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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심문 받으시는 예수님 (요 18:12-14, 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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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문 받으시는 예수님 (요 18:12-14, 19-24)


조선시대 황희라는 유명한 정승이 있었습니다. 황희가 어느 날 시골길을 가다 두 마리 소를 몰고 일하는 농부를 만났습니다. 황희는 농부에게 “그 두 마리 소 가운데 검은 소가 일을 잘합니까, 누런 소가 일을 잘합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농부는 침묵을 지켰습니다. 황희가 몇 번씩 물었지만 마찬가지였습니다. 황희는 불쾌한 표정으로 지나갔습니다. 한참 가는데 그 농부가 뒤쫓아 와 말했습니다.
“선비 양반, 아까는 죄송했습니다. 제가 왜 그때 말하지 않았느냐 하면, 아무리 짐승이지만 주인이 누구보다 누가 더 일 잘한다고 해보십시오. 얼마나 섭섭하겠습니까? 그래서 침묵을 지켰습니다. 사실은 검은 소가 일을 더 잘합니다. 누런 소는 꾀를 좀 부려요.” 

이 말은 황희는 크게 깨닫고 그때부터 아랫사람들을 대할 때 함부로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백성의 지도자로서의 대제사장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아닌 두 사람의 대제사장이 등장을 합니다. 이것이 어떻게 된 것일까요? 

대제사장은 일 년에 한 번 속죄일에 지성소에 들어가 백성을 위한 속죄의 피를 법궤 위 시은좌에 올려 드림으로 백성들의 죄를 대속하여 백성들로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역할을 할 뿐 아니라 또한 그들은 하나님의 복을 백성들에게 선언할 권한과 육체의 정결 여부를 판결할 권한을 부여 받았습니다. 더 나아가,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묻는 우림과 둠밈이라는 제비뽑기를 사용하여, 특별한 일들에 대해 여호와께 물어봐야 했습니다. 그만큼 대제사장의 직무는 아주 중요합니다. 

그러기에 대제사장이란 직임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레위 지파 가운데서도 아론의 직계 자손들만이 감당할 수 있도록 위임받은 직분이 바로 제사장이요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대제사장이 되어 죽을 때까지 대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합니다. 그렇다면 대제사장이 두 사람이나 있다고 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먼저 생각할 것은 대제사장들의 속셈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가야바와 안나스라는 두 인물이 등장을 합니다. 그런데 그 두 사람이 다같이 대제사장으로 표현이 되고 있습니다. 실상 한 시대에 두 대제사장이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대제사장직은 종신직이기 때문에 전임 대제사장이 죽거나 아니면 건강에 이상이 생겨서 전혀 대제사장직을 감당할 수 없을 경우에만 후임 대제사장이 세워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두 명의 대제사장이 등장을 합니까? 먼저 등장하고 있는 안나스는 전직 대제사장이고 그때 현직 대제사장은 가야바입니다. 

현직 대제사장만이 대제사장이고 전직 대제사장은 요즘으로 말하자면 증경 대제사장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현역은 아닙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바로 그 안나스의 사위가 바로 현직 대제사장인 가야바입니다. 사실 로마 총독에 의해서 해임이 돼 버린 제사장입니다. 그러니까 정치적으로 자기에게 협조하지 않는다고 해서 안나스를 해임해 버리고 그 사위되는 가야바를 대제사장으로 위촉을 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빌라도가 총독으로 제직할 당시 산헤드린의 최고 지도자로서의 자리에까지 올라서 비록 종교 지도자의 자리에서는 쫓겨났어도 막강한 정치 지도력을 발휘하고 있었던 인물입니다. 그래서 그가 예수를 먼저 심문을 하는 겁니다. 

