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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대장부답게 담대하라 (왕상 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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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부답게 담대하라 (왕상 2:1-4)


큰일을 한 사람들을 보면 대장부답게 강하고 담대한 모습들을 보일 때가 많습니다. 고 정주영 현대 그룹 회장도 담대했던 분이라고 하더군요. 그러니까 조선소도 없는 상황에서 대형선박을 수주하는 기적도 이루어낸 것 아니겠습니까? 일반 사람들이라면 생각도 못할 일 아닙니까. 정주영 회장은 빨간 신호등이 켜 있을 때 거의 대기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기사에게 이렇게 말했답니다. “가자! 빨리 가서 일하자. 딱지를 떼고 돈도 내어 국가도 유익하고 나도 일하고 서로 좋게 하자.” 그리고 달려가면서 일하였다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들도 대장부답게 담대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윗은 훌륭한 왕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 마음에 맞는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은 여러 면에서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전쟁에서는 싸움도 잘했고, 글도 잘 썼고, 음악성도 뛰어났습니다. 정치도 잘해서 그가 왕으로 있는 동안 나라는 태평성대를 이루었습니다. 또 전쟁도 잘해서 이스라엘을 주변 나라들로부터 조공을 받는 나라로 만들었습니다.
   
1절에 보니 ‘다윗이 죽을 날이 임박하매’라고 말합니다. 다윗처럼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백성들이 존경했던 사람도 죽음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들은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지난주에 교우 한 명을 주님께 보냈습니다. 참으로 슬픈 일이지만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그분이 우리보다 조금 먼저 갔을 뿐이지 결국 우리도 다 그 길로 가야 합니다.
   
다윗은 죽으면서 아들 솔로몬을 왕으로 세웠습니다. 그리고 어린 솔로몬에게 유언을 합니다. 본문이 그 유언의 내용입니다.

오늘 설교는 다윗의 유언 중에서 2절에 ‘너는 힘써 대장부가 되라’라는 말씀을 가지고 ‘대장부답게 담대하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대장부는 히브리말로는 ‘게베르’인데 남자를 말합니다. 하지만 그 의미는 ‘남자가 되라’는 말이 아니라 ‘사내답게 씩씩한 남자가 되어라’, ‘강하고 담대하라’라는 뜻입니다. 중국어 성경에는 ‘용사’라고 번역되었다고 합니다. 이 말은 교만하고 과격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겸손하고 부드러워야 하지만 용기 있고 담대하라는 의미입니다.
   
다윗이 솔로몬에게 ‘대장부답게 담대하라’고 유언한 이유는 솔로몬이 어린 나이에 왕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왕상3:7에 보면 솔로몬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내용 중에 ‘종은 작은 아이라 출입할 줄을 알지 못하고’라는 말이 나옵니다. 솔로몬이 20살에 왕이 되었다는 설과 14살에 왕이 되었다는 설이 있습니다. 몇 살인지 성경적으로 증명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어린 나이에 왕이 되었다는 것만은 틀림이 없습니다. 다윗은 너무 솔로몬이 어린 나이에 왕이 되어서 졸장부가 될까 염려가 되어서 힘써 대장부가 되라고 유언을 한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강하고 담대하라’는 말씀이 많이 나옵니다. 왜 그런 말이 많이 나오는지 아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신자들이 남자건 여자건 상관없이 졸장부가 아니라 대장부가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설교는 두 부분을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우리는 무엇에 대장부답게 담대해야 하는가입니다. 둘째, 우리는 어떻게 담대해질 수 있는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1. 무엇에 대장부답게 담대해야 합니까? 
   
