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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앙유산을 남기자 (삿 2: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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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유산을 남기자 (삿 2:11-23)

신앙의 활력은 저절로 유지되지 않습니다. 모태 신앙이요 삼사 대째 신앙의 경력을 가지고 있어도 그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을 잘하게 하는 밑거름은 되지만 열매 맺는 신앙생활을 자동적으로 보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의 어른들을 본받으며 영적으로 깨어 있어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고 기도와 말씀으로 성숙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왕년에 받은 은혜만을 되씹으며 신앙의 훈련을 게을리 하면 우리의 신앙은 퇴보하게 되고 신앙생활에 기쁨이 사라집니다. 

사사 시대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안타까운 모습은 지금부터 3000여 년 전의 역사로 그치지 않고 이민자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귀한 교훈을 제공합니다. 그들의 실패를 거울삼아 이 자리에 계신 분들과 그들의 자녀들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신앙생활을 하기 기대합니다.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가 주로 출애굽 제일 세대의 역사를 다룬다면 여호수아서는 출애굽 제이 세대의 역사를 다루고, 사사기는 가나안에 정착한 제삼 세대 이후 세대의 역사를 다룹니다. 
 
출애굽 1세대는 애굽에서 태어난 세대입니다. 출애굽은 하였으나 전에 살던 애굽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광야 생활이 힘이 들 때마다 즉 물이 부족하다거나 길이 험하다거나 고기가 먹고 싶다면서 하나님과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인 모세에 대한 원망과 불평을 계속하였습니다. 

열두 명의 정탐꾼들이 40일간 가나안을 정탐하고 돌아왔습니다. 그중의 열 사람이“ 그 땅 거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다 ... 그들에 비하면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다”(민 13장)라고 보고하자, 이를 들은 백성들은 낙심하여 밤새도록 곡하였습니다.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다면 좋았을 것을 ... 차라리 우리가 한 장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 고 했을 때 물론 그들이 살고 싶어 한 말이지만, 입술의 열매를 지으시는 하나님께서 그들이 말한 대로 행하십니다. “너희의 시체가 광야에서 소멸되기까지 사십 년을 광야에서 유리 하는 자가 되리라” (민 14:33) 

그 결과 광야 제일 세대는 60만 장정 중 여호수아, 갈렙 두 사람만 제외하고는 광야에서 전부 죽고 말았습니다.  

출애굽 2세대는 애굽에서 나올 때 스무 살 이하였거나 광야에서 태어나서 자란 세대입니다. 온갖 역경 속에서도 하나님만 의지하였습니다. 신실하고 경건한 여호수아의 리더십 아래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여 가나안 정복을 이루었습니다.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열조가 강 저편에서 섬기던 신이든지 혹 너희의 거하는 땅 아모리 사람의 신이든지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수 24:15,16)라고 여호수아가 고별 연설을 하였을 때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 섬기는 일을 우리가 결단코 하지 아니하오리니” 하며  백성들도 하나님만 섬길 것을 다짐했습니다.  

가나안 세대는 물질적으로 풍요하고 전쟁도 별로 없던 평화로운 시대에 주로 가나안에서 태어나서 자라난 세대입니다.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삿 2:10)던 세대였습니다. 아버지 세대가 하나님을 믿고 섬기며 힘들게 가나안 땅을 정복하였으나 가나안 세대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베푼 복을 복으로 여기지 않고 당연히 주어진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세대에게 주신 두 가지 사명이 있는데, 하나는 남은 땅의 정복이고 다른 하나는 오직 여호와만을 섬기는 거룩한 공동체를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가나안 세대가 이 두 가지 사명을 잘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믿음이 없고 영안이 어둡다 보니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았고 그러다 보니 각자 자기 소견에 좋은 대로 행동하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이 주신 안식의 땅에서 안식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였습니다. 

사사기는 바로 가나안 세대의 불신앙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모든 문제의 근원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구원하신 여호와를 버리고 가나안 땅의 우상을 섬기는 죄를 지은 것에 있습니다. ‘전철을 밟지마라’하는 속담이 있는데 그들은 죄에 빠졌다가 구원을 받고 이전보다 더 큰 죄에 빠지는 과정을 여호수아가 죽은 후부터 사울이 왕이 될 때까지 320년 동안 일곱 번 이상이나 반복하고 있습니다. 

1. 범죄: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2:11-13)

죄의 본질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갖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스스로 살아보려고 애쓰는 것은 마치 뿌리가 뽑힌 나무가 가지고 있는 제한된 수분과 영양분이 말라 감에 따라 결국은 죽어 가는 것과 같습니다. 이스라엘은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가나안의 신들을 의지하였습니다. 일찍이 모세가 경고했습니다. 

