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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표적과 기사 (행 5: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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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적과 기사 (행 5:12-16)

우리는 지금 사도행전을 통해서 교회의 뿌리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본래 모습은 어떤 것이며 교회의 성격은 어떠해야 하는지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늘 생각하지만, 교회가 교회됨의 본모습을 찾아야만 능력을 가지게 되고, 능력을 가져야만 교회가 부흥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하면 교회가 원상으로 복귀할 수 있을는지, 어떻게 해야 교회가 본래의 모습으로, 참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을는지, 그 해답을 찾고 이행해 나가는 일은 우리가 부단히 노력하고 애써야 될, 하나의 피할 수 없는 긴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 말씀을 보면, 초대교회의 교회상敎會像(位相)을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부동산을 판 값을 속여서 교회에 바치려다 현장에서 죽어 버리는 무서운 일이 일어나면서 사람들은 교회와 성도들에 대하여 함부로 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사도의 가르침과 병 고침이 계속 있던 당시에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죽고 난 다음에 방해 요소가 있어도 교회는 부흥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교회에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요소가 있어 가지고서는 절대로 부흥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성령의 역사는 믿는 자의 마음을 하나로 묶게 되었고, 그들 사이에 확고하고도 굳은 공동의식을 성립시켰습니다. 안으로는 "믿는 무리가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4:32) 밖으로는 하나로 굳게 뭉쳐서 복음 선교의 연합 전선을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사도들은 모두 마음이 하나가 되어서 성전의 솔로몬의 행각에 모이고 다른 사람들은 감히 접근하지 못하고 민중은 그들을 존경했습니다. 사도들은 성령의 능력을 받고, 많은 징조와 불가사의한 일들이 그들의 손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많은 병자들이 예루살렘과 주변의 마을들에서 모여들었으며, 그들은 모두 고침을 받게 됩니다. 드디어 사람들은 환자를 침대 또는 요 위에 눕힌 채 예루살렘의 대로에 놓고, 베드로가 지나갈 때, 그 그림자라도 덮어줬으면 하고 바랄 정도가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이었으므로 믿는 남녀의 수가 모두 늘어가기만 했습니다. 

교회로서 가지는 기쁨이 4가지가 있습니다. 

1.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 전파로 새 신자가 생긴 기쁨이 있습니다. 

2. 새 신자를 맞이하여 교회 안에 있던 성도와 하나가 되는 기쁨이 있습니다. 

3. 지난날의 모든 종교관을 벗어버리고 개종한 신도들이 새 복음을 받아 기뻐하며 성장하게 되는 기쁨이 있습니다. 

4. 온갖 병든 자들이 다 낳음을 얻은 기쁨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 안에도 이런 기쁨이 언제나 함께 하기를 기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사도들의 표적과 기사로 인하여 복음이 이제 예루살렘에서 그 주변으로까지 서서히 확산되어 가는 장면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런 초대교회의 확장과 부흥은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의 결과요, 다음에 있을 종교 지도자들의 핍박의 원인이 되는 중간 역할을 하면서 예수님의 사역을 계승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본문의 중심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으로 인하여 공동체의 순결과 거룩을 되찾은 초대 교회는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더욱 확장되고 성숙되었습니다. 

이것은 순결함과 거룩함을 유지하여 하나님의 뜻에 부합된 진실한 교회가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으며 성령의 권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교훈을 줍니다. 

둘째로, 사도들은 민간에 많은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사도들의 표적과 기사는 예수님의 사역을 계승한 것이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복음 전파의 명령을 주시고 또한 성령을 통하여 주님의 권능을 부여함으로 구속 사업이 마지막 날까지 이루도록 하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병자들이 고침을 받은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이들이 영생의 근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영접한 데에 있습니다. 이처럼 각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육신의 문제가 아닌 영원한 삶을 위한 영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능력은 병든 자에게 커다란 소망을 주었는데,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능력을 연상시킵니다. 그리고 성령의 충만을 받아 새롭게 변화된 사람의 능력이 어떤 것인지를 교훈해 줍니다. 

여러분들이 생각하실 때, 표적과 기사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이 만든 창조 이치가 완전합니다. 사실 이보다 더 큰 표적과 기사는 없습니다. 병든 사람이 식사를 못하다가 식사를 하게 되면 큰 기쁨입니다. 이와 같이 병든 사람이 정상적으로 돌아오는 것이 큰 표적입니다. 하나님의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 안 먹는 것보다 더 큰 불행이 없습니다. 표적을 구할 때 주님은 요나가 하나님의 말씀을 안 듣다가 말씀을 듣고 순종한 표적보다 더 큰 표적이 어디 있느냐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시간 참여한 것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표적입니다. 

셋째, 복음의 확장은 교회의 박해와 환난을 가져 왔습니다. 

복음에 대한 반응은 복음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자와 복음을 받아들이지는 않지만 복음의 능력에 매료된 자, 그리고 복음에 대적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소문이 퍼지는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교회를 박해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예루살렘 교회에 대한 박해는 결국 복음이 팔레스틴 전지역으로 까지 확산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생명의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언제나 사단의 방해와 성령의 역사가 동시에 일어났습니다. 오늘의 본문에 나타나는 것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도들의 권위'입니다. '권위주의'라는 말과 '권위적'이라는 말은 다릅니다. 

