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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불평의 덫 (출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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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평의 덫 (출 17:1-7)

 
제가 하루는 금요심야기도회를 준비하다가 고민에 빠진 적이 있습니다. ‘금요 기도회에 참석하는 사람들은 늘 정해졌는데 고정된 사람을 대상으로 내가 이렇게 강도 높은 신앙 훈련을 지속해야 될 이유가 무엇인가? 내가 온 힘을 다하여 성도님들에게 은혜를 부어드리지만, 이렇게 상당 기간 은혜를 받았다면 이제는 남을 가르칠 수 있는 입장에 있어야 되는데 성도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구한 날 은혜를 또 받겠다고 찾아오니, 이런 모임을 통하여 무엇을 이루어야 되는가?’ 제 고민을 이해하시겠습니까? 그 때 주님의 세미한 음성이 제 마음을 울렸습니다. ‘은혜는 누적되는 것이 아니고 그때그때 성도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이다.’ 저는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한 적이 없었는데, 정말 일리가 있는 깨달음이었습니다.

우리가 매일 먹는 음식은 누적되지 않습니다. 만일 매일 섭취하는 영양분이 누적된다면? 상상만 해도 끔찍하지요. 우리는 킹콩처럼 커졌을 것입니다. 우리가 매일 먹는 음식은 그 날의 양식이에요. 그 날의 배고픔을 채워주고 그 날에 필요한 영양분을 공급하는 것입니다. 내가 어제 굶어 죽지 않고 오늘까지 살 수 있었다는 사실이 어제 먹은 식사의 효과를 증명하는 것입니다. 오늘까지 생존하도록 도와준 것입니다. 어제도 밥을 먹었는데 왜 오늘 또 먹느냐? 배가 고프기 때문이고 오늘의 일용할 양식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만일 하나님의 은혜가 누적된다면 여러분은 지금쯤 다 신학박사가 돼야 되고, 다 설교자가 돼야 되고, 다 선지자가 돼야 옳습니다. 주일 예배뿐만 아니라 수요일, 금요일, 새벽기도까지 빠지지 않고 참석해서 지난 십 수 년 동안 고강도의 말씀을 섭취하셨다면 신학박사 학위를 몇 개 따도 될 만큼의 분량을 공부한 것입니다마는 여러분이 그렇게까지 유식한 것처럼 보이지 않아요. 설교말씀은 누적이 되는 것이 아니고 그날그날 주시는 영혼의 양식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신앙을 버리지 않고 여기까지 오실 수 있었다는 사실은 그 동안 하나님의 말씀이 헛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발전의 증거를 바랍니다. 만일 수십 년 동안 신앙생활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어떠한 발전이나 성장의 증거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이상한 것입니다. 자녀에게 영양분이 풍성한 음식을 먹이는데도 불구하고 키가 크지 않는다면 그것은 슬픈 일이고 이상한 것입니다.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지금까지 무얼 먹었는지 기억은 하지 못하더라도 그 결과로 키가 자라고 체중이 늘어야 정상이지, 아무런 성장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영양이 부실했거나 몸이 병든 것입니다.

제가 중학교 3학년 때 캐나다로 이민을 가서 대학에 진학할 때까지 5년이라는 세월이 걸렸습니다. 사실 중학교 3학년은 애매한 시점입니다. 좀 더 일찍 가야 영어를 익힐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되는데 중학교 3학년은 애매한 시점이었습니다 마는 외국어는 쉽게 습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대화나 듣기는 쉽게 배울 수 있더라도 읽기와 쓰기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저는 캐나다의 고등학교가 13학년까지 있다는 사실을 저에게 유익하다고 판단하고 5년이라는 세월을 충분히 사용하려고 애를 썼고 그리고 계획대로 돼서 대학에 진학했을 때 공부하는 데에 아무런 어려움을 겪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1991년에 귀국해서 한국목회를 하게 된 후에 종종 저보고 한국말을 잘 한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잘하긴? 말하는 직업인데 당연하지요. 원래부터 잘했고 귀국한 지 지금 몇 년인데, 수십 년을 살았는데도 한국어 실력이 늘지 않는다면 그건 이상한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마음속에 이런 생각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실력은 늘지 않더라.’ 그렇기 때문에 실력이 느는 것을 보면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언어 실력은 느는지 안 느는지 측정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신앙이 느는지 안 느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느냐? 이것은 중요한 문제입니다. 신앙이 성장하는지 안 성장하는지 이것은 세 가지 관점에서 알 수 있습니다: 남이 보는 관점, 내가 보는 관점, 하나님이 보시는 관점입니다.

