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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룻과 보아스의 신앙인격 (룻 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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룻과 보아스의 신앙인격 (룻 2:1-7)

추석 명절 행복하게 보내셨나요? 
오늘도 주님의 크신 은혜가 함께 하기를 축원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어떻게 일하고 계실까요? 
오늘 우리는 아주 중요한 것을 하나 배워야 하는데 그것은 하나님은 사람의 人格(인격)을 통해 일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실 때 사람에게 인격이 있도록 창조하셨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인간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形象(형상)을 따라, 하나님의 模樣(모양)대로 사람을 만드셨다고 하셨습니다. 그 하나님의 형상, 그 하나님의 모양이 바로 영혼이고 인격입니다. 이것은 오직 인간에게만 있습니다. 

문제는 그 인격은 사람마다 다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아무나 다 존귀하게 들어 쓰시지 않습니다. 사람의 됨됨이인 인격이 성숙한 사람을 통해 큰일을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성숙한 인격을 소유한 백성이 되도록 부단히 훈련시키고 있고 연단시키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세요.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들어 존귀하게 사용하시나요? 實力(실력) 있는 사람? 能力(능력) 있는 사람? 많이 배우고 똑똑한 사람? 아닙니다. 우리 하나님은 성숙한 인격의 소유자를 들어 일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오늘 우리는 봉독한 말씀을 통해 신앙인격이 한 차원 높은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그들은 누굽니까? 평생 모압 족속 여인으로 하나님께 버림받고 살아야 했던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룻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유대 땅 베들레헴으로부터 이주해 온 유대 남자와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어찌된 일입니까? 원인이 뭔지는 알 수 없으나 결혼한 지 얼마 못되어 그 남편이 죽었습니다. 시동생도 같이 죽었습니다. 그러니 가문의 남자들은 다 죽고 시어머니와 며느리 둘이 모여 사는 집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그녀는 이제 자식도 없이 평생 청상과부로 살 수 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시어머니가 고향땅으로 돌아가겠답니다. 

그러면서 두 며느리들에게 친정으로 가서 재가하고 살라고 권유합니다. 결국 오르바라는 며느리는 시어머니의 권유를 못이기는 척하고 친정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렇지만 룻은 늙은 시어머니를 버리고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끝까지 따라가겠다고 고집을 부려 함께 유대 땅 베들레헴에 도착했습니다.  

베들레헴에 오긴 왔는데 두 여자의 가족 생계가 막막했습니다. 

시어머니가 과거에 베들레헴에 살 때는 넉넉한 집안이었습니다. 그런데 모압으로 내려갈 때 재산을 다 처분하고 갔고 10년새 쫄딱 망해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다 남편도 없고 자식도 없는 가난한 신세가 된 것입니다. 오죽 어려웠으면 며느리가 남의 밭에 나가서 추수하다 땅에 떨어진 이삭을 주워서 생계를 유지했겠습니까?   

그런데 베들레헴 땅으로 돌아온 그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젊은 며느리 룻이 늙은 시어머니를 봉양하려고 들판에 이삭을 주우러 나갔는데 ‘우연히’ 보아스 라는 사람의 밭에서 이삭을 줍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우연히’라고 표현했습니다. 

3절을 보세요. 3 룻이 가서 베는 자를 따라 밭에서 이삭을 줍는데 우연히 엘리멜렉의 친족 보아스에게 속한 밭에 이르렀더라. 

그러나 이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인간의 시각으로 보면 우연처럼 보이나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면 하나님의 간섭과 인도하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통한 만남의 복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따라서 합시다. /우리의 만남은 /우연히 아닙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섭리로 만나게 된 것을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만났습니까? 예수님이 아니었다면 결코 만날 일이 없었던 사이입니다. 그런데 은혜로 만났습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만남이 인격적인 만남이 되길 축원합니다.  

여러분! 인격이란 무엇일까요? 이것은 어떤 것일까요? 
인격이란 개인이 갖고 살아가는 삶의 방식입니다. 그 속에 그의 생각, 감정, 의지가 있고 행동으로 표현이 됩니다. 그래서 각 사람의 인격은 다 다릅니다. 

최근에는 “인격 장애”라는 말이 많이 쓰입니다. ‘육체장애’보다 더 심각하고 무서운 것이 인격 장애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히틀러 같은 사람도 인격장애자라고 봐야 합니다. 유태인을 600만명을 죽였습니다. 북한의 일성과 김정일 집단도 인격 장애인들입니다. 남들이 굶어 죽든 말든 자기들의 정권을 놓으려 하지 않습니다. 

왜 人格(인격)장애가 생기는 것일까요? 

