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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롬 11:3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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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롬 11:33-36)


수요일 로마서 강해 공부 때 여러 번 제가 강조한 내용이 있습니다. 로마서 구조는 1장에서 11장까지는 교리 부분이고, 12장에서 16장까지는 그리스도인의 윤리 부분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며, 내가 왜 예수를 믿어야 되는가? 예수님과 나의 관계성, 구원은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인가? 이런 모든 문제를 1장에서 11장까지 기록하다가 오늘 11장 마지막 부분에 와서 사도 바울은 감탄시 하나를 씀으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이 본문의 말씀은 바울 사도의 신학과 신앙의 간증으로 봐야 합니다. “그가 이해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이런 것입니다. 

지금 이렇게 많은 성도들이 한 자리에 모여서 똑같은 예배 모범의 절차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영혼의 고백은 하나님에 대해서 다 다른 모습으로 조명되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같은 장소에서 같은 시간에 똑같은 일을 경험했는데도 거기에 대한 신앙적 평가는 사람마다 다 다르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기독교 2천년 역사를 보면 얼마나 많은 교파의 분열이 있었는지 우리가 인정합니다. 희랍 정교회가 있고, 로마 가톨릭 교회가 있고, 프로테스탄트 개신교회가 있고,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순복음 할 것 없이 수백 갈래입니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신앙고백의 차이 때문에 생긴 일입니다. 

제가 몸담고 있던 미국 장로교 PCUSA라고 하는 교단은 언더우드를 우리 한국에 파송한 교단입니다. 40년 동안 신학 논쟁을 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동성연애자에게 목사 안수를 줄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성경에 동성연애는 죄다. 평신도도 동성연애를 하면 안 되는데 동성연애 한 사람에게 어떻게 목사 안수를 주느냐?” 반대합니다. 한 쪽에서는 뭐라고 합니까? “그러면 그 사람은 저주받은 인생이냐? 그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지 않느냐? 

그 사람의 영혼은 영원히 저주 받을 자라고 규정해버리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정신이냐?” 어디가 옳습니까? 그래서 40년 동안 계속 논쟁하며 끝이 안 나다가 지금 결정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또 둘로 갈라지는 모습입니다. 지금 막 갈라지면서 “그러면 우리는 이 교회에 안 있겠다.” 나가고, 그대로 있고 이것이 금년에 굉장히 큰 이슈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내 영혼의 신학과 신앙 고백이 어떤 색깔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내가 신앙생활 잘 할 수도 있고, 잘못할 수도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로마서의 교리적 내용을 끝내면서 아주 흥분적 감격으로 영적 시 한편으로 마감하는 내용입니다. 여기 뭐라고 시를 썼느냐 하면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리고 만물을 연결 지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이해할 때 두 가지 표현을 특별히 했습니다. 만물을 보면서 하나님의 지혜를 말했고 우리 인체, 사람의 몸을 보면서 하나님의 오묘하심을 나타냈습니다. 그래서 바울 서신에 그런 이야기들이 많이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성경이 쓰여질 때 헬라 문화는 지혜와 지식을 ‘소피아’와 ‘그노시스’라고 사용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또 앞으로도 모든 인간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어떤 힘을 지식에서 얻고자 하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 학문 과정을 거치는 것이고 그 지식이 지혜롭게 활용되는 힘을 키워오고자 노력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아주 지식이 많은데 지혜가 없어서 그 사람의 그 많은 지식이 별로 유익하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지식을 쌓지 못했는데도 매우 지혜롭게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특별한 사람이 있습니다. 지혜도 많고 지식도 많은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아주 훌륭한 일을 합니다. 