먼저 남이 보는 관점입니다. 자녀를 키우시다가 가끔 아이가 성장했다는 사실을 깨달으실 때가 있지요? 깜짝깜짝 놀라실 것입니다. 애가 평소에는 무관심과 무개념으로 사는 것 같은데 어느 날 대화를 해보면 아이의 생각이 성숙했다는 것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부모가 가장 대견하게 느낄 때가 그런 때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 ‘내가 어렸을 때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여기 세 가지를 말하고 있는데 말하는 것, 깨닫는 것, 생각하는 것. 우리가 어렸을 때는 말하는 것, 깨닫는 것,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다고 했습니다. 이 세 가지 부분에서 인간의 성숙을 엿볼 수 있는 것입니다. 아마 남들이 여러분에게 ‘집사님, 신앙이 많이 자라셨어요.’ 이렇게 말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만 여러분에게 변화가 있다면 남들도 그것을 눈치 챌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 내 자신이 보는 관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세월이 빨리 지나간다고 말하는데, 세월이 빨리 지나가는 것처럼 느끼는 사람은 지나간 세월동안 별로 특별한 일이 없었다는 얘기에요. 특별히 기억할만한 것이 없기 때문에 세월이 빨리 지나가는 것처럼 느끼는 것이고, 반대로 많은 일이 벌어졌을 때는 세월이 꽉 찬 것 같고 늦게 지나가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방이 텅 비었을 때보다도 방에 가구가 가득 있을 때 더 방이 커 보이는 것과 같은 원리에요. 지나간 세월동안 내가 어떤 경험을 했고 어떤 변화를 겪었는지를 통해서 내 신앙과 인격의 성장을 스스로 점검할 수 있습니다.

야곱이 20년이라는 세월을 외삼촌의 집에서 보내다가 고향으로 돌아올 때 자기의 삶의 재고정리를 했지요. 자기가 처음 갔을 때는 빈 몸이었는데 20년이 지난 후에는 열두 명의 아들과 많은 가족과 또 사람과 소유를 가지고 돌아오게 되었는데 외적인 것뿐만이 아니고 그의 인생에 있어서 상당한 성장과 변화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스스로 깨달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의 신앙이 성장하게 되면 역량이 커지고, 그릇이 커지고, 더 많은 것을 담을 수 있게 되고, 더 많은 일을 감당할 수 있게 되고, 더 많은 사람을 섬길 수 있고, 더 많은 사람을 건사할 수 있게 됩니다. 나무의 나이테를 통하여 나이를 알 수 있듯이 우리도 내면의 나이테를 통하여 우리의 성장을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하나님이 보시는 관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너 많이 컸네.’ 이런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는 다 고만고만하기 때문에. 다 어린 양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과거에는 하시지 않던 말씀을 하실 때에 우리를 컸다고 보시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과거에 하시지 않던 말씀을 하실 때. 그래서 예수님도 당신이 부활하신 후에야 베드로에게 장차 베드로가 어떤 죽음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지를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전에 말씀하셨다면 베드로가 감당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전에 하시지 않던 말씀을 하셨다는 사실에서 베드로가 컸다는 것을 예수님이 인정하시는 것이 된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과거엔 맡기지 않던 일을 맡기실 때, 우리가 컸다고 보시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모세가 나이 40이 되었을 때 혈기로 애굽 사람을 쳐 죽였는데 하나님은 그때는 모세를 쓰시지 않다가 미디안 광야에서 장인의 양을 40년 동안 치고 난 후에 그 때 비로소 하나님이 모세에게 새로운 일을 맡기셨습니다. 그렇다고 모세가 완벽한 사람이 된 건 아니지만 적어도 과거에는 감당할 수 없었던 일을 감당할 수 있는 그릇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영적으로 성장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경험을 했더라도 그것이 우리의 영적인 성장으로 이어지지 않을 경우에는 그 이유가 무엇이냐? 그 이유는 단순합니다. 불평으로 세월을 보냈을 경우입니다. 아무리 많은 귀중한 경험을 했더라도 불평으로 세월을 보냈다면 그 모든 것이 우리에게 영적인 유익이 되지 않고 영적인 성숙을 가져다주지 않습니다. 그게 바로 오늘 본문의 이스라엘 백성의 경험입니다. 이들이 40년 광야에서 보낸 기간은 아주 귀중한, 어느 누구도 겪지 못한 그들만이 유일하게 가진 경험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애굽에서 건져 내시고, 홍해바다를 가르고 건너가게 하시고, 40년 동안 만나를 먹게 하시고, 반석에서 물이 나오게 하시고,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이 세상의 어느 민족도 이러한 경험을 한 민족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이 모든 경험이 그들에게 유익이 되지 못하고 그래서 결국은 갈렙과 여호수아를 제외한 애굽에서 나왔던 모든 세대가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그 말은 광야의 경험이 그들을 성숙하게 만들지 못했다는 얘기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냐? 오늘 본문에 나오는 패턴이 40년 동안 지속됐기 때문입니다. 불평하고 원망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백성이 모세와 다투어 가로되 우리에게 물을 주어 마시게 하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 다투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 ‘거기서 백성이 물에 갈하매 그들이 모세를 대하여 원망하여 가로되…….’ 그들이 모세에게 원망했다는 말은 모세에게만 원망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에게 원망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모세를 통하여 이들을 건져내신 것이기 때문에 모세에게 하는 말은 하나님에게 하고 싶은 말이에요. 모세에게 원망했다는 말은 하나님을 원망했다는 말이고 그 말은 불평하며 살았다는 얘기입니다. 이것이 한두 번 발생한 것이 아니고 40년 내내 지속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만 원망을 한 게 아니고 모세도 마찬가지에요. 모세가 40년 동안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있는 동안에, 40년이면 엄청나게 긴 세월이 아닙니까. 40년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섬겼다면 장족의 발전을 해야 마땅한데 모세는 그렇게 하지 못하고 본인도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그가 미디안에서 장인의 양을 치던 40년 동안은 엄청나게 성장한 것 같은데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있을 때는 얼마나 성장했는지 불분명합니다. 

