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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버려진 나를 찾아오신 예수님 (눅 15: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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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버려진 나를 찾아오신 예수님 (눅 15:1-10)  

우리교회는 10월 마지막 주일에 10. 27일에 새생명축제를 가지려고 합니다. 이 새생명축제는 이름 그대로 새로운 생명을 초청하여 가지는 천국잔치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성도이기에, 일 년 내내 전도하라는 말씀, 당연한 말씀이지만, 우리는 9월과 10월 두달 동안 전심전력을 기울여 전도에 힘쓰려고 합니다.

이번 새생명축제에는 한 번도 교회라는 곳에는 발걸음을 들여놓지 못하신 초신자들을 모시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전에 교회에 다니시다가 낙심하셨거나, 잠시 쉬고 계시는 분들, 잃어버린 교인들을 찾아 모시고 나와야겠습니다. 우리의 전도는 진실한 전도, 성실한 만남, 성경적인 전도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거짓말도 하면서 전도하는 이단사이비 집단이 아니라, 한 영혼을 불쌍히 여기고 긍휼히 보는 목자의 심정으로 잃어버려진 영혼을 찾아야 합니다.

한 영혼을 되찾아오는 것은 영적인 전쟁입니다. 악한 사탄-마귀가 자기의 수하에 있는 사람을 쉽게 내어주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위해선 우리 교회가 먼저 영적인 능력을 회복해야 합니다. 오늘의 많은 교회들이 영적인 기억상실증에 걸려 있고, 메마른 종교집단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습관적으로 모였다 흩어지는 교회가 되었고, 영력이 식어지고 화석화되어가고 있습니다.

한번은 예수님이 말씀하기를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하시면서 한 비유를 말씀했습니다.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하겠는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물을 불러 말합니다.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마11:17)라고 하셨습니다. 강단에서 성도들을 향하여 피리를 불면 성도들은 춤을 추어야하고, 이 앞에서 슬피 운다면 성도들은 가슴을 쳐야 하는데, 전혀 반응이 없습니다. 반응이 없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참 좋은 말씀이지만, 듣지 않은 것으로 하겠다, 다음에 기회가 오면 생각해보겠다’고 합니다.

우리 주님은 계속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세례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으니, 유대인들을 그가 귀신이 들렸다고 하였고, 인자가 와서 먹고 마시니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하였다”고 놀려대었으며, 조롱하고 멸시하였습니다. 설교 중에 가장 힘든 설교가 전도하라는 설교가 되었습니다. 먼저 영혼을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전도하십시오.

우리의 신앙은 물댄 동산 같아야 하고, 물이 끊어지지 않는 샘 같아야 하는데, 예레미야 시대처럼 사람들은 생수의 근원되신 하나님을 버렸고, 스스로 웅덩이를 파고 있는데, 물을 가두지 못하는 터진 웅덩이였습니다. (렘2:13)

사58:11에는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메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 네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항상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사람들, 모두 다 메마르다고 하지만, 우리의 영혼은 만족을 누리며, 우리의 육신은 항상 건강하며, 우리의 영혼과 마음과 육체는 마치 물댄 동산 같으며, 물이 끊어지지 않는 샘물과 같습니다.

저는 기도합니다. 우리 교회로, 우리 영주교회가 영적인 흡인력이 있는 교회, 구태의 재현이 아니고, 매너리즘에 빠지고 타다 남은 재와 같은 사역이 아니라, 복음의 감격과 영광을 위하여 타오르는 불꽃이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찬송의 감격이 있고, 기도의 영력이 있고, 말씀의 능력이 있고, 살아 있는 신앙,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서 죽은 신앙이 아니라, 살아 있는 신앙이어야 합니다. 우리 시대에 영적인 감동, 환희, 만족을 주는 사역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매주일 성산에 올라가는 심정으로, 주님을 만나는 감격이 넘쳐야겠습니다.

전도하는 교회, 영혼을 구원하는 교회는 험한 파도를 헤치면서 천국을 향하여 달려가는 항해하는 배와 같습니다. 바다에 나간 배, 항구에 정박하고 있는 배가 아니라, 망망대해를 향하여 돌진하는 배와 같아야 합니다. 배라고 하면 항해하는 배를 진정한 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항구에 정박하고 있으면 우선 안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정박한 배는 잠시 하역을 위하여 타고 내리기 위하여 잠시 머무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너무나 오랫동안 정박하고 있으면 배의 구실을 못하는 고장 난 배에 불과합니다.

