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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용서의 조건 (렘 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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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의 조건 (렘 5:1-9)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그 어떤 보배보다 귀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두 가지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위로와 사랑>입니다. 말씀을 읽으면 위로를 받고 힘과 용기가 생깁니다.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말씀을 붙잡고 승리했습니다. 

몇 해 전 우리 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해 주신 <고 훈 목사님>께서 이런 간증을 하셨습니다. 목사님께서는 젊어서 결핵을 심하게 앓았습니다. 치료를 위해 고향에서 요양할 때 김 집사님이라는 분에게서 성경책 한 권을 선물 받았다고 합니다. 그 집사님은 이북에서 피난을 오신 분인데, 전쟁 중에 오른손을 다쳐 쓰지 못하는 50대 부인이었습니다. <훈아, 네가 살려고 주님께 나왔구나. 

우리는 네가 구원 받도록 많이 기도했다. 한경직, 김창인 목사님 같은 분들도 결핵을 앓았지만, 예수님 믿고 목사 되신 분들이다. 너도 후일 목사 되라고 결핵을 주신 것 같다. 이 성경은 내 보물이다. 이제는 네가 읽고 꼭 목사가 되거라!> 고 목사님은 그 성경을 읽고 또 읽었고, 말씀이 그 분을 변화시켜 목사님이 되셨습니다. 목사님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주님께서 내게 면류관을 두 개 주신다면 하나는 나를 전도한 윤 권사님께, 그리고 하나는 성경을 선물한 김 집사님께 드리겠습니다.> 여러분, 이게 말씀의 능력입니다.
 
우리 교회는 작년부터 모든 교우들이 성경을 같은 순서대로 읽고 묵상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힘을 얻길 바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그 창조의 생명과 능력이 담겨 있습니다. 하루 중 가장 중요한 일이 말씀을 읽는 일과 그 말씀을 붙잡고 기도하는 일이 되길 원합니다. 말씀에 약속된 하나님의 축복과 평강이 모든 교우들에게 충만하길 기원합니다. 

그러나 말씀에는 이와는 상반된 또 하나의 성격이 있습니다. 그것은 말씀이 우리를 <날카롭게 찔러 두렵게 한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읽을 때 찔림을 받습니다. 마음이 괴롭고 두렵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 예리하여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갭니다. 

여러분, 말씀이 두려운 이유는 무엇일까요? 연세대학교 철학과 명예교수이신 <김형석교수>께서는 평생 교육자로 살아오셨는데, 그 분이 제일 처음 경험한 교사 생활은 당신께서 졸업하신 시골 초등학교에서였습니다. 중학교 3년 과정을 마치고 형편상 공부를 계속할 수 없어 잠시 쉬고 있던 중에 학교에서 임시 교사가 되어 달라고 했답니다. 그 때가 16세였습니다.  

그런데 교사가 되고 보니 곤란한 문제가 많았다고 합니다. 어느 날 산수 문제를 숙제로 내면서 <다음 날 나와서 풀게 할 테니 잘 준비해 오라>고 시켰습니다. 그런데 친구가 찾아와 말하길 <난 산수를 잘 못하니 시키지 말아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다음 날 친구는 수업이 다 끝날 때까지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 부터는 김 교수를 어려워하면서 <선생님!>이라고 깍듯이 인사를 하더라는 것입니다. 친구에게 인사를 받는 일이 너무도 어색했다고 합니다. 그 후부터 그 친구는 졸업할 때까지 한 번도 개인적으로 찾아온 적이 없고, 멀리서만 빙빙 돌았다고 합니다. 

그 친구는 왜 수업 시간에 고개를 숙이고 있었겠습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숙제를 해 오지 않아 마음이 찔렸기 때문입니다. 숙제를 다 한 학생은 조금도 기가 죽지 않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 두려움을 가지고, 마음의 불편함을 느끼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우리 뜻대로, 욕망대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따라 산 사람에게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오늘 읽은 말씀은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서 유다 백성을 무섭게 찌르시는 말씀입니다. 9절을 다같이 읽어봅시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어찌 이 일들에 대하여 벌하지 아니하겠으며 내 마음이 이런 나라에 보복하지 않겠느냐>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을 벌하고, 보복하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이 말씀을 받는 백성들의 입장에서 얼마나 두려운 말씀입니까? 