하나님의 창조원리를 벗어나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끝없는 욕심을 채우려고 하다 보니 사람다운 사람이 못되고 짐승과 같은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령을 우리 속에 보내주셔서 거룩한 하나님의 성품을 닮도록 지금도 부단히 일하고 계심을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이 쓰시기 좋도록 인격도 바뀌게 하십니다.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바뀝니다. 야곱이 이스라엘로 바뀝니다. 강퍅했던 사울이 바울로 바뀝니다. 저와 여러분도 하나님이 쓰시기에 합당한 인격으로 변화되길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으로 돌아갑니다. 
룻과 보아스! 이들은 어떤 인격을 갖고 있었나요? 
그들에게는 하나님과 사람이 감동할 만한 신앙 인격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서로가 서로에게 인격적인 대우를 합니다. 그래서 서로가 서로에게 복된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찾아 볼 수 있는 신앙인격은 어떤 것일까요? 
  

1. 그들은 남을 축복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보아스 어떤 사람인가요? 본문 1절을 보세요. 

1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의 친족으로 유력한 자가 있으니 그의 이름은 보아스더라 

성경은 그를 “유력한 자”라 했습니다. 

실제로 그는 이름의 뜻도 “힘이 있는 자” 라는 뜻입니다. 그에게는 어떤 힘이 있었을까요? 그는 영적인 힘이 있었습니다. 시리아번역본 성경에는 그는 율법에 유력한자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런 것을 보면 그는 성경을 밝히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그는 경제적으로도 힘이 있었던 사람입니다. 

많은 종들을 데리고 추수를 하는 것을 보면 그의 소유의 땅이 많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4장에 보면 성문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화를 나누는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지역사회에서도 상당한 존경을 받고 살았던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처럼 아는 것이 많고 가진 것이 많은 사람은 대체로 교만하다는 것입니다. 특히 힘이 좀 있는 사람은 목이 뻣뻣합니다. 그래서 남을 업신여기나 무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국회의원들 보세요. 선거때는 굽신거리고 하지만 당선되면 목에 힘을 줍니다. 

그런데 보아스는 달랐습니다. 그는 여러모로 힘이 있는 사람이었음에도 남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남을 존대하고 남을 높여 주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떻게 알 수 있나요? 오늘 본문을 보세요. 4절을 보세요. 

4 마침 보아스가 베들레헴에서부터 와서 베는 자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니 그들이 대답하되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니라 

자기 밭에 와서 추수하는 일꾼들을 만나자 마자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며 그들을 축복합니다. 그러자 일꾼들도 보아스에게 축복합니다.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나이다.”   

성도여러분! 
이 대화가 단순한 인사 같으나 이 대화 속에는 보아스의 인품과 인격이 보입니다. 남을 축복한다는 것은 상대를 인정한다는 것이고 상대가 하나님 앞에서 잘되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얼마나 귀한 인품인가요?   

내가 남을 축복하면 그 축복이 내게도 찾아오는 것을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창12:3절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합니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무슨 뜻입니까? 내가 남을 축복하면 하나님이 축복하는 그 사람에게도 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아멘? 

뿐만 아닙니다. 보아스는 룻에게도 축복합니다. 
오늘 봉독치는 않았으나 12절에도 보세요. 

“12 여호와께서 네가 행한 일에 보답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날개 아래에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주시기를 원하노라 하는지라” 

이 축복을 들을 룻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감동이 되었겠습니까? 
그 축복으로 보아스라는 사람의 인격에 대해 엄청난 감동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의 만남이 열매를 맺게 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도 남을 축복하는 사람 되기를 축원합니다. 옆 사람을 한번 축복합시다.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복주시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 넘치기를 원합니다” 큰소리로 제대로 축복하세요.   

우리 주님도 우리에게 남을 축복하라 하셨습니다. 

심지어는 롬12:14절에는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하셨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어떻게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에게 축복합니까? 저주를 퍼부어주어도 시원찮은데 어떻게 축복하란 말입니까? 그러니 보통 사람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숙한 인격을 갖고 있는 사람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남을 축복을 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인격과 인품이 되어 있는 사람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 됨됨이가 바로 인격이고 인품입니다. 

바라기는 여러분도 남을 많이 축복하셔서 신앙인격이 하나님과 사람에게 인정받는 사람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세상 사람은 남에게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감당키 힘든 일을 당하면 복수를 하려 합니다. 그러면 그런 사람은 세상 사람입니다. 영적으로 성숙한 인격을 소유한 사람은 복수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축복합니다.   

성경에 기록이 없는 이야기를 상상해 봅시다. 

여러분 같으면 요셉이 보디발 장군 부인에게 복수를 했을까요, 안했을까요? 
성경에 기록이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상상을 한번 해보세요. 

