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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열어주소서3 : 내 입을 열어주소서! (시 8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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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어주소서3 : 내 입을 열어주소서! (시 81:8-16) 
 
 
❚입이 중요하다!

우리말에 ‘입’에 관련된 재미난 표현들이 많습니다. 너무 말이 많고 수다스러우면 우리는 “입방정 떤다.”고 표현합니다. 말도 많고 남의 말을 너무 쉽게 전하는 사람을 우리는 “입이 가볍다.”고 말합니다. 반대로 신중하고 말을 아끼는 사람을 “입이 무겁다”고 하지요. 종종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 얘기는 너만 알고 있어야 돼!” 소위 ‘입단속’(이것도 재미난 표현입니다)을 시키는 것이지요. 그런데 며칠 지나면 사람들이 다 알아요. 동네방네 소문 다 났어요. 왜 그럴까요? 그 사람도 다른 사람에게 “이 얘기는 너만 알고 있어!”라며 입방정을 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똑똑한 사람, 능력 있는 사람도 중요하지만 입이 너무 가볍고 입단속을 못하는 사람은 중요한 일을 맡기기가 어렵습니다. 이렇게 입에 관한 재미난 표현들이 많은 것은 입이 하는 기능 중에서 말하는 기능이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입을 잘 단속하고 잘 관리하는 일이 그만큼 중요한 것이지요. 오늘은 입 얘기를 하겠습니다. 입이 하는 기능이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째, 입은 먹는 기능을 합니다. 먹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혹시 먹지 못하는 괴로움을 아시는지요? 병이 들어서 먹는 즐거움을 느낄 수 없는, 맛을 느낄 수 없는 환자들을 만나보면 그 고통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먹는 일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요. 오늘 내게 건강 주셔서 먹는 즐거움 주시고 맛을 느낄 수 있는 감각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둘째, 입은 숨 쉬는 기능을 합니다. 물론 입 말고도 우리는 코로도 숨을 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입을 막아놓고 코로만 숨을 쉬어 보세요.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얼마나 답답합니까? 그런데도 오늘 이렇게 숨쉬며 살아가는 일이 너무도 당연하게 여겨주십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오늘 나를 살아 숨 쉬게 하시고 호흡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셋째, 입은 말하는 기능을 합니다. 여러분은 아십니까? 말을 아껴라 아껴라 하지만, 입이 무거워야 한다고 말들 하지만 말이 얼마나 중요한지요. 얼마나 소중한지요. 어떤 집사님이 후두암에 걸린 친구를 만나고 온 이야기를 해줍디다. 수술을 받고 말을 할 수가 없어서 머리맡에 칠판을 놔두었더랍니다. 그 칠판에 글을 써서 의사소통을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자기가 찾아가니 그 친구는 칠판에 딱 한 마리 쓰더랍니다. “친구야! 건강해라!” 이 한 마디가 얼마나 하고 싶었을까요? 

우리가 말을 못하게 된다면 어떻게 아내와 남편에게 자녀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모든 일에는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니 늦기 전에 소중한 사람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해보세요. 이 입을 가지고 이제 다른 사람들에게 해서는 안 될 말, 하지 말아야 할 말은 하지 말고 정말 소중한 말, 꼭 해야 할 말을 할 수 있는 여러분 되기 바랍니다.

이렇게 입은 너무나 중요한 기능을 합니다. 입이 중요하고 소중히 여기십시오. 잘 관리하고 잘 사용하십시오. 그런데 이 입을 영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이 역시 세 가지입니다.

❚은혜의 입을 크게 열라!

첫째, 우리의 입을 크게 벌려 은혜를 받아먹어야 합니다. TV에서 신비한 동물의 세계를 보았습니다. 새가 높은 나무 위에 둥지를 짓고 알을 낳습니다. 알을 정성껏 품다가 이윽고 알을 깨고 새끼가 하나 둘 나옵니다. 며칠 지나자 새끼들은 어미가 물어다주는 먹이를 먹는데 새끼는 많고 어미가 물어다주는 먹이는 하나뿐이니 어미가 먹이를 입에 물고 오면 앞 다투어 목을 길게 빼고 서로 먼저 먹이를 달라고 아우성입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그 중에 어미 새가 어떤 새끼에게 먹이를 제일 먼저 줄까요? 잘 생긴 놈? 제일 먼저 태어난 맏이? 아니요. 목을 제일 길게 빼고 입을 제일 크게 벌리는 새끼에게 제일 먼저 먹이를 줍디다. 미물인 새에게서도 우리는 영적인 교훈을 얻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성도들에게 은혜와 복을 가장 먼저, 가장 많이 주실까요? 세상에 하나님의 자녀는 너무도 많고, 그 많은 자녀들이 서로 달라고 아우성인데 도대체 어떤 자녀에게 가장 먼저 가장 많이 주실까요? 오늘 본문에 그 답이 나와 있습니다. 10절 말씀을 한 번 보세요.