더 특별한 사람이 있습니다.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을 무지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아주 특별한 사람이 있습니다. 소피아와 그노시스 상관없이 영적인 능력이 주어진 사람입니다. 바울은 여기에 포커스를 맞추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적 능력이 주어진 아주 특별한 택함 받은 백성이다.” 이렇게 규정하는 것입니다. 만물을 바라보니까 “깊도다!”라는 감탄사로 오늘 말씀을 시작하고 있는데 “얼마나 깊으냐?”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우주 만물의 운행을 바라보니까 하나님의 소피아와 그노시스의 풍성함이 인간이 가지고 있는 언어로 헤아릴 수 없는 신비로 가득 차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성경은 영어에서 번역이 되었기 때문에 설교자들은 설교 준비를 할 때 어쩔 수 없이 영어 성경을 봐야 할 때가 많습니다. 바로 이 부분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을 어떻게 영어 성경이 말했느냐 하면 “unfathomable”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소피아와 그노시스는 해결할 수 없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또 요즘의 성경이 쉬운 말로 번역이 되었는데 거기 보니까 “unsearcha-

ble” “불가사의한” 그러면 그러한 지식을 우리 하나님의 백성이 어떻게 알 수 있느냐? “그게 바로 영적 계시이다. 그래서 아주 특별한 사람이다.” 이미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을 바라보면서 “피조물이 고대하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렇게 말했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모든 만물은 썩어짐의 종노릇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나님의 창조물은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길 기다리고 있다. 그래야 피조물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날 수 있는 자격이 된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에 있어서 우리 현실적으로 금년 여름에도 대단히 기온이 올라가서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한국은 동남아보다도 이제 날씨가 더 더워졌습니다. 여름 내내 우리 모두를 불편하게 한 뉴스가 계속됐습니다. “전력이 모자라니까 큰일 났습니다. 전기를 아껴 쓰십시오.” 이 방송이 여름 내내 나왔습니다. 실제로 큰 불편을 겪은 사람들이 많았고 산업에도 큰 지장을 주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만들어 사용하는 전력 발전소가 자꾸만 고장이 난다는 것입니다. “지금 몇 호기 발전소가 고장이 나서 멈추었습니다. 몇 호기도 불안합니다. 

제발 전기 좀 아껴 쓰십시오.” 여름 내내 우리가 그렇게 살아왔지 않습니까? 사실 이 기술 분야는 우리나라가 인정을 받아서 이미 세계 여러 나라 원자력 발전소 건설 계약을 맺었고 지금 공사 중에 있습니다. “한국 기술이면 넉넉하다. 어느 기술보다도 믿을 만하다.” 그래서 그런 천문학 숫자에 돈을 내고 공사를 맡긴 거 아닙니까? 그런데도 여름 내내 들려온 소식은 불안했습니다. “오늘은 관심 단계입니다. 오늘은 경보 수준입니다. 오후 한시부터 다섯 시까지 전기 끄십시오.” 항상 그러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만드신 발전소를 한번 평가해 보십시오. 태양 발전소를 만들어놓으셨습니다. 

수십억 년이 지나도 한 번도 고장 안 났습니다. 관심 단계 한 번도 안 갔습니다. “오후 1시부터 5시까지 햇볕 덜 사용하라.” 한 번도 말씀 안하셨습니다. 원자력 발전소 하나 짓는데 수천억 들어갑니다. 크기가 갈보리 교회 같은 이 정도 덩치에 발전소인데 수천억 들여서 건설합니다. 만약 이 원자력 발전소의 크기를 아주 크게 해서 그 부피가 경기도 만하게 만든다면 그 경비는 얼마나 들겠습니까? 인간이 가지고 있는 수학으로 표현할 수 없는 정도의 돈이 들어갑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돈도 안들이고 말씀으로 저렇게 큰 발전소를 만드시는데 얼마나 크냐? 지구 100만개를 합친 것보다 더 큰 발전소입니다. 발전량은 1500만대의 열을 발전할 수가 있습니다. 전기 값 안 받습니다. 공짜로 주십니다. 얼마나 관리를 잘하시는가? 어떤 행성에도 피해를 주시지 않습니다. 지구와의 거리 조절 정확합니다. 인간에게 걱정 끼치는 거 하나도 없습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소피아와 그노시스여!” 