1) 꿈을 꾸는 일에 
   
다윗은 솔로몬이 큰 꿈을 꾸기를 원했습니다. 단지 수명이 긴 왕이 아니라 이스라엘 나라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왕국을 꿈꾸길 원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솔로몬에게 3절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지켜 그 길로 행하라고 유언했던 것입니다.
대장부는 대장부다운 생각을 합니다. 키가 크다고 대장부가 아니며 기골이 장대하다고 대장부가 아닙니다. 저는 제 키보다 평균 10cm나 큰 사람들 틈에서 군대생활을 했습니다. 키 크고 싱겁다는 말이 있는데 다는 아니지만 정말 그런 사람들이 좀 있습니다. 별일 아닌데 쩨쩨하게 구는 것을 보면 아주 속이 터집니다. 돈이 많다고 대장부가 되는 것도 아니고, 큰 집에 산다고 대장부가 아닙니다. 높은 자리에 올라갔다고 대장부라고 불러 주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을 보고 대장부라고 말합니까? 크게 생각하는 사람이 대장부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큰 꿈을 꾸셨던 분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안일만 생각하셨던 분이 아닙니다. 인류의 구원이라는 큰 꿈, 하나님의 나라 회복이라는 위대한 꿈을 꾸신 분입니다. 그래서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낮고 천한 이 땅에 오셔서 33년 동안 고난을 당하셨고 결국에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인류 구원의 길을 열어 놓으신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꿈을 꾸는데 있어서도 대장부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잘 먹고 잘 사는 정도의 꿈은 대장부다운 꿈이 아닙니다. 남들보다 더 벌고 남들보다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 꿈, 이 세상에서 성공하는 꿈 정도를 가지고는 대장부다운 꿈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윌리암 케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큰일을 도모하라”라고 외쳤습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위대한 비전에 사로잡히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내가 원하는 나의 꿈이 아닌 위대하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위대한 비전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행 13:36에 보면 다윗은 평생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섬기다가 잠들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욕망을 목표로 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꿈을 목표로 살다가 죽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도 다윗처럼 하나님이 주신 꿈을 위하여 위대한 대가를 지불하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2) 큰일을 행할 때 
   
솔로몬은 어린 나이에 다윗을 이어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어린 솔로몬에게는 왕의 직분을 행하는 것은 너무나 큰일 이었습니다. 아마도 솔로몬은 두려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솔로몬에게 대장부답게 담대하라고 유언을 한 것입니다. 솔로몬은 다윗의 유언처럼 대장부답게 담대했습니다. 그 결과 왕이라는 큰일을 잘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렘 1장에 보면 예레미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열방의 선지자로 부르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선지자가 되는 것도 큰일인데 열방의 선지자로 부르셨으니 얼마나 큰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까. 이 때 예레미야의 나이도 본문의 솔로몬처럼 어렸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두려워하는 예레미야에게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강한 자들로부터 구원할 것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대장부답게 사역을 감당했고 그 결과 위대한 선지자가 되었었습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으며 신앙생활 하다보면 주님께서 큰일을 명하실 때가 있습니다. 나의 힘과 능력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큰일을 명하실 때 우리 그리스도인은 대장부답게 담대해야 합니다. 우리가 대장부답게 담대하게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큰일을 시도하면 하나님은 능히 그 일을 감당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29살 때 교회를 개척하라는 성령의 인도를 받았습니다. 저는 가진 돈도 없었고 교회개척이 그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큰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성령님의 인도하심이 확실했기 때문에 대장부답게 담대하게 순종했습니다. 그랬더니 교회를 개척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주셨고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목회를 감당하게 해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에게 우리가 감당할 수 없어 보이는 큰일을 명하실 것입니다. 그럴 때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강하고 담대하십시오. 대장부답게 담대하게 순종하셔서 하나님이 쓰시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3) 하나님의 말씀을 행할 때 
   
다윗은 솔로몬에게 하나님의 명령을 지켜 그 길로 행하는 일에 대장부답게 담대하라고 유언을 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면 담대함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현실과 하나님의 말씀에는 큰 괴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면 손해를 볼 것 같고 때로는 크게 위험해 보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길갈에서 할례를 행하라고 하셨습니다. 할례는 포경수술인데 전투를 해야 할 남자들이 포경수술을 한다는 것은 아주 위험한 일입니다. 그 때 상황이 어떤 상황입니까? 가나안 족속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주목하고 있었습니다. 만약 이스라엘 백성들의 할례 소식이 가나안 사람들에게 알려지기라도 하면 가나안 사람들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이 때다 싶어서 바로 공격을 할 텐데 할례를 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어떻게 순종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도움으로 가나안을 정복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시고, 설교를 통해서 말씀하시고 성령의 음성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행한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닙니다.
   
