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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 따르기 (막 1: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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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따르기 (막 1:16-18)  

베드로 형제들이 고기를 잡고 있습니다. 그때 예수께서 부르십니다.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물고기가 아니라 사람이요 영혼입니다. 영적 차원입니다. 많은 구도자들이 시도했지만 아무도 못 했던 신비한 일입니다. 예수를 따르기만 하면 된답니다. 오늘도 우리를 향해 같은 초청이 옵니다. 

세상 선생이나 지도자를 따르려면 엄청난 희생이 요구됩니다. 수도사들은 종처럼 섬기며 갖은 고생을 다합니다. 김일성 따르는 이들은 가족도 재산도 목숨도 버렸어요. 사람을 따른 결과는 아무 것도 없어요. 그렇게 따르라는 것인가요? 예수 따르기는 무엇인가요? 약속하십니다. “도와줄테니 따라만 와라. 내 짐은 가볍고 쉽다.” 

1. 따름이 먼저이다. 

예수를 위해 무슨 일을 하려나요? 그 전에 따름이 먼저입니다. 그를 따르지 않고 그의 제자는 될 수 없어요. 열 한 제자는 3년을 따랐습니다. 나머지 생애는 성령을 따랐고요. 바울은 처음부터 예수의 영을 따라 살았어요. 우리에게 요구되는 삶도 그러합니다. 열 한 제자와 바울처럼 예수의 영을 따라야 합니다. 그래야 제자입니다. 

신자로서 늘 할 일은 내가 제자인가 정체 확인하는 것입니다. 예수 위해 내 힘으로 뭘 한다면 따르는 게 아닙니다. 예수를 믿어야 해요. 제자는 예수의 전 생애를 함께  합니다. 죽음과 고난뿐 아니라 영광과 통치까지 그래야 해요. 교회 일을 통해 갑니다. 그 전에 내 힘으론 절대 제자가 되지 못해요. 그럴 힘이 없어요. 따라야 해요. 

“예수 따르기”란 주제를 가르쳐준 친구 목사가 패러글라이딩의 경험을 말해줍니다. 훈련은 단5분, “걸어, 걸어, 걸어, 뛰어, 뛰어.” 다섯 마디 반복하는 데 1분. 마음 준비 4분입니다. 전문가가 뒤에서 자신이 앞에서 함께 낙하산 메고 절벽으로 갑니다. 이때 별 생각이 다 나는 겁니다. “걸어, 걸어”하다가 중단하는 이도 많답니다. 

자신도 두렵습니다. 그러나 저 위에 떠올라 마음껏 즐기는 선배들을 바라봅니다. 그래도 여전히 바로 눈앞의 낭떠러지가 너무 두렵습니다. 바람이 불어오자 강사가 외칩니다. 따라 하랍니다. “걸어, 걸어, 걸어, 뛰어, 뛰어.” 정신없이 따라하는 동안에 이미 몸은 창공에 떠올랐습니다. 그 짜릿함과 황홀함은 말로 다 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 따름도 같아요. 남 보기에는 대단히 어려워요. 위험하기도 합니다. 어떻게 저렇게 날 수 있을까? 그러나 예수 따름은 결정만 내가 합니다. 나머지는 도우시는 성령이 해 주십니다. 물론 약간의 불편함이나 귀찮음도 있습니다. 그래도 거기서 얻는 기쁨과 만족 유익은 말로 다 할 수가 없어요. 하늘까지 올라가는 경험입니다. 


2. 함께 끝까지 따르라 

하늘을 나는 것은 내 힘이나 기술이 아닙니다. 바람과 돕는 이 때문입니다. 예수 따르기도 그래요. 자식이 부모를 따르나요? 반대로 부모가 자식 데리고 다닙니다. 그러면서 자식은 부모의 모든 것을 보고 배웁니다. 신자는 예수의 가는 곳 모두를 따라갑니다. 자식이 부모를 보듯 예수의 행적 모두를 봅니다. 마음에 새겨 품습니다. 