또 하나 문제는 대제사장은 누가 세우느냐 하면 하나님이 세우시는 것입니다. 그것도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레위 지파 가운데서도 아론의 지계 후손들만이 제사장이 될 수 있고 그들 가운데 한 사람만이 대제사장으로 세움 받을 수 있는 것인데 로마 당국에 의해서 제사장에 세워진다고 하는 것은 이미 하나님의 말씀을 벗어났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미 정통성을 잃어버린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그건 로마에 의해 정령당한 나라 잃은 백성의 슬픔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더라도 적어도 대제사장이라면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백성들을 이끌어야 할 책임 즉 중재자로서의 역할과 더불어 백성들을 위한 축복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데 그들은 자기들의 기득권 즉 로마 당국과의 협조를 통해 종교를 빙자한 백성들의 지도자로의 역할에 보다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안나스는 그 기득권을 이용해 산헤드린 공의회 의장의 직분을 맡아 계속해서 사위되는 가야바와 더불어 로마 정령 상태의 이스라엘을 실제적으로 이끌고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그는 종교 지도자라고 하기보다는 정치적인 권력에 더 관심이 많을 수밖에 없었고 바로 그런 세속적인 권력에 더 관심이 많은 사람들을 가리켜 흔히 사두개파 사람들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어찌 되었든 이런 입장에 있는 안나스에게로 군대와 천부장과 유대인의 하속들이 예수를 잡아 결박하여 끌고 갑니다. 성경은 이르기를 “안나스는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장인이라 가야바는 유대인들에게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유익하다 권고하던 자러라” 그랬습니다. 로마 군병들이 예수를 잡았으면 마땅히 총독에게로 끌고 가야 옳지 않습니까? 그런데 안나스에게 끌고 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모든 계획이 대제사장으로부터 나오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겁니다. 그게 어떤 계획이었습니까? 유대인들에게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유익하다 권고하던 자라고 했습니다. 

즉 예수를 죽이고자 계획한 자는 바로 가야바와 안나스라는 사실을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이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백성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며 대속하는 것 즉 죽을 수밖에 없는 자를 살리는 것이 바로 대제사장의 할 일입니다. 그런데 그런 그들이 거꾸로 예수를 죽이려고 꾀하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하나님의 뜻을 묻는 자가 대제사장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자기들이 정말 예수님이 메시야인지 확신이 안 선다면 마땅히 하나님께 물었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지금까지 메시야가 우리 가운데 오시기를 오래도록 기다려 왔는데 지금 이 예수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보내주신 메시야가 맞습니까? 그런데도 그들은 애써서 예수가 메시야가 아니라는 증거만을 찾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증거가 있을 까닭이 없습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예수를 처형할 증거를 만들어내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래야만 빌라도에게 말하여 예수를 처형할 수 있을 테니까 말입니다. 자기들이 옳다 그르다를 판단하여 죄를 정할 수는 있어도 궁극적으로 사형시킬 권한은 오직 로마 당국에만 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주후 70년경은 로마군에 의해서 예루살렘이 함락된 비극의 해입니다. 그때 예루살렘 성은 완전히 파괴되고 성전은 불태워지고 성 안에 살고 있던 9만 명이 참사를 당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예루살렘을 떠나야 했던 그런 비극이 일어났을 때 예루살렘 시민들의 지주가 된 사람이 벤 자카이라는 랍비였습니다. 예루살렘이 함락되어질 때 벤 자카이는 로마군 사령관을 찾아가서 “당신이 말하는 대로 다 따를 테니 나와 함께 랍비 10명이 기거할 수 있는 방 한 칸만 마련해주십시오”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래서 방 한 칸만 파괴하지 말아달라는 제의는 받아들여졌습니다. 그후 예루살렘의 모든 집들이 불태워지고 파괴되었지만. 벤 자카이와 랍비 10명이 살고 있는 집 한 칸만은 남아있었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벤 자카이를 `민족의 배신자'라고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벤 자카이는 아무 말 없이 동료 랍비 10사람과 함께 20년 동안 작업한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탈무드'입니다. 그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시대는 달라지고, 사람은 죽고, 태어나고, 새사람이 나타나고, 인류의 문명, 물질의 세계, 집이나 건물, 이런 것은 다 없어지고 파괴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남는다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벤 자카이가 이스라엘 민족이 역사를 두고 터득해왔던 하나님을 경외하는 그 지혜를 모으고 후손들에게 전해주어야겠다는 생각으로 20년 동안 작업해서 만든 것이 `탈무드'입니다. 

이것을 오늘날까지 이스라엘 백성에게 교훈집으로 남겨주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백성이 될 때 이스라엘은 결코 망하지 않는다는 확신을 가지고 탈무드를 남겨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백성이 복된 백성이 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섬길 줄 아는 백성이 복되다는 확신을 가졌던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지도자입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어준 일을 지켜보았던 그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예루살렘 성이 멸망당하는 것을 보면서 두려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마지막 한 가지 희망 즉 말씀만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시 세울 수 있다는 희망으로 이렇듯 귀한 일을 감당했던 것입니다. 