그 다음에 바울서신에 우리 인체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지 않습니까? 우리 인체를 보라. 우리 몸에는 세포가 얼마나 되느냐? 어떤 과학자는 7조나 된다고 하고 어떤 과학자는 7백조도 된다고 합니다. 하여튼 그 정도의 많은 세포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많은 세포가 하나의 목적을 향해서 통일성을 이루고 있는 게 우리입니다. 지금 제가 설교하고 있습니다. 설교를 하는 이 하나의 목적을 위해서 각기 다른 모양과 기능에 7조개나 백조 개나 넘는 세포가 똑같이 각기 다른 움직임을 움직여주기 때문에 설교를 하는 것입니다. 설교를 하기 위해서 여러분의 얼굴을 제가 마주 보아야 합니다. 

여러분의 얼굴을 바라본다는 그 목표를 위해서 내 몸에 1억7천만 개의 세포가 협동해서 일을 해야 비로소 보이는 것입니다. 빛을 통과시키는 렌즈의 기능이 필요하고 거리를 맞추는 초점 조리개가 재빠르게 움직여야 되고 보일 수 있는 영상을 그릴 수 있는 망막이 순식간에 그림을 그려야 되고 신호 전달 신경이 중추 신경에 직통 전화를 해서 그래서 비로소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많은 7조개 이상의 세포는 각기 다르면서도 통일된 요소를 하나 가지고 있는데 그것을 유전자라고 합니다. 왜 세상에 그렇게 많은 사람이 있는데 똑같은 사람이 없는가? 그 많은 DNA 하나만 달라도 다른 사람의 모양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신체 안에 있는 그 많은 DNA를 풀어서 “앞으로 나란히”를 시킨다면 지구에서 태양을 400번 왕복할 수 있는 거리가 됩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unsearchable” “unfathomable” “불가사의한,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지식의 풍성함이여!” 이렇게 감탄시를 쓴 것입니다. 유전자가 우리 인체에 통일성을 이루어 유지하는 것과 똑같이 바울 사도는 이 교회를 영적 유전자로 해석했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우리의 신앙 고백을 7조개 이상의 세포가 다르듯이 모두 각자 다를 수가 있지만 그러나 하나의 목표를 향해서는 동일성을 이루는 영적 유전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을 보십시오. 

“사역은 여러 가지이나, 세포는 달라도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신 하나님은 같으니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을 유익하게 하심이라. 하나의 목적을 향해서 가는 것이라.” 구체적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예언함을, 병들 분별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또 다른 사람에게는 방언의 통역함을 주시나니 이 모든 일은 같은 성령이 행하사”라고 했습니다. 

“다 달라도 하나의 유전자 목표를 향하는 교회이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인 것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눈이 손더러 나는 네가 쓸데없다 하거나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지 못하리라. 세포는 달라도 유전자는 같다.” 바울이 그렇게 본 것입니다. 

우리가 늘 하는 기도문 가운데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시다. 못하는 일이 없고 안 계신 곳이 없다. 불꽃같은 눈으로 우리를 살피사” 이런 단어들을 씁니다. 그러면 우리가 상식적으로 한번 판단을 해서 ‘하나님 혼자서 온 세상에 그 많은 사람이 일하고 밥 먹고 죄짓고 장난하고 놀고 하는 것을 어떻게 일일이 세밀하게 관찰하시느냐?’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지 않습니까? 요즘은 하나님이 뭡니까? 사람들도 다 관찰합니다. 과학이 하나님을 도와주고 있습니다. 

CCTV라는 것을 만들어놓으니까 24시간 365일 교회도 CCTV가 얼마나 많은지 누가 몇 시에 문에 들어섰으며 몇 시에 나갔으며 사무실에 누가 왔으며 그 복잡한 시골 골목도 시장 골목도 CCTV 하나만 있으면 비밀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자동차에도 블랙박스라는 것을 달아놓으니까 누가 몇 시에 내 자동차에 왜 접근했는지 다 보지 않습니까? 어두워도 다 나타납니다. 요즘에는 뭐까지 나타났느냐? “다본다”라는 것이 나왔습니다. 인간도 다 봅니다. 

