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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징계에는 속셈이 있다 (잠 13:1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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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계에는 속셈이 있다 (잠 13:18-24)


오늘은 징계에 대하여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솔로몬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초달을 차마 못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24)
초달이란 히브리 원어로 쉐베트라고 합니다. 이는 회초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자식일 잘못할 때 때리는 매입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살다 보면 종종 징계를 받을 때도 있고 또 사람들을 징계할 때도 있습니다. 
자기가 자기를 징계할 때가 있습니다.
어떤 이는 조그만 죄책감으로 전보대 위에 올라가 24시간 매달려 있는 벌을 스스로 가했습니다. 어떤 이는 발가벗고 장미 밭에 딩글기도 하였습니다. 어떤 이는 참회하는 마음으로 계단을 무릎으로 오르기도 하였습니다. 자기가 자기를 징계하는 모습입니다.

남에게 자기를 징계하여 달라고 요청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느 왕은 아침에 일어나면 신하 한 명을 시켜서 사람이 죽은 해골을 가지고 들어 와서 보여주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말하게 하였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자기를 징계하게 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 아예 잘못 하면 징계를 달라고 자청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나는 가나안 농군학교 김 용기 장로님이 경영하시던 신림 학교에 입학하여 훈련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 분의 스스로 기도가 나를 섬짓하게 하였었습니다.

“하나님! 내 다리가 잘못 하거든 내 다리를 분질러서라도 나를 바로 가게 하옵소서. 내 눈이 죄를 지으면 내 눈을 빼 주옵소서. 내 손이 잘못 하면 내 손을 잘라 주옵소서.”
이런 기도를 대중앞에서 당당히 하셨습니다. 징계를 달라고 하는 과감한 기도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징계를 주실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면 그런 징계의 정체는 무엇일가요? 징계를 받으면 징계에 대하여 반응하는 자세가 다릅니다.

1. 분노형 

야곱이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징계를 받을 때 “내게 하필이면 이런 징계가 임하였나?”라고 분노하는 형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반항하는 형입니다. 하나님이 자기만을 미워한다고 생각하는 형입니다.
야곱은 아버지 이삭이 자기를 미워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형 에서만을 사랑하고 있다고 여겼습니다. 편애하고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화가 났습니다. 그는 위장하고 들어가서 축복기도를 받았습니다. 야곱은 분노형입니다.

요셉의 형제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버지 야곱이 요셉만 사랑하고 자기들은 미워한다고 생각하며 분노를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요셉을 팔아버렸습니다. 요셉의 형들도 분노형입니다.

2. 체념형 

요나가 이게 속합니다.
하나님은 절대 주권자이기에 징계를 주어도 어쩔 수 없다고 체념하고 받아드리는 형입니다. 하나님은 <복수하는 하나님> 정도로 받아 드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심는 대로 거두게 하시는 분이니 주시는 대로 받아야 한다고 여기고 조용히 체념하는 사람들입니다.

성경이 쓰여지던 시대에는 로마가 온 세계를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로마의 아버지는 절대주권자형이었습니다. 아예 법으로 그렇게 정하여져 있었습니다. 부친의 자식에 대한 권리는 자식이 이 세상에 태어났을 때부터 정하여 지게 됩니다.
로마의 부친은 자식이 태어난 순간 죽일 것인지 살릴 것인지부터 정할 수가 있었습니다.

어거스틴 시대까지고 로마의 부권은 절대적이었습니다. 자기 자식을 노예로 팔든지 학교로 보내오 공부를 시키든지 모두가 아버지의 절대 권한이었습니다. 아무리 아들이 장관이 되고 지위가 높은 사람이 되었어도 아버지가 그만 두라면 그만 두어야 했고 아버지에게 모든 국사도 묻고 처리하여야 할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이 성경을 쓸 당시에 하나님을 아버지처럼 생각하는 형입니다. 아버지가 징계를 주면 체념하고 절대적으로 받아야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징계를 주면 어쩔 수 없이 받아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완전히 체념하고 징계를 받아 드리는 형입니다. 
요나가 이 유형에 속합니다. 나 때문에 풍랑이 일어나니 나를 바다에 던지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바닷속에 던짐을 받을 때에도 어쩔 수 없는 운명이라고 그대로 받아 드렸습니다. 요나형은 체념형입니다.