성경은 주일성수를 명하시지만 직장생활을 하다보면 주일을 범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이때 나 혼자 ‘주일성수해야 하니까 교회 가겠습니다.’라고 말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또 성경은 십일조를 하라고 명하시지만 나는 경제적으로 어렵습니다. 월급 탄 것을 다 써도 부족한데 그런 상황 속에서 십일조 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우리들은 종종 성령의 음성을 듣거나 감동을 받습니다. 교회에서 무슨 일을 할 때 동참하라는 성령의 인도를 받을 때가 있습니다. 작정기도를 명하시거나 또 다른 어떤 헌신을 요구하실 때가 있습니다. 또 일정액의 헌금을 감동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것도 내가 순종하기에는 너무나 벅찬 금액의 감동이 올 때도 있습니다. 나의 상황으로 볼 때는 정말 순종하기가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감동에 대장부답게 담대하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길갈에서 할례를 행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담대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형통케 하시는 것입니다. 3절 하반절에 보니 “그리하면 네가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할지라”고 말씀합니다. 형통하는데 ‘그리하면’ 이라는 조건이 있습니다. 말씀대로 행하면 이라는 조건입니다. 말씀대로 행할 때 담대하십시오.

4) 대적을 만날 때 
   
5절에 보면 다윗이 평생 자기 곁에 있었으나 평생 자기를 힘들게 했던 요압 이야기를 합니다. 다윗에게는 요압이라는 대적이 있었던 것처럼 솔로몬에게도 솔로몬을 힘들게 하는 대적이 있을 것입니다. 다윗은 솔로몬이 대적을 만날 때 주눅 들지 말고 대장부답게 담대하라고 유언한 것입니다.
시골에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무서운 사냥개가 요란스럽게 으르렁 거리고 있어서 주인이 나가 보았습니다. 사냥개가 오리 한 마리를 잡았습니다. 그러자 오리들이 한꺼번에 사냥개에게 덤벼들고 있었습니다. 오리들이 담대하게 사냥개에게 덤비니 사냥개가 당황하고 무서워서 벌벌 떨면서 으르렁거리고 있더랍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많은 대적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 대장부답게 담대하시길 바랍니다. 주먹을 쓰며 싸우라는 말은 아닙니다. 성경적인 원칙을 지키며 담대하게 믿음으로 행하라는 말입니다.
   
박근혜 대통령의 인기가 계속 상승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분의 인기가 상승하는 원인은 G20에 참석해서 외교를 잘했고, 베트남과 세일즈 외교를 잘해서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분이 원칙을 세우고 원칙대로 행동하는 모습이 국민들의 신뢰를 얻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개성공단 문제를 처리할 때 단호한 태도가 북한을 머리 숙이게 만들었습니다. 어떤 정권에서도 볼 수 없었던 모습입니다. 사실 저는 개성공단은 차라리 폐쇄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북한이 그 돈 가지고 뭐하겠습니까? 전쟁준비하지요. 북한은 재정이 차단되어야 두 손을 들게 되어있습니다. 죽어가는 김정은 정권에 링거를 놔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박대통의 소신 있는 모습은 좋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박대통령을 위해서 기도하면서 그가 원칙을 갖되 성경적인 원칙을 가질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을 만날 때 대장부답게 담대하게 원수도 사랑하고 원수를 위하여 기도하라는 성경적 원칙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5) 사람의 시선이 신경 쓰일 때 
   
