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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열어주소서1 : 내 눈을 열어주소서! (시 119: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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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어주소서1 : 내 눈을 열어주소서! (시 119:17-24) 
 
 
❚눈을 뜨게 해주세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고전소설 심청전에 보면 심봉사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우리나라 사람 치고 심봉사와 심청이를 모르는 사람 없지요? 그런데 심봉사가 본명이 아닌 것은 잘 모르셨지요? 심봉사의 본명은 ‘심학규’로 양반 집에 태어나 과거시험에도 합격을 했으나 곧 눈이 멀어 관직을 받지 못하고 몰락한 양반으로 살게 됩니다. 몰락 정도가 아니라 하루하루 먹고 살기도 힘든 비참한 삶을 살지요. 사람들은 이 비참한 양반 심학규를 본명 대신 심봉사라 부릅니다. 

옛날에는 시각장애인들을 ‘봉사’라고 부르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심봉사의 딸 심청이가 천하의 효녀에요. 그래서 공양미 300석을 바치면 아비의 눈을 뜰 수 있다는 말에 청나라 상인들에게 자신을 팔아 인당수 바닷물에 풍덩 빠집니다. 그 다음 얘기는 다 아실 테니 생략하고 아무튼 심청전은 해피엔딩으로 끝납니다. 심청이는 지극한 효성 때문에 복을 받아 왕비가 되고 딸을 만나러 온 아버지 심봉사는 결국 눈을 뜨게 되었다 이겁니다.

우리가 이 심청전을 어렸을 때부터 열심히 읽은 이유는 너희도 이렇게 부모에게 효도하면 복 받는다는 교훈 때문이지요. 그러나 심청전을 사회학적으로 분석해보면 그리 행복한 이야기만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만큼 심청전이 쓰인 당시 조선시대의 사회제도와 양반제도가 부패하고 양민들은 고통당했다는 뜻입니다. 안 그래도 가난한 서민들은 수탈과 온갖 질병(심봉사처럼)과 특히 미신에까지 시달렸습니다. 아니, 세상에 공양미 300석을 절에 바치면 부처님이 아버지 눈을 뜨게 해준다? 말이 됩니까? 

쌀 300석이면 어마어마한 양인데 그것을 구하려고 청나라의 상인들에게 인신매매로 자신을 파는 것이나 용왕을 잘 달래서 풍랑이 안 일어나게 한다며 멀쩡한 처녀를 사서 바닷물에 빠뜨려 제물로 바치는 일이 버젓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심청전의 저자가 누군지는 아직도 모르나 그는 이 불행한 이야기를 그래도 해피엔딩으로 마무리해서 불행한 사람들에게 소망을 주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아무튼 이 심청전 이야기를 꺼낸 것은 그 시대에 이렇게 아픈 사람, 앞 못 보는 사람이 너무 많았고, 특히 사랑하는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려는 간절한 딸의 소망이 얼마나 귀한지 이야기 하고 싶어서입니다.

여러분, 오늘날에도 심봉사처럼 눈 먼 사람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혹시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도 꼭 눈을 떠야 합니다. 그렇다고 여러분에게 공양미 300석을 교회에 바치라든지 인당수에 뛰어들라 소리는 하지 않겠습니다. 왜요? 우리가 떠야 할 눈은 ‘육신적인 눈’이 아니라 ‘영적인 눈’이기 때문입니다. 다같이 옆 사람에게 이렇게 말하기 바랍니다. “눈이 참 아름다우십니다!” 이번에는 반대편 사람에게 이렇게 말하기 바랍니다. 

