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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원대로 하옵소서 (막 14:3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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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대로 하옵소서 (막 14:32-42)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주고 있는 책입니다. 6절 말씀을 보면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저는 이 구절의 말씀을 이렇게 읽고 싶습니다. “믿음이 하나님을 감동시킵니다.” 또 1절 말씀을 보니까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저는 역시 이 말씀을 이렇게 읽고 싶습니다. “믿음은 바랄 수 없는 것을 바라게 하며, 믿음은 볼 수 없는 것을 보게 하고, 믿음은 들을 수 없는 것을 듣게 하며, 믿음은 만질 수 없는 것을 만지게 합니다.” 라고 읽고 싶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철저히 믿음에 대해서 교훈을 주고 있는 책입니다. 성경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세상의 성공보다도 오직 믿음으로 우리가 세상을 살아감을 믿음으로 판단하고 믿음으로 행하게 함을 한결같이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책입니다. 성경에 등장하고 있는 많은 인물을 바라볼 때마다 우리가 어떠한 믿음을 가져야 되는지를, 내가 어떠한 믿음을 가져야 되는지를 그 책이, 그 말씀이, 인물이 우리에게 교훈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을 가리켜 ‘믿음의 조상’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창세기 22장 말씀을 보게 되면 독자 아들을 제물로 바치는 아브라함의 믿음이 하나님을 감동시켰다고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까? 아브라함의 믿음은 말씀대로 순종하는 믿음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갈등과 고민을 넘어서는 믿음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가장 귀한 것을 내려놓을 줄 아는 믿음이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또한, 마태복음 15장 말씀을 보면 병든 딸로 주님의 도우심을 간구하고 있는 가나안 여인의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가나안 여인의 믿음은 자존심을 버리는 믿음이었습니다. 

은혜의 소중함을 깨닫고 고백하는 믿음이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예수님께서도 우리에게 친히 믿음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향한 우리 주님의 믿음이 그 믿음이 십자가에서 가장 잘 나타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십자가에서의 죽음도 마다하지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특히 오늘 주신 본문 말씀을 보게 되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의 참 본을 보여주고 있다고 감히 말씀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신 믿음이 어떤 믿음일까요? 첫 번째 말씀드립니다. 우리 예수님의 믿음은 고민하는 믿음이었습니다. 본문의 말씀 33절 말씀 보시겠습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실 새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라고 주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의 성도들이 신앙의 고민을 이야기할 때 오해하는 것이 있습니다. 누군가의 고민과 갈등이 있다고 한다면 그 고민과 갈등을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부정적으로 해석할 때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신앙적 고민과 갈등을 꼭 부정적으로서만, 나쁘게만 봐야 합니까? 이제 곧 추석이 다가옵니다. 여러분은 추석과 같은 명절이 다가오면 어떤 생각을 하십니까? 제 경우에 있어서 어릴 때는 명절이 다가오면 그냥 좋았습니다. 많은 사람을 만날 수 있어서 좋았고, 또 오랜만에 친척을 만나게 되면 이 친척 분들께서 용돈도 주시니까 아주 좋았습니다. 또 맛난 음식을 마음껏 먹을 수 있어서 좋았고, 공부하라는 말을 듣지 않고 실컷 놀 수 있으니까 그 명절이 좋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어른이 되고 나서 맞는 명절은 기쁨이 아니라 아주 스트레스가 되고 있습니다. 아이들에게도 어른 노릇을 해야 되겠고, 또 어른들에게도 제가 해야 할 도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어릴 때에는 좋았던 명절이 어른이 되어서는 스트레스가 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어른이 되었기 때문에 제가 성숙해졌기 때문에 가질 수밖에 없는 고민과 갈등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은 성숙해질수록 고민과 갈등은 더 깊어진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랍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고민과 갈등의 질, 무엇을 놓고 고민하느냐? 무엇 때문에 갈등하느냐? 그 내용이 매우 중요하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른이 되어서 명절을 맞이했습니다. 빠듯한 살림을 생각하면서 명절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하는 고민은 마땅한 고민일 것입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먹을 것만 생각하고 놀 것만 생각한다면 그 어른을 가리켜 어떻게 어른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 

신앙도 동일한 줄로 믿습니다. 신앙이 깊어질수록 주의 은혜를 알면 알수록 우리의 고민은 깊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주님의 소원을 내가 느끼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내가 알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내가 주의 뜻을 깨닫고 헌신하고 싶은데 과연 내게 그러할 만한 능력이 있는지 내가 고민이 된다는 것입니다. 주의 말씀을 듣고 내가 충성하고 싶은데 인간적으로 여러 가지 내 마음에 부딪혀집니다. 그러니 고민과 갈등이 심각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가리켜 거룩한 고민, 거룩한 갈등이라고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세상의 고민과 갈등은 자신을 위한 것이지만 그러나 거룩한 고민과 갈등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고 이야기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마음에 어떠한 고민이 있습니까? 무엇 때문에 고민하고 계십니까? 거룩한 고민입니까, 아니면 우리의 욕망 때문에 욕심 때문에 고민하고 있는 것입니까? 우리의 마음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 마음이 무엇을 지향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무엇을 사모하고 있는 것입니까? 