하나님께서 이토록 두려운 말씀을 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왜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런 책망을 받기에 이른 것일까요? 그 이유는 백성들 중에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을 찾으셨습니까? 1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다니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 아멘!  하나님께서는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사람>을 찾으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의 언약을 마음이 품고 사는 사람>,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원리로 사는 사람>을 찾으셨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그런 사람들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많은 수의 사람을 찾으시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한 사람을 찾으셨습니다.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여기 <한 사람>이란 딱 한 사람을 말한다기보다는 <많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유다 백성 중에, 그것도 거룩한 도시라고 자부하던 예루살렘에 그런 사람들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마치 창세기 18장에서 보는 대로 <소돔과 고모라에서 의인 열 명만 있어도 멸망시키지 않겠다>는 말씀과 흡사합니다. 그러나 소돔성에 의인 열 명이 없어 유황불에 멸망한 것처럼, 유다에도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유다에, 예루살렘에 어떻게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사람이 없었습니까? 예루살렘에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종교도 없고, 하나님께 대한 제사도 없었습니까? 

아닙니다. 이런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 종교도, 제사도 없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모든 것이 다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는 하나님을 위한 성전이 서 있었고, 그 곳은 제사장으로 넘쳐났습니다. 날마다 제사도 드렸고, 그 곳에는 입만 열면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모두 거짓이라는 데 있었습니다. 2절을 보세요. <그들이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할지라도 실상은 거짓 맹세니라>  문제는 바로 여기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여호와 중심으로 했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했고, 하나님을 입에 달고 살았지만, 그 모든 것이 거짓이요, 형식뿐이었습니다. 입으로는 여호와를 불렀지만, 마음은 멀었습니다. 

이것은 백성들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다는 증거였습니다. 정말 하나님께서 살아계신다고 생각한다면, 정말 하나님을 믿는다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고, 거짓을 행하거나 악을 저지르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에 하나님을 향한 참 믿음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일들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들은 차라리 <난 하나님께서 누군지 모릅니다. 난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보다 더 악합니다. 그들은 위선과 거짓까지 더해진 불신앙의 죄를 짓고 있었습니다. 

이런 이들의 영적 상태는 어떠했습니까? 3-4절을 보세요. <여호와여 주의 눈이 진리를 찾지 아니하시나이까 주께서 그들을 치셨을지라도 그들이 아픈 줄을 알지 못하며 그들을 멸하셨을지라도 그들이 징계를 받지 아니하고 그들의 얼굴을 바위보다 굳게 하여 돌아오기를 싫어하므로 내가 말하기를 이 무리는 비천하고 어리석은 것뿐이라 여호와의 길, 자기 하나님의 법을 알지 못하니>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눈은 진리를 찾고 있는데, 그들은 하나님께서 치셔도 아픈 줄을 몰랐습니다. 이미 마비되어 깨닫지 못하는 것을 말씀합니다. 꾸중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돌아오길 싫어했습니다. 이들은 비천하고 어리석다고 했습니다. 여기 <비천함>은 경제적 가난을 말하는 게 아니라, 영적 빈곤을 포함한 총체적 빈곤을 말합니다. <어리석음>은 지식이 없음을 말하는 게 아니라, 마땅히 깨달아야 할 것을 깨닫지 못하는 모습을 말씀합니다. 

예레미야가 말씀을 전하던 이 때는 이미 하나님을 떠난 북 왕국 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망한 지 오래였습니다. 다음 차례는 유다였고, 이미 바벨론의 발톱이 거의 가까이 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별 일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실 리가 없다. 우리는 평안할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그러면서 온갖 죄악 중에 그대로 빠져 있었습니다. 

