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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소망의 은혜에 감사 합시다 (딤전 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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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망의 은혜에 감사 합시다 (딤전 4:10)
  
(딤전 4:10) 이를 위하여 우리가 수고하고 힘쓰는 것은 우리 소망을 살아 계신 하나님께 둠이니 곧 모든 사람 특히 믿는 자들의 구주시라
  
유엔 사무총장을 지낸 더그 함마슐드 총장이 쓴 에세이에 이런 비유적인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콜롬부스가 탄 배가 아메리카 신대륙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 배 안의 선원중의 하나는 이 배 안에 있으면서 큰 걱정과 근심으로 가득 차 있찼있었는데 자기 고향에서 어떤 집에 구두 수선하는 집에 직공으로 있었는데 그 구두 수선하는 주인이 나이 많아서 자기는 이 배를 타고 미국까지 왔다가 돈을 좀 벌어 가지고 돌아가서 그 주인의 구두수선 가게를 인수받으려는 것이 소망입니다. 

그런데 걱정이 풍랑이 일어날 때마 다 아이고 이거 죽으면 어떡하나, 좀 시간이 늦을 때마다 아 이거 늦으면 못 가는데 이거 어떡하나, 또 가기 전에 그 노인 죽으면 어떡하나, 이걸로 걱정이 가득하였다 합니다. 신대륙을 발견하는 이 귀한, 위대한 역사에 동참한 사람이 그까짓 가게 하나에 메여 가지고, 집에 못 돌아갈까 봐 걱정하는 이 불쌍한 청년을 생각해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콜럼부스가 가진 소망은 저 앞에 있는 것이고 이 청년이 가진 소망은 저 과거에 있는, 뒤에 있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소망을 가진 존재로 세상에 태어 나온다고 합니다. 그래서 인생을 살아가면서 기대감 곧 소망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내일은 오늘보다, 다음 달은 금번 달보다, 명년은 금년보다 나아지리라는 기대가 우리에게 인생을 활기차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소망은 가치관 인생관에 따라 다를 수 있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소망은 사람으로 하여금 삶의 의미와 목적을 갖게 해줍니다. 소망은 사람의 가치관을 결정해 주고 힘 있는 삶을 살게 하는 원동력이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소망의 근거는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에 나타난 언약입니다.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 (시 62:5)하시고 하시고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롬 15:13)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실로 소망의 근원이 되십니다. 우리가 인생길에서 지치고 낙망할 때 소망의 하나님을 바라보기만 한다면 그는 자비하시고 의로우셔서 쓰러지고 넘어진 자에게 소망의 위로를 주십니다.
마치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인 놋 뱀을 바라볼 때 모든 상처와 고통이 사라지게 된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민 21:9).

이 세상은 슬픔이 많을 뿐만 아니라 역경도 많이 있습니다. 때로는 악인이 오히려 잘되는 것 같고 불의와 압제가 승리할 것 같아 보이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역경 중에서도 성도는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롬 4:18에서 아브라함은 바랄 수 없는 중에도 바라고 믿었다고 합니다. 아무리 희망이 없어 보이는 상황이라고 해도 소망의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었을 대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독자 이삭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 이삭은 이름의 뜻 그대로 웃음이며 기쁨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소망의 근원이 되셔서 그를 믿고 바라는 자에게 믿음 안에서 기쁨을 주십니다. 그 기쁨은 '말할 수 없이 영광스러운 즐거움의 기쁨'(벧전 1:8)입니다. 세상이 주는 즐거움과 족히 비교할 수 없는 영원한 기쁨을 우리의 삶에서 맛보기 위하여 소망의 하나님을 굳게 바라고 믿어야 할 것입니다. 
소망의 근거이신 하나님은 영원 전에 영생의 소망을 약속하셨습니다. 
영생의 소망을 위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약속하신 것(딛 1:2)이라 고 합니다.

그런데 소망은 말씀과 함께 한다고 합니다.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 둔 소망으로 말미암음이니 곧 너희가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골 1:5)고 합니다.

그리고 언약의 말씀을 이루신다고 합니다.
왕이 자기 처소에 서서 여호와 앞에서 언약을 세우되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여호와를 순종하고 그의 계명과 법도와 율례를 지켜 이 책에 기록된 언약의 말씀을 이루리라(대하 34:31) 하십니다.

