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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자 (딤전 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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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자 (딤전 2:4-5)


일전에 어느 원로 목사님을 만나 대화하던 중에 이런 말씀을 들었습니다. 

“나는 50년이 넘도록 목회를 해오면서 설교할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에 관해서 알기 쉽게 전하려고 애써 왔습니다. 나는 부족하고 결함이 많지만 내가 전하는 예수님은 정말 위대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나는 언제나 예수님에 대해서 긍지와 자부심을 갖고 설교해 왔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말씀을 들으면서 저는 고개를 끄덕이며 ‘과연, 옳은 말씀이다’고 생각했습니다.

설교의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빠진 설교는 아무리 명 설교라는 평을 들을지라도 주님의 인정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이는 설교를 듣는 성도들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신은 왜 설교를 듣습니까?”라고 물을 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듣기 위함입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교양 강좌를 듣기 위해서라면 구태여 설교를 들을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또 재담(才談)을 듣기 원하는 경우에도 구태여 설교를 들을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설교는 그런 목적을 달성하는데 적합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배 시간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말하고 듣는 이유는, 그만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아는 것이 귀하기 때문입니다. 그토록 귀중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 각자의 구원과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세상에 태어난 보람을 느끼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격언이 생겨났을 것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족보에 명예로운 이름을 남기는 것을 매우 중요시했습니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이름’ 대신에 ‘많은 재산’을 남기는 것을 더 원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름을 남기든, 재산을 남기든, 그것이 보람되고 성공한 인생을 살겠다는 욕망의 표출이라는 점에서는 같습니다. 

그러나 조금만 깊이 생각해보면, 이름을 남기는 것이나 많은 재산을 남기는 것이나 그것이 뭐가 그렇게 중요할까요? 사람은 누구나 한 번은 죽기 마련인데, 죽음에 대비해서 아무 준비도 갖추지 못하고, 그저 세속적인 성공만을 추구하는 것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세상에서 이름도 얻고 돈도 많이 벌었으나 영원한 내세를 위한 준비를 하지 못했다면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에 대하여 시편 49편 20절에 보니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라고 하였습니다. 가장 성공적이고 보람된 인생은 살아생전에 영원한 삶을 준비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구원받으려면 예수 그리스도만 믿어야 합니까? 다른 길은 없는 것일까요?”라고 묻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도행전 4장 12절에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고 하신 대로,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예수 믿는 것처럼 귀한 일은 있을 수 없고, 예수 믿는 것처럼 절박한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또한 예수 믿는 것보다 더 큰 행복도 있을 수 없습니다. 이 진리를 올바로 아는 사람은 예수 믿게 된 사실을 생각할 때마다 감격을 금치 못합니다. 사도 요한은 말하기를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요일 3:1)라고 하였습니다.

아기 예수께서 탄생하신 지 40일이 되었을 때, 양부 요셉과 모친 마리아가 율법의 규정대로 결례를 행하고자 아기 예수를 안고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그 때 시므온이라는 한 경건한 노인이 성령의 감동을 받고 성전에 들어갔다가 아기 예수를 대면케 되었습니다. 시므온 노인은 한 눈에 이 아기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메시아이신 것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는 너무나 감격하여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시므온 노인은 메시아를 자기 눈으로 확인했으므로 이제는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소중함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팔 일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빌 3:5-9)

