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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기브롯 핫다아와의 탐욕 (민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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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기브롯 핫다아와의 탐욕 (Lusting People at Kibroth-hattaavah)
성경 : 민 11:1-9
 
 
“여호와께서 들으시기에 백성이 악한 말로 원망하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진노하사 여호와의 불을 그들 중에 붙여서 진영 끝을 사르게 하시매 백성이 모세에게 부르짖으므로 모세가 여호와께 기도하니 불이 꺼졌더라 그 곳 이름을 다베라라 불렀으니 이는 여호와의 불이 그들 중에 붙은 까닭이었더라 그들 중에 섞여 사는 다른 인종들이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이르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랴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이제는 우리의 기력이 다하여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 하니 만나는 깟씨와 같고 모양은 진주와 같은 것이라 백성이 두루 다니며 그것을 거두어 맷돌에 갈기도 하며 절구에 찧기도 하고 가마에 삶기도 하여 과자를 만들었으니 그 맛이 기름 섞은 과자 맛 같았더라 밤에 이슬이 진영에 내릴 때에 만나도 함께 내렸더라”
 
오늘은 인간의 마음속에 깊이 뿌리를 박고 있는 ‘탐욕(貪慾’에 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탐욕은 매일 신문이나 방송의 중심부를 차지하고 있는 우리 사회 부정 부패 사건들의 뿌리에 도사리고 있는 더러운 놈입니다.
 
대문호 단테에 의하면 탐욕이란 ‘꺾을 수 없는 원수’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강하고 질긴 놈인지 아무도 꺾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돈을 우상으로 생각하고 탐(貪)하는 탐욕은 결국 사람과 가정과 나라를 망칩니다. 이런 의미에서 대부호 앤드류 카네기의 말은 진리입니다. “세상에 돈이라는 우상보다 사람을 더 타락시키는 우상은 없다.” 

이와 같은 탐욕이 그동안 우리나라의 정치인들과 경제인들, 지성인들, 심지어 가정 주부들의 밑뿌리에까지 도사리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십계명 가운데 마지막에 탐심에 대한 경고의 계명을 주십니다.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출 20:17).
 
이것은 사람의 행동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과 달리, “탐내지 말라”는 계명은 행동이 아닌 마음가짐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욕심을 내고 그것이 탐욕화 되면 그 자체가 죄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 오늘 본문의 사건처럼, 진노하시는 하나님에 의해 징계를 받게 됩니다.
 
본문 민수기 11장을 보십시오. 기브롯 핫다아와에서 탐욕으로 가득하여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실 얼마 전까지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400년이 넘도록 해 오던 불쌍한 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로 하여금 그 오랜 세월동안 이스라엘 민족의 정체성을 유지하게 하셨고, 엄청난 기적을 열 번이나 거듭하여 마침내 애굽에서 인도해내셨지 않습니까?
 
역사상 초유의 기적으로 홍해를 가르셨고, 죽음의 광야에서 수백만의 훈련되지 못한 사람들을 만나로 먹이시고 반석에서 생수를 터뜨려서 마시게 했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그들은 만나에 싫증을 느꼈고 ‘고기 먹고 싶다’고 어린애처럼 보채며 울고불고 야단법석을 떨었습니다. 하나님은 탐욕의 사람들에게 크게 역정을 내셨고, 욕심을 낸 사람들을 그곳에서 죽이셨습니다. 사람들은 그곳을 일컬어 ‘기브롯 핫다아와’(= 탐욕의 무덤) 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참으로 두려운 일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그들의 탐욕이 어떤 것이었는지, 그리고 그들이 품었던 탐욕이 내 안에는 없는지 깊이 살펴보는 시간이 되기 바랍니다.
 

1. 만나로 만족 못하고 원망함 (= 은혜를 망각한 탐욕)
 
5절=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6절= “이제는 우리의 기력이 다하여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매일 하늘로부터 내리셨던 만나에 점점 염증을 느낀 나머지 불만 섞인 말까지 하고 맙니다. 그들은 만나로 만족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한 탐욕의 모습입니다.
 
5절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 있을 때 그들이 먹었던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회상하며 이런 것들을 먹을 수 없는 자신들의 처지를 한탄했습니다. 

어찌보면 그들의 모습이 이해가 될 법합니다. 왜냐하면 이런 자극적인 음식에 길들여진 그들이 일 년 이상 만나 한 가지만을 먹어왔으니 이제 싫증이 날 만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좀더 깊이 생각해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원망과 한탄은 동정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들이 먹고 있던 만나는 영원한 음식이 아니라 가나안 땅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이 주시는 한시적인 양식이었고, 이제 곧 가나안에 이르게 되면 맛있는 음식을 얼마든지 먹게 될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만나를 먹으면서 자신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어 가나안으로 인도해가시는 하나님께 감사해야 했고, 자꾸만 과거 애굽의 생활을 회상할 것이 아니라 더욱 간절히 미래의 가나안 땅을 소망해야 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그럼에도 이스라엘은 그 만나를 먹으면서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애굽 땅에서 이끌어내신 것을 원망했습니다. 게다가 애굽의 자극적인 음식들을 그리워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를 망각한 탐욕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어디 만나 한 가지에만 국한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그들의 목이 마를 때에 반석에서 물을 내셨습니다. 