“영적인 눈도 참 아름다우십니다!” 여러분이 만약 육신의 눈을 뜨기 원하신다면 안과를 찾아가 개안수술(요즘 수술 참 쉽습니다)을 받든지, 공양미 300석을 바치든지 하면 되겠지요. 하지만 성경은 우리의 육신적인 눈을 뜨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영적인 눈, 즉 영안(靈眼)을 뜨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뇌성마비 중증장애를 앓아서 몸도 비틀어지고 말도 제대로 못하지만 아름다운 믿음의 시를 써서 유명한 송명희 시인은 <참 소경>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참 소경이 누구인가 세상을 못 보는 사람인가? 아니라 아니라 주님을 못 보는 사람 아닌가! 당신은 당신은 소경이 아닌가!

육신의 눈이 어두워 세상을 못 보는 사람이 아니라 멀쩡하게 눈을 뜨고 있지만 주님도 못 보고 영적인 세계를 보지 못하는 그가 진짜 소경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육신적인 눈보다 영적인 눈이 더 중요하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체의 눈을 떠서 세상을 밝히 보기 위해 투자하고 노력할 것이 많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영적인 눈을 뜨기 위해 우리는 어떤 일을 해야 하며 어떤 노력을 바쳐야 하는가? 오늘부터 2013년 다섯 번째 시리즈 설교로 <열어주소서!>라는 말씀을 다섯 번에 걸쳐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은 그 첫 번째 시간으로 <내 눈을 열어주소서!>라는 제목으로 어떻게 하면 우리의 영안을 밝히 뜰 수 있는가 말씀을 나누려 합니다. 아무쪼록 오늘의 말씀을 통해 저와 여러분의 영안이 밝히 떠져 영적인 신비의 세계를 환히 볼 수 있는 복된 시간이 될 수 있기 바랍니다.

❚내 눈을 열어주소서!

제일 먼저 왜 성경이 그토록 우리의 영적인 눈이 밝히 떠져야 한다고 말씀하는지 이유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우리가 영안이 떠져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래야 하나님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또 영안이 떠져야 하나님의 말씀이 밝히 보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이 그것을 말씀합니다. 시편 119편은 자그마치 176절이나 되어서 성경에서 가장 절수가 긴 시편인데 이 176절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내용이라서 사람들이 ‘말씀 시편’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 시편인 119편 17~18절에서 시인은 무엇을 특별히 간구하고 있습니까?

17 주의 종을 후대하여 살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주의 말씀을 지키리이다 18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

아마도 시인은 지금 좀 힘든 상황에 처해있는 모양입니다. 건강에 문제가 생겼든지 가정이나 물질에 문제가 생겼든지 뭔가 어려움이 겪고 있는데 시인은 하나님이 저를 후대하시고 이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간구합니다. 그런데 그냥 해결해 달라는 것이 아니라 좀 특별한 이유가 있어요. “주의 말씀을 지킬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간구합니다. “주님! 제 눈을 열어주세요. 그래서 주의 율법, 주님의 말씀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해주세요!”라고 말입니다. 발음은 본토발음이 아니더라도 용서하고 들으세요. 영어성경인 NIV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Open my eyes that I may see wonderful things in your law