그 이유는 모세 자신도 그 40년을 불평하면서 보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4절에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내가 이 백성에게 어떻게 하리이까’ 사람은 마음이 불만스러울 때 내 백성이라고 하지 않고 이 백성이라고 합니다. 내 자식이라고 하지 않고 이 자식이라고 합니다. 우리 교회라고 하지 않고 이 교회라고 합니다. 벌써 모세가 내 백성이라고 하지 않고 이 백성이라고 말하는 것은 마음에 원망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백성에게 어떻게 하리이까 그들이 얼마 아니면 내게 돌질 하겠나이다’ 그런데 이것이 모세에게도 패턴이 되었습니다. 모세는 백성에 대하여 하나님에게 불평했고 백성은 모세에 대하여 하나님에게 불평했습니다. 서로 불평을 한 것입니다. 이 다음 번에 백성이 물을 달라고 할 때는 모세가 화가 나서 지팡이로 반석을 때리기까지 했습니다. 그것은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고 모세의 심리상태를 보여준 것입니다.

영적 성숙은 어디에서 옵니까? 고난을 인내하는 데에서 옵니다. 인내한다는 말은 불평하지 않고 묵묵히 감내한다는 뜻입니다. 당시에는 고통스럽지만 잘 견디면 그 결과로 우리의 그릇이 커지고 하나님이 우리를 인정하십니다. 그런데 불평하는 건 인내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이 겪는 불편함으로 인하여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했고, 모세는 자기가 겪는 고통으로 인하여 백성과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탓했어요. 그렇기 때문에 40년의 특별한 경험이 이들에게 유익이 되지 못하고 배울 것을 배우지 못했고 결국 백성도 그렇고 모세도 그렇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은 것입니다. 

불평한다는 말은 어리광을 피운다는 말이에요. 어리광은 애들이 피우는 것입니다. 성숙한 자가 되려고 하면 어리광을 피울 수 없습니다. 십자가가 무겁다고 어리광을 피우는 사람은 십자가를 지는 것이 아닙니다. 