앞에서 말한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는 이스라엘을 멸망의 자기의 정치적 권한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예수를 잡아 죽이도록 함으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렁텅이로 빠뜨렸다면 벤 자카이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희망을 남겨 주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가 오늘의 유대인들이요 이스라엘 나라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오직 말씀 안에 바로 서는 길 외에 다른 길은 없습니다. 지금 당장은 나에게 이익이 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벗어나게 되면 그 결과는 두고 두고 후회할 수밖에 없는 것임을 우리 모두 기억하여 오직 말씀 안에서 은혜로 사시며 믿음으로 내일을 위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부패한 인류의 실상입니다. 
“대제사장이 예수에게 그의 제자들과 그의 교훈에 대하여 물으니”
대제사장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그 제자들과 그의 교훈에 대하여 묻습니다. 이건 바꿔 말하면 이런 말이 됩니다. “아니, 네가 그렇게 잘난 사람이고 네가 그렇게 큰일을 했다고 하는데 어떻게 네가 기른 네 제자들은 하나도 안 남았느냐? 네가 신중하게 뽑아 선택하여 세운 그들은 지금 왜 하나도 네 옆에 없느냐?” 이렇게 묻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목사는 꼭 연예인들과 같다”고 합니다. 어떻게 보면 인기 직업이라는 것입니다. 연예인들이 인기를 관리하듯이 목사들도 어떤 의미에서는 인기 관리를 하는 듯이 보이는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느냐 사람을 기쁘게 하느냐가 중요한 하나의 이슈가 됩니다. 누구라도 압니다. 비단 목사이니까 그래야 된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면 당연히 먼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하는데 과연 저와 여러분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시는가요? 아니면 내 생각을 앞세우는가요? 어떨 때는 스스로 생각기에도 내가 목사가 맞나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맞나 싶을 때가 있습니다. 에이 목사님들은 그럴리 있겠습니까? 

그렇게 말씀하시는 분들도 계시지만 그렇게 말씀해 주시는 분들 정말 고맙습니다만 인간의 나약함이 드러날 때에는 여지없이 무너지는 것이 목사에게도 예외는 아닌 것 같습니다. 나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 남을 깎아 내리는 일이 어찌 나 하나만의 일이겠습니까? 그래서 주님께서 다락방의 기도에서 그토록 우리가 하나 되기를 위해서 기도하셨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물론 서로가 경쟁적으로 자기를 세워나가기 위한 노력을 하는 것은 참으로 좋은 일입니다. 그래서 더 큰 은혜를 사모하고 어떻게 하면 보다 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을까 하여 선의의 경쟁을 한다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선의의 경쟁이 아닌 살리는 일이 아닌 죽이는 일이 되고 서로를 깎아 내리는 일이 된다면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그것이 오늘 현실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기독교인들이 많이 줄고 있다고하지를 않습니까? 
우리가 다들 힘들게 살 때는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고 하나님의 허락하시는 복을 받기를 소망하며 살았지만 그래서 복 받기를 위해 더욱 하나님과 사람 앞에 심고 뿌리고 나누었는데 이제는 살만 하게 되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들 어릴 때만 하더라도 먹을 것도 변변치 않았습니다. 배가 고픈데 음식 투정 부릴 겨를이나 있었던가요? 그런데 요즘에는 거꾸로 다이어트 열풍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살만 하니까 이제는 가꾸고 싶습니다. 그런데 이게 서로를 세워나가면 좋을 텐데 사실은 그렇지를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줄 서기 문화입니다. 아니 다같이 일등하면 안 됩니까? 그래서 요즘에는 일등상 이등상 하지를 않고 무슨 재능상 무슨 봉사상 이런 이름으로 모두에게 상장을 하나씩 안겨주기도 한다고 하는데 그렇습니다. 하나님도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귀하게 여기시고 우리 모두에게 관심을 가지고 계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더군다나 하나님께서 귀한 직임을 맡겨 세우신 사람들이라고 할 때는 더욱 많이 맡은 자들에게는 많이 찾을 것이라고 하시지 않습니까? 이건 당연히 긍정적인 접근을 주님이 원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대제사장은 부정적인 접근을 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나사로를 살렸다면서? 당신이 38년 된 중풍병자를 고쳤다면서? 그런데 당신이 그렇게 애지중지하며 심혈을 기울였던 그 제자들은 지금 어디 갔느냐? 게다가 그 중 한 명은 당신을 팔아먹지 않았더냐?”라는 희롱 섞인 질문인 것입니다. 이 대목이야 말로 우리가 십자가 사건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대목인 것입니다. 이 질문이야말로 인류 전체가 얼마나 썩어 문드러진 존재인가 하는 사실을 대제사장을 통하여 나타내주고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6: 57~68에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를 잡은 자들이 그를 끌고 대제사장 가야바에게로 가니 거기 서기관과 장로들이 모여 있더라 베드로가 멀찍이 예수를 따라 대제사장의 집 뜰에까지 가서 그 결말을 보려고 안에 들어가 하인들과 함께 앉아 있더라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거짓 증거를 찾으매 거짓 증인이 많이 왔으나 얻지 못하더니 후에 두 사람이 와서 이르되 이 사람의 말이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 동안에 지을 수 있다 하더라 하니 대제사장이 일어서서 예수께 묻되 아무 대답도 없느냐 이 사람들이 너를 치는 증거가 어떠하냐 하되 예수께서 침묵하시거늘 대제사장이 이르되 