우리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소원과 마음의 중심을 너무너무 잘 아셨습니다. 그래서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안 하고 길쌈도 안 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라고 말씀하셨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과 생각이 우리의 마음이 세상을 향하고 있음을 우리의 눈이 물질을 향하고 있음을 우리의 세계에서 분명히 직시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믿는 자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만, 그러나 우리의 고민과 염려가 하나님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이 세상 때문이며 우리의 욕심 때문임을 우리 예수님께서는 너무나도 잘 알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계속해서 들어보십시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우리 주께서 약속하셨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세상의 것으로 염려하고 고민하는 것을 하나님이 절대로 기뻐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성도의 고민은 마땅히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즉 거룩한 고민이 될 수 있어야 함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한 이후에 하나님의 위대하신 동행하심을 체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 가운데 원망과 불평이 끊이지 않았던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그들에게는 거룩한 고민이 그들 마음속에 없었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손길로 애굽에서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구원받은 백성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애굽에서의 생활과 습관을 잊지 못하고 세상적인 것으로 그들의 마음과 생각이 사로잡혀있었기 때문에 은혜 받은 자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는 거룩한 고민을 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먹고 마시는 문제에만 붙잡혀 거룩한 고민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돌보심 가운데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원망과 불평이 끊이지 아니했더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고민으로 사로잡혔던 그들을 거룩한 고민도 할 줄 몰랐던 그들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거룩한 땅, 가나안에 발을 들이지 못하게 막으셨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갈보리 성도 여러분! 우리가 무엇을 먹고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세상의 것으로 염려하고 고민하는 성도들이 아니요 우리가 주의 말씀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며 거룩한 고민을 할 수 있는 우리 믿음의 사람들, 우리 모두 모두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부탁을 드립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이루어나가는 신실한 성도들이 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돌보심의 축복을 누릴 수 있는 저와 여러분들, 우리 모두모두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두 번째 주께서 가르쳐주신 교훈은 우리 주님의 믿음은 기도하는 믿음이었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 35절 말씀을 보시겠습니까? “조금 나아가사 땅에 엎드리어 될 수 있는 대로 이때가 자기에게서 지나가기를 구하여 이르시되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거룩한 것으로 고민만 하는 신앙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거룩함을 선택하고 결정할 줄 아는 믿음이 될 수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거룩한 고민을 한다고 하는 것은 내가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거룩한 고민을 한다고 하는 사실 만으로 내가 하나님에 대해서 안다고 하는 사실 만으로서는 내가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깨닫고 거룩한 고민이 시작되었다고 한다면 거룩한 결정을 내가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거룩한 고민 이후에 이 거룩한 결정을 위해서 바로 이 순간에 기도의 중요성이 나타나게 된다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기도에 대해서 그렇게 수없이 많이 강조하고 또 가르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도가 무엇입니까? 우리의 요구와 고집을 하나님 앞에서 관철시키는 것을 기도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기도는 우리의 고집과 편견을 버리는 과정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주의 뜻을 겸허히 묻는 것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의 도움을 구하고 하나님의 뜻으로 채워나가는 것, 이것을 가리켜 기도의 참 의미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믿음 있는 사람만이 행할 수 있는 신앙적 행위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예수님은 거룩한 고민을 하시면서 그리고, 거룩한 결정을 위해서 기도하는 본을 우리에게 친히 보여주신 것이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기도할 것을 부탁하십니다. 명령하셨습니다. 가르치셨습니다. 37절 말씀을 보십시오. “ 돌아오사 제자들이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시몬아 자느냐 네가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라고 말씀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과 동일하신 분이신 예수님께서 꼭 기도해야지만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꼭 기도를 해야지만 거룩한 결단을 내릴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예수님께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하는 본을 보여주신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를 해야지만 우리의 고집과 편견, 교만을 버릴 수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를 해야지만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채울 수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를 해야지만 하나님의 거룩한 결정을 믿음 가운데 바르게 내릴 수 있기 때문에 우리 주께서 기도의 본을 우리에게 보여주셨다는 것입니다. 