훌륭한 가문, 높은 학문, 사회적인 지위, 종교적인 권위 등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매우 요긴하고 자랑스러운 것들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와 비교해 보니 그가 이제껏 소중히 여겨왔던 그 모든 것이 한없이 누추한 것에 불과함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는 다른 사도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시몬 베드로를 비롯해서 안드레와 야고보와 요한은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적에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주님을 따라 나섰습니다. 세리 마태는 세관에 앉아 사무를 보던 중에 주님의 부르심을 받자 세관에 사표를 던지고 주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사도들이 알고 믿었던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과거에 죽은 분이 아니라 오늘도 여전히 살아 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십시다. 그러므로 우리 역시 믿음의 선진들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사는데 대한 벅찬 감격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지만 그저 덤덤할 뿐 무엇이 기쁘고 감사한지 알 수 없다면, 그 원인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올바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보석의 가치를 모르면 다이아몬드를 선물 받아도 별로 기쁘지 않을 것입니다. 그에게는 유리로 만든 모조품이든지 진품이든지 비슷하게 보일 테니까요. 그러나 다이아몬드의 가치를 아는 사람은 그것을 선물로 받으면 감격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구원의 감격을 누리기 원하는 성도들은 먼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서 올바로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스스로 하나님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누구나 영적으로 죽은 상태이므로 영이신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숭배하는 신들은 다 무엇일까요? 그것은 사람들이 상상 속에서 만들어낸 것에 불과합니다. 고대인들은 어느 민족을 막론하고 태양을 신으로 숭배했습니다. 그들은 태양의 빛과 열을 힘입어 사람을 비롯해서 모든 동식물이 살아가는 것을 보고는 이처럼 위대한 태양을 신으로 알고 섬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피조물을 신으로 섬기는 것이므로 우상숭배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여러 종교가 있지만 다 왜곡된 신관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신이 아닌 피조물이나 상상 속에서 만들어낸 것을 신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로마서 3장 11절에 보면, 이처럼 영적으로 무지한 인간들의 형편에 대하여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창조하신 우주만물에 당신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을 나타내 보여 주셨습니다. 온 우주 삼라만상이 하나님의 계심을 웅변적으로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죄로 인해 마음이 어두워진 인간들은 우주만물의 신비를 감탄하면서도 그것을 지으신 분이 하나님이신 것을 알지 못하고 지음 받은 존재인 해와 달과 별들, 강과 바다, 산, 짐승, 심지어는 곤충조차도 신으로 섬기는 우상 숭배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뿐 아니라, 성경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모양과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셨다고 증거하지만,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자들은 사람이 아메바에서 진화된 존재이며, 원숭이나 고릴라가 사람의 가장 가까운 조상이라고 주장합니다. 그야말로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져서 인간의 존엄성을 저버리고 짐승과 같은 수준으로 자신을 끌어내린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인간의 상태를 일컬어 전적 타락이라고 합니다. 타락한 인간의 본성은 하나님을 알 수도 찾을 수도 없습니다. 이는, 이방인들은 더 말할 나위가 없고, 선민이라고 자부하는 유대인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은 신앙의 생명력을 상실하고 종교적인 형식과 위선에 빠져 있었는데,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올바로 알지 못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공생애 동안 행하신 일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 하나는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사람들에게 알려주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에 보면, 마지막 유월절 식사 자리에서 예수님과 제자들이 주고받은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고 하셨을 때, 도마가 말하기를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빌립이 나서서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과 같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 수 있습니다. 구약 시대의 선지자들도 하나님에 대하여 알려주었지만 부분적인 것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때가 되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 아버지에 대하여 올바로 알려주셨습니다. 이에 대하여 요한복음 1장 18절에 이르기를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 곧 성자 하나님이십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신 사실을 이 같이 언급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여기 언급한 “말씀”은 곧 창조의 근본이신 말씀을 의미합니다. 이 ‘말씀’은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성자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 아버지에 대하여 올바로 알려주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자비롭고 긍휼이 많으신 모습을 대하면서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 같은 분이시구나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를 위해 자기 목숨을 아낌없이 희생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면서 우리는 범죄한 인생들을 한없이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지혜로우신 말씀을 대하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를 발견합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이 넘는 무리를 배불리 먹이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고, 바다의 노한 풍랑을 잠잠케 하시며,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죽음에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대하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탕자의 비유나 잃은 양의 비유는 불쌍한 죄인들을 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얼마나 큰가를 말해 줍니다. 그러므로 성도님들께서는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하신 말씀을 명심하시고 성경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깊이 탐구하셔서 하나님 아버지를 더 깊이 알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들의 유일한 중보자이십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하신 주님의 말씀은, 예수님이 유일하신 구주이신 것을 증언합니다.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가 계신 천국에 들어가서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천국은 아무나 들어갈 수 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신 대로, 예수 그리스도만 천국에 이르는 길입니다.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잠 14:12)하신 말씀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다 사망의 길에 불과합니다.

석가모니는 ‘사람이 죽는 것은 숙명(宿命)이므로 묵묵히 받아들이라’고 하였고, 공자는 말하기를 “삶에 대해서도 모르겠거늘 어찌 죽음에 대하여 알겠느냐?”(未知生 焉知死)라고 했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내가 곧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세상 종교들은 산 자의 종교가 아니고 죽은 자의 종교입니다. 불교는 초상집 같고, 유교는 제삿집 같고, 기독교는 잔칫집 같다는 말은 매우 적절한 표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상 종교들은 물에 빠져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 안타까이 발만 구르지만 기독교는 물에 뛰어들어 그 사람을 건져내는 종교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십자가에 달리셔서 보혈을 흘리셨습니다. 다른 종교의 창시자들 가운데 누구 한 사람 죄인들을 대신해서 목숨을 버린 사람이 있습니까? 남에게 교훈을 말하는 것은 쉽지만, 남을 위해 목숨을 희생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공자는 총애하던 제자 안회(顔回)가 죽었을 때에 땅을 치면서 ”하늘이 나를 버리셨구나.“하고 탄식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죽은 나사로의 무덤 앞에 가셔서 무덤의 돌문을 옮겨 놓으라고 하신 후에, ”나사로야, 나오라“고 명하여 그를 살리셨습니다.