제가 굳이 영어성경을 인용하는 이유는 영어로 볼 때 좀 더 느낌이 와 닿기 때문입니다. 그대로 직역하면 “제 눈을 열어주세요! 제가 당신의 율법에서 원더풀 한 것, 놀라운 것, 신기한 것을 볼 수 있게 말입니다.” 느낌 알지요? 확 와 닿지요? 그렇습니다. 우리가 영적인 눈을 꼭 떠야 하는 이유는 그 영안이 떠져야 하나님이 보이고, 예수님도 보이기 때문입니다. 송명희 시인의 시처럼 주님을 보지 못하는 눈뜬 소경이 너무 많습니다. 남편에게 자녀에게 주변 사람에게 아무리 예수님이 있다, 하나님이 계신다 해도 못 믿는 것은 그들의 육신적인 눈은 멀쩡한데 아직 영안이 가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도가 필요한 거에요. 그게 지식으로도 안 되고 노력으로 안 되거든요. “하나님! 어리석은 제 눈을 떠서 하나님을 보게 하신 것처럼 저 영안이 가려진 제 남편, 자식, 저 사람들의 눈을 뜨게 해주세요.” 이렇게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우리가 영안이 뜨여야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에서 그야말로 원더풀한 것, 놀랍고 신기한 것을 볼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이미 영안이 열려서 하나님을 보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잖아요? 그래서 교회를 다니는데 문제는 아직도 영안이 밝히 열리지 않아서 말씀을 보아도 잘 깨닫지 못하고 말씀을 들어도 느낌이 확 와 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8장에 보면 예수님이 벳세다라는 곳에 가셨을 때 사람들이 맹인 한 사람을 데려와 고쳐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주님이 맹인 손을 붙잡고 마을 밖으로 나가 눈에 침을 뱉고 안수하십니다. 더럽게 웬 침이냐? 약이라고 발라주신 것이냐? 아마도 무슨 상징적인 행위겠지요.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님이 안수하신 후 그 맹인에게 이렇게 물으신 것입니다. “무엇이 보이느냐?”(23절) 그랬더니 맹인이 대답합니다. “사람들이 보이는데 또렷하진 않고 희미하게 윤곽만 보여서 마치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가는 것 같습니다.” 아직 눈이 완전히 떠지지 않아서 그렇지요. 보이긴 보이는데 아직 희미합니다. 

그러니까 희미하게 윤곽만 보이고 사람이 나무 걸어가는 것처럼 보이는 겁니다. 우리가 혹시 이렇지 않습니까? 교회는 다니고 예수는 믿어서 보이긴 보이는데 아직 영안이 환하게 열리지 않았다면 이런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보이기는 보여요. 하나님도 보이고 예수님도 보이는데 또렷하게 환하게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남들한테도 “이거다!” 하고 확신을 가지고 말하지 못해요. 그러니 신앙생활에 확신도 적고 전도도 잘 안 되는 것입니다. 게다가 말씀을 보고 들으면 좀 알 것은 같은데 아직 그렇게 뚜렷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니 말씀이 원더풀하다? 시편 19:10에 “주의 말씀을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하고 그 맛이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다고 했는데 그 맛이 뭔지, 그 놀랍고 짜릿한 느낌이 뭔지 잘 모르고 사는 것이지요. 그런데 주님은 다시금 그 맹인에게 안수하십니다. 그러고 나니 맹인이 비로소 모든 것을 밝히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25절). 이것은 정말 중요한 말씀입니다. 우리도 이 맹인처럼 또 한 번의 안수가 필요합니다. 성령으로 안수 받아야 합니다. 말씀의 능력으로 안수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비로소 우리의 영적인 눈이 환히 열려서 말씀이 또렷이 보이고 말씀의 능력이, 그 놀라운 말이 확 느껴지게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얼마 전 곧 임직을 받을 피택자 중 한 분이 이런 얘기를 해요. “목사님! 요즘 제가 참 즐겁습니다. 피택자 교육을 ‘세게’ 받아서 성경을 열심히 공부하는데 어, 정말 말씀이 보이기 시작하고 막 느낌이 오기 시작하네요.” 그렇습니다. 영안이 열리기 시작한 겁니다. 

영적인 눈이 열리니 전에도 많이 읽고 들은 말씀이지만 그야말로 말씀이 새롭게 느껴지고, 느낌이 확 와 닿고, 정말 원더풀, 놀랍고 짜릿한 느낌이 드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도 다 이런 경험을 해야 합니다. 교회를 오래 다녔는데도 말씀이 아직 원더풀 하게 깨달아 지지 않는다, 짜릿한 느낌이 없다고 한다면 참 불행한 일입니다. 속히 우리의 영안이 떠지기 바랍니다. 크게 밝게 떠져서 하나님의 말씀이 그야말로 내 속에서 막 살아 움직이고 역사하고 말씀 때문에 놀랍고 짜릿하고 뜨겁고 이런 경험을 다 할 수 있는 여러분 되기 바랍니다.

❚사명을 보게 하소서!