걷는 걸음마다 지켜주셔서 발이 부르트지 않게 하시고 입은 옷이 해어지지 않도록 돌보아주셨습니다.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시며 뜨거운 해와 서늘한 바람으로부터 백성들을 지켜주셨습니다. 

그뿐입니까? 나쁜 짐승이나 해로운 해충들이 해치지 않도록 돌보아 주셨습니다. 하나에서 열까지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처럼 엄청난 은혜를 받아온 사람들이 그 은혜를 망각하고 불평과 원망을 일삼는 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른 아침 들판에 나가 만나를 주우면서, “주님, 감사합니다. 이 황량한 광야에서 먹을 것을 주시다니요” 라고 눈물을 흘리면서 감사를 고백해도 모자랄 판국인데, 오히려 원망을 하다니요! 

반석에서 물이 터져 그 물을 손으로 움켜쥐고 마시면서, “주여, 정말 감사합니다. 이 메마른 땅에서 목마르지 않게 해주시다니요” 하고 두 손을 들고 하나님을 찬송해도 부족할 판인데, 오히려 불평하다니요!
 
성도 여러분! 은혜를 망각한 탐욕의 모습은 오늘 우리에게도 나타날 수 있는 것임을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떠나온 과거 세상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세상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간다면 어느새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린 배은망덕한 사람이 되고 말 것입니다. 

밀림의 왕 사자를 보십시오. 사자는 먹을 만큼만 사냥합니다. 사자는 쌓아놓기 위해 사냥하는 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지금 갖고 있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좀 더, 좀 더’ 하며 계속해서 욕심을 부립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말할 수 없는 은혜를 받으면서도 받은 은혜에 만족하지 못하고 ‘조금만 더’ 하는 마음을 버리지 못하는 인생의 모습은 은혜를 망각한 탐욕 바로 그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머리 속에 있는 모세혈관 하나만 터져도 모든 것이 끝장날 수밖에 없는 연약한 나 자신이 오늘 이렇게 살아 있는 은혜가 어디에서 왔는지 깊이 생각해봅시다. 우리 속에 있는 ‘좀 더’ ‘좀 더’ 하는 탐욕의 마음을 주님의 십자가 밑에 묻어버리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성도가 되기 바랍니다.
 
2.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랴”고 함 (= 하나님을 믿지 못한 탐욕)
 
4절= “···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이르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랴”
 
만나만으로 만족하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랴” 고 하면서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이것은 은혜를 망각한 탐욕의 모습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약속과 능력을 믿지 못하고 하나님을 믿지 못한 탐욕의 모습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죽음의 광야로 끌어들이실 때에는 나름대로 계획이 있으셨습니다. 광야에 양식이 없고 물이 없고 고기가 없다는 것을 하나님은 누구보다 잘 알고 계셨습니다. 

주님은 백성들이 배고프면 먹일 수 있는 양식 준비도 하셨고, 목마르면 마시게 할 생수 준비도 하셨고, 행여 만나가 질리면 고기라도 주실 준비까지 다 하고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단 하나, ‘하나님만 믿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믿지 못했습니다.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랴!“ 고기를 탐하는 그들의 탐욕 뒤에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못하는 불신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안에는 거대한 불신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배가 고프면 “하나님이 이 광야에서 어떻게 우리에게 양식을 주겠는가?” 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불신했습니다.
 
목이 마르면 “이 많은 사람들을 무슨 물로 다 마시게 하겠는가?” 하고 하나님을 의심했습니다. 

고기가 먹고 싶으니까 “고기 먹고 싶은데,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겠는가?” 하고 하나님을 시험했습니다. 

시편기자는 78편에서 광야생활을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형편을 영적으로 잘 해석하고 있습니다.
 
시 78:18-20= “그들이 그들의 탐욕대로 음식을 구하여 그들의 심중에 하나님을 시험하였으며 그뿐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여 말하기를 하나님이 광야에서 식탁을 베푸실 수 있으랴 보라 그가 반석을 쳐서 물을 내시니 시내가 넘쳤으나 그가 능히 떡도 주시며 자기 백성을 위하여 고기도 예비하시랴 하였도다” 

시 78:21-22=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듣고 노하셨으며 야곱에게 불 같이 노하셨고 또한 이스라엘에게 진노가 불타 올랐으니 이는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며 그의 구원을 의지하지 아니한 때문이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본래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있으면 하나님께서 주실 것이라는 믿음, 이것이 믿음이요 이것이 하나님만 바라보는 믿음의 자세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면 우리는 어떠한 상황에서든지 탐욕의 노예가 되지 않습니다. 

