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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무엇을 원하느냐? (고전 4: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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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원하느냐? (고전 4:14-21) 
 
  
14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 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 
15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음이라 
16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17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 안에서 내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 디모데를 너희에게 보내었으니 그가 너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행사 곧 내가 각처 각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18 어떤 이들은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지 아니할 것 같이 스스로 교만하여졌으나 
19 주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서 교만한 자들의 말이 아니라 오직 그 능력을 알아보겠으니 
20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21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매를 가지고 너희에게 나아가랴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나아가랴 
 
어떤 노총각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노총각이 요술 램프를 주웠는데, 요정이 나타나 딱 한 가지의 소원을 들어준다고 했습니다. 노총각은 욕심이 나서 세 가지 소원을 순식간에 말해버렸습니다. “돈. 여자. 결혼이 소원입니다.” 그 소원은 곧 이루어졌습니다. 다음날 노총각은 ‘돈 여자’와 결혼했다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솔로몬은 하나님께서 꿈에 나타나서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고 하셨을 때,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종으로 종의 아버지 다윗을 대신하여 왕이 되게 하셨사오나 종은 작은 아이라. 출입할 줄을 알지 못하고, 주께서 택하신 백성 가운데 있나이다. 그들은 큰 백성이라. 수효가 많아서 셀 수도 없고, 기록할 수도 없사오니,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라고 구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의 구하는 것을 매우 마음에 들어 하시면서 “네가 이것을 구하도다. 자기를 위하여 장수하기를 구하지 아니하며, 부도 구하지 아니하며, 자기 원수의 생명을 멸하기도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송사를 듣고 분별하는 지혜를 구하였으니, 내가 네 말대로 하여 네게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주노니, 네 앞에도 너와 같은 자가 없었거니와, 네 뒤에도 너와 같은 자가 일어남이 없으리로다. 내가 또 네가 구하지 아니한 부귀와 영광도 주노니, 네 평생에 왕들 중에 너와 같은 자가 없을 것이라.”고 복을 주셨습니다. 