선진국들이 하늘에 띄어놓은 위성들은 지구 어떤 곳이라도 세밀하게 관찰하지 않습니까? 우리나라도 아리랑호가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세계를 다 보는 것입니다. 사람도 다 보는데 하나님이 못 보시겠습니까? 유치원 아이들은 숨바꼭질 할 때 자기가 못 보면 다른 사람도 못 보는 줄로 생각합니다. 궁둥이는 하늘로 뻗치고 얼굴만 가립니다. “하나님의 지식과 지혜는 불가사이하고 측량할 수 없으며 헤아릴 수 없이 깊도다.” 하나님을 그렇게 보았습니다. 

지금 바울의 감탄의 골자가 무엇인가? 왜 이렇게 말하고 있는가? 그 어마어마하신 하나님이 하신 일이 뭐냐? 나를 관심해주셔서 구원해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설명을 1장에서 11장까지 계속하고 지금 감탄의 시로 11장을 마감하면서 12장은 무슨 말로 시작하느냐?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로 시작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큰 구원의 은총이 임하였으므로 이제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될 것인가?” 하는 기독교인들의 실천신학을 12장부터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너무 크시고 신비로우시고 불가사의한 존재인데 비해서 나는 너무나도 작고 티끌 같은 보이지도 아니한 존재인데 어떻게 그렇게 크신 하나님의 사랑이 나 같은 사람에게 임재하셨는가? 그 자체가 “unsearchable” “unfathomable” 불가사의한, 해결할 수 없는 신비의 사건인 것입니다. 우리가 찬송가 310장을 늘 부르잖아요?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 바로 그 부분 “난 알 수 없도다” 그 부분이 “unsearchable” “unfathomable” 표현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의 감격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살아오시면서 나에게 관심해준 어떤 감격을 기억하십니까? 내가 들은 말 가운데, 혹은 내가 받은 어떤 인격 가운데 ‘아! 그 사람이 그때 그렇게 말한 거 정말 감격이다.’ 뭐가 있으십니까? 우리나라 언어문화 가운데는 제일 감격 표현하는 언어가 옛날 임금님에게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이 말입니다. 최고의 존경 언어입니다. 저만 만나면 내 손을 잡고 “목사님!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하시는 권사님 한분이 계신데 치매 환자이십니다. 보기만 하시면 그러십니다. 또 한분은 장로님이셨는데 대중기도를 하시면서 “하나님!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이 문장을 꼭 쓰십니다. 제가 말씀드립니다. “장로님! 그 용어는 임금님께 쓰는 용어입니다.” “아, 목사님! 거룩할 성(聖), 은혜 은(恩)자인데 쓰면 어떻습니까?” 그래서 그 장로님 별명이 “성은이 망극” 장로였습니다.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의 관심의 대상이 되어서 나를 구원해주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그 사실에 대한 어쩔 줄 모르는 감격 표현 “깊도다. 말할 수 없도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살려주기 위해 자기 생명을 던지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강재구 소령이 부하들을 살리기 위해서 수류탄을 자기가 덮쳐서 자기 혼자 죽고 전우들을 살렸다든가, 달려오는 지하철에 뛰어들어서 그 사람은 살리고 자신은 희생되었다든지 그런 이야기들이 많이 있지 않습니까? 사실 그런 것은 십자가 정신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극치는 십자가 위에서 완성되었습니다. 로마서 1장에서 11장까지 “아! 그 구원의 은총이 깊도다.” 

목회를 오래하다 보니까 별 예를 다 경험하는데 교회 나오는 청년 남녀가 연예를 했습니다. 나중에 저한테 남자 청년이 와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둘이 결혼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남자가 여자에게 사랑 표현을 생명 거는 일을 말했습니다. “나는 너를 위해서라면 내 생명도 버릴 수 있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여자가 뭐라고 말했는지 알아요? “진짜?” “진짜다!” “그러면 해봐!” 오늘은 청년이 권총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미국은 권총은 그냥 마켓에 가서 구입하면 됩니다. 배추 사는 것과 마찬가지로 구입할 수 있습니다. 