나는 너를 애굽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 네 하나님이니 네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하였으나

네 입을 어떻게 열라?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할렐루야! 이게 답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입을 크게 연 사람, 가장 크게 벌린 자녀에게 제일 먼저 복을 주시고, 은혜를 크게 부어주십니다. 사실 오늘 본문은 이런 뜻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왜 우상을 숭배하고 절하냐고 따지십니다. 하나님이 애굽 땅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탈출하게 내시고 광야에서 40년 동안 인도하신 사건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출애굽 사건에서도 그렇고, 광야생활에서도 그렇고 필요한 것이 있을 때마다 채워주신 분이 누구냐는 것입니다. 

홍해 바다를 갈라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 애굽군대를 멸하신 분이 누구시냐? 먹을 것이 필요하다고 굶어죽겠다고 부르짖어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주신 분이 누구시냐? 하나님 아니십니까? 목말라 죽겠다고 먹을 물이 필요하다고 부르짖어서 반석에서 물이 나오게 하신 분이 누구냐? 하나님 아닙니까? 그러니까 입을 크게 열면 채워주신 분은 하나님인데 왜 엉뚱하게 우상을 만들고 우상에게 절하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 가운데 해주신 약속이 바로 “네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라는 약속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도 입을 크게 아주 크게 여시기 바랍니다. 입을 크게 열어야 먼저 받습니다! 입을 크게 열어야 그 크기만큼 은혜 많이 받습니다! 여러 해 전 말씀 드린 예화지만 오늘 말씀에 꼭 맞는 예화라 다시 한 번 들려드리지요. 연세가 지긋한 분에게 들은 이야기입니다. 6.25 때 우리가 많이 헐벗고 굶주려서 미국이 원조물자를 통해 많은 식량과 옷을 보내주었는데 그 중에 가루분유를 많이 보내주었다고 합니다. 이 전지분유를 물에 타 허기를 면했다고 하는데 정말 이런 시절이 있었나요? 바로 그런 배고프고 가난한 시절, 어느 동네에서 이런 방송이 나왔다고 합니다. 

미국에서 원조 온 분유를 나누어 줄 테니 각자 집에서 그릇 가지고 오라고 말이지요. 그래서 집집마다 아이들이 가지각색 그릇을 가지고 가는데 어떤 아이는 밥그릇을, 어떤 아이는 국그릇을, 어떤 아이는 큰 그릇이 없어 작은 종지만한 그릇을 가져가는데 그 중 한 아이가 커다란 세수 대야만한 그릇을 들고 가더라는 것입니다. 다른 아이들은 그 모습을 보고 크게 웃었습니다. “야, 이 바보 같은 놈아! 그렇게 큰 그릇 가져가면 뭐 분유 많이 줄까봐 그러냐?”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날은 이상하게 분유를 가져온 그릇 크기만큼씩 배급해 주더라는 것입니다. 밥그릇 가져온 아이에게는 밥그릇 가득, 종지만한 그릇 가져온 아이에게는 그 크기만큼, 그런데 대야만큼 큰 그릇을 가져온 아이에게는 그 그릇 만큼 가득 채워주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이와 같습니다. 우리가 그릇을 준비한 만큼 받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입을 벌린 크기만큼 받게 되어 있습니다. 은혜도 복도 적극적인 신앙을 가진 자, 내가 복 받겠다고 강력하게 소망하고 갈망하는 자, 입을 크게 벌리고 나 복 많이 달라고 하는 자에게 주어지지 소극적으로 기다리면 언젠가 주겠지 하는 사람에게는 평생 가야 복이 안 주어집니다. 오늘 본문 10~11절에서도 분명히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입을 크게 열라고 했는데 이스라엘 백성이 그 말씀을 듣지 않고 복 받기를 별로 바라지 않고 입을 안 벌리니 복과 은혜 못 받았다고 말씀하지 않습니까? 결국 16절에 나온 것처럼 누가 하나님이 주시는 기름진 밀을 먹고 반석에서 나오는 꿀을 만족하게 먹습니까? 입을 크게 벌리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영적인 입을 크게 벌려야 할 줄로 믿습니다.

