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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께서 이루신 것을 앎이니라 (느 6: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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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이루신 것을 앎이니라 (느 6:15-19)


구약성경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갔다 돌아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세 차례 포로귀환이 있었습니다. 

1차 포로귀환은 스룹바벨의 인도 하에 이루어졌습니다. 이 때 주요사건은 성전을 재건하는 일이었습니다. 2차 포로귀환은 에스라의 인도 하에 이루어졌습니다. 이 때 주요사건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 재건을 이루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3차 포로귀환은 느헤미아의 인도 하에 이루어졌습니다. 이 때 주요사건은 무너진 성벽을 재건하는 일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3차 포로귀환 때 있었던 일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느헤미야의 인도 하에 성벽 재건이 마무리 되었습니다. 느헤미야가 성벽 재건을 마무리한 후 나름대로 소감을 밝히고 있습니다.

첫째, 성벽재건이 52일 만에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본문 15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성벽 역사가 오십이 일 만인 엘룰월 이십오일에 끝나매” 성벽 역사가 52일 만에 끝이 났다는 것입니다. 이 일을 지휘했던 느헤미야조차도 놀라움을 표하는 말입니다.

당시 자료를 찾아보면 예루살렘 성벽은 무너진 채로 150여년을 방치된 채로 있었습니다. 무너진 성벽을 재건하는 일은 어찌 보면 새로 쌓는 것보다 힘든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전체 길이가 약 3 킬로 정도나 되었습니다. 이것은 결코 작지 않은 규모였습니다. 
그런데 이 큰 역사를 불과 52일 만에 끝을 냈다는 것입니다. 단 기간 내에 전격적으로 끝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직접 이 일을 지휘했음에도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실 이 엄청난 역사를 이토록 전격적으로 이룰 수 있었던 것은 백성들이 하나로 뭉쳤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하나로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느 2:18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또 그들에게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신 일과 왕이 내게 이른 말씀을 전하였더니 그들의 말이 일어나 건축하자 하고 모두 힘을 내어 이 선한 일을 하려 하매” 느헤미야가 성벽 건축의 비전을 제시하고 그동안 하나님께서 어떻게 인도해 오셨는지를 설명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설명을 듣고 마음을 모았다는 것입니다. 힘을 모았다는 것입니다.

3장을 보면 성전건축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이름이 셀 수 없이 많이 나옵니다. 그리고 저들이 단지 몸으로만 수고한 것이 아니고 기꺼이 재물도 바쳐서 성벽 재건에 참여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토록 성벽 재건을 전격적으로 이루어 낼 수 있었던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혼연일체를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가 되어 기꺼이 사랑의 수고를 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성원들이 하나를 이룬 공동체는 놀라운 역사를 일으킵니다. 그러나 구성원들이 하나를 이루지 못하는 공동체는 결코 그 어떤 일도 이루어내지 못합니다.

바다 거북이는 산란기가 되면 모래사장으로 올라와 알을 낳습니다. 먼저 모래 구덩이를 팝니다. 그리고 그 구덩이에 약 500여개의 알을 낳고 모래로 덮습니다. 알에서 부화한 새끼 거북이들은 그 육중한 모래 더미를 빠져나오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새끼 거북이들이 협력을 합니다. 맨 위쪽에 있는 새끼 거북이들은 머리 위의 모래를 걷어냅니다. 옆쪽에 있는 새끼 거북이들은 계속 벽을 허뭅니다. 그리고 아래에 있는 새끼 거북이들은 무너져 내린 모래를 밟아서 다진답니다. 이러면서 육중한 모래 더미를 빠져 나옵니다.

그런데 그 반대도 있습니다. 게입니다. 독 속에 게를 넣어두면 한 마리 한 마리는 기어서 독 밖으로 나올 수 있는 역량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 마리를 함께 넣어두면 한 마리도 기어 나오지 못한 답니다. 왜냐하면 한 마리가 기어 나오려 하면 다른 게가 뒷다리를 물고 늘어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공동체가 새끼 거북이들의 모임과 같은 공동체가 될 것인가 아니면 독 안의 게들의 모임과 같은 공동체가 될 것인가 생각해야 합니다. 

사실 우리 주변에는 독 안의 게들의 모임과 같은 공동체들이 더 많습니다. 내분 때문에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들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공동체가 많습니다. 그 공동체 안에 게와 같은 사람들이 많은 공동체들이 있습니다. 서로 헐뜯고 서로 끌어내리려는 사람들이 있는 공동체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 공동체가 새끼 거북이들의 모임과 같이 서로 협력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새끼 거북이들과 같이 협력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면 하나를 이루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엡 4:3-4를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우리가 하나를 이루려면 우선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하나의 소망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부부를 맺어주시면서 하나 되기를 바라십니다. 교회를 세우시고 성도들이 하나가 되기를 바라십니다. 