홈랜드라는 미국 드라마가 있습니다. 그 홈랜드에 다음과 같은 대사가 나옵니다. 홈랜드라는 것은 미국의 본토방위국을 말합니다. 홈랜드에서 고위직을 맡은 Saul이란 사람이 자기 아내와 대화하는 중에 이런 말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나는 이 일에 적합하지 않아.’ 그런데 아내가 아주 날카로운 질문을 합니다. ‘지금 누구 들으라고 그 말을 하느냐? 누구를 설득하려고 하느냐?’ 그랬더니 남편이 ‘당신, 나 자신, 나도 모르겠네.’

그러나 저는 압니다. 지금 그 사람이 누구를 설득하려고 하는지. 하나님을 설득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하는 말이에요. ‘저는 이 일에 적합한 사람이 아닙니다. 저는 이 일을 감당할 뜻도 없고 능력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잘못 고르셨습니다. 저는 이 짐을 지고 싶지 않습니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모세도 40년 동안 그 말을 되풀이했습니다. ‘이 일이 저에게 맞지 않습니다. 사람을 잘못 고르셨습니다. 애초부터 이 일은 저와 맞지 않았습니다.’ 그런 말을 한다고 그 직분을 덜 수 있다는 말이냐? 그게 아니에요. 

수고는 수고대로 하면서, 고생은 고생대로 하면서 그것이 발전이 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불평하는 사람이 세상에는 많습니다. 평소에는 그런 말을 안 하지만 하나님에게 대놓고 불평하진 않아요. 가족과 대화할 때 그런 말을 합니다. 친구에게 말을 하다가 그런 말을 하고 술에 취하면 그런 말을 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하나님에게 하고 싶은 말이에요. 자신의 삶에 대하여, 자신의 의무에 대하여, 자기가 진 십자가에 대하여 나는 애초부터 이것을 원치 않았다느니, 나는 이 일에 합당한 사람이 아니라느니, 이런 말을 되풀이하면서 사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런데 희한한 것은 정작 그 짐을 덜기를 원하느냐? 그건 아니라는 사실이에요. 이스라엘 백성이 이렇게 불평하지만 그럼 너희 애굽으로 돌아갈래? 그건 아닌 것입니다. 천만의 말씀이지,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애굽에서 하나님께 건져달라고 부르짖었는데 이제 광야생활이 어렵다고 돌아갈 수는 없는 것이지요. 너희 애굽으로 돌아갈래? 라고 묻는다면 돌아갈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모세에게도 그럼 다른 사람이 너의 역할을 하면 좋겠느냐? 고 묻는다면 아니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럼 왜 피할 수 없는 운명에 대하여 이스라엘 백성이든 모세든 그렇게 불평을 하는 것입니까? 어리광을 피우는 것입니다. 사람이 어리광을 피우는 이유는 그렇게 하면 누가 불쌍히 여겨 주리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누가 사랑하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어리광을 피우는 것인데 하나님에게는 통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어리광을 피운다고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느냐? 아니에요. 차라리 묵묵히 참는 사람을 불쌍히 여겨주시지, 기회만 있으면 자기가 얼마나 불쌍한지를 하나님께 일깨워 드리려는 사람을 하나님은 귀찮게 여기시고 귀를 닫으십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믿음을 도와주지 못합니다. 오늘 본문 7절에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다투었음이요 또는 이들이 여호와를 시험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아닌가 하였음이더라’ 이들이 어리광을 피운 것은 하나님을 의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말 우리 가운데 계시느냐 안 계시느냐 의심한다는 얘기에요. 하나님을 의심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계십니다. 묵묵히 듣고 계십니다. 우리의 형편을 하나님이 모르시는 것이 아니에요. 다 알고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내하는 자에게 상을 주시는 것입니다. 

‘네가 맡은 일 성실히 행할 때에 주님 앞에서 상 받으리, 주가 베푸신 은혜를 감사하며 너 십자가 지고 가라. 즐거운 마음으로 십자가 지고 가라. 네가 기쁘게 십자가 지고 가면 슬픈 마음이 위로받네.’ 어차피 져야 될 십자가라면 즐거운 마음으로 지고가야 그것이 나에게 유익이 됩니다. 어차피 져야 되는 십자가인데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면 기쁘게 지고 가야 그것이 나에게 유익이 되지, 지고 가는 내내 불평하게 되면 십자가는 십자가대로 고통스럽고 불평은 불평대로 고통스럽고 유익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린아이처럼 말하고 깨닫고 생각할 때는 지나갔습니다. 장성한 자의 분량에 이르러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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