종교 가운데서 기독교처럼 죄의 문제를 심각하게 다루는 종교는 없습니다. 성경을 보세요. 창세기로부터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죄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은 책이 하나라도 있는지 찾아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이처럼 죄의 문제를 다루시는 이유는, 죄인들에게 죄를 청산하고 의롭게 되는 길을 알려주시기 위함입니다. 그것은 병을 고치기 위해서 먼저 병의 원인을 밝혀내야 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의사들은 병자를 고치기 전에 먼저 병의 원인을 정확하게 밝혀내는 일부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방법도 마찬가집니다. 먼저, 우리의 죄를 지적하시고 깨닫게 하십니다. 죄의 성격이 얼마나 추악하며 죄를 방치했을 때 얼마나 무서운 결과가 생기는가를 알려 주십니다. 사람은 자기가 병든 것을 알지 못하면 치료를 받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 인생들에게 죄에 감염되어 비참한 운명에 빠져있는 실상을 소상하게 알려줍니다. 그와 동시에, 절망에 몸부림치는 죄인들에게 죄를 해결하고 살 수 있는 길을 제시해 줍니다.

세상 사람들은 비방하기를 “기독교는 편협하다. 종교는 다 같은 것인데 기독교만 구원의 종교라고 하니 너무 배타적이다”라고 비난합니다. 그러나 이 같은 비난은 합당치가 않습니다. 종교는 다 같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어찌 타 종교들의 창시자들에게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훌륭한 성현군자라도 실상은 죄인에 불과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면에서 우리와 같이 되셨으나 죄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범죄한 인류를 구속하기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이 세상에 그 누가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생명을 희생한 사람이 있습니까? 그러므로 그 누구도 예수 그리스도와 동등하게 여길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어떻게 그를 믿는 모든 자들의 죄를 깨끗하게 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의 죄를 대신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대표성의 원리가 적용되었기 때문입니다. 인류의 조상 아담은 모든 인간들을 대표하는 사람입니다. 아담이 있었기에 우리가 존재합니다. 아담 한 사람이 범죄하였는데 모든 사람이 죄인된 것도 아담이 인류의 대표이기 때문입니다. 

이 원리는 구원에도 적용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의 순종하심으로 그를 믿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법에 순종한 것으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은 곧 그를 믿는 모든 자가 그와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은 것을 의미합니다. 아담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하여 그의 후손으로 태어난 모든 사람이 죄인 되었듯이, 이제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의 순종하심으로 인하여 그를 믿는 모든 사람이 의인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성도들은 이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단순히 윤리적인 생활을 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윤리적인 생활이 목적이라면 타종교도 얼마든지 그 일을 감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불교의 자비를 실천하고, 유교의 삼강오륜을 비롯한 도덕률을 실천한다면 이 사회가 살기 좋은 곳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기독교가 윤리를 무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가르치는 종교가 기독교 말고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도덕을 가르치는 것이 기독교의 본래의 목적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영혼의 구원을 위한 종교입니다. 구원은 한갓 이론이 아니고 실질적인 것입니다. 그것은 부도덕한 사람이 도덕적인 사람으로 되는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경험하는 변화는 외형적인 변화가 아니고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하신 것처럼 내면적이고 본질적인 변화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죄인이 의인되고, 죄의 종이었던 사람이 의의 종이 되고, 마귀의 종이었던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지옥 백성이 천국 백성이 됩니다. 그러니까 구원은 존재의 변화와 신분과 소속의 변화를 다 포함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만찬 의식을 행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살을 먹고 그 피를 마시는 의식입니다. 주님의 피를 마시고 살을 먹는다는 것은 곧 주님께서 우리의 살과 피가 되신다는 뜻입니다. 육신의 피와 살이 되신다는 뜻이 아니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이 되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요 6:54-57)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것처럼 복된 일은 달리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오늘 본문에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일컬어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라고 하였습니다. 그것도 한 분이신 중보라고 하였습니다. 중보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서서 두 편을 화해시키는 사람을 말합니다. 하나님과 원수된 죄인들을 하나님과 화해시킬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님들께서는 인류의 유일한 구세주시요 중보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올바로 알고 믿게 된 이 사실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뿐 아니라 아직도 세상에서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이 구원의 진리를 전하는데 힘쓰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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