그 뿐 아니라 성령께서 하나 되게 역사하고 계시다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를 이루려고 애쓰는 것은 성령의 역사에 동참하고 있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 되는 일을 가로막는다면 성령의 역사를 거스르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공동체 안에서 하나를 이루는 일에 앞 장 서야 합니다. 그래서 성벽 재건이 52일 만에 전격적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하나님의 역사가 일사분란하게 이루어지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둘째, 집요한 방해를 이겨냈다는 것입니다.

본문 16절 앞부분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대적과 주위에 있는 이방 족속들이...” 느헤미야의 지휘 하에 성벽 재건공사가 진행되는 중에 집요하고도 지속적인 방해가 있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느헤미야의 성벽 재건을 가장 앞 장 서서 방해했던 사람은 산발랏이라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당시 사마리아 지역을 통치하도록 파송되었던 총독이었습니다. 그런데 느헤미야가 유다 지역의 총독으로 부임하자 자기의 통치 지역이 축소되고 또 위축될 것이 염려되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성벽 재건을 반대했습니다.

이 산발랏은 휘하에 도비야와 게셈 같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산발랏은 이 도비야와 게셈 같은 사람을 예루살렘 성벽 재건 현장에 보내 방해공작을 폈습니다.
특히 본문 6장 앞부분을 보면 저들이 어떻게 방해 공작을 했는지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1-4절을 보면 느헤미야를 죽이려는 음모를 꾸몄습니다. 5-9을 보면 느헤미야를 역적으로 몰려는 음모를 꾸몄습니다. 그리고 10-14을 보면 거짓 선지자의 잘못된 예언으로 느헤미야를 죄의 수렁에 빠뜨리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더 놀라운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17-18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 때에 유다의 귀족들이 여러 번 도비야에게 편지하였고, 도비야의 편지도 그들에게 이르렀으니, 도비야는 아라의 아들 스가냐의 사위가 되었고, 도비야의 아들 여호하난도 베레갸의 아들 므술람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으므로, 유다에서 그와 동맹한 자가 많음이라”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 내부에 적들과 내통하는 자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특히 산발랏의 하수인으로 방해공작의 행동대장격인 도비야가 이스라엘 내부에 여러 사람들과 내통하며 방해 작업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스가냐입니다. 이 사람은 아라의 아들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아라는 1차 포로귀환 때 스룹바벨을 도와 중요한 역할을 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스가냐는 당시 유대 귀족  가문 출신의 유력한 인물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앞에 3:29을 보면 동문지기였고, 그의 아들은 성벽 재건에 참여하기도 했던 사람입니다. 도비야는 바로 이 스가냐의 사위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유다 귀족 사회의 유력한 인물은 무술람입니다. 도비야는 이 무술람과 사돈을 맺었습니다. 그리고 그 외에 많은 유다 귀족들 가운데 이 도비야와 이런 저런 연유로 동맹을 맺었습니다.
이렇게 유다 귀족 사회에 겉으로는 성벽 재건을 찬성하고 협력하면서도 속으로는 적들과 내통하고 동맹을 맺어 방해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저들이 느헤미야에게 도비야가 좋은 사람이라고 말하고 도비야의 말을 듣도록 권했습니다. 그래서 느헤미야에게 사태를 잘못 판단하여 두려워 떨게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느헤미야는 이렇게 안팎으로 방해공작에 시달렸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이런 방해공작을 잘 극복하고 결국 성벽 재건을 완수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느헤미야는 어떻게 이런 방해공작을 이길 수 있었을까요? 우선 기도입니다. 느헤미야는 9절을 보면 “이제 내 손을 힘 있게 하옵소서”라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14절을 보면 “내 하나님이여 도비야와 산발랏과 여선지 노아다와 그 남은 선지자들 곧 나를 두렵게 하고자 한 자들의 소행을 기억하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대적들과 싸우는 방법도 달라야 합니다. 대적들과 직접 맞서 싸우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우선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며 이 싸움을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다음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나가 싸우라 하시면 그 때 싸우고 기다리라시면 기다리면 됩니다. 왜냐하면 이 싸움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창 32장을 보면 야곱이 형 에서와 만나는 이야기가 기록되어있습니다. 야곱이 고향으로 돌아오는 도중 형을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소식을 들어보니 형이 사백 명을 이끌고 야곱을 만나러 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야곱이 그 소식을 듣고 두려워 떨기 시작합니다. 이제 형과의 한판 싸움이 벌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때 야곱이 한 일이 기도입니다. 우선 1차 기도를 드립니다. 이전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을 붙잡고 기도를 드립니다. “내가 반드시 네게 은혜를 베풀어 네 씨로 바다의 셀 수 없는 모래와 같이 많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그리고 2차 기도를 연이어 드립니다. 이 때 저 유명한 얍복강 기도를 드립니다. 밤새도록 처절한 기도를 드립니다. 천사와 씨름했습니다. 허벅지 관절이 어긋나도록 기도했습니다. 이 때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과 싸워 이겼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우리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대적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우리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난제를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두려워 떨 때가 있습니다. 