다윗은 이스라엘의 역사에 남는 성군이었습니다. 솔로몬이 다윗의 뒤를 이어 왕이 된다는 것은 상당히 부담스러운 일입니다. 사람들은 솔로몬을 주목하며 다윗과 비교할 것입니다. 백성들은 ‘다윗은 이랬는데 솔로몬은 안 그러네’, ‘다윗은 저렇게 하지 않았는데. 솔로몬은 왜 저러지’라고 말할 것입니다. 다윗은 그것을 알았기 때문에 대장부답게 담대하라고 유언을 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며 살아갑니다. 이것이 경건생활에 큰 방해요소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마 6:1에서 구제와 기도와 금식이라는 기독교신앙에 있어서 중요한 세 가지 덕목을 말씀하시기 전에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사람 때문에 흔들리는 신앙은 아주 위험합니다.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하지만 우리는 대장부답게 담대하여 항상 주님을 바라봐야 하고 주의 말씀의 원칙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고전 3:1-3을 보면 영적인 어린아이와 영적으로 장성한 자를 비교하여 말합니다. 두 가지 차이점을 말했습니다. 하나는 말씀에 대한 소화력입니다. 음식물에 체하듯이 설교를 듣고 시험에 든다든지 걸림이 되는 것이 많다면 영적인 소화력이 약한 영적인 어린아이입니다. 어떤 설교를 들어도 아멘으로 받을 수 있고 말씀으로 인한 시험이 없다면 신령한 사람입니다. 또 하나는 주님만 바라보고 사느냐 사람을 따라 행하느냐입니다. 영적으로 어린아이는 사람을 따라 행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행동하지 않고 사람을 따라 움직인다면 영적인 어린아이입니다. 영적으로 장성한 사람은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사람들이 무엇을 좋아하든 개의치 않습니다. 대장부답게 담대하게 오직 주님만 바라보고 주님이 원하시는 것을 따라 행동합니다.
   
저는 성도들이 주변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사람 때문에 신앙이 흔들리고 사람 때문에 교회생활이 흔들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대장부답게 담대하게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의 말씀대로 행하기를 바랍니다.

6) 하나님께 드릴 때 
   
다윗은 성전을 건축하고 싶었으나 전쟁을 많이 해서 피를 많이 흘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허락지 않으셨습니다. 주의 일은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야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윗이 성전을 건축할 수 없으니 그 과업은 솔로몬이 감당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성전건축은 생각처럼 단순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특히 많은 물질이 들어가야 했습니다.
   
솔로몬은 즉위 4년에 건축을 시작해서 11년 8월에 완성하였습니다. 7년 6개월 걸린 셈입니다. 그런데 왕상 5장을 보면 역군이 3만 명인데 3교대이니 매일 일하는 역군이 1만 명이었습니다. 짐꾼이 7만 명, 돌 뜨는 사람들이 8만 명 이었고 감독 3,300명이었으니 모두 163,300 명이었습니다. 한 명 당 인건비를 싸게 잡아서 5만원씩 지불하면 하루에 81억6천5만원입니다. 일 년에 300일 일한다고 생각하면 인건비만 1년에 2조4천4백9십5억입니다. 7년 6개월을 계산하면 18조6천1백6십2억입니다. 인건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성전건축에 들어간 금이 10만 달란트라고 하는데 금값만 약 1천조 가까운 돈입니다. 우리는 1억도 큰돈인데 1천억도 아니고 1천조라니 보통 사람의 심장으로는 성전 건축을 감당할 수 있었겠습니까. 대장부답게 담대하지 않으면 성전건축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돈을 쓰는 것에 쩨쩨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강문호목사님이 지방에 내려가서 한 분과 목욕탕에 들어갔습니다. 목사님이 두 사람 목욕비 7,000원을 내고 들어갔습니다. 조금 지났는데도 그 분이 들어오지 않아서 목사님이 이상히 여겨 나가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그이와 목욕탕 주인이 실랑이를 벌이고 있더랍니다. 그분이 그 목욕탕 단골이라 평소에 3천 원씩 내고 들어갔는데 강목사님이 7천원을 내고 들어갔으니 강목사님이 낸 500원을 돌려달라고 하고 있고, 목욕탕 주인은 들어간 손님이 낸 것이니 돌려줄 수 없다고 하더랍니다.
   