그러므로 이 약속은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기 때문에 결코 변경되거나 폐하여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범죄 이후에도 인간에게 소망을 주는 언약을 맺으시고 성취하시며, 앞으로도 계속하여 실행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소망의 근거가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에 나타난 언약을 끝까지 붙잡고 나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유혹과 시험에 빠져 그 소망을 상실한 사람들도 있기 때문입니다.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특권을 판 에서와 같은 사람도 있고(히13:15-17), 은 삼십 냥에 그리스도를 판 가룟 유다와 같은 이들도 있습니다. 이들은 영원한 소망의 특권을 하찮은 땅의 것과 바꾼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오직 소망을 주신 하나님만을 섬기고 그 말씀을 따르는 생활을 합니다.(딤전4:10)

거듭난 은혜를 받은 성도일지라도 세상에서 극악한 일을 당하거나 고난을 당하면 일시적으로 영원한 소망을 잃고 눈앞의 현실 문제로 인해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마 13:20-22)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어떤 일을 만날지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언약하고 보장하신 은혜의 언약즉 하나님께서 동행해 주시겠다는 언약, 영생을 주시겠다는 언약을 의뢰하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협력하여 선을 이루어주시는 분임을 믿고 인내하면 다시 소망과 기쁨의 생활로 회복될 것입니다.

대부호 도널드 트럼프라는 사람은 얼마나 부자였던지 하루는 장난감 하나 사는 기분으로 2천9백만 달러짜리 요트 한척을 샀는데 이배는 5층으로 되어 있으며, 100개의 방이 있고, 초대형 냉장고 6대에는 1백 명이 3개월 동안 먹을 음식을 저장할 수 있었고 이발관, 미장원, 병원, 당구장, 식당, 오락실 등의 시설이 갖추어져 있었고, 영화관에는 800개의 영화 필름 도서실이 있었다합니다. 그러나 이 배를 사고 겨우 1년 만에 트럼프 씨는 "이 배에 있어도 전혀 즐겁지 않다"라고 말하였다합니다. 

그의 이야기는 돈으로 행복을 사려고 했으나 기쁨은 그런데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빵은 중요하다. 자유는 더 중요하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대한 신앙이다"(독일의 신학자 알프레드 델프는)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나님 없는 자유는 방종, 방탕, 탈선에 이르게 하지만 물질이 선한 물질이 되게하고, 자유로 참자유가 되게하고, 지식을 선하게 만들고, 권력을 봉사의 수단이 되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 대한 신앙이며 충성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중요하고 가치 있고 복 된 것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에 나타난 언약임을 다시 한 번 확신하고 소망의 은혜에 감사 합시다. 
  
소망의 내용은 무엇일까요?

성도가 지닌 영원한 소망은 부활과 천국의 영광된 삶입니다.
너희는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벧전 1:21)고 합니다.

사람이 한 번 죽는 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라(히 9:27)하셨으므로 사람은 반드시 죽습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성도는 다시 살리심을 받게 될 것을 믿습니다.
예수께서 죽으신 지 삼 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우리의 소망이 되어 주셨으므로 우리는 그 안에서 다시 부활할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독교 신앙의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들이 기다리는 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니이다(행 24:15)고 합니다.

부활의 소망이 없다면 기독교는 설 자리가 없는 것입니다. 바울은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을 인하여 내가 심문을 받노라'(행 23:6)고 했습니다. 그처럼 성도는 부활의 소망을 갖습니다. 성도가 갖는 부활의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만 가능합니다. 즉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성도들의 부활이 성취된다는 말입니다. 그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재림은 우리 몸의 온전한 구속을 가져다줍니다(고전 15:51). 

그래서 바울은 말하기를 피조물들이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을 바란다고 했으며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며 하나님의 양자 될 것을 기다린다고 했습니다(롬 8:19, 23). 성도들은 부활의 소망과 함께 그리스도가 속히 강림하시기를 소망하는 것입니다.