또한 다윗왕은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고 하면서, 양자택일 요구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만일 이 시간 우리들에게 하나님께서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라고 물으신다면, 저와 여러분은 도대체 무엇을 구해야 하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라고 책망하면서,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으나 너희는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나 우리는 비천하여,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 맞으며, 정처가 없고,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모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박해를 받은즉 참고, 비방을 받은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도다.”고 질책하였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이렇게 고린도 교인들을 질책한 것은, 14절에 나와 있는 대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 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본문에 ‘부끄럽게 하려고’ 라는 동사 앞에는 부정어 ‘우크’(Ουκ)가 사용되어, 고린도 교인들을 향한 사도 바울의 한없는 애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칼빈은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말한 것은,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의 예리한 책망으로 인하여, 분개와 불만을 품을 수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부정적 반응을 제거하기 위함이었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악심과 앙심을 가지고 책망하는 자의 책망은, 책방 받는 자에게 치욕을 주며, 반감을 불러일으키게 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처럼 아버지가 자녀에게 하듯 사랑으로 책망하는 자는, 상대에게 치욕을 주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바른길로 들어가게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 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와 같은 사랑의 권면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 대해 믿음의 아버지와 같은 위치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 자신이 직접 고린도 교회를 설립했을 뿐만 아니라, 그곳의 성도들을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양육해왔던 바울로서는, 고린도 교인들이 믿음의 자녀로 여겨졌을 것이 분명합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을 향하여 “복음으로 너희를 낳았음이라.”고 말한 것은, 그의 영적 아버지다운 깊은 애정을 보여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진정한 훈계와 책망이란, 바로 이러한 것이어야 합니다. 즉 사랑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 올바른 책망의 소리는 들어보기가 참으로 힘이 듭니다. 오직 비판을 위한 비판, 혹은 상대를 깎아내림으로써 자기의 인기를 높이려는 인기성 비방만이 가득할 뿐입니다. 단순한 비판이나 풍자 혹은 냉소주의와 야유는, 결코 진정한 비판이나 책망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상대를 향한 애틋한 사랑과, 애정이 담겨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것들로는, 당사자의 마음에 바른 깨우침이나 변화를 불러일으킨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 이웃을 향해, 건전한 비판과 책망을 하되, 결코 그들에 대한 사랑과 애정을 잃어서는 안 됩니다. 책망이라는 말씀의 회초리를 드는 목적은, 단지 상대를 아프게 하고 부끄럽게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더욱 큰 사랑으로 품고 올바른 길로 인도하려는 데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참된 복음사역이란 말씀으로 한 영혼을 낳는 일이라는 것을, 15절에서 이렇게 가르쳐줍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스승’이란 후견인 혹은 가정교사를 가리키는데, 고린도전서가 쓰일 당시에는, 노예들이 이런 일을 담당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이들을 지도하고 보호하긴 했지만, 제자의 인격과 장래를 책임지지는 않았습니다. 이러한 제한적 역할을 할 수 있는 자들은 세상에 많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일만’이란 표현을 사용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이러한 스승과 비교하여, 자신을 ‘아비’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즉 바울은 자신을 단지 말씀의 지식만을 가르치는 자가 아니라, 진정한 해산의 고통을 통해 영혼을 낳는 아비로 비유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도 바울은 자신의 복음 사역을, 말씀으로 영혼을 낳는 것으로 묘사한 것입니다. 이것은 그가 영혼을 얻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과 수고를 하였는지, 그리고 그가 복음의 씨앗을 뿌려 세운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 대하여, 얼마나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오늘 우리가 말씀을 진하고 가르친다고 하는 것은, 세상의 학교처럼 단지 성경에 대한 지식을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은 단지 성경을 가르쳐서, 지식이 넘치는 성경 박사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은 주님과 성령께서 하신 바와 같이, 영혼을 거듭나게 하고 재창조해 내는 일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단지 교회에 출석하는 출석 교인이 아니라,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천국의 시민으로 새롭게 태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말씀을 머리로만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온 맘을 다해 말씀을 따라 살며,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성숙해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일을 위해서는 한 생명을 낳기 위한 해산의 고통과 함께, 양육을 위한 눈물과 수고가 반드시 요청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를 양적으로 성장시키는 일에만 주력할 것이 아니라, 주님과 사도 바울의 모범을 따라서, 진실로 한 영혼을 낳아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시켜, 천국 시민으로 키워내는 참된 영적 부모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가 복음으로 낳은 영적 자녀인 고린도 교인들이, 자신을 본받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그래서 16절에 “그러므로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 했습니다. 아비는 자녀가 자기를 닮았음을 확인할 때, 크게 기뻐하게 됩니다. 만일 자식이 아버지를 닮은 데가 전혀 없다면, 심각한 문제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을 본받지 않고 마음대로 행함으로써, 영적 아비인 사도 바울의 마음을 안타깝게 만들었습니다. 그렇기에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자기를 본받으라고 촉구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것도 바로 이와 같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자신의 형상대로 지으시고, 그들로 하여금 자신을 닮아 하나님과 같이 거룩한 삶을 살기를 소원하셨지만, 인간들은 반대로 사탄의 영에 이끌려 세상을 닮은 모습으로 살아왔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보내 거듭 권면하시고, 마침내 자신의 본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 사 모범을 보이게 하심으로,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형상을 닮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본받아 하나님을 닮아가고, 그 뜻을 행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최고로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 모든 성도들에게 가장 원하시는 것은 오직 하나, 그것은 바로 우리가 날로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선하심과 사랑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이,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최상의 영적 효도 역시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점점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가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나님과 예수님을 닮아가기는커녕, 그 하는 짓이 마치 마귀새끼들이나 같다고 하면, 이 얼마나 하나님을 노엽게 하며 탄식케 하는 일이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들은 과연 현재 나의 모습이 하나님과 세상 중에서, 어느 쪽을 더 닮은 모습인지 진지하게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어떠하든지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조금이라도 닮아 가는, 하나님의 자녀다운 성도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19절에 보면 사도 바울이 다시 고린도 교회에 가게 될 때에는, 그들의 말이 아니라 능력을 알아보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20절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는 말씀입니다. 물론 이는 말의 중요성을 무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다만 성도는 말과 함께 능력도 갖추어야 함을 강조한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나라와 그 복음은, 인간의 언어로 전달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처럼 하나님의 나라를, 사람의 언어로 전하도록 하셨다는 것은 매우 감사한 일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의 나라를 말이 아닌 다른 수단, 즉 자본이나 권력, 혹은 다른 물리적 힘이 있어야만 전할 수 있게 하셨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마도 하나님의 나라는 거의 전해지지 못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것들은 소수의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말은 다릅니다. 말은 일반 은총의 하나로서,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게다가 말을 하는 데에는 아무런 비용도, 그 어떤 공간적인 제약도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는 세상일처럼 자본이나 기타의 수단이 없어도, 이를 전하려는 의지만 있으면, 누구나 어디서든지 자유롭게 전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본이나 물질이 없어서 하지 못하였다는 변명은, 적어도 하나님 나라와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있어서는 통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말을 통해 천국 복음이 전파되게 하신 것은, 우리에게 감사의 조건인 동시에 두려움의 근거도 됩니다. 왜냐하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못했다면, 그에 따른 추궁이 반드시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가 이처럼 쉽고 간단한 수단인 말을 통해 전해지는 것이라면, 어째서 지금까지 세계가 완전 복음화 되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 나라는 말로 전달되지만, 여기에는 또 다른 요소 곧 말씀이 생활 속에 실현되어, 삶의 변화를 일으키는 능력이 있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처럼 교회 성장이 정체 상태에 빠진 것은, 바로 이 두 요소간의 격차, 즉 말로 전해지는 하나님 나라와, 거기에 상응하는 능력 간에 격차가 크기 때문인 것입니다.