요셉을 유혹하다가 실패하니 억울한 누명을 씌워 죽이려 했던 그 여인, 그래서 요셉을 감옥에서 수년 동안 고생케 했던 여인, 그 여인은 어찌 살았을까요? 요셉이 복수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제가 상상해 보면 총리 취임소식을 들은 보디발 부인은 요셉이 총리로 재임하는 동안 사는 것이 사는 게 아니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죽을 맛이었을 것입니다. 요셉이 총리로 올라섰으니 남편보다 높은 직급입니다. 그러니 이제나 저제나 요셉이 자기를 잡으러 올 것을 기다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복수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마도 어느 모임이나 연회석상에 부부동반으로 만날 기회가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제가 보기에는 요셉이 그 자리에서 그 여인을 보자마자 씩 웃고 지났을 것입니다. 아마도 윙크를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는 자기 형들에게도 복수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위로하고 그들의 앞날을 책임집니다. 어떻게요? 하나님의 섭리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도 축복이 나를 복되게 하는 것을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복수는 나를 통쾌하게 할 것 같으나 결국은 내가 지는 것입니다. 오히려 내가 남을 많이 축복하는 것이 승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숙한 신앙인의 인격입니다.  


2. 그들은 남에 대한 관심과 배려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사람을 평가할 때 외모로 판단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판단의 첫 기준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세상 사람들의 평가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람의 속을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제가 제 큰아들에게 코치를 합니다. 

“외모 보지 말거라, 외모는 몇 달 못 간다. 속을 보거라 속이 예쁘면 평생 행복하단다”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속을 들여다 볼 수 있나요? 그것은 그의 가치관을 보아야 합니다. 특히 성경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보아스는 그런 면에서 대단한 인물입니다. 본문 5절을 보세요. 
5 보아스가 베는 자들을 거느린 사환에게 이르되 이는 누구의 소녀냐 하니 

보아스는 일꾼들에게도 관심을 갖고 있었지만 자기 밭에서 이삭을 줍는 여인에게도 관심을 갖고 그를 배려하여 줍니다. 그 밭에서 일하던 일꾼들이 그녀를 소개시킵니다. 모압족속 여인이라는 것, 그리고 거기다 과부라는 것, 시어머니를 봉양하려고 아침부터 밭에 와서 이삭을 줍는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그러면 보통 사람 같았으면 그녀가 하잘 것 없는 여인이라 판단하였을 것이고 무시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히려 그 여인을 배려합니다. 그리고는 그 여인에게 말을 겁니다. 

8~9절을 보세요. 

8 보아스가 룻에게 이르되 내 딸아 들으라 이삭을 주우러 다른 밭으로 가지 말며 여기서 떠나지 말고 나의 소녀들과 함께 있으라 

9 그들이 베는 밭을 보고 그들을 따르라 내가 그 소년들에게 명령하여 너를 건드리지 말라 하였느니라 목이 마르거든 그릇에 가서 소년들이 길어 온 것을 마실지니라 하는지라   

저는 이 말이 걸립니다. 
“내 딸아”, 내 딸아……. 

이 표현으로 보아 보아스가 나이가 좀 든 사람 같습니다. 그래도 좀 이상합니다. 
그런데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듣기 싫은 소리는 아닐 것 같습니다. 

부모를 떠나 이국땅에 와서 늙은 시어머님 모시고 있는데 어떤 나이 지긋한 남자가 “내 딸아” 하며 불러줍니다. 너무 자상합니다. 그리고는 다른 밭으로 가지 말라, 내가 일꾼들에게 너를 건드리지 말라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은 엄청난 관심과 배려입니다. 이것이 성숙한 인격입니다. 

“관심과 배려” 이것은 아무에게나 베푸는 것이 쉽지는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숙한 인격을 갖고 있는 신앙인은 당연히 가져야 할 바람직한 모습입니다.   

우리 주님을 보세요. 들판에서 말씀 듣느라 허기진 사람들을 배려합니다. 그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합니다. 그리고 육체적 질병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져 주고 치유해 줍니다. 심지어는 사람 취급 안 해 주는 문등병자에게 찾아오셔서 손을 대시고 치유하여 주십니다. 관심과 배려, 그게 사랑이고 그것이 성숙한 신앙인격인 것입니다. 

한번은 어느 회사의 사보(社報)에서 이런 글을 보았습니다. 