오늘날 교회에 예수 믿는 많은 신자들이 평소에는 믿음이 좋은 것 같았는데, 정작 돈 문제를 놓고 행동하는 것을 보면 믿음이 약한 자가 많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믿음을 가진 성도를 찾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정말로 주님만 의지합니까? 여러분의 마음에 누가 더 큰 힘을 가진 존재입니까? 예수님입니까, 돈입니까?
 
예수님이 내 생명의 주권자요 내 삶의 유일한 통치자인 것을 믿는다면 우리는 오직 예수님만 의지해야 합니다. 돈에 마음을 주면 안 됩니다. 다른 곳에 마음을 바치면서 그것이 마치 하나님인 것처럼 기대고 의지하는 것이 바로 탐심이요 우상숭배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불신하는 탐욕의 그늘에서 확실히 벗어나는 성도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3. 다른 인종들에게 전염되어 고기를 탐함 (= 악인들의 충동을 받은 탐욕)
 
4절= “그들 중에 섞여 사는 다른 인종들이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이르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랴”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갑자기 요동쳤던 원망과 불평의 영은 그 출발점 이 이스라엘 중에 섞여 사는 다른 인종들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이 처음 애굽을 벗어나 나올 때 함께 나온 ‘중다한 잡족’(출 12:38)이었습니다. 

이들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믿는 언약의 자손이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비록 이스라엘 공동체에 자원하여 들어왔지만 올바른 여호와 신앙을 갖지 못하고 여전히 애굽의 우상숭배 문화에 젖어 있었습니다. 바로 이들이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믿음의 삶을 살지 못하고 범죄하게 하는 중대한 요인으로 작용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다른 인종들에게 전염되어 고기를 탐하게 된 것은 달리 표현하면 ‘악인들의 충동을 받은 탐욕’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자녀에게 탐욕을 품도록 충동하는 악인들의 활동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이 시대 교회에도 ‘섞여 사는 무리들’이 있어 이들에 의해 성도들의 영적 성장이 방해받기도 하고 때로는 진리에서 떠나 실족하게 되기도 합니다. 

그들이 누구입니까? 그들은 바로 혼합주의적인 사상을 가지고 교회 안에 가만히 들어와 성도들의 신앙을 도적질하는 자들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런 자들을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라고 했습니다(갈 2:4).
 
우리에게도 비슷한 시험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 ‘섞여 사는 무리’라고 말할 수 있는 세상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포진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밤낮 없이 그들의 소리를 듣지 않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나의 주변의 사람들이 탐하고 좋아하니까 나도 덩달아 거기에 빠지게 되는 위험은 항상 존재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속해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영원한 나라에서 살기 위해 잠시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섞여 사는 무리’에게 영향을 받아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자극 받아야 하고, 거룩한 백성들을 통해서 좋은 영향력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섞여 사는 무리’에게 전염되어 고기를 탐해서는 절대 안 됩니다. 악인들의 충동을 받은 탐욕의 사람이 되어서는 결코 안 됩니다. 

탐욕을 품어 성도들에게 전염시키는 무리는 결코 하나님의 나라를 기업으로 받을 수 없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자들을 가리켜 ‘좋은 밭에 뿌려진 가라지’(마 13:24-43), 또는 ‘그물에 걸려든 좋은 물고기들 사이에 섞여 있는 나쁜 물고기’(마 13:47-50), 그리고 ‘양들 사에에 섞여 있는 염소들’(마 13:47-50) 등으로 표현하시고, 이런 자들은 반드시 의인들 사이에서 갈라내어져서 영벌에 처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 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성도 여러분! 그러므로 우리는 ‘가만히 들어온 무리’를 경계해야 합니다.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골 2:8).
 
그들이 ‘고기 먹고 싶다’고 울 때 같이 울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의 악한 충동에 현혹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주님의 은혜에 더욱 감사하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나오는 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까지 세 가지를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은혜를 망각하고 욕심을 내는 것은 어떤 것이든지 탐욕이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을 불신하여 인간적인 욕심을 내는 것은 무엇이든지 탐욕이 된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리고 세상 사람들, 악한 사람들, 특히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의 말에 자극받아서 욕심을 내는 것 또한 탐욕이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중 탐욕으로 원망하던 사람들은 ‘기브롯 핫다아와’ 곧 탐욕의 무덤에 묻혔습니다. 우리 또한 ‘기브롯 핫다아와’에 묻히기 전에 먼저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모든 탐욕을 성령의 능력과 말씀의 권위로 몰아내고,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답게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 모두 탐욕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권면받고 자신을 훈련시켜 주님 앞에 영광과 찬양을 돌릴 수 있기 바랍니다.
 
<북한인권한국교회연합 공동대표, 사)나눔과기쁨 상임대표, 박순오 목사의 세상 보기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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