H. L. 웨이런(Waylan)은 이런 말을 하였다고 합니다. “나는 지난주에 과거 4,000년 동안 한 번도 잘못을 범하지 않은 사람을 만났다. 그는 대영제국 박물관에 있는 미라였다” 고 했습니다. 미라가 무엇입니까? 죽은 몸을 썩지 않게 방부제로 처리하여 말려 보존하는 시신입니다. 우리는 살아있는 사람이지, 죽은 미라가 아닙니다. 우리는 미라처럼 존재만을 위한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나의 신앙이 지금 화석화되어가고 미라처럼 말라버린 신앙은 아닌지 점검해보고, 영혼을 살려야 합니다. 창조적인 사역을 위해서는 영적회복이 필요합니다.

  네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영적 회복이 필수적입니다. 나에게 자력이 없는데, 어떻게 쇠붙이가 붙어올 수 있습니까? 사람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무서운 영적인 힘이 끌어당기는 것을 느낄 때에, 한 영혼이 주님께로 나올 수 있습니다.

영적 회복은 내가 이루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성령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간절히 믿고 사모할 때에, 나를 사용하셔서 복음의 나팔이 되게 하시고, 용광로의 불쏘시개로 사용하십니다.

  비행기가 비행하는 동안 가장 많은 연료를 소모하는 때는 이륙하는 순간이라고 합니다. 과장된 표현이라고 하지만, 연료의 거의 절반 정도를 이륙할 때에 소모한다고 합니다. 일단 어느 고도에 오르면 연료를 많이 소모하지 않아도 비행할 수 있다고 합니다. 

우리 사역에도 이와 비슷한 것을 느껴봅니다. 우리의 사역이 이륙하고 하늘로 떠오르기 위하여 사력을 다해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역량을 총동원해야 합니다. 각 분야에서 목회자는 목회자로서, 장로님들은 당회에서, 평신도들은 소그룹에서 각 남녀선교회에서 찬양대, 교사로서 새생명축제를 위하여 이륙할 수 있도록 힘을 집결하고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할 수 있도록 복음을 들고 나가야겠습니다. 

목회자와 장로님들은 인격의 깊이를 더하고, 신뢰받은 교회가 되도록 힘써야 합니다. 각 소그룹에서는 영혼구원을 위하여 기도하고, 남녀선교회도 전도를 위한 체제로 탈바꿈해야 합니다. 우리는 어떤 영혼도 수용할 수 있는 큰 그릇이 되어야 합니다. 불신자들이 쉽게 친숙해지고 동화될 수 있는 현대 문화를 수용해야 합니다. 사역의 에너지가 흩어지지 않고 초점을 향하여 모아질 수 있어야 합니다.

볼록 렌즈에 비쳐진 햇빛이 그 초점이 모아지면 불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값 주고 사신 교회입니다. 건강한 교회, 구원받은 감격과 확신이 넘치는 교회, 미래가 있고, 꿈이 있고, 창의적인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자신의 은사를 가지고 주님의 몸인 교회를 섬기고 살리는 역사, 받은 은사대로 섬기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제자 훈련할 때에 파레토의 법칙이라는 것을 배웁니다. 이탈리아 경제학자 빌프레도 파레토(Vilfredo Pareto)는 연구하는 시간 외는 밭에서 농작물 재배하는 것이 소일거리였습니다. 어느 날 그는 자신이 키우는 완두콩의 전체 80%가 불과 20%의 콩깍지에서 열린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파레토는 생각을 거듭한 끝에, 이 법칙이 인간 사회의 거의 모든 현상에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독창적인 이론을 완성하게 되었습니다.

가령 국가 전체 토지의 80%는 인구의 20%가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걸려오는 전화의 80%는 자주 전화하는 20%의 사람에게서 걸려오고 있었습니다. 회사의 총수익 중 80%는 20%의 주력 상품에서 나오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 법칙에 '80대 20의 법칙'이란 이름을 붙였는데, 사람들은 그의 이름을 따서 '파레토 법칙'으로 부르기를 더 좋아했습니다. 파레토의 법칙, 8020의 법칙이라고 합니다.