어느 사업가가 레미콘 사업을 시작하려고 다 준비를 해놓고 자동차를 구입하려고 자동차 회사에 전화를 했답니다. 그 전화를 받은 영업 사원이 전화번호를 묻더니 급히 끊었습니다. 그리고 즉시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이상해서 이유를 물었더니 자동차에 대해 설명을 하자면 한참 걸릴 텐데 통화요금을 고객에게 부담지우는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업가는 그 말을 듣고 다른 것은 묻지도 않고 당장 자동차 16대를 주문했다고 합니다. 자동차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과 장황한 설명 때문이 아니라 그 영업 사원의 태도에서 풍기는 인격의 힘이 그런 결과를 얻어냈다는 것입니다. 

상대를 배려하는 그것이 바로 성숙한 인격인 것입니다. 

이런 모습은 보아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룻에게도 있습니다. 

그녀는 자기 시어머님이 고향으로 돌아간다 할 때 끝까지 따라갑니다. 혼자 가도록 버려 둘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시어머님을 지극정성으로 섬깁니다. 그 효성이 소문이 납니다. 그러다 보니 결국 자기에 복으로 찾아 온 것입니다. 

만약 룻이 자기 앞길만 생각했다면 그 여자는 평범한 모압 여인으로 살다가 끝난 인생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어머님에 대한 관심과 배려, 이것이 사랑으로, 그리고 효도로 나타났기에 그 성품에 감동한 보아스가 그녀를 아내로 맞아들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내가 아닌 남을 위해 관심과 배려를 베풀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관심을 주시고 배려하시며 사랑해 주셨듯이 우리도 그런 모습으로 주님께 다가가시기를 축원합니다. 
  

3. 그들은 성실함과 정직함이 있었습니다. 

사람의 됨됨이를 보려 할 때 제일 중요한 것 중에 하나가 근면, 성실, 그리고 정직함에 있습니다. 

오늘 봉독한 본문의 룻을 보세요. 
그녀는 정말로 근면 성실한 여인이었습니다. 7절을 보세요. 

7 그의 말이 나로 베는 자를 따라 단 사이에서 이삭을 줍게 하소서 하였고 아침부터 와서는 잠시 집에서 쉰 외에 지금까지 계속하는 중이니이다  

그녀는 이삭을 주우러 남에 밭에 가서 일하는데 아침부터 와서 일합니다. 

그리고는 잠깐만 쉬고 와서 계속해서 열심히 일하였습니다. 남의 밭에 와서 이삭을 줍는데 뭐 아침부터냐 할 것입니다. 그리고 자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시어머님 한분인데 뭐 그리 부지런을 떨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삭줍기는 아침부터 부지런해야 합니다. 남들이 다 주어간 후에 나와 봐야 주울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부지런 하지 않으면 내 것이 없습니다. 그 부지런함이 성실이고 근면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부모를 공경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그녀는 정직합니다. 되어진 일들을 시어머님께 숨김이 없이 다 아룁니다. 시어머니에게 외간 남자 이야기를 사실대로 다 말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런데 룻은 좀 바보처럼 솔직합니다. 숨김이 없습니다. 마치 친정 엄마 대하듯 감추질 않고 다 말합니다. 그러니 시어머님도 믿고 조언을 해주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런 근면과 성실, 그리고 정직함의 신앙 인격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남다른 훈련과 연단도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말씀을 통해 우리 주님을 닮아야 합니다. 그러니 결코 간단한 일을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가 노력해야 합니다. 내게 이익이냐 손해냐 계산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열심히, 그리고 성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특별히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여기 “정직함”이란 다른 말로 “착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그를 들어 쓰십니다.  

사도행전에 바나바를 보세요. 

행11:24절에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었다고 소개합니다. 그리고 성령과 믿음이 충만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큰 무리가 주님께 더하여 졌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세상 사람들은 자기들은 악하면서도 착한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자기들은 못된 짓을 다하면서도 지도자는 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세상의 요구만이 아닙니다. 하나님도 우리가 믿음을 갖기를 원하되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기를 원하십니다. 

롬12:11절을 아시지요?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냥 열심만 가지면 안 됩니다. 착한 양심을 갖고 열심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없으면 우리 믿음은 파선을 하게 됩니다. 

딤전 1:19절을 보세요.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말씀을 맺습니다. 

신앙인은 인격이 성숙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존귀하게 쓰임을 받습니다. 
룻은 보아스의 신앙과 배려 관심에 감동을 받았고 
보아스는 룻의 신앙과 열정, 그리고 효성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 결과 둘은 행복한 가정을 이루었고 그 가문을 통해 다윗 왕이 탄생했고 그 가문을 통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사람의 됨됨인 인격과 신앙은 뗄래야 뗄 수 없는 것입니다. 
신앙 따로 인격 따로가 없습니다. “신앙은 좋은데 인격은 엉망이다” 라는 말은 잘못된 것입니다. 
성숙한 인격은 믿음을 동반하고 성숙한 믿음은 인격을 좌우합니다. (최일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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