영어에 ‘크레디빌리티 갭’(credibility gap)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곧 발언과 사실과의 차이에서 오는 불신을 말입니다. 흔히 정치가의 발언이나 정부의 정책이 사실과 달라, 신뢰할 수 없을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와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있어서도, 이와 같은 현상이 있습니다. 즉 말로써 전해지는 복음은 그럴 듯한데, 이에 상응하는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능력’이란 하나님 나라와 복음에 대한 지식으로 인해 변화된 성품, 즉 인격과 삶을 통해 나타나는 능력을 말합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인들에게는 그 능력이 없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복음과 교회를 불신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지적하며 책망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점입니다. 즉 “너희들의 말은 참으로 그럴 듯한데, 어째서 실제의 삶에는 그에 상응하는 사랑과 겸손이 없느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을 전함에 있어 말과 언어만이 아니라, 이에 따르는 삶의 능력으로도, 그것을 증거 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에 대해 성경은 사랑이 최고의 은사요 능력이라고 말씀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복음의 언어와 함께, 이에 상응하는 최고의 은사인 사랑과 섬김의 삶을 통하여, 복음을 더 능력 있게 증거 하는 그리스도의 증인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 21절을 보면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매를 가지고 너희에게 나아가랴.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나아가랴.”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고린도 교인들이 교만하여 사도 바울의 권면을 무시하고, 계속 시기와 분쟁을 거듭한다면, 징계의 매를 가지고 갈 것이요, 뉘우치고 사랑으로 서로 화합한다면, 자신 역시도 사랑과 온유로 대하리라는 일종의 최후통첩인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으로 하나님이 세우신 종의 모습이요, 복음 사역자의 참 모습입니다. 왜냐하면 바로 이러한 모습은 자신의 백성을 대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국의 유명한 강해 설교자 캠벨 몰간 목사님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엄격하심과 무한한 부드러움은, 성경 처음부터 끝까지 나타나 있다. 그러므로 설교자라면 청중들에게 언제나 사랑으로 호소해야 한다. 하지만 반대로 하나님처럼 두려울 정도의 경고도 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참으로 귀한 말입니다. 하나님은 성경에서 보듯 그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패역한 백성들을 향해, 오래 참으시며 인내와 사랑으로 대하시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나답과 아비후, 고라 자손, 아간에게 하셨듯이, 끝까지 죄를 찾아내시며 징계하시는, 심히 두렵고 엄하신 분이시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모든 복음 사역자들도, 사랑과 엄격함을 함께 갖추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지난 9월 14일에 두 번째 사역지인 화순 능주 교회의 목사 위임식과 장로 및 집사 권사 임직 식에 참석하여, 축사를 한 바 있습니다. 

그날 위임을 받게 된 목사님은, 제가 최초의 사역지인 화순 내평교회(현재 남부교회)의 고등학생이었기 때문에, 아주 감회가 깊었습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이 답사 시간에 이런 말을 하더라고요. “오늘 축사를 해주신 목사님은 제가 이렇게 말하면 여러분이 믿으실는지 모르지만, 학습 세례를 주실 때 매를 때려가며 저를 엄하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또 인자하고 따뜻한 사랑으로 저희들을 품어주셨습니다.” 예식이 끝나고 다과 시간에 어떤 목사님이 또 이렇게 말하더라고요. “학습 세례 공부를 할 때 매를 때려가며 가르치셨다는데, 역시 목회를 잘 하시는 목사님은 어딘가 남다른 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모두가 자신이 듣기에 쑥스러운 말들이었지만, 사랑과 공의 이 두 가지를 겸전한 목회자가 되고 싶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것이 곧 영적 아비인 목회자가 지녀야 할 덕성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혹 어느 누가 연약하여 죄를 범했을지라도 진심으로 죄를 뉘우치면, 주님의 사랑으로 기꺼이 용서할 것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죄를 인정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을 때는, 엄격하게 징계의 매를 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해야만 교회의 거룩성과 성결성을 보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가 복음으로 낳은 영적 자녀인 고린도 교인들을 향하여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매를 가지고 너희에게 나아가랴.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나아가랴.”고 하면서, 양자택일을 하라고 최후통첩을 하였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복음으로 거듭난 영적 자녀이면서도, 세상을 닮은 모습으로 살아감으로써, 영적 아버지인 사도 바울의 마음을 몹시 아프게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어떠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들 역시 그들처럼 하나님의 자녀이면서도, 세상을 따라 살아감으로써 스스로 하나님의 매와 회초리를 자초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사 1:5절에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패역을 거듭하느냐?”라고 했고, 시 32:9절에 “너희는 무지한 말이나 노새같이 되지 말지어다. 그것들은 재갈과 굴레로 단속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가까이 가지 아니하리로다.”고 했습니다. 바라기는 주님께서 우리를 대하실 때, 매와 징계와 채찍과 재갈이 아닌, 항상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대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평생 듬뿍 받고 사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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