한 가지만 더 얘기합시다. 우리의 영안이 열리면 하나님을 보게 되고, 말씀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게 참 중요하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의 영안이 열리면 또 한 가지의 놀라운 일이 생긴다고 말씀합니다. 그것은 “영안이 열리면 사명이 보이기 시작한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사도 바울 이야기입니다.

사도 바울이 사울이었을 때 그는 율법에 미쳐서 예수장이들을 미워하고 다 박멸하기로 마음먹습니다. 그래서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스데반 집사를 돌로 쳐 죽일 때 옷을 맡아 기꺼이 증인이 되고, 나중에는 아예 머나먼 다메섹까지 쫓아가 그곳에 있는 예수장이들을 다 잡아들이려 하지요. 그런데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그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주님은 박해자 사울에게 나타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행 9:4) 하시는데 그 순간 사울은 눈이 멀게 됩니다. 

사흘 동안 다메섹의 한 집에서 보지도 먹지도 못하고 있던 사울에게 주님은 아나니아라는 제자를 보내십니다. 아나니아가 사울에게 가서 말씀을 선포하는 순간 사울의 눈에서는 비늘 같은 것이 떨어져 나가 다시 보게 되고 그 즉시 세례를 받고 그 때부터 박해자 사울이가 복음을 위해 목숨 거는 사도 바울이 된 것입니다. 물론 이 때 사울이 다시 뜬 것은 육신의 눈입니다. 그런데 육신의 눈이 떠지는 동시에 그의 영적인 눈도 뜨게 된 것입니다. 지금까지 그의 눈에는 비늘이 껴있었습니다. 

율법과 유대교라는 비늘이 껴있으니 영안이 닫혀서 예수님을 못 보다가 이제 그 비늘이 떨어져 나가고 영안이 뜨이니 주님을 보게 된 것이지요. 뿐만 아닙니다. 그는 지금까지 보지 못하던 자신의 사명을 보게 됩니다. 지금까지 율법을 수호하는 것이 자기 사명인 줄 알았는데 영안이 열리니 내 진짜 사명은 복음을 이방인들에게 증거하는 일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영안이 열리면 사명이 보인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우리 눈에는 혹시 어떤 비늘이 껴있는지요? 먹고 사는 것 걱정, 내 삶, 내 가정, 내 가족만 보고 있으면 그것이 비늘이 되어 우리 눈에 끼어서 영안을 가리게 됩니다. 그러면 사명은 안 보이고 나만 보이고, 내 생각과 내 고집만 보이게 됩니다.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 혹시 이런 말 들어보셨습니까? 이 ‘뭐’에 해당되는 말이 뭔지 아시지요? 동물 이름입니다. 이 말이 강단에서 쓰기 힘든 속된 말이라 이렇게 넘어가지만 그래도 꼭 맞는 말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이 말은 내 마음이 닫히고 눈이 닫히면 꼭 그 수준밖에는 안 보인다는 뜻입니다. 눈은 그 사람의 수준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었어요. 어떤 교회가 건축을 잘 하고 나서 본당에 뭘 들여놓을 것인지 의논하다가 싸움이 났답니다. 싸우는 이유는 이겁니다. 본당에 오르간을 들여놔야 하느냐, 피아노를 들여놔야 하느냐? 우리 교회처럼 오르간 피아노도 다 들여놓으면 안 싸웠을 텐데 아마 좀 작은 교회였나 봐요. 그 교회에 음악을 좀 아는 사람 둘이 있는데 한 사람은 누가 뭐래도 교회는 오르간이다 고집하고 또 한 사람은 아니다 좋은 피아노가 있어야 한다 고집하니 싸움이 난 것입니다. 