교회에서도 이 파레토의 법칙이 적용되고 있었습니다. 담임목사의 80%의 에너지를 20%의 교인들에게 쏟고 있었습니다. 목회자의 남은 20%의 에너지를 나머지 80%의 교인들에게 미치고 있습니다. 교회의 중요한 사역의 80%는 교인들 중의 20%의 성도들이 감당해주고 있었습니다. 교회의 헌금도 비슷합니다. 헌금의 80%는 교인 20%가 감당해주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파레토의 법칙이 마치 진리처럼 여겨지던 때가 있었습니다. 적어도 인터넷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파레토의 법칙이 진리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2000년 이후에 지금은 롱테일(Long-tail) 법칙이 새롭게 각광을 받기 시작하였습니다. 파레토의 법칙은 무너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기업에서는 공룡의 머리와 같은 20%의 주력 상품을 가지고 80%의 수익을 보장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미디어 인터넷의 영향으로 나머지 80%의 꼬리 부분이 더 중요하게 되었고, 인터넷의 검색 기능으로 머리와 꼬리의 차이를 희미하게 만들고, 다수의 소액구매자들의 80%의 수익이 상위 20%의 수익을 능가하게 되었다는 이론입니다.

지금 목사님이 무엇을 말씀하고 있느냐고 하실 수도 있습니다. 전도 잘하는 상위 20%의 사람들이 전체 등록하는 교인의 80%의 결과를 가져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전도에 관심도 없고, 전혀 힘을 내지 못하던 80%의 성도들이 진정 80%의 결실을 가져와야겠습니다. 우리는 모든 성도들은 내가 참석하고 내가 동참하는 사역에서 큰 역사를 이룬다는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새생명축제, 그래, 전도 잘하는 몇 사람이 감당해주겠지, 우리교회는 상위 20%의 사람들이 80%의 사역을 감당하는 교회라고 하면 그런 교회는 좋은 교회가 아닙니다. 과거지향적인 교회에서는 맞는 이야기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오늘의 우리 교회는 모든 성도들 100%의 동참으로 200%의 좋은 결과를 얻는 교회라고 말할 수 있어야 진정 좋은 교회요 미래지향적인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지상명령을 받고 있습니다.

마28:19-20에서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1:8)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 주님이 마지막으로 부탁하신 유언의 말씀이요, 주님의 지상명령입니다.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유언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마지막 부탁하신 말씀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왕이십니다. 그러면 한 영혼을 구원하라는 말씀은 어명으로 들어야 합니다. 
주님의 지상명령을 수행하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교회에서 신앙생활하는데 있어서 가장 힘들고 부담이 되는 시간은 해마다 후반기에 가지는 새생명축제를 준비하는 기간입니다. 세상에서 위대한 역사에 힘들지 않고, 부담이 되지 않는 일이 어디에 있습니까? 고통을 수반하지 않는 위대한 역사란 있을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항상 힘들고 부담이 되는 것이 전도하는 일입니다. 성도들은 전도라는 말만 들어도 부담이 된다고 합니다. 전도하라는 설교가 듣기 싫어 교회 나오기에 부담이 된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부담이 되지 않는 인생이 어디에 있으며, 부담 없이 듣는 설교는 설교가 아닙니다. 그런 설교가 있다면 만담입니다.

전도를 말할 때에, 어떤 이들은 ‘전도는 우리 평신도의 일이 아니라, 목회자의 사명이라’고 말합니다. ‘전도란 모든 교인이 해야 하지만 특별히 전도의 은사를 가진 사람들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마귀가 가져다주는 부정적인 생각입니다. 나는 전도자로 부름을 받았고, 세움을 받았고, 우리 주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았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 모든 성도들은 예수님을 전파하는 사람들, 예수님을 소개하고, 예수님의 향기를 드러내고, 예수님의 편지로 살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본문의 1-2절에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따르는 사람들 중에는 다양한 계층의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는 세리와 죄인들이 있었습니다.