본문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기도에 관한 또 다른 교훈이 있답니다. 여러분! 기도에는 때와 시기가 있다는 것입니다. 41절 말씀을 보십시오. “세 번째 오사 그들에게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그만 되었다 때가 왔도다. 보라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 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기도에 때와 시기가 있다고 이야기할 때에 의문을 가지시는 분이 계실 것입니다. ‘우리가 언제든지 기도할 수 있지 않습니까? 성경에도 항상 기도하라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그 기도에 무슨 때가 있습니까?’ 라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언제든지 기도할 수 있지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에는 때와 시기가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문제를 놓고 기도할 때 그 문제를 놓고 여러분 언제든지 기도할 수 있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자녀의 혼사 문제를 놓고 기도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 자녀가 다 혼사를 치르고 결혼했습니다. 그러면 더 이상 그 혼자 문제로 기도할 때는 지난 것입니다. 어떤 문제를 놓고 기도할 때 그 기도의 시기, 그 기도의 때가 분명히 있다는 것입니다. 기도해야 할 그 때를 놓치게 된다면 우리의 마음에 큰 아쉬움과 후회로 남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이 무엇인가? 하나님이 바라는 믿음이 무엇인가? 그 믿음은 바로 기도해야 할 그때에 바로 열심히 기도하는 것! 이것이 바로 주께서 원하시는 것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한 집사님이 계셨습니다. 이 분은 젊으셨을 때 삶이 고단하니까 먹고 살기에도 바쁘셨습니다. 그 당시 다 그랬던 것처럼 자녀들과 오붓한 시간을 가질 여유도 없이 젊음을 다 보내고 말았습니다. 자녀들이 장성해서 이 자녀들이 믿음생활 하면서 이 집사님께서는 자녀들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시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 이분의 삶이 너무 놀랄 정도로 변화되었습니다. 

후에 집사님께서 제게 이러한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목사님! 내가 예수님을 믿고 제일 후회되는 게 있어요. 안타까운 것이 있어요. 우리 아이들이 어릴 때 그 아이들을 위해서 열심히 기도했어야 했는데 그때는 내가 예수님을 알지 못했으니까 기도도 알지 못했으니까 기도를 하지 못했습니다. 그게 너무너무 후회가 됩니다. 내가 예수님을 만나고 기도의 중요성을 깨달았을 때는 내 아이들이 이미 장성하고 말았습니다.” 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러분! 자녀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을 언제든지 할 수 있고, 또 언제든지 해야 되지만 그러나 다시 강조 드립니다. 기도해야 되는 그때에 그 시기도 반드시 있더라는 것입니다. 꼭 기도해야 하는 바로 그때 기도하는 믿음, 그러한 믿음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줄 잊지 아니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믿음이 주님을 본받아 날마다 기도하는 믿음의 성도들 모두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언제든지 항상 모든 일에 기도하는 성도들 모두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또한 기도해야 할 때 주께서 우리의 기도를 바라실 때 기도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고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모두모두 누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세 번째 우리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믿음은 순종하는 믿음이었습니다. 36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르시되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는 주님의 말씀은 포기가 아니랍니다. 순종입니다. 42절 말씀을 보십시오.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이 말씀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따르려고 하는 주님의 순종입니다. 예수님의 믿음이 이토록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순종하는 믿음이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입니다. 거룩한 것으로 고민하고 거룩한 것으로 선택하고 결정했으면 그 거룩함 위에 온전히 순종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야고보서를 잘 알고 계시지요? 야고보서는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교훈을 알려주고 있는 책입니다. 야고보서가 강조한 내용이 무엇이었습니까? 여러분! 야고보서는 한결같이 행함이 있는 믿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내용이 있습니다. 야고보서 2장 17절과 26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이 말씀을 오해하고 있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하는 이 가르침이 행함을 강조하고 있습니까, 믿음을 강조하고 있습니까?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 여러분! 이 말씀이 다시 묻습니다. 행함을 강조하고 있습니까, 믿음을 강조하고 있습니까? 믿음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가져야겠는데, 우리가 믿음을 소유해야겠는데 우리가 바르게 믿어야겠는데 그 믿음이 어떤 믿음이 되어야겠는가? 행함이 있는 믿음이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행함이라는 것이 율법적인 냄새가 나니까 저는 이렇게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율법적인 냄새가 나고 있는 이 ‘행함’이라고 하는 단어보다도 복음적 단어라고 할 수 있는 ‘순종’을 강조해서 “순종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고 이야기합니다. 주의 뜻을 깨달았다고 고백합니다. 