“내가 죽은 후에 너희가 스스로 부패하여 내가 너희에게 명한 길을 떠나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너희의 손으로 하는 일로 그를 격노케 하므로 너희가 말세에 재앙을 당하리라”(신 31:29). 

여호수아도 경고했습니다. 
“만약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하신 언약을 범하고 가서 다른 신들을 섬겨 그에게 절하면 여호와의 진노가 너희에게 미치리니 너희에게 주신 아름다운 땅에서 너희가 속히 망하리라”(수 23:16). 

그런데 가나안 세대는 거듭된 경고에도 불구하고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가나안 땅의 우상들을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자기들을 구원한 하나님은 과거 역사의 하나님으로만 느껴지고, 그 대신 가나안의 우상이 더 실제적이고, 실감나게 마음에 와 닿았을 것입니다. 

바알은 기후와 농사를 지배하는 신입니다. 아스다롯은 바알의 아내로 풍요와 사랑과 전쟁을 지배하는 신입니다. 바알이나 아스다롯을 섬기는 제사에 풍요와 다산을 기원하는 성적 유희가 포함되었습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을 남편으로 이스라엘을 아내로 즉 신앙생활을 부부 관계로 자주 비유합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것은 영적으로 간음한 것과 다름이 없이 취급하였습니다. 가나안 세대는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한 행동을 하면서도 여전히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으로 착각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성경에 관하여 많이 알면서도 실제의 삶은 믿지 않는 사람들과 별로 차이가 없이 세상의 가치관을 가지고 살고 하나님에게 드려야 될 시간과 정성을 다른 데에다 쏟아 붓고 있다면 오늘날도 가나안 세대와 별반 다름이 없는 삶을 산다고 할 수 있습니다.  


2. 징계 : “노략하는 자의 손에 붙여”(2:14-15)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경건한 백성이 되기를 원하셔서 이스라엘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풍요한 가나안을 주셨으나 이스라엘 자손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베푸신 복을 복으로 알지 못하니 마치 돼지에게 진주를 던진 후 돼지가 그 가치를 알지 못하여 발로 밟는 것과 같은 상황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할 때 이스라엘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였고 모든 대적들을 물리칠 수 있었으나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으시면 대적들에게 패하고 그들에게 시달릴 수밖에 없습니다. 

사사기를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라는 말이 반복됩니다. 한 세대가 지나가면서 과거의 범죄와 그에 따른 징계와 하나님이 그들에게 베푸신 구원의 사실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때마다 하나님은 이방 나라를 통해 징계하시고 이방 민족으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종으로 부리게 하셨습니다. 대적들에게 수모를 당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우상 숭배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요 다른 한편에서는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사랑의 채찍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 입장에서 볼 때 반복하여 죄를 짓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 안타깝고 한심스럽기도 하지만 사실은 그것이 우리의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이전 세대의 그리스도인들이 범했던 죄를 지금 우리가 다시 범하며, 개인적으로 과거에 범했던 죄들을 또 다시 범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을 비난하기에 앞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3. 탄원 : “슬피 부르짖음으로” (2:18)

이스라엘 백성들이 대적에게 계속적으로 압박과 시달림을 받으니 괴로움이 심하여져서 슬피 부르짖습니다. 그렇지만“그들이 그 사사들에게도 순종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다른 신들을 따라가 음행하며”(2:17) 라는 표현을 보면 이스라엘이 회개하였다는 증거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단지 자기들의 죄에 대한 징계를 받아 고통스러워 할 뿐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들의 고통을 보시고 안타까워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 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분이시기 때문입니다(출 34:6). 후회하고 돌이켜야 할 당사자는 이스라엘 백성이었으나, 오히려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키셨습니다. 그들의 부르짖음에는 진실한 회개가 담겨있지 않다는 것을 아시면서도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아버지처럼 여전히 사랑을 베푸십니다. 

하나님이 처음에는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에 즉각적으로 응답하셨습니다. 첫 번째 옷니엘, 그 다음에 에훗, 드보라 사사 때까지입니다. 그런데 기드온 때부터 조금 다른 모습이 나타납니다. 입다 때에는 그들이 부르짖자 ‘너희들이 섬기는 신에게 알아보라’고 하시며 응답하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삼손 때에는 이스라엘이 아예 부르짖지도 않습니다. 비록 실수할 때 인생의 채찍으로 징계하시나 하나님은 한결같은 사랑으로 택하신 백성을 돌아보십니다.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의 씻김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에 끝까지 하나님의 사랑을 힘입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롬 8:37,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하면서 확신에 찬 선포를 합니다. 신앙생활 하면서 죄를 안 지을 수는 없지만 중요한 것은 수시로 하나님께 우리의 죄를 자백하며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사정을 주님께 아뢰며 기도와 간구를 해야 합니다.