당시의 세리는 유대인들로부터 버림 받고 멸시와 천대를 받아야 하고 로마의 앞잡이요, 매국노라고 불렀습니다. 당시에 죄인들이라고 부르는 사람들, 땅의 사람들이라고 부르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죄인들이란 당시의 명예스럽지 못한 직업을 가지고 살면 죄인이라는 말을 들어야 했습니다. 이들은 공직에 임용되지 못하였고, 법정에 증인이 될 수 없게 하였습니다. 세리, 목자, 행상인, 피혁장이 같은 사람들은 죄인이라, 땅의 사람들이라고 불렀습니다.

우리 주님이 가시는 곳에는 항상 소외된 사람들, 세리와 죄인들이 따르고 있었습니다. 이들에게 있어 예수는 최후의 소망이요, 자기들을 이해해주는 친구이셨습니다. 당시에 교권자들에게 버림 받은 서민들에게는 예수님의 사랑의 교훈은 생명을 주시는 진리의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세리와 죄인들을 기쁘게 받아주셨고, 그들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인정해주셨습니다.

“여러분, 가운데서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를 가지고 있는데, 그 가운데 한 마리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찾아 다니지 않겠느냐?”고 반문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100마리의 양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들에서 양을 먹이다가 양을 헤아려보니, 한 마리가 보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목자는 자기가 잘못 헤아린 것 같아, 다시 세어보았습니다. 우리에서 나올 때에 분명히 100마리였는데, 한 마리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목자는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잃어버린 양을 찾을 때까지 찾아 다녔습니다. 그는 양을 찾아 기뻐하면서 자기 어깨에 메고 와서 집으로 돌아와서 벗과 이웃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나와 함께 기뻐해주십시오. 파티를 열겠습니다. 잃었던 내 양을 찾았습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주님은 당신을 비난하고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조롱하는 교권자들을 향하여 다시 한 번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또 어떤 여자에게 드라크마 열 닢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하나를 잃었습니다. 여인은 등불을 켜고 온 집안을 쓸고 다니면서 모든 가구를 들추고 찾을 때까지 찾더니 드디어 찾아내었습니다. 여인은 너무나 기쁘고 행복한 얼굴로 그녀의 이웃과 친구들을 불러 “나와 함께 기뻐해주십시오. 잃었던 드라크마를 찾았습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우리 주님은 다시 발걸음을 멈추고 무리를 둘러보시면서 유명한 탕자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한 가지, 한 가지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결론적인 교훈의 말씀을 주신 것이 있습니다. 7절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잃어버린 양을 이야기 하고 있지만, 사실은 잃어버린 한 영혼, 한 사람을 살리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세리와 죄인들,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면서, 회개하고 구원받는 것은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인해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고 하셨습니다.

10절 말씀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도 7절의 말씀과 같은 말씀입니다.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읽지 않았지만, 32절 “그런데 너의 이 아우는 죽었다가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으니, 즐기며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하셨습니다. 아버지는 단호하게 큰 아들에게 말합니다.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으니, 즐기며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셨습니다. 100마리에서 열 드라크마로, 다시 두 형제로, 남은 자는 99마리, 9드라크마, 한 사람, 결국 99마리도 잃어버린 한 영혼입니다.

 저는 살인방조죄라는 것을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죽음으로 치닫고 있는 한 영혼을 그냥 방치하는 것은 살인방조죄에 해당합니다. 의사가 되면서 선서할 때에, 히포크라테스의 선서를 암송하였습니다. “나는 환자의 건강과 생명을 첫째로 생각하겠노라”고 다짐합니다. 그런데 어떤 의사가 한 남자를 진료하고 있었는데, 부인의 막무가내기 식으로 요청하므로 남자 환자를 퇴원시켰습니다. 

그런데 그 환자가 사망하였습니다. 퇴원시킨 의사가 살인방조죄로 입건되어 구속영장이 청구되었습니다. 검찰의 주장인즉 부인의 요청을 묵살하고 치료를 계속했더라면 살릴 수 있는 환자였는데, 퇴원시키므로 죽음에 이르게 하였으니 살인을 방조한 행위라고 합니다. 퇴원을 하면 사망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퇴원시켰으니 죄가 된다고 했습니다. 아니, 퇴원하는 것도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없느냐고 할지 모르지만, 퇴원하면 죽는 것을 뻔히 알고 있는 의사가 부인의 말을 듣고 퇴원시킨 것은 살인방조죄에 해당한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오늘 한 영혼의 죽음, 복음을 듣지 못하고 죽어가는 수많은 영혼에 대한 구령의 열정에 빠져들어야 합니다. 지금 우리 가족 중에 지옥으로 달려가는 형제가 있는데, 그를 구원하지 못하면 우리는 구원을 받아도, 하나님은 수많은 천군천사들 앞에서 살인방조죄를 물으실 것입니다.