3. 훈련형

하나님이 징계를 주실 때에 분노를 느끼는 것도 아니요, 체념하는 것도 아니라 징계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훈련시키려고 주시는 선물이라고 생각하는 형이 있습니다.
제롬이 유명한 말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최대의 노여움도 죄를 범하는 사람에 대하여 노여워하시지 아니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죄을 범한 인간에게 주는 최대의 벌은 상관하시지 않고 내버려 두시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욥이 이런 유형에 속합니다. 욥은 고난을 받을 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편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편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 내 발이 그의 걸음을 바로 따랐으며 내가 그의 길을 지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일정한 음식보다 그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구나. 그는 뜻이 일정하시니 누가 능히 돌이킬까 그 마음에 하고자 하시는 것이면 그것을 행하시나니 그런즉 내게 작정하신 것을 이루실 것이라 이런 일이 그에게 많이 있느니라”(욥 23;8-14)

욥은 하나님이 자기를 징계하실 때 자기를 훈련시켜서 크게 쓰시려고 하는 특별한 계획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같이 하나님으로부터 징계를 받을 때에 야곱같이 분노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요나같이 체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욥같이 훈련받는 것이라고 인정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징계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일가요?

1. 징계는 하나님이 사랑하신다는 증거입니다.

솔로몬은 말하고 있습니다.
“훈계를 저버리는 자에게는 궁핍과 수욕이 이르거니와 경계를 지키는 자는 존영을 얻느니라”(18)
히브리서 기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그 사랑하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히 12;6)
그래서 징계가 없으면 사생아입니다.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여 참 아들이 아니니라”(히 12;7-8)
징계가 있다면 사생아가 아니라 참 아들이라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버나드 쇼라는 사람은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주여! 나에게 노하여 주옵소서!”

어느 날 어느 교회 목사님이 “무교병은 쓴 나물과 함께 먹으라”라는 설교하였였습니다. 예배가 끝난 후 한 사람이 면담을 요청하였습니다. 목사님과 마주 앉았습니다. 그는 품속에서 칼을 꺼내 들었습니다. 그리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습니다.
"나는 오늘 처음으로 교회에 나온 사람입니다. 나는 채무자입니다. 나에게 돈을 꾸어준 사람이 얼마나 나를 못 살게 구는 지 나는 그에게 이 칼로 복수하려고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오늘 목사님의 말씀을 듣고 쓴 나물도 먹기로 작정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내 마음이 이렇게 편할 수가 없숩니다. 감사힙니다. 나에게 준 고난은 나로 하여금 하나님을 만나게 하시려는 뜻이 들어 있는 것인 줄 믿게 되었습니다."
징계는 사랑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초매로 매질하였다면 이는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징계를 받을 때에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기에 주신 것이라고 믿어야 합니다.
우리나라에게는 <조상 매>라는 체벌이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자녀가 잘못을 저지르면 부모는 자식을 데리고 조상 묘앞으로 가서 회초리를 들어서 자기 종아리를 자기가 치면서 말합니다.
“내가 너를 잘못 가르쳐서 네가 그렇게 하니 내가 조상 앞에서 견딜 수 없구나! 그래서 내가 조상앞에서 매를 맞아야 한다.”

이 때만큼 자녀가 아픈 적은 없다는 것입니다. 징계는 자녀가 잘 되라고 하는 사랑의 표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징계를 주실 때에도 그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에게 다음과 같은 징계를 주었습니다.
병으로 징계하실 때가 있습니다. 교통사고로 징계하실 수도 있습니다. 사업의 실패로, 가족 중에 누구를 먼저 데리고 하시는 징계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다 사랑에서 주시는 징계입니다.

롯이 아브라함을 떠나 죄악의 소굴 소돔과 고모라로 들어간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롯의 가정의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기도를 응답하여 주셨습니다. 롯은 아브라함에게 4번 빚을 진 셈입니다.

1. 아브라함은 롯을 가나안 땅으로 데리고 왔습니다.
2. 아브라함은 롯을 부자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3. 아브라함은 롯이 붙들려 갔을 때 구출하여 주었습니다.
4. 아브라할은 롯을 소돔에서 구하여 주었습니다.

그러나 롯의 후손들은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4번 괴롭혔습니다. 은혜를 은혜로 갚지 않고 악으로 보상하였습니다. 롯의 후손들은 모압과 암몬이었습니다. 모압과 암몬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4번이나 괴롭혔습니다.

1. 모압 선지자 발람은 이스라엘을 저주하려고 하였습니다.
2. 예후다 시대에 롯의 후손들이 이스라엘을 침공하였습니다.
3. 여호사밧 기대에 또 이스라엘을 침략하였습니다.
4. 이스라엘의 성전을 무너뜨릴 때에 그들이 합력하여 무너뜨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롯의 후손들을 향하여 4명의 선지자로 하여금 저주하게 하였습니다.