내 앞이 축복을 받았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의 말씀, 주의 뜻, 주의 인도하심 가운데 순종이 없다고 한다면 내가 하나님을 만났다고 할지라도 내가 아무리 큰 방언을 말한다고 할지라도 순종이 없다고 한다면 그 믿음은 바로 죽은 믿음이 되고 만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는 믿음은 입술로만 “주여, 주여”하는 믿음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순종이 있는 믿음이 우리를 구원하는 줄로 믿습니다. 부끄러운 구원이 아니라 자랑스러운 구원을 받게 하는 믿음은 순종이 있는 믿음인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우리 예수님께 감동을 드리는 믿음은 순종이 있는 믿음인줄로 믿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겟세마네 동산에서 이러한 순종의 믿음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랍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다시 말씀드립니다. 믿음은 바랄 수 없는 것을 바라게 합니다. 세상의 사람은 요행을 바라고 운을 바라지만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란다고 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볼 수 없는 것을 보게 합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예수님이 어디 있느냐?” 라고 실문하고 있습니다만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나와 날마다 동행하시는 우리 주님을 만나며 생활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들을 수 없는 것을 듣게 합니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들은 세상의 사람들이 듣지 못하는 주의 음성을 날마다 들으며 생활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신뢰입니다. 의지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신뢰하고 있기 때문에 고민이 있고 갈등이 있다고 할지라도 기도하면서 순종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대로 순종하지 아니하면서 내 믿음을 이야기한다면 그 믿음이 바로 죽은 믿음이요 거짓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베드로를 잘 아실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이유도 바로 이러한 순종하는 믿음 때문이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밤이 맞도록 수고하였지만 아무런 소득이 없었습니다. 배를 씻고 그물을 정리하고 있는데 우리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오셨습니다. 

베드로의 배에 오르신 예수님께서 따르던 사람들에게 많은 말씀을 주셨습니다. 베드로는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우리 예수님의 숨결을 느끼며 그의 모든 손짓을 바라보며 그의 말씀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숨결을 느끼면서 아마도 베드로는 예수님의 마음을, 진심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말씀을 다 마치시고 우리 주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지요? “베드로야! 깊은 곳으로 가서 그물을 내려라.” 주의 말씀을 듣고 베드로가 이렇게 고백하며 말씀대로 순종하지 않습니까?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순종했으되 잡은 것이 없지만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입술로, 마음으로 믿는 것만이 믿음의 전부가 아니라고 한 것입니다. 믿음의 완성은 순종하면서 이루어진다고 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믿음 역시 모리아 산에서 독자 이삭을 바치는 순종을 보여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감동과 기쁨을 드렸던 모습이 있지 않습니까? “이 잔을 내게서 옮겨주시옵소서.” 라고 하는 주님의 기도를 볼 때 예수님의 인간적인 바람이 무엇이었는가를 우리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그런 주님의 기도에서 순종의, 믿음의 참 의미를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순종의 믿음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그 이유는 우리에게 순종의 삶을 원하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갈보리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인생을 살아갈 때마다 우리의 뜻과 우리의 목적과 우리의 생각만을 주장하는 그러한 사람들이 절대 되지 아니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주의 음성을 들을 때마다 하나님의 계획을 깨달을 때마다 주의 인도하심의 손길을 우리 모두 깨달을 때마다 날마다 순복하며 나갈 수 있는 우리 믿음의 사람들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그리할 때 우리 주님께서 우리의 목자장이 되어주실 것입니다. 

그리할 때 우리 주님께서 우리 모든 필요도 채워주실 것이며 그리할 때 우리 주님께서 우리 가정도, 우리 교회도, 우리 인생도 지켜주실 줄로 분명히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믿음은 거룩한 고민이 있는 믿음이었습니다. 기도하는 믿음이었습니다. 순종하는 믿음이었습니다. 이 귀한 주일날 우리 모두가 마음의 결단을 내리며 날마다, 날마다 주의 말씀 가운데 순복하며 나아갈 수 있는 저와 여러분들,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 살아계신 아버지 하나님! 은혜를 감사드립니다. 연약하고 부족한 우리들을 사랑해 주시어서 하나님의 백성 삼아주시고 사랑과 은혜 가운데 호흡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니 감사합니다. 교회와 우리 삶의 주인 되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 교회를 사랑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주님께서 천하보다 한 영혼을 더욱 사랑하신 것 같이 한 영혼의 소중함을 잃지 않는 교회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성령의 은혜 가운데 진행하여 평안과 강건한 교회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 쓰임 받는 성도,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도구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세상의 것이 아닌, 하나님의 거룩함을 늘 묵상하고 기도하며 거룩하심에, 부르심에 늘 순종하는 우리 모두가 늘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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