내가 너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이에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그가 신성모독 하는 말을 하였으니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보라 너희가 지금 이 신성모독 하는 말을 들었도다 너희 생각은 어떠하냐 대답하여 이르되 그는 사형에 해당하니라 하고 이에 예수의 얼굴에 침 뱉으며 주먹으로 치고 어떤 사람은 손바닥으로 때리며 이르되 그리스도야 우리에게 선지자 노릇을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더라” 

이게 무슨 말입니까? 대제사장들은 지금 어떻게 해서든 예수를 죽이려고 올가미를 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세벨이 거짓 증인을 내세워 나봇을 죽이는 것처럼 그렇게 이들은 거짓 증인을 내세워 예수를 옭아매 죽이려고 하고 있지만 그것도 마음대로 되지를 않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를 심문하는 것도 사실과 증거와 증인들을 놓고 심문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죽일 핑계거리를 찾아내기 위한 잘 짜여진 각본이라는 뜻입니다. 한데 그것도 마음대로 되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두 사람이 와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이 사람이 말하기를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 만에 짓겠다” 했다고 말합니다. 이 말씀의 참 뜻은 성전이라는 건축물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성전 된 자기 몸을 가리켰다고 하였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죽으실 것과 다시 사흘 만에 부활하시는 것으로 구원을 완성시키시는 이야기를 하신 것이었습니다. 구약시대에 제사장이 성전에 들어가서 제사를 지내는 것으로도 인간을 완전하게 구원할 수 없었던 것을 예수님께서는 친히 제물이 되시고 대제사장이 되셔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완성될 구원을 그렇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을 들은 자들은 그 말씀의 진의가 무엇인지를 살펴보려 하지 않고 단지 올무에 걸어 넘어뜨릴 구실 만을 찾고 있었기에 정말 그랬었느냐? 이것만 물었습니다.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묻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대답하셨고, 게다가 앞으로 심판날에 인자가 하늘 아버지의 권능의 보좌 우편에 앉은 것과 구름타고 올 것을 너희가 보리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시자마자, 마침 잘 되었다는 듯이 의도적으로 제사장은 자기의 옷을 찢으며 말하기를 “저가 참람한 말을 하였으니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하고는 때리고 매질하고 이제 빌라도에게 사형에 처해주기를 요청하기 위해 넘겨주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가 깊이 살필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들도 사람 사이에 시기심이나 증오심을 갖기 시작하면 꼭 대제사장과 같은 그런 행동 양식을 따라간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상대방이 한 말의 뜻이 무엇인가? 무엇을 말하려는 것인가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말꼬리를 붙잡아서라도 상대방을 칠 근거를 삼으려고 하는 것이 우리들 모두의 죄악된 성품입니다. 이게 우리의 본능입니다. 
결국 우리의 죄악 된 마음 저 밑바닥엔 사람에 대해 하나님에 대해 좋은 마음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성령의 사람이 되지 못하면 우리의 현실은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죄의 본성입니다. 