또 한 사건이 있습니다. 강목사님이 어느 분과 택시를 탔습니다. 택시를 타고 가면서 계속 택시 기사에게 전도를 하였습니다. 택시비가 7,900원이 나왔습니다. 목사님이 8,000원을 내고 먼저 내렸습니다. 그런데 목사님과 함께 택시를 탄 그분이 뒤따라 내리면서 100원을 달라고 하여 받아 가지고 내리더랍니다. 목사님이 얼굴이 뜨거워지고 전도한 것이 후회가 되더랍니다.
   
하나님께 드리는데도 너무 쩨쩨한 분들이 있어요. 어느 교회 집사님이 주일날 교회에 나가면서 천 원짜리 몇 장만 주머니에 넣고 지갑은 서랍에 빼놓고 간답니다. 그것을 본 남편이 “아니, 친구 만날 땐 챙기는 지갑을 교회 갈 땐 왜 두고 가느냐?”고 하니 그 집사님이 “지갑을 갖고 가면 헌금할 때 부르는 ‘내게 있는 모든 것을 아낌없이 바치네’라는 찬송을 부를 때마다 너무 괴로워서요”라고 하더랍니다. 친구만나도 밤 먹고 차 마시는데 몇 만원씩 쓰는데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은 그렇게 인색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겠습니까.
   
전 개인적으로 누가 얼마를 헌금했는지 웬만하면 말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몇 년 전에 우리교회가 주차장 땅을 살 때 많은 분들이 헌금해주었습니다. 저는 특히 김기범 장로님 가정에서 드린 헌금에 크게 감동을 받았습니다. 장로님 댁은 그 당시 월세를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집 보증금보다 더 큰 돈을 헌금하셨습니다. 대장부답게 담대하게 드린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후 하나님이 아니시면 하실 수 없는 큰돈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제가 지난 금요일에 장로님 부인인 강윤정 권사님 기도를 하면서 지금이 그 때의 믿음이 필요하다는 기도가 나오더군요. 하나님께서 또 헌금을 원하시는 것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습니다. 아마 권사님 마음에 어떤 감동을 주시지 않았나 싶습니다. 혹시 감동을 받으셨다면 그것이 무슨 감동이든 대장부답게 순종하기를 바랍니다.
   
성도들은 모두가 하나님의 종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주시는 감동이라면 순종하려는 기본자세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만약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에 순종한다면 하나님은 그에 합당한 열매를 주시는 분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심는 대로 거두게 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당장은 손해를 보는 것 같아도 길게 보면 결코 손해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계산 할 수 없이 돌려주시는 분입니다.

2. 어떻게 하면 대장부답게 담대할 수 있습니까? 
   
1) 의롭게 살면 
   
잠 28:1입니다.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의인은 사자 같이 담대하니라” 의인은 사자 같이 담대합니다. 의롭게 사십시오. 담대할 수 있습니다. 악하게 살면 담대할 수 없습니다.
일본에 흉악한 살인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십 년이 지나도 범인을 잡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한 교통경찰이 범인을 잡았습니다. 한 교통경찰이 점심 식사를 하러 급하게 식당으로 뛰어 들어가니 식사를 하고 있던 사람이 갑자기 도망을 쳤습니다. 경찰은 수상해서 그 사람을 따라가 잡았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흉악한 살인 강도였던 것입니다. 도둑은 제 발이 저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의롭게 살면 겁나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십시오. 대장부답게 담대할 수 있습니다.