청년이 권총 가지고 온 것을 여자가 보고는 “어휴! 잘났다, 잘났어! 쏴봐!” 청년이 “쏜다!” 그러면서 왼팔을 들고 오른손으로 자기 팔에다 “팡!” 쐈습니다. 그 결혼이 깨졌습니다. 둘 다 그 사건 후에 마음이 변했습니다. 여자는 ‘아니, 뭔 남자가 저렇게 경솔해? 저 사람은 언젠가 사고 낼 사람이다.’ 그렇게 판단이 되었습니다. ‘쉽게 권총 가지고 나오는 저 사람과는 결혼 못하겠다.’ 남자는 어떻게 생각했느냐 하면 ‘아니, 무슨 여자가 그 순간이 되면 말려야지 계속 쏴보라고 하냐? 저런 여자와는 못살겠다.’ 청년이 저한테 와서 말하는 겁니다. “너는 왜 그런 경솔한 짓을 한 거니? 네 팔만 장애인 되었지 않느냐?” “아닙니다. 목사님! 괜찮습니다. 이 팔뚝 맨 끝의 살갗만 살짝 지나가게 쏴서 딱지만 떨어지면 괜찮습니다.” “별 녀석을 다 봤다!” 그랬습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The Passion of the Christ)”에서 예수님의 신체적 고통을 여러분 모두 보셨지 않습니까? 우리 사회는 역사적으로 감격적인 러브 스토리가 가끔 있어왔습니다. 호동 왕자를 사랑하기 위해서 낙랑 공주가 자명고를 찢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바보 온달을 사랑하기 위해서 평강 공주가 궁중을 빠져나갔다는 이야기도 있고, 윈저 공은 심프슨 여인을 사랑하기 위해서 왕의 자리에서 물러났다는 이야기들이 있지 않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그래서 바울 신앙 고백은 “나 때문에 그렇게 되신 것이다. 아! 깊도다.” 여기 이런 말이 있습니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이 모사란 말은 카운슬러, 충고하는 사람으로 “누가 예수님을 충고했느냐? 누가 예수님의 카운슬러를 해서 그런 일을 하라고 했느냐? 

인간에게 충고 들어가면서 하나님이 일하고 계시냐?” 35절 “누가 주께 먼저 돼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이 말은 로마서 1장에서 11장까지 주제로 다뤄온 말의 결론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은혜를 먼저 입은 것이지 내가 먼저 선한 일을 해서 그 보상으로 구원받은 것이냐?” 중세기 시절에 그러했지 않습니까? 

신앙의 교리적 시행착오가 생겨서 내가 쌓는 의에 의한 하나님의 구원의 보상, 그것이 점점 발전해서 마침내 이 십자가 은혜의 기독교를 금욕 종교와 고행 종교로 만들어버렸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금욕의 절제 생활을 하고 하나님을 위해서 고행을 참으면 그것이 나를 구원하는 의가 된다는, 그래서 수도원 생활이 문화화 되었고 금욕 생활은 구원의 의를 만든다고 사람들이 행복해 했지 않습니까? 마침내 잘못된 것을 바로 잡기 위해서 종교개혁이 뒤집어엎었습니다. “이게 무슨 짓이야? 구원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야. 예수님을 충고해서 우리가 은혜 받은 게 있냐? 그냥 주신 것이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 다음에 마지막으로,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무슨 의미입니까?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이 계획하신 목적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지난 수요일에 저는 요한계시록 강의를 끝냈습니다. 요한계시록에 약속한 계시의 결론이 무엇입니까? 본래대로의 회복입니다. 우주 만물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새 하늘과 새 땅이 될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어떻게 됩니까?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에서 세세토록 왕 노릇할 것이다.” 그리고 성경을 덮었습니다. “믿거나 말거나 이대로 될 것이다.” 그게 성경입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시다.
  
「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시여! 하나님의 지혜와 그 지식은 너무나 깊어 측량할 수 없고 불가사의한 일입니다. 바울의 신앙고백대로 우리가 고백하면서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면서 주님이 주신 이 땅에서의 우리의 삶을 날마다 믿음으로 승리하는 아버지의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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