4. 구원 :  “사사를 세우사” (2:16-18) 

대적에게 시달리는 이스라엘을 위하여 하나님은 사사를 세우십니다. 사사는 대적에게서 백성을 구원하는 역할 뿐 아니라 백성을 하나님의 공의대로 다스리는 영적, 군사적, 정치적 지도자 역할을 하였습니다. 왕과 다른 점이 있다면 왕은 세습적이지만 사사는 당대에 끝나게 됩니다. 사사가 사는 날 동안 이스라엘에 평화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구원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기는커녕 사사들이 하는 말을 듣지 않고, 다른 신들을 따라가 음행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사사가 죽은 후에는 전에 지은 죄를 반복할 뿐 만 아니라 전보다 더 심하게 악을 행합니다. 점점 죄악의 깊은 수렁으로 빠집니다. 즉 사사 시대는 불행하게도 범죄 – 징계 – 탄원 – 구원 – 더욱 타락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지 못하고 추락을 계속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결심(2:19-23) 
가나안 세대는 계속 패역한 길을 가므로 하나님이 결심하셨습니다. ‘패역하다’(2:19)라는 말은 ‘부패하다’는 뜻입니다. 마치 샘물이 더러워져 오염되듯, 도구가 망가지듯 못쓰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잠 25:26). 이스라엘이 부패하였으나, 하나님은 그들이 온 마음으로 회개하기를 기다리십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나 안 하나 시험하기 위하여 가나안 민족들을 이스라엘 가운데 계속 남겨 두셨습니다. 


본문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1. 우상을 멀리해야 합니다 

신명기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순종하고 그 계명들을 지키면 그들과 함께 하시고 그들에게 복을 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오히려 가나안 족속들과 교통하며 그들의 신을 섬깁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하지 못한 이유가 말씀에 대한 불순종과 우상숭배입니다. 우리는 흔히 우상숭배하면 다른 신을 섬긴다는 종교적인 문제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옛날처럼 신들을 형상으로 만들어 섬기지 않는 현대사회에서 무엇이 우상숭배입니까? 

모든 사람은 누군가를 섬기고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을 섬기고 있지 않다면 다른 무엇인가를 섬기고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섬기는 그 ‘다른 무엇’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우상들’입니다.  우상 숭배는 하나님의 자리에 다른 것을 가져다 놓는 것입니다. 그 자체로 아무 힘없는 어떤 것이 인간이 집착에 가까울 만큼 헌신할 때, 그것은 우리에게 대한 지배력을 행사하기 시작합니다. 그리하여 신이 아닌 것들이 신처럼 행세하게 됩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다가오는 큰 우상은 물질과 경제적인 풍요에 대한 유혹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사 시대에 이스라엘이 당하는 고난은 하나님의 무능이나 실패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적 일관성을 보여줍니다. 또한 하나님은 그들이 점점 더 큰 죄악으로 빠져 들어감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지속적이고 반복적인 은혜를 베푸십니다. 오늘 우리들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면서 하나님께 우선순위를 둔 삶을 살아야 합니다. 


2. 신앙 유산은 계승되어야 합니다.

광야 일 세대는 과거에 연연하며 하나님께 대한 불신앙, 원망과 불평을 하며 광야에서 방황하다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광야 이 세대는 임마누엘의 신앙을 가지고 말씀에 순종하였기에 가나안 정복의 위업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가나안 세대는 반역과 그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징계가 반복되는 악순환을 경험합니다. 

오늘날 미국에 사는 Korean American들은 과연 이스라엘의 어느 세대에 해당되겠습니까? 광야 제일 세대에 같이 과거지향적인 사람들도 있겠고 제이 세대와 같이 미래지향적인 사람들도 있겠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졌다는 면에서 우리는 당연히 출애굽 제이 세대를 본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제이 세대에도 문제점은 있었습니다. 여호수아의 인도를 받은 제이 세대는 가나안을 점령하느라 몹시도 분주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제이 세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신 6:6,7,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하면서 자식에 대한 신앙 교육의 중요성을 역설하였지만 그것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였습니다. 부모가 아무리 신앙이 좋고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며 바쁜 가운데서 하나님의 일을 많이 한다 할지라도 자녀에게 신앙의 유산을 잘 남겨주지 못하면 자녀들은 그들이 세상에서 보고 듣고 경험하는 것을 따라 영향을 받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가나안에서 태어나서 자라난 가나안 세대의 모습입니다. 