우리가 들으면 참 우스운 일이지만 두 사람은 서로 음악수준이 높네 낮네 싸우다가 교회 전체가 오르간 파와 피아노 파로 나누어 지금도 목숨 걸고 싸우고 있는 모양입니다. 왜 이런 일이 생길까요? 바로 눈 때문입니다. 시야입니다. 시야가 좁아져요. 육신적인 눈만 뜨고 영적인 눈을 못 뜬 게지요. 이 경우는 내 음악지식이 육신의 눈이 되는 겁니다. 믿음의 눈이 열리고 영적인 눈이 열리면 누가 보인다고 했습니까? 하나님부터 보이고 예수님부터 보이지요. 그러면 하나님이 뭘 원하실까? 

주님은 뭘 원하실까? 이것부터 봐야하지 않습니까? 하나님한테 오르간이냐 피아노냐 그것이 뭐 그리도 중요하겠습니까? 하나님이 찬양받으시는데 오르간으로 찬양 드리든, 피아노라 드리든 하나님이 그걸 따지시겠습니까? 하나님께 정말 중요한 것은 교회의 화평입니다. 그런데 영적인 눈이 안 열리니 알량한 작은 음악지식 가지고 그렇게 다투는 것이지요. 영안이 열리지 않으면 자신만 크게 보입니다. 교회는 작게 보입니다. 자기 지식과 주장만 보이고 하나님은 안 보입니다. 이 모든 것보다 오직 하나님이 보이고, 하나님의 뜻이 보이고, 하나님이 내게 주신 사명과 책임을 볼 수 있는 영안이 뜨이길 축원합니다.

❚볼 수만 있다면!

중학생 때 영어시간에 읽은 글 하나가 너무 제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헬렌 켈러가 쓴 “3일 동안만 볼 수 있다면”이라는 짧은 글입니다. 그녀는 태어난 지 19개월 만에 열병을 앓아 보지도 듣지도 못하고 따라서 말도 못하게 된 3중장애를 가졌지만 훌륭한 교육자이며 저술가가 되었습니다. 헬렌 켈러가 위대한 사람이 되도록 도운 설리반 선생님도 유명하지요. 이 글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만약 내가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유일한 소망이 하나 있다고 하면 그것은 죽기 전에 꼭 3일 동안만 눈을 뜨고 보는 것입니다. 만약 내가 사흘간 볼 수 있다면 첫날에는 나를 가르쳐 준 설리번 선생님의 얼굴을 바라보겠습니다. 그리고 산으로 가서 아름다운 꽃과 풀과 빛나는 노을을 보고 싶습니다. 둘째 날엔 새벽에 일찍 일어나 먼동이 터오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저녁에는 영롱하게 빛나는 하늘의 별을 보겠습니다. 셋째 날엔 아침 일찍 큰 길로 나가 부지런히 출근하는 사람들의 활기찬 표정을 보고 싶습니다. 점심때는 아름다운 영화를 보고 저녁에는 화려한 네온사인과 쇼윈도의 상품들을 구경하고 저녁에 집에 돌아와 사흘간 눈을 뜨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싶습니다.”

헬렌 켈러는 육신의 눈이 먼 사람입니다. 아름다운 세상도 못 보고 사랑하는 부모님이나 선생님 얼굴도 볼 수 없는 시각장애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육신의 눈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세상의 아름다움을 더 잘 느낄 수 있었습니다. 더욱이 영적인 눈은 그 누구보다 환히 열려서 하나님을 보고 감사할 수 있는 신앙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헬렌 켈러와 달리 너무 멀쩡한 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눈을 가지고 우리는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세상만 봅니까? 나만 보입니까? 지금까지 받은 은혜 못 보고 없는 것, 부족한 것, 원망 불평거리만 보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환하게 보이고, 말씀이 놀랍게 보이고, 내게 주신 사명이 확실하게 보이십니까? 불평 원망보다 감사의 제목이 보이십니까? 다시 한 번 주님께 간구하기 바랍니다. “하나님, 내 눈을 열어주소서! 그래서 그 환한 눈으로 주님을 확실히 보고 주의 일을 확실히 하게 하옵소서!” 이렇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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