1. 이사야
2. 예리미야
3. 에스겔
4. 스바냐

이 4명의 선지자들은 롯의 후손들의 멸망을 계속 하여 예언하였습니다. 그러나 결론은 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잘 되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속셈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징계는 사랑이 동기입니다. 징계는 사랑의 다른 이름입니다.

2. 징계에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징계를 받는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면 하나님이 관심을 가질 필요도 없습니다.
솔로몬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훈계를 저버리는 자에게는 궁핍과 수욕이 이르거니와 경계를 지키는 자는 존영을 얻느니라(18)

히브리서 기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내 아들아 주의 징계를 경홀히 여기지 말며 그의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히12;5)

징계에는 반드시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들어 있는 데 경홀히 여긴다면 하나님을 경홀히 여기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요나가 타고 있는 배가 풍랑에 요통치게 하셨습니다.. 이는 니느웨로 가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다시스로 가는 요나에게 주신 징계였습니다. 풍랑을 무시하는 것은 하나님의 진정한 의도를 무시하는 행동입니다. 그러나 요나는 왜 풍랑이 일어나는 지를 분명히 알았습니다. 그래서 바람이 풍랑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풍랑을 일으키시는 것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스스로 바다로 던지라고 말했습니다. 징계를 받아드렸습니다.

큰 물고기가 요나를 삼켰습니다. 그러나 3일 3야동안 소화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기적중에 기적입니다. 큰 물고기는 말할 것도 없이 고래입니다. 고래는 4시간이면 어떤 음식물도 다 소화시키는 동물입니다. 그 속에서 3일을 있었습니다. 정말 놀라운 잠수함을 하나님은 보내주신 것입니다. 운전도 필요없는 잠수함이니다. 풍랑이 일어나도 끄떡없는 배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확하게 운전하셔서 니느웨로 보내주셨습니다.

요나에 의하여 니느웨성은 짐승부터 왕까지 모두가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징계를 경홀히 여기지 않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게 되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누리게 됩니다.

노아의 홍수때 사람들은 하나님이 징계하신다는 사실을 경홀히 여겼습니다. 그러나 노아만은 하나님이 징계하실 것을 너무나 두려워 하였습니다. 드디어 홍수로 물이 점점 불어 났습니다. 아무리 거인들이라도 그 많은 물을 어떻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이 주시는 채찍으로 계속 그들에게 홍수가 올 것이라고 경고하였습니다. 거인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노아 미드라쉬가 전해주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이 홍수를 주신다고 하여도 우리 목밖에 차지 않을 것이다. 물이 땅에서 솟아난다고 하여도 우리를 덮치지는 못 할 것이다.”

아무리 하여도 깨닫지 못 하는 것을 보신 하나님의 진노는 거세게 일어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비가 쏟아지기 전에 지옥을 통과한 후에 지구상에 떨어지게 하셨습니다. 뜨거운 비가 내렸습니다. 이런 벌은 그런 죄인에게 마땅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육적으로 뜨겁게 음란하였으니 뜨거운 비를 맞는 것은 당연하였습니다. 죄를 짓기에 뜨거웠으니 뜨거운 빗물로 고통을 당하여야 했습니다. 지옥에 갈 불쌍한 영혼들이라 지옥을 통과한 비를 맞는 것은 당연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죽어가면서도 하나님께 반항하며 회개할 줄 모르는 그들은 정말 구제불능이었습니다.샘이 터지고 비가 세차게 오자 그들은 마지막 수단으로 자기들의 자녀들을 물속으로 넣어 질식시켜서 죽게 하였습니다. 비상수단으로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자기들의 신에게 드리는 제물이었습니다.그러나 소용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스릴 자가 누구이겠습니까?

그러나 노아만은 하나님의 은총을 입었습니다. 노아의 공로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무조건적인 축복입니다. 노아만은 미리 방주를 만들어 홍수위에 떠서 홍수를 지배하게 하셨습니다. 물결이 노아의 생명을 넘보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징계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증거입니다. 노아를 사랑하시고 노아를 살리려고 하셨기에 하나님은 홍수라는 징계를 주신 것입니다.

3. 징계는 유익의 증거입니다.