영광스러운 탄생의 자리에 박사들 목자들과 함께 있어보았나요? 그의 세례의 감격과 고독한 광야의 시련에 참여했나요? 평범한 목수의 아들로서 부모를 섬기고 교회에 순종합니다. 사랑의 가르침, 동행, 그리고 십자가의 모욕과 고통을 보나요? 지옥의 공포 그리고 부활, 승천의 자리까지 따르나요? 오직 신자만 경험하는 복입니다.  

예수의 생애 모든 자리를 다 가고 보고 경험합니다. 하나도 놓칠 수 없어요. 그가  우리를 위해 이루신 모든 구원의 과정을 따릅니다. 단지 따르기만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해도 그와 동일시됩니다. 한 성령으로 한 몸으로 특별한 존재가 됩니다. 그래서 어느새 우리는 사람 낚는 어부로 변합니다. 따름이 곧 능력입니다. 

여기서 “우리”라는 단어는 중요합니다. 예수는 나를 포함한 동료들도 함께 부르십니다.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함께 사람을 낚습니다. 물론 혼자 하는 경우도 있어요. 그럼에도 여전히 함께 있는 가운데서 개인입니다. 예수 따름은 함께 합니다. 신자는 절대로 자기만 생각할 수 없어요. 우리는 동료입니다. 

교회의 예배와 봉사 모든 자리에 함께 가야 합니다. 주를 따르면서 본 것을 따라해보세요. 아이처럼 하세요. “내 체질이 아니야.” “내 은사의 일이 아니야.” 거기도 가고 그 일도 해야 합니다. 몸의 모든 부분 빼놓지 않고 성장해야 합니다. 절벽에서 뛰는 것 같아도 날아가는 길입니다. 성령께 맡기고 따르세요. 거기도 오라십니다. 


3. 걸어 걸어 걸어 뛰어 뛰어 

날기 전에 할 일입니다. 먼저 따르기로 결정하세요. 앞에서 끌기도 하지만 뒤에서 밀기도 합니다. 안 보여도 분명히 함께 있어요. 내가 가야할 자리가 있습니다. 명령이 들립니다. “걸어, 걸어, 걸어.” 시작입니다. 그러다보면 “뛰어, 뛰어”합니다. 그대로 하다보면 어느새 날아갑니다. “내가 어떻게 이 일을 해냈지?” 날은 것입니다. 

모든 삶의 현장은 예수 따르기의 기회입니다. “걸어, 걸어”에서 중단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사람 따르고 돈 따르고 해 보았자 결국 육신입니다. 예수를 의지하고 걸으세요. 나를 위해 이루어진 그의 생애 전체를 다 품고 예수와 함께 갈 길을 가세요. 특별히 주의 일을 그렇게 따르세요. 걷다가 중지하는 사람이 너무도 많아요. 

때로는 낙심도 되고 억울함도 당합니다. 상처도 받아요. 먹고 사는 게 우선입니까? 꼴보기 싫은 사람 때문에 그만 두었나요? 한 때 열심히 걸었지만 이젠 아닌가요? 베드로 경우도 그래요. 스스로 실패자라고 생각합니다. 주께서 잡히는 장면에서 따르지 못했어요. 도망쳤다가 멀찍이 따랐어요. 결정적 순간에 저주하며 부인했어요. 

그러나 주께서 미리 경고 하셨어요. 제 열성으로 따르겠다니까 네 힘으로는 안 된다고 합니다.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그때 자기 한계를 알았어야지요. 목숨 내 놓는다고 큰소리쳤어요. 낙심한 그는 부활하신 예수를 보고서도 따르기를 중단합니다. 사람이 아니라 고기 잡으러 고향에 갑니다. 

예수는 갈릴리로 따라가 만납니다. 베드로 마음에 빛을 줍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지금 이 시간 우리 마음에 주의 음성이 들립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사랑한다면 다시 일어서세요. 
“걸어, 걸어, 걸어.” 따르세요.
“뛰어, 뛰어.” 그렇게 주저앉지 말라하십니다.
“내 양을 먹이라. 내 일을 하라. 나와 같은 존재가 된다.”  
(김기홍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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