더구나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사랑을 베풀어 주시며 빛을 비추시어 영생을 주러 오셨습니다. 한번도 우리에게 손해 끼치는 일을 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오히려 배고픈 자에게 먹을 것을 주시고, 목마른 자에게는 물을, 다친 자를 싸매시며 병든 자를 고쳐주신 이에게 이같이 증오심으로 갚을 수 있습니까? 사랑으로 두 손을 펴고 다가오신 주님의 그 사랑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거꾸로 그 사랑을 외면했습니다. 오히려 멸시하며 손바닥으로 내리쳤습니다. 누가 그랬습니까? 평범한 사람이 그랬다면 또 모르겠습니다만, 지금 대제사장이 그러고 있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이 예수에게 그의 제자들과 그의 교훈에 대하여 물으니 예수께서 대답하시기를 “내가 드러내 놓고 세상에 말하였노라 모든 유대인들이 모이는 회당과 성전에서 항상 가르쳤고 은밀하게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아니하였거늘 어찌하여 내게 묻느냐 내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 들은 자들에게 물어 보라 그들이 내가 하던 말을 아느니라”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대제사장이면서도 예수님의 가르침과 교훈과 행적에 대하여는 하나도 깨우친 것이 없고 다만 죽이려는 마음만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 본성 깊이 뿌리박힌 쓴 뿌리입니다.

화상을 입어 온통 일그러진 얼굴을 한 사람이 처음으로 거울을 보게 되었을 때에 거울 속에 비쳐진 일그러진 자신의 모습을 보고 어떤 행동을 취합니까? 자기의 얼굴을 뜯는 것이 아니라, 거울을 깨뜨리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빛 되신 주님이 나타나시자 자신의 추하고 부패한 모습이 드러남을 알고 스스로를 고치려고 하기보다 그 빛을 끄려고 덤벼들고 있는 것이 대제사장의 모습이요, 우리 인간들의 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성도들은 끊임없이 겸손하게 은혜를 구하며 통회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다윗입니다. 다윗의 생애는 전기와 후기로 나뉩니다. 그 분기점은 밧세바 사건입니다. 밧세바 사건 이전의 전기에서는 물맷돌로 골리앗을 보기 좋게 때려 눕혀 승리를 합니다. 그리고 그를 잡아 죽이려고 쫓아오는 사울을 향하여 한 번도 거친 말이나 부정적인 말이나 어떤 횡포를 부리지 않았습니다. 늘 말없이 도망만 다닙니다. 
그런 다윗과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드디어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셨다고 성경은 거듭 기록합니다. 

그런 다윗이 하루 아침에 무너져 내립니다. 밧세바 사건을 일으키시는 것입니다. 이 일로 다윗은 여지없이 땅에 떨어집니다. 밧세바 사건 이전에는 대부분 다윗 외부와의 문제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밧세바 사건 이후에는 모두 자신에 관한 싸움들입니다. 
왕궁 내에 일어난 반란 사건들도 모두 스스로와의 싸움으로 수렴해 나갑니다. 그래서 변합니다. 다윗이라는 믿음의 사람이 철저히 변하게 됩니다. 이리하여 나온 유명한 고백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이러한 고백을 통해 다윗은 철저히 깨닫습니다. 우리가 성령의 사람으로 살아가지 않는다면 날마다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순간적으로 무너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만 우리가 온전한 믿음의 사람 순종의 사람 은혜의 사람으로 살아가며 하나님의 복을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지금 대제사장의 심문을 통해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은 인간의 자가 얼마나 무서운가 하는 것입니다. 그 부패하고 더러운 죄가 바로 내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에이 그건 대제사장 얘기라고 하시겠습니까? “너희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라고 하신 말씀을 떠올려 보십시오. 우리의 대제사장은 예수님이시고 우리는 그 수종을 드는 제사장들입니다. 왕 같은 제사장 왕권 제사장 즉 주님과 같은 제사장이라는 뜻입니다. 그런 우리 안에 안나스 같은 가야바 같은 추하고 온갖 더러운 것들로 가득차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씻음 받았다고 해도 그위에 그리스도의 피계속해서 뿌리고 바르지 않는다면 어느 순간 나의 죄악된 본성이 또다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망하고 좌절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고 그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들은요 누구든 누가 조금만 추켜 주면 우리 마음에 그렇지 나도 꽤 괜찮은 사람이야 하는 생각을 갖습니다. 어림 반 푼 어치도 없는 생까 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사람다울 수 있는 것은 오직 주님의 은혜로만입니다. 조금만 방심해도 내가 드러나요. 그런데 나는 어떤 사람이냐 하면 원래 죄 가운데 태어난 사람이란 말입니다. 지금은 하나님의 은혜로 덮여 있으니 괜찮은 줄 알지 실은 저 밑바닥에는 추하고 더러운 것들로 가득하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은혜로 그것을 덮어두지 않으면 언제 그것이 겉으로 드러날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래서 아무 조건 없이 주시는 주님의 사랑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너를 사랑한다고 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그 사랑을 받아들이십시오. 그건 나도 그렇고 우리도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다른 잣대를 들이대지 마십시오. 나는 죽고 그리스도만 존귀하게 되기를 원했던 바울의 고백을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은 아낌없이 자신을 주셨습니다. 지금도 은혜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예수님마저도 깔고 앉아야 속이 편한 사람들 아닙니까? 겉으로는 안 그런 척 하면서도 사실은 시기심과 미움과 질투로 우리 마음이 가득하지는 않습니까? 