철학자 <파스칼 >의 말 중에 <그는 강 저편에 살았다!>는 경구가 있습니다. 이 말은 <나는 강 이편에서 살고 그는 강 저편에 살았기 때문에, 난 좋은 사람이고 그는 나쁜 사람>이란 말입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오늘 이 말씀을 읽는 우리는 강 이편에 사는 좋은 사람들이고, 예레미야 당시의 유다 백성들은 강 저편에 사는 나쁜 사람들입니까? 오늘 이 말씀이 예레미야 시대의 한심한 사람들의 이야기이고, 오늘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게 말하기에는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너무도 부끄럽습니다. 예레미야 시대의 모습이 오늘 우리에게서도 그대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현재 별 위기의식이 없는 것 같습니다. 주일이면 와서 예배하고,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그런 대로 잘 살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정말 그런 것일까요? 

개구리가 솥 안에서 죽는 이유를 아시지요? 개구리가 들어가 있는 솥에 갑자기 뜨거운 물을 부으면 개구리는 당장에 뛰쳐나갑니다. 그러나 조금씩 밑에서 불을 때어 불이 서서히 더워지게 하면 개구리는 자신이 익어가는 것을 모릅니다. 마비되어 느끼질 못합니다. 뜨거움을 느꼈을 때는 이미 익어 뛰어 나갈 수 없게 됩니다. 마치 가랑비에 옷이 젖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 우리가 그렇습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영적 힘을 잃어 쳐지고 있습니다. 언제 영적 능력을 잃었는지도 잘 모릅니다. 
인생에 조금만 어려운 일이 있어도 나가떨어집니다. 별 것도 아닌 일이나 말에 마음 상하고 주저앉는 것은 영적 체질이 약해진 증거입니다. 건강한 사람은 좀 상한 밥을 먹어도 끄떡없습니다. 그러나 체질이 약한 사람은 이제 새로 한 밥을 먹어도 배앓이를 합니다. 

기도가 중단된 지가 오래지만 위기의식이 없습니다. 말씀 앞에 진실하지 못합니다. 
<주여! 주여!> 라고 이름만 부르는 것으로는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잘 알지 못합니다. 주일에는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고 평일에는 점집을 찾아가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기도는 기도대로 하고 생활은 생활대로 합니다. 기도한 대로 믿고 적용하면서 살아야 하는데, 그렇지를 못합니다. 

성령의 역사를 경험하지 못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교회 봉사도 열심히 하지만, 기쁨도 없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도 없는 이들이 있습니다. 마치 땅을 팔아 구제 헌금을 바쳤지만, 그 안에 거짓이 가득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받은 <아나니아>와 <삽비라>와 흡사한 이들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위해 섬기지 않고, 자신의 영광을 위해 섬기는 이들이 많습니다. 

이러다 보니 그리스도인들이 사회의 빛이 되지 못합니다. 정직을 말하는 사람은 많지만 정직하게 살지는 않습니다. 세상의 소금이 되자고 말은 하지만, 이미 맛을 잃은 소금과 같습니다. 

이런 현상은 지도자들로부터 시작되고 있습니다. 언제나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은 게 아니겠습니까?  5절을 보세요. <내가 지도자들에게 가서 그들에게 말하리라 그들은 여호와의 길, 자기 하나님의 법을 안다 하였더니 그들도 일제히 멍에를 꺾고 결박을 끊은지라>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여호와의 길을 안다고 큰 소리를 치면서도 그 말씀은 버렸습니다. 마치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처럼 알기는 잘 알지만, 행하지는 않습니다. 이러다보니 지도자들로부터 모든 사람들이 영적으로 패배자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들이 능력을 잃고, 기쁨을 잃었습니다. 성도들은 하나님께 매달리지 않습니다. 열정이 식었습니다. 미국과 유럽의 교회들이 이런 과정을 거쳐 오늘날 쇠퇴하고 있습니다. 교회에 노인들만 남았습니다. 힘을 잃었습니다. 

여러분, 이런 우리에게 주어지는 진노는 무엇입니까? 7절 앞을 보세요. <내가 어찌 너를 용서하겠느냐?>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구할 수 없는 처지에 떨어지는 것뿐입니다. 