❚기도의 입, 복음의 입을 크게 열라!

둘째, 우리의 입을 크게 벌려 기도하고 찬양해야 합니다. 요즘 새벽기도회 시간에 사사기를 큐티 본문으로 묵상하고 있는데 사사기를 읽을 때마다 반복되는 싸이클이 있다고 했지요? 이스라엘 백성이 유상 숭배하고 하나님께 범죄하면 ➛ 하나님이 이방 민족을 도구로 사용해 이스라엘 백성을 징계하고 ➛ 이스라엘 백성들이 괴로워서 부르짖으면 ➛ 사사를 보내 구원하시고 ➛ 그런데 이 은혜를 잊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또 범죄하는 이런 싸이클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괴로워서 “부르짖었다”라는 말이 히브리어로 ‘짜아크’라는 동사입니다. 신학교 다닐 때 히브리어를 배우는데 교수님이 이 ‘짜아크’라는 동사를 외우는 방법으로 “입을 ‘짜악’ 벌리고 부르짖는다”라고 가르친 기억이 납니다. 이렇게 외우니 25여년이 지난 지금도 이 말을 안 잊어버립니다.

그렇습니다. 이 ‘짜아크’라는 동사처럼 우리 입을 크게 열어야 부르짖을 수 있고, 입을 크게 벌려야 간절하게 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특히 너무 놀라고 당황하면 그야말로 ‘말문’이 막히는 것처럼 우리도 신앙생활 하면서 너무 힘들고 어려울 때 오히려 ‘기도문’이 막힐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 내 입을 활짝 열고, 우리의 기도의 문을 활짝 열어 기도하여 부르짖지 않으면 절대 문제는 해결 안 됩니다. 괴로우십니까? 힘드십니까? 여러분의 입을 ‘짜악’ 크게 벌려 기도하기 바랍니다. 중요한 일, 부담되는 일이 있습니까? 여러분의 입을 크게 열어 부르짖기 바랍니다. 해결될 줄로 믿습니다.

또 기도할 때 찬양도 함께 하기 바랍니다. 다음 주일 설교 본문인 사도행전 16장에 보면 복음 전하다가 빌립보 감옥에 갇힌 바울과 실라가 매를 맞고 발은 차꼬에 채워졌는데 밤에 입을 벌려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러자 굳게 닫힌 옥문이 지진으로 활짝 열리고 발에 채운 차꼬가 다 풀리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렇습니다. 아프고 힘들 때, 어렵고 괴로울 때일수록 더욱 우리의 입을 크게 벌려 기도하고 찬양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기적이 일어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괴롭고 힘들면 무슨 경황이 있겠습니까? 정신이 하나도 없는데 무슨 기도가 나오고 찬양이 나오냐고요? 아닙니다. 그럴수록 더 기도하고 찬양해야 합니다. 이럴 때 기도도 찬송도 못하는 사람을 뭐라고 부르느냐? 두 주 전 “내 눈을 열어주소서”라는 제목으로 설교할 때 송명희라는 시인을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그녀가 태어날 때 의사가 태안의 아기의 뇌를 집게로 잘못 건드려 소뇌가 손상되어 일생동안 뇌성마비 장애인으로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하나님을 만난 후 온몸을 뒤틀며 시를 썼습니다. 이 분이 쓴 <참 소경>이라는 시를 소개했지요? 첫 소절이 이런 내용 아니었습니까?

참소경이 누구인가? 세상을 못보는 사람인가?
참소경이 누구인가? 세상을 못보는 사람인가?
아니라 아니라 주님을 못보는 사람아닌가?
당신은 당신은 소경이 아닌가?
그런데 이 시의 세 번째 소절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벙어리가 누구인가? 유창히 말못하는 사람인가?
벙어리가 누구인가? 유창히 말못하는 사람인가?
아니라 아니라 기도를 못하는 사람 아닌가?
당신은 당신은 벙어리 아닌가?

우리에게는 분명히 육신의 입이 있지 않습니까? 그 입 가지고 말도 유창히 잘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영적인 입은 닫혀서 기도를 못한다? 육신의 입 가지고는 노래방에 가서 세상 노래는 잘 부르는데 하나님을 찬송할 줄도 모른다? 그렇다면 송명희 시인의 시처럼 우리는 입은 열렸으되 영적인 벙어리인 것입니다. 말 못하는 장애인들도 수화를 통해 아름답게 하나님께 찬송할 줄 아는데 나는 건강한 입을 가지고 무엇을 하는가? 나는 영적인 벙어리 아닌가?