징계를 받으면 유익된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말했습니다.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119;71)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시119;67)
그래서 어떤 성도는 이런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습니다.
“진정한 눈물은 영혼을 아름답게 합니다”(True tears make souls beautiful)

욥도 말했습니다.
“볼지어다. 하나님께 징계를 받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욥5;17)
바울을 향한 징계가 대표적인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계신 3층천까지 다녀오는 영계 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나고 돌아 온 직후 가시와 같은 병에 걸렸습니다. 갈라디아 지방으로 휴양가서 고쳐 보려고 애쓰기도 하였습니다. 그 병을 고쳐 달라고 세 번이나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고쳐주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병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것이 유익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병이 있어야 하나님께 기도하게 되고 기도하여야 그 능력이 그대로 유지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일생 가시와 같은 병을 그대로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 병의 징계가 도리어 유익이 되었습니다. 그 병때문에 바울은 능력의 삶을 살아 갈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병때문에 죽지 않았습니다. 누가라는 의사를 붙여 주셔서 늘 같이 지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정말 묘한 곳에 있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가시와 같은 병이라는 불치병을 주셨을 때 낙심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과론적으로 보니 바울에게 유익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징계를 받을 때에 낙심하면 안 됩니다.

미국으로 이민간 집사님 이야기입니다.
미국으로 가기 전에 이민 계획을 하고 영문학을 전공하고 싶어하였었습니다. 그러나 영문학과에 불합격하였습니다. 제2지망 국문학과에 합격하였습니다. 그는 실망하였습니다. 그러나 할 수 없이 국문학을 공부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민을 가게 되었습니다. 미국에 가서 교회를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였습니다. 어느 날 주일 예배를 드리고 나오는 데 담임 목사님이 사무실로 불렀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집사님! 우리 교회안에 한국어 학당을 만들려고 합니다. 그런데 가장 적임자는 집사님이십니다. 미국이라 영문학을 전공한 분은 많은 데 국문학을 전공한 분은 집사님 한 분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크게 쓰임받게 되었습니다. 안 되는 일이 잘 되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아는 것보다 하나님은 나를 더 잘 아십니다.

슈퍼맨의 주인공 크리스토퍼는 유명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가 등장하는 영화는 관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95년도 승마경기중에 말에서 떨어졌습니다. 그는 불운하게도 전신마비가 되었습니다. 그는 휠체어를 타고 살아가는 역경을 맞이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스타로서 죄를 물마시듯이 저지른 것을 하나님이 장계하신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낙심하지 않고 무엇인가 할 일을 찾아 보기로 하였습니다. 그래서 휠체어를 타고 영화감독이 되었습니다. 자기가 배우로서 이런 영화를 만들면 된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조금도 좌절하지 않고 휠체어를 타고 영화 촬영현장을 누비고 있습니다. 그는 어느 날 신문기자와 인터뷰를 통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일함으로서 분노나 좌절대신 해방감을 느낀다. 많은 것을 빼앗겼지만 창조적인 길을 찾아낼 수 있게 된 것이 얼마나 행운인가?”
징계를 통하여 더욱 유익하게 되었습니다. 팽이를 때리면 때릴 수록 더 잘 돕니다. 유익이 됩니다.

미국의 초대 대통령 죠지 워싱톤이 승리하고 장군들과 함께 둘러 앉았습니다. 같이 즐겁게 축배를 들고 있었습니다. 이 때 한 장교가 워싱톤의 모친에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길렀기에 저렇게 자랑스러운 아들을 만들었습니까?”
모친이 말했습니다.
“나는 아들에게 어떤 일이 있어도 순종하는 법을 가르쳤지요. 순종하지 않으면 징계를 서슴치않았지요.”

구세군이 전 세계에 복음을 증거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이 때 윌리암 부스 장군은 구세군의 성도들과 사관들에게 늘 가르친 것이 있습니다.
“당신들은 어떤 경우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공경하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 후 설교가 죠웨트(Jowett)가 말했습니다.

“한번은 구세군 사관 70명이 상부로부터 외국으로 선교하러 나가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단 한 명도 어디로 나가게 되느냐고 묻는 이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모두가 다 어디로 보내 주시던지 나가서 복음을 증거하겠다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이이 이들은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는 지를 체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어떤 사명을 주시고 어떤 징계를 주시더라도 무조건 순종하겠다고 하는 이들은 하나님의 축복를 받아 누리게 되어 있습니다.

솔로몬은 이렇게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선인은 그 산업을 자자 손손에게 끼쳐도 죄인의 재물은 의인을 위하여 쌓이느니라. 가난한 자는 밭을 경작하므로 양식이 많아지거늘 혹 불의로 인하여 가산을 탕패하는 자가 있느니라. 초달을 차마 못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 의인은 포식하여도 악인의 배는 주리느니라”(22-25)

그렇습니다. 징계에는 하나님의 속셈이 들어 있습니다.
1. 징계는 하나님이 사랑하신다는 증거입니다.
2. 징계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증거입니다.
3. 징계는 유익의 증거입니다.

미지막으로 도 종환 시인의 <담쟁이> 시를 알려 드리며 마치려고 합니다.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 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 남을 수 없는
저것을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높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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