여러분, 다시 하나님의 용서를 받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요구는 분명합니다. 다시 부흥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흥되어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사람이 되는 것이야말로 용서를 받는 조건입니다. 

산업혁명이 한창이던 18세기 영국은 매우 부패하였습니다. 산업화로 인한 인구의 도시 집중은 빈부 격차와 함께 온갖 범죄와 타락을 불러왔습니다. 그 때 한 사람, <존 웨슬리>가 있었습니다. 그는 목사의 아들이었고, 옥스퍼드 대학 출신으로서, 신대륙에 선교사로 다녀오기까지 했지만, 아직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1738년 5월 24일 한 가정집 집회에서 깨지고 변화되었습니다. 그 날 그의 일기장 내용은 이렇습니다. <그날 저녁 아는 마지못해 올더스게이트 거리의 한 가정에서 모이는 집회에 나갔더니 어떤 사람이 루터의 로마서 주석을 읽어내려고 있었다.

9시 15분전 쯤, 그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을 통해 우리에게 일으키시는 변화를 설명할 때 내 마음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구원을 위해 오직 한 분 그리스도만을 의지한다고 느꼈으며, 그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죄를 없애시고 죄와 죽음의 법에서 구원하셨다는 확실한 증거를 받았다.> 이 순간은 웨슬리 속에 부흥이 일어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 후부터 웨슬리로 인해 영국 사회가 변화되었습니다. 한 사람의 부흥이 온 나라의 부흥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영적으로 부흥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선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말씀 앞에 앉으십시오. 전에도 읽어드린 적이 있는 <고 하용조 목사님>의 글 일부를 읽어드리겠습니다. <위대한 사람 옆에 서 있다고 저절로 위대해지지 않습니다. 배부른 사람 옆에 있다고 배부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십시오. 말씀을 따라다니십시오.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교회나 목사를 따라다니지 마십시오. 사람을 따라다니면 얻는 것은 실망과 상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좇으십시오.> 

아울러 하나님께 기도의 무릎을 꿇으시길 바랍니다. 어제 아침 영도기독교연합의 목회자들이 모였습니다. 그 자리에서 저는 영도지역 교회들이 먼저 일어나자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를 위해 교회들이 연합으로 대대적인 기도운동을 전개하고자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 보다 이 일에 앞선 지역을 방문하기로 했습니다. 여러분 기도하시고, 부르짖으시길 바랍니다. 

열심을 내십시오. 할 수 있습니다. 엎드리십시오. 할 수 있습니다. 새벽기도회에 나오십시오. 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없는 게 문제입니다. 전도하십시오.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 진정으로 위로가 되는 진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부흥을 정말 원하시는 분은 다름 아닌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 영을 주실 것입니다. 부흥은 인간의 결단만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됩니다. 

예레미야 33장 3절에서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할렐루야!  <크고 은밀한 일>이 무엇입니까? 

이어지는 33장 6절-8절을 보면 <....보라 내가 이 성읍을 치료하며 고쳐 낫게 하고 평안과 진실이 풍성함을 그들에게 나타낼 것이며  내가 유다의 포로와 이스라엘의 포로를 돌아오게 하여 그들을 처음과 같이 세울 것이며  내가 그들을 내게 범한 그 모든 죄악에서 정하게 하며 그들이 내게 범하며 행한 모든 죄악을 사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죄악을 사할 것이라>, 용서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켜 용서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부흥을 열망하고 엎드릴 때,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셔서 우리의 심령을 새롭게 하실 것입니다. 인생과 가정을 새롭게 하실 것입니다. 교회를 새롭게 하실 것입니다. 이 가을에 우리 각자가 부흥되길 원합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길 원합니다. 살았다는 이름만 가지는 게 아니라, 실제로 살아있는 능력의 그리스도인들이 되길 원합니다. 예전의 열정을 자랑하는 퇴역 군인이 되지 말고, 모두가 현역이 되어주시길 바랍니다. 다시 힘을 내서 하나님 앞에 일어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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