아니 그렇지는 않더라도 다른 사람을 무시하지는 않습니까? 그런데 그 무시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나보다 잘 나서입니까 나보다 못 낫다고 생각해서입니까? 그런데 생각해 보세요. 세상에 나만 못한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주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들치고 다 주 안에서 귀한 하나님의 보배들인데 누가 잘 나고 못 나고가 어디 있단 말입니까? 그러니까 이제 겉모습으로 사람 보지 마십시오. 못난 사람 망가진 사람 잘못된 사람을 오히려 더 불쌍히 여기십시오. 
다시 말씀드립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제사가 무엇이라고요? 

“상한 심령이라”
그렇다면 이 대제사장이 왜 이런 일을 했습니까? 이들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고 자신을 위해서만 그들의 인생이 존재하였기 때문에 그러한 일들을 서슴없이 저질렀던 것입니다. 자기 하나 밖에는 그 목표가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들에게도 두려움을 주는 중요한 대목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들도 혹시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 모든 것은 겉치장과 구호에 그칠 뿐 오직 나 자신과 가족들만을 위해서만 모든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는가를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지금 안나스나 가야바도 그들 나름대로 하나님을 향하여 열심을 갖고 있고 하나님 편을 든답시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하나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묻지를 않고 있습니다. 정말 하나님이 보낸 사람이 맞습니까? 묻지를 않습니다. 그리고 자기 생각이 옳다고 철썩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게 하나님을 위한 열심인 줄만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자기 자신을 위한 일인 줄 꿈에도 모르고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사랑은 죽이는 것이 아닙니다. 살리는 것이 사랑이고 은혜입니다. 그런데 혹 나 역시 누구를 죽이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 나 자신을 죽이고 있지는 않은지요? 

대제사장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예수를 죽였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자기를 죽였고 이스라엘을 죽인 것입니다. 이런 어리석음이 우리들 가운데 있지는 않은지 항상 살펴서 항상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안에서 나를 다스려 나가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워터루 싸움에서 나폴레옹을 이긴 아더 웰링턴의 일화입니다. 그가 여러 부하들을 거느리고 어느 날 여우 사냥을 떠났습니다. 여우를 발견한 웰링턴은 힘차게 말을 몰았습니다. 그런데 여우는 펄쩍 담장을 넘어 농장 안으로 들어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마침 농장에는 문을 지키는 소년이 있었습니다.
“얘야, 문을 열어라. 여우를 잡으러 들어가야겠다”
그러자 소년은 딱 잘라 거절했습니다. 
“죄송합니다만, 농장 안으로 들어가실 수가 없습니다. 사냥꾼이 농장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일부러 이 담을 쌓은 것입니다. 저희 농장을 지키기 위한 것이니 그냥 돌아가십시오.”
웰링턴은 화가 머리끝까지 났습니다.

“네 이놈! 이건 내 명령이다. 빨리 문을 열어! 난 웰링턴 장군이란 말이다!” 
하지만 소년은 침착하게 대답했습니다.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더욱 열어드릴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각하처럼 높으신 분께서 농민의 어려움을 상관하지 않고 그저 무리한 요구를 하십니까?” 
할 말을 잃은 웰링턴은 혼자 이렇게 중얼거리고 말았습니다.
“그래, 네 말이 옳다. 여우는 놓쳤지만 오늘 귀한 교훈을 얻었구나.”
오늘 우리가 꼭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 오늘 하루 모든 일을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게 하옵소서.” 하는 기도입니다. 
우리가 가진 것이 많을수록 또한 수고하는 일이 많을수록 맡은 직분이 귀할수록 더욱 겸손하게 사랑으로 베풀며 섬기는 성도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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