마지막 셋째, 우리의 입을 벌려 하나님을 증거하고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지난 주, 그 전 주에 이어 오늘도 설교 후 부를 찬송 366장 1절에서는 “내 눈을 열어주소서” 2절에서는 “내 귀를 열어주소서” 그리고 마지막 3절에서는 오늘의 주제인 “내 입을 열어주소서”라고 간구하고 있습니다.

봉해진 내 입 여시사 복음을 널리 전하고
차가운 내 맘 녹여주사 사랑을 하게 하소서
깊으신 뜻을 알고자 엎드려 기다리오니
내 입을 열어주소서 성령이여

그렇습니다. 평상시는 안 시켜도 말 잘하다가 복음 전해라, 전도해라 하면 입을 꼭 봉해버리는 그런 사람이 영적인 벙어리지요. 따라서 우리는 내일부터 시작되는 부흥사경회를 준비하는 특별새벽기도회에, 그리고 다음 주 30일부터 시작되는 사흘간의 부흥사경회 때 이렇게 부르짖어야 합니다. “하나님, 내 입을 열어 복음을 증거하고 전도하게 하소서. 이번 부흥사경회 때 그동안 꼭 전도하고 싶었던 사람들에게 우리 부흥회 같이 가자고, 우리 교회 한 번 가보자고 담대하게 초청하게 하소서.”

❚우리 입은 얼마나 큰가?

저는 선천적으로 입이 좀 큽니다. 지금은 인물 많이 좋아진 거에요. 지금은 입이 별로 크게 보이지 않지만 옛날 제가 날씬했던 시절, 안 믿으실지 몰라도 몸무게 53kg 나가던 총각시절, 마르고 작은 얼굴에 비해 상대적으로 입이 커서 놀림도 받았지요. 별명도 ‘하마’라고 붙었는데 하마는 그래도 귀엽기나 하지요. 신학교 때 소풍 가서 입 크게 벌리기 대회에서 우승하고 나서 새로운 별명이 붙었어요. ‘대구’(大口=입이 큰 물고기)라고요. 이 별명은 좀 싫더라구요. 

저는 이런 외모에 대해 좀 콤플렉스도 있었습니다. 제가 오늘 저의 약점, 콤플렉스, 부끄러운 얘기를 왜 하겠습니까? 설교하고 나면 온 성도가 제 “정말 입이 큰가?” 하고 제 입만 유심히 볼 텐데 말이지요. 이유가 있습니다. 약점이라고 생각했던 것, 부끄럽다고 여긴 것, 숨기고 싶었던 문제가 오히려 은혜 받는 통로가 되기 때문입니다.

저도 오늘 본문 말씀을 보는 순간 제 입이 큰 것은 더 이상 콤플렉스도, 부끄러운 일도 아니라 오히려 자랑이요 긍지가 되었습니다. 입이 크니까 남들에 비해 입을 더 크게 벌리고 은혜를, 복을 받을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제가 입만 큰가요? 목소리도 좀 큽니까? 어려서부터 목소리가 커서 “넌 애가 왜 그렇게 목청이 크냐” 핀잔도 종종 들었지요. 한편으로 부끄럽기도 했고요. 하지만 지금은 전혀 부끄럽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제게 큰 입을 주시고 좋은 목소리 큰 목소리로 조금이나마 찬양을 잘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심에 감사하며 안 그래도 큰 입을 더 크게 벌려 남들보다 큰 소리로 힘차게 찬양을 하곤 합니다. 그리고 그 큰 입으로, 그 큰 목소리(식당에서 병원에서 사람들이 다 쳐다볼 정도로 쩌렁쩌렁 울리는 소위 ‘목욕탕 소리’)로 주님께 더 간절히 기도합니다. 무엇보다 이 큰 입을 더 크게 벌려 설교를 하며 말씀을 전하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음에 감사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입은 얼마나 큽니까? 저보다 입 큰 사람 있으면 나와 보세요. 예배 후 누가 더 큰가 대보게요. 하지만 육신의 입이 아닌 영적인 입을 더 크게 크게 벌려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오늘 들은 말씀처럼 세 가지, 은혜와 복을 받아먹는 입, 기도하고 찬양하는 입, 복음 증거하는 입으로 만들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본문에서 주신 하나님의 약속을 다시 한 번 되새겨봅니다. “네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크게 넓게 연 만큼 “내가 채워주리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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