토마스 아켐피스라는 신학자는 「그리스도를 본받아」라는 책에서 말하기를 '희망을 인간이나 피조물에 두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보다 많이 가지려는 것보다 적게 바라는 것을 택하라'고 했습니다. 세상 것에 대한 많은 바람보다 한 가지라도 영원한 것에 희망을 두는 것이 현명한 생각입니다. 성도들은 땅에 것보다 '하늘에 간직한 것'에 희망을 둔 존재들입니다. 특히 죽음을 이기고 살아나신 그리스도처럼 영원한 부활의 언약을 하나님께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그것을 잡으려고 쫓아 가노라"(빌3:12)고 한 것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이 세상의 모든 소원을 다 이루었어도 죽으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은혜 안에서 영광스러운 부활을 보장받았기에 영원한 소망 속에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이 세상에서의 삶의 연륜이 많을수록 원망, 후회, 한, 불만을 더 지니게 됩니다. 자신의 희망과 뜻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자신의 노력대로 보상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저 천국에서 모든 것을 보상받는 삶을 보장받았습니다.

"생각컨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8:18)고 바울은 확신합니다.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 때문에 받았던 불이익, 그리스도 안에서 받는 고난을 저 천국에서 그 어느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영광과 존귀의 삶으로 보상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로 인한 어떤 모순된 일을 만날지라도, 손해를 볼지라도, 극악한 일을 당할지라도 영원한 소망을 잃지 않고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주로 믿는 자는 영생의 소망을 갖습니다.

베드로는 '영생의 말씀이'(요 6:68) 주께 있다고 고백했습니다. 즉 그리스도를 믿고 순종하는 자에게는 영생을 소유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또한 예수께서는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않을 터'(요 10:28)라고 하셨으며, 바울은 참고 선을 행하는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영생을 주신다고 했습니다(롬 2:6, 7). 우리는 한 번 죽지만 영원히 죽지 않는 영생의 소망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성도가 바라는 소망 중에서도 가장 큰 소망은 영광에 대한 소망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고후 3:18) 이른다고 했습니다. 즉 우리가 변하여 그리스도와 같은 영광을 받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우리가 받을 그 영광이 현재의 고난과 족히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찬란한 것(롬 8:18)이라 했으며, 그로 인하여 환난 중에서도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한다고 했습니다(롬 5:2, 3). 이와 같이 성도의 소망은 잠깐 있다가 없어질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영원한 것입니다.

사무엘 베케트의 '호흡'이라는 희곡은 막이 오르면 쓰레기가 잔뜩 어질러져 있는 무대가 등장한다합니다. 배경 음악이 흘러나오면서, 아기의 첫 울음 소리로 시작한 연극은 한 노인의 임종의 헐떡거림으로 끝이 나고 막이 내려온다 합니다. 인생은 허무하고, 존재는 덧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벧전 1:34)고 말씀합니다.

영국의 계관시인 테니슨이 어느 날 그는 시골길을 가다가 행복한 얼굴로 열심히 일하는 중년 부인을 보았다합니다. '오늘 아침에 좋은 소식이 있나 보죠?' 테니슨이 묻자 부인은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합니다. '선생님. 저는 한 가지 소식밖에 모른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 인류를 위해 죽으셨다가 부활하셨다는 소식입니다.' 테니슨도 '부인, 그것은 오래된 소식이자 새로운 소식이며 정말 좋은 소식이군요.‘말했다합니다.
소망의 내용이 부활과 천국의 영광된 삶임을 다시 한 번 확신하며 소망의 은혜에 감사 합시다. 
  

소망을 가진 성도의 생활은 어떠해야 할까요?

소망은 사람으로 하여금 삶의 의미와 목적을 갖게 해줍니다. 소망은 사람의 가치관을 결정해 주고 힘 있는 삶을 살게 하는 원동력이 됩니다.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롬 15:13)고 합니다.
'희망은 사상이다'(세익스피어)고 하기도 합니다. 고귀하고 영원한 삶의 희망을 지닌 자는 그 삶의 가치와 방식도 그것에 합당해야 합니다.

따라서 소망을 가진 성도들은 성결한 생활을 해야 합니다.
"주를 위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3:3)고 성경은 교훈합니다.

거룩한 천국의 소망을 지닌 성도들은 세속적인 풍조나 그 가치에 물들지 않는 영혼과 삶을 유지해야 합니다. 죄악, 불의, 방탕한 생활에 물든 사람에게 있어서 천국 소망은 헛된 망상으로 끝나게 될 것입니다.
나아가 소망을 가진 성도는 그 생활이 항상 기쁨과 즐거움이 되어야 합니다.

"주 안에서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느니라"(빌4:4,5)고 가르칩니다.