2)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믿음을 가지면 
   
다윗은 대장부답게 담대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시 3:6에 보면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 진 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이다”고 말했습니다. 몇 명만 나를 에워싸도 두려울 텐데 다윗은 천만인이 자기를 에워싸도 두렵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가 바로 앞 절에 나옵니다. 시 3:5입니다.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다윗은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하심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대장부답게 담대했던 것입니다.
   
삼상 16장부터 왕상 2장까지를 보면 하나님이 다윗과 함께 했다, 하나님께서 다윗과 함께 계시기를 원한다는 말이 9번이나 나옵니다. 마 28:20을 보면 주님께서 약속하셨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다함께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 3번만 해봅시다.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대장부답게 담대하십시오.

3) 길게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셨습니다. 그 때 기도의 내용을 보면 십자가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완전하신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완전한 사람이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담대하게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담대하게 십자가를 지실 수 있었던 이유는 3가지입니다. 

첫째,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죽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이라면 목숨까지 내걸고 순종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둘째,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의 고통을 받아드리셨던 것입니다. 셋째, 길게 보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죽음만 보셨던 것이 아니라 죽음 이후의 부활을 보셨고, 자신의 고통만 보셨던 것이 아니라 고통 넘어 있는 하나님의 기쁨과 우리의 구원을 보셨던 것입니다.
   
[거짓말 13 가지]라는 책이 있는데 제가 읽은 것은 아닙니다. 그 책은 거짓말 같지 않은데 거짓말인 것 13가지를 분석한 재미있는 책이랍니다.
실패하였습니다. 그 때 “나는 실패하였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솔직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나는 실패자가 되었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거짓말하는 사람입니다. 실패하였지 실패자가 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길게 보지 못 하고 있는 것입니다. 실패하였어도 다시 일어나면 됩니다. 의인은 일곱 번 넘어져도 여덟 번 일어난다고 솔로몬은 말했습니다.
   
누구와 다투었습니다. 그 때 “사이가 나빠졌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진실을 말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와 원수가 되었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거짓말하는 사람입니다. 싸웠기에 그 다음에 더 친해지는 관계가 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오늘 싸웠다 할지라도 길게 보면 더 없이 소중한 사람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지금 가난하니 “난 지금 궁핍하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진실을 말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나는 가난뱅이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거짓말을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돈이 없고 궁핍할 지라도 내일은 풍성하게 역사하실 수 있는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말로 할 수 없이 부자였던 욥이 완전히 망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거름더미에서 일으키셨습니다. 그래서 전보다 갑절이나 부자가 되었습니다.
   
범사를 길게 보면 대장부답게 담대하게 행동 할 수 있습니다.
고사성어에 ‘조삼모사’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침에 셋, 저녁에 넷이라는 뜻입니다. 원래 이 말은 옛날 중국 송나라 때에 생겨난 말입니다. 저공이라는 사람이 원숭이를 좋아하여 집에서 몇 마리 키웠습니다. 그런데 날이 갈수록 원숭이가 늘어 갔습니다. 그래서 원숭이들에게 충분한 먹이를 대줄 수 없어서 저공은 원숭이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부터 열매를 아침에는 3개, 저녁에는 4개 주겠으니 그렇게 알아라.” 그러자 원숭이들은 열매를 적게 준다고 데모를 했습니다. 그래서 저공은 말을 바꾸어서 “아침에는 4개, 저녁에는 3개 주겠다”고 하니까 원숭이들은 좋아라고 하면서 데모를 중지했다는 얘기입니다. 이 ‘조삼모사’라는 말은 지금 이 순간만을 생각하고 나중은 생각하지 않는 미련한 사람을 뜻합니다. 당장 눈앞에 있는 이익만 생각하다가, 나중에는 더 큰 이익을 놓치는 사람을 뜻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미래를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죽음 후를 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볼 때 지금 어렵고 힘들어도 대장부답게 담대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떤 상황과 환경 속에서도 대장부답게 담대하시기를 바랍니다. 범사를 길게 보십시오. 그리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보혜사로 함께 하심을 믿으시고 대장부답게 담대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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