불과 한 세대가 지나기 전에 그들은 아버지 세대가 가졌던 신앙에서 떠나 그들 주변에 있었던 가나안 신을 섬기는 안타까운 모습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누구를 탓하겠습니까? 부모가 너무 할 일이 많아 바빠서 그랬다고 핑계를 대겠습니까? 광야 제이 세대의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가져야 하지만 반면에 자녀 교육을 제대로 하지 못한 그들의 실수를 거울삼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기듯이 오늘날 우리가 우상에게 절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향한 관심을 멀리하게 하고 열심을 떨어뜨리게 하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자식들에게 깊은 관심을 가지고 하나님이 기뻐하는 경건한 자손들이 될 수 있도록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여야 합니다. 가능하면 많은 대화를 나누어야겠고 그들의 영적 성장을 위한 투자를 아끼지 않아야 합니다. 

물질을 많이 남겨 주기보다 아이들에게 온전한 신앙을 남겨 주려고 애를 써야 합니다. 부모들이 자식들을 위하여 기도할 뿐더러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책임은 가나안 세대에게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이 그들에게 있었고 자라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행하신 권능에 대하여 부모들에게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실천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가나안 사람들이 섬기는 우상을 섬겼습니다. 설령 부모 세대가 잘못했다고 할지라도 자녀들의 잘못된 행동이 정당화 될 수는 없습니다. 결국은 그들이 저지른 행동을 인하여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때 부끄러움을 당하게 됩니다.   
 

3. 영적 전쟁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구원사적 관점에서 볼 때 사사시대 이전의 중요한 사건은 출애굽과 시내산 언약 체결입니다. 출애굽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은 바로의 압제로부터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며 자신의 우주적인 주권과 권능과 영광을 분명하게 계시하셨습니다. 이를 통해 이스라엘은 자신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이 참으로 세상과 우주를 다스리시는 만왕의 왕이시며 구원의 주님이심을 분명히 체험했습니다. 그 감격 속에서 시내산에서의 언약을 체결하며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기로 맹세하였습니다. 

가나안 세대에게도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나라를 가나안 땅에 실현해야 하는 사명이 주어졌습니다. 이를 위해 가나안 거민들과의 전쟁은 피할 수 없는 과제였습니다. 이방 족속들과 계속되는 전쟁의 틈바구니 속에  하나님은 결국 자기 백성들로 하여금 이들이 섬기는 여호와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체험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사사기는 영적 전쟁의 사명을 포기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날 때 얼마나 비참한 신세로 전락하는지를 보여줌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영적 전투를 포기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할 것을 경고합니다. 영적 전쟁에서 이기는 비결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교회를 통치하시며 다스리신다는 여호와 하나님의 왕권을 인정하고 그 왕권의 능력을 확신하면서 세상의 유혹에 대항하는 것입니다. 

사사기는 여호수아와 같은 뛰어난 지도자를 다루고 있는 여호수아서와 다윗과 같은 뛰어난 왕과 관련된 룻기나 사무엘서 사이에서 리더십 부재를 보여줍니다. 

사사기 마지막 구절인 21장 25절,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을 통해 역설적으로 리더십의 회복에 대한 소망을 보여줍니다. 그 소망은 일차적으로 다윗이라는 뛰어난 영성의 지도자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진정한 리더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왕이요 제사장이요 선지자이십니다. 그분이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사셨습니다.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는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그분께 순종하고 모든 생각을 그분의 뜻에 맞출 때 풍성한 삶이 약속됩니다. 언제 어디서든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임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빛을 드러낼 수 있는 용기와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부모의 희생과 섬김이 없이는 자녀들이 결코 바르게 자라지 않습니다. 부모 된 우리부터 먼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신앙의 본을 보여야 합니다. 외할머니 로이스의 믿음이 어머니 유니게에게, 어머니 유니게의 믿음이 아들 디모데에게 이어지는 것 같이(딤후 1:5) 우리의 자녀들에게 아름다운 믿음을 전해 주어야 합니다. 

우리의 자녀들은 악한 세상의 풍조에 물들지 아니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믿는 신앙을 가지고 성령께서 주시는 지혜와 능력을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와 이 사회를 위하여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하도록 기도하며 그들이 뛸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주어야 합니다. 우리를 실족시키는 세상의 풍조를 따르지 않고 우리의 영원한 사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며 우리의 자녀들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을 섬기면서 그분이 원하시는 삶의 열매를 풍성하게 거두시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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