빌리그래함 목사님에게 어떤 분이 한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목사님은 어떤 때 가장 영적인 위기를 느끼십니까?” 그때 빌리그래함 목사님은 대답하시길 “저는 많은 곳에 다니면서 수많은 사람을 상대로 복음을 전파하기 때문에 이것으로 전도의 책임을 다 했다고 생각하고, 막상 내 곁에 다가와 만나게 되는 한 사람에게는 복음을 전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들었을 때에, 그것이 나의 가장 커다란 영적 위기라고 생각되었습니다. 내가 수많은 사람들을 전도하는 사람인데 한 사람 정도는 그냥 지나쳐도 되겠지, 이런 생각이 들려고 할 때가 내가 가장 위기를 느끼는 순간이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영적인 위기를 느껴야 합니다.

전도란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증거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상대방을 이해하며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사랑으로 다가가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잃은 영혼을 찾아내야 합니다.

친구 목사님이 둘째 아들을 4살 때에 잃어버렸다가 찾았습니다. 거여동의 아주 조그만 집, 다닥다닥 게딱지처럼 붙어 있는 골목에서 소독차가 연기를 뿜으면서 지나가니까 아이들이 소리치며 따라 갈 때에 휩쓸려 사라졌습니다. 아무리 찾아도 없었습니다. 서너 시간 이 골목 저 골목 미친 듯이 찾았지만 찾을 수가 없어서 하는 수 없이 파출소에 신고하러 갔더니 아, 글쎄 파출소에서 빵 먹고 우유 마시고 놀고 있었습니다.   아이들에게는 당장 마실 우유와 먹을 빵만 있으면 엄마 아빠는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이것이 아이들의 특성입니다. 곧 밤이 올 텐데도 빵과 우유만 있으면 만사 그만인 것이 아이의 모습이고 잃어버린 양의 모습입니다.

사랑이란 감상적이거나 무작정 기다려 보는 정도가 아닙니다. 여러분, 찾아 나서야 진정한 사랑입니다. 자식이 집을 나갔으면 앉아서 기다리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뒷골목을 찾아 나서야 합니다. 사진을 뿌리고, 전단을 만들어 붙이고 찾아 나서야 진정한 사랑입니다. 여러분, 진정으로 화해를 원하고 있습니까? 기다리지 말고, 찾아 만나러 가서 손을 내밀어야 화해입니다. 화해를 기다리면 안 됩니다. 기다리는 화해는 가치가 없습니다. 먼저 찾아 나서고 행동으로 보이고 솔선해야 합니다. 용서하는 것보다 아름다운 것은 없습니다. 먼저 찾아가 보세요, 엄청난 이적이 일어납니다.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길 잃은 것에 대하여 책임을 물었습니까? 원망하셨습니까? 그냥 받아주셨습니다. 우리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나를 위하여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 주시면서 건져 주셨습니다. 나는 잃어버려진 양이었는데, 목자이신 주님이 나를 찾아와 주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사랑으로, 무조건 용서하시는 사랑으로 구원받았습니다. 이제 구원받은 감격을 나누면서 잃어버린 한 영혼을 찾아내어야겠습니다. 이제부터 우리의 관심과 초점은 잃어버린 한 마리와 같은 심령에게 두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영원한 목자이십니다. 그는 찾도록 찾아 나서고 있습니다. 찾은 즉 어깨에 메고 돌아오고 있습니다. 들판에서 기다리는 양들보다 한 마리 때문에 즐겁고 감사하였습니다.

한 마리 잃은 양을 찾았다고 이웃을 불러 잔치하는 교회가 되어야겠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감격스러운 말은 “찾아내었노라”는 말입니다. 찾아 나서고 찾아보아야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나의 잃어버린 영혼을 찾아내었노라”는 말을 외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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