이 때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이 싸움은 우리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우리가 그 대적과 싸워 이길 수 없고, 우리가 그 문제와 씨름하여 해결할 수 없습니다. 빨리 이점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허벅지 관절이 어긋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스라엘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응답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그 대적과의 싸움을 이길 수 있습니다.

많은 경우 기도를 하되 어정쩡하게 합니다. 그리고 대적과도 어설프게 싸웁니다. 그래서 기도한 것도 아니고 전적으로 그 문제와 씨름한 것도 아닌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우선 하나님께 맡기고 전적으로 기도에 매달려 보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말씀을 들을 때까지 기도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제 됐다!’라는 기도의 응답을 들을 때까지 기도해 보시기 바랍니다.

셋째, 하나님께서 이 역사를 이루셨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본문 16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들이 우리 하나님께서 이 역사를 이루신 것을 앎이니라” 느헤미야가 성벽 재건을 완공한 후 대적들의 반응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두려워 떨고 또 낙담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두려워 떨고 낙담한 이유를 살펴보니 이 모든 일이 다 하나님의 역사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느헤미야는 대적들의 반응 속에서 저들이 하나님께서 이 역사를 이루셨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런데 느헤미야가 이점을 발견했다고 기록하고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느헤미야가 먼저 이 점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느헤미야는 성벽 재건 공사는 지가들만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하나가 되기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그 막대한 경비를 마련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대적들의 집요한 방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52일 만에 전격적으로 이 모든 일을 끝낼 수 있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하나님께서 친히 역사하셨기 때문입니다. 느헤미야는 이 점을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점을 대적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이 놀라운 일을 총 지휘한 사람이라면 자기를 드러내고 싶어 했을 것입니다. 그동안 자기가 했던 일을 자랑하고 싶어 했을 것입니다. 남들이 알지 못하는 뒷이야기를 공개하면서 그 과정 속에 자기의 공을 은연중에라도 나타내고 싶어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달랐습니다. 오직 하나님 한 분만 자랑했습니다. ‘나의 마음을 감동하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왕의 마음을 움직여 이 모든 일을 허락하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대적들의 음모를 무산시켜주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어주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공사 도중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해 주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립니다.’

역대 음악가 중 가장 겸손한 사람을 꼽으라면 하이든을 들게 됩니다. 그의 자서전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 모든 찬양을 드린다. 왜냐하면 너의 모든 것이 오직 그에게서 왔기 때문이다.”

그가 런던 여행 도중에 헨델의 메시야를 보고 감동을 받아 오라토리오 천지창조를 작곡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매일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 작품을 완성할 수 있는 힘을 주십시오” 하나님의 은혜로 이 작품이 완성되어 1808년 3월 27일 연주회가 열렸습니다. 음악이 끝나고 청중들이 열광적으로 환호하자 하이든은 두 손을 하늘을 향하여 높이 들고 말했습니다. "나에게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저 위로부터 모든 것이 나왔습니다.“

하이든은 그가 작곡한 악보의 첫머리에는 ‘In Nomini Jesu’(예수의 이름으로)란 문구를, 끝부분에는 ‘Soli Deo Gloria’(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하여)란 문구를 써 넣었다.

우리에게 이런 태도가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이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를 감추고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릴 수 있어야 합니다.

시 115:1을 보면 시인은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오직 주는 인자하시고 진실하시므로 주의 이름에만 영광을 돌리소서”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보이지 않는 손길로 놀라운 역사를 이루시고 계십니다. 때로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역사를 이루십니다. 때로는 우리가 기도하지 않았을 지라도 역사하십니다. 우리가 이 점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느헤미야처럼 이 점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 한 일을 드러내거나 내 이름을 높이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모든 영광을 돌릴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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