소망이 없는 자는 그 생활이 언제나 불만스럽고 또한 죽기를 갈망(왕상 19:4; 계 9:6).하나 소망이 있는 자는 생활에 능동적이고 모든 일을 기쁨으로 행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고후 8:2) 그리고 희망과 기쁨을 잃지 않는 자세를 보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고난을 받으면 받을수록 더 큰 영광이 기다리기 때문입니다(마 5:11, 12).

소망을 가진 성도는 인내하며 관용해야 합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고 합니다.

산모는 출산의 기쁨을 위하여 열 달의 수고와 출산의 고통을 참고 견딥니다. 그와 같이 성도들도 그가 바라는 소망이 값지고 가장 귀한 것들이기에 현재의 고통을 견디며 인내합니다. 조그만 일에도 과민하여 다투려고 하거나, 모순된 일을 만나면 금시 원망하고 불평하거나 한다면 그는 소망 없는 현실주의자와 다름없는 것입니다.

가령 몇 십억 원짜리 복권에 당첨된 사람이 얼마 있으면 그 돈을 은행에서 찾게 된다고 생각해 봅시다. 웬만한 일은 즐겁고 너그럽게 대할 것입니다.
그런데 영원한 천국의 삶을 보장받은 우리가 관용과 사랑의 생활을 하지 못한다면 그 얼마나 모순이요 비극이겠습니까?

'희망이 적으면 적을수록 많은 평화가 온다'고 하기도 합니다. 희망은 인간에게 정신의 양식이요 생활의 윤활유입니다. 그러나 유한한 세상 것에 희망을 두는 사람들은 항상 실망과 회의를 느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고 그 은혜 속에 거하는 성도들은 죽을 희망이 아니라 그는 산 소망"을 지니고 사는 특권을 누리게 됩니다." (T.W.윌슨) '소망은 강한 용기이며 새로운 의지다'(루터)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소망이면서도 믿음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바울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항상 같이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고전 13:13).

미국 볼티모어에 죤스 하킨스 병원라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병원이 있는데 그 병원에 '브룩스 로빈슨 이라는 사람을 기념하여' 라는 현판이 병원에 붙어있다 합니다. 

그는 볼티모아 야구선수 였는데 게임이 있을 때마다 몸을 던져서 정말 자기의 전 존재를 던져서 최선을 다하는 플레이가 항상 야구팬들을 열광시켰고 감동을 주었다고 합니다. 그는 그리스도인이였다라고 합니다. 그는 동시에 기도에 힘썼고 아이들을 좋아했고 병원을 찾아와서 병든 아이들을 항상 방문하기를 좋아했고 막대한 금액을 항상 헌금해 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가 늙어서 이제 죽기 얼마 직전에 벌써 볼티모아시와 병원에서는 이 사람을 기념해서 어린이 센터를 지을 생각을 갖고 한 사람을 보내어서 "당신이 죽은 다음에 당신이 어떤 사람이라고 기억되기를 원하십니까?" 라고 물었다 합니다. 

그런데 이 질문을 할 때 벌써 그들은 현판에 새길 글을 갖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 글은 "정말 최선을 다해서 성실하게 플레이를 했던 사람. 우리 어린아이들의 친구" 와 같은 말을 쓰려고 생각했다 합니다. 그러나 그는 뜻밖에 "아주 즐겁게 플레이를 했던 사람으로 저를 기억해 주십시요" 라고 말을 했다. 그래서 그 사람은 그 말에 감동을 받아 "정말 성실하지만 동시에 즐겁게 플레이를 했던 어린이들의 친구 부룩스 로빈슨을 기념하여" 라고 현판을 바꾸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어떠한 사람으로 기억되어야 할까요? 하늘의 소망가운데 산 사람이라고 기억되는 우리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모든 사람이 꿈속에서도 원했던 영원한 삶의 소망을 하나님께로 부터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받음은 성도의 삶의 힘이요, 지혜요, 안식처입니다. 모든 선진 신앙인들이 이 소망으로 세상을 이기고 자신의 운명을 극복하고 아름다운 삶의 열매를 남겼습니다. 우리들도 소망 안에서 삶을 허락 받고 누릴 수 있음을 바로 알되 소망의 근거는 하나님의 말씀에 나타난 하나님의 언약이요 소망의 내용은 부활과 천국의 영광된 삶이요 소망을 가진 성도의 생활은 성결과 기쁨과 인내하며 관용해야 함을 다시 한 번 기억하고 소망의 은혜 주심에 감사하는 모두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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