마 7:29에,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지상 교회가 주님과 같이 되면 그 권위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대단한 권위입니다. 

루터가 "교회를 교회 되게 하라"고 외쳤는데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는 말입니다. 한 마디로 지상 교회가 원상原狀으로 복귀하면 되는데 그 방안은 주님 같은 교회로 복귀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할 일을 제대로 못하여 권위를 잃게 되면 세상의 핍박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교회는 그런 대로 뭔가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그 때는 세상이 교회를 더 깎아 내리려고 합니다. 심지어 우롱하려고 합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이 그 실례입니다. 만일 그 때 사도들이 아나니아와 삽비라에게 기만당했더라면 그것이 계기가 되어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계속해서 생길 뻔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사이비가 정리되고 난 다음, 사도들의 권위가 드높이 부각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경애敬畏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권위가 어디서부터 주어진 것입니까? 그리스도께서 수직적으로 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을 택하셨습니다. 권세는 이렇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직선적으로 저들을 지명하셨습니다. 그리함으로 제자가 되고, 예수님의 공생애 3년에 참여하게 되었고,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 동참하게 되었고, 예수님의 부활하신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거기까지가 사도의 권세입니다. 그러므로 내적으로는 그리스도께서 주도하시는 교회요, 현재는 성령이 역사하는 교회요, 실제적으로는 사도가 주관하는 교회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초대교회를 보면 내막적으로는 예수를 사랑하는 것이요, 실제적으로는 성령을 받아서 성령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사도들을 따르는 것입니다. 사도들과 운명을 같이하는 것입니다. 사도들의 지시를 따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입니다. 사도의 권세라고 하는 것이 구심점이 되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사도들의 그 능력을, 교회의 주인됨을, 핵심되고 지도자됨을 말해주기 위해 그들에게 표적이 나타납니다. 이것이 그들에게 주어진 하나의 '아이디 카드'입니다. 그래서 표적과 기사가 나타납니다. 12절입니다. 

"사도들의 손으로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되매 믿는 사람이 다 마음을 같이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이고." 

솔로몬 행각은 외전外殿으로서 일백육십이개의 큰 기둥으로 된 건물입니다. 아주 큰 집입니다. 이런 집에 모였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곳에 모여들었다는 것은 유대교의 핍박을 피하지 않겠다는 단호함을 보여준 것입니다. 사도들 뿐 아니라 일반 신도들도 못지않게 당당했습니다. 

어디서 나온 용기일까요? 부활신앙의 용기입니다. 주님처럼 죽으면 주님처럼 영광스럽게 부활할 것인데 두려울 게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 한 가운데서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려고 한 것입니다. 요즈음 말해서 부흥집회를 하고 있습니다. 메시야가 이 성전의 주인되심을 증거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장소를 어느 골방이나 어느 마당이나 어느 들이 아니라 예루살렘 성전 한 가운데를 잡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대단한 일입니다. 절대로 핍박을 피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고 또 교회를 핍박하는 장본인이 예루살렘 성전 그 안에 있는 제사장이고, 대제사장인 것입니다. 그런 자들이 있는 곳으로 쳐 들어가서, 바로 그 한 가운데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고 증거하고자 모였으니 보통 일입니까? 절대로 소극적으로 대하지도 않고 도피하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당당하게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갔습니다. 많은 사람이 모여서 사도들을 모시고 부활을 증거하고 성경을 가르치고 배우고 하는 큰 집회를 가지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눈치보면서 모인 것이 아닙니다. 숨어서 모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공개적으로 모이는 것이었습니다. 핍박이 있으나 핍박을 각오하고 모인 것입니다. 1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 나머지는 감히 그들과 상종하는 사람이 없으나 백성이 칭송하더라." 그런데 우리는 예수를 믿으면서 너무 안일하게 믿으려고 합니다.

지금도 교회 나가는 것 자체를 부끄럽게 여기는 딱한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작은 성경 찬송을 빽에 넣고 갈 때 "어디가?"라는 질문을 받으면 "응 나 … 저기가"라고 대답하는 일이 없잖아 있습니다. 어디 가느냐고 물으면 당당하게 '교회 갑니다"라고 해야 합니다. 공개적이어야 합니다. 신앙은 공개적이어야 합니다. 

예루살렘 성전 안에, 솔로몬 행각에 저들은 당당하게 모였습니다. 초대교회의 사도들, 신자들 모두에게 그런 정도의 권세가 있었으니 능력이 나타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수많은 병자가 고침 받고 귀신이 쫓겨났습니다. 이 교회는 아주 능력있는 교회였습니다. 16절입니다. " …… 베드로가 지날 때에 혹 그 그림자라도 뉘게 덮일까 바라고." 

이와 관련해서 행 19:12절에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 이 정도의 권세와 위엄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초대교회의 지도자들에게는 기적과 능력이 있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들으시는 여러분에게도 이런 능력이 있기를 바랍니다. 귀신 쫓는 능력이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사랑의 능력, 겸손한 능력, 화해의 능력, 상담하는 능력, 남을 도와줄 수 있는 능력, 영분별의 능력,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닮아가는 능력, 상급을 부지런히 쌓아가는 능력이 풍성하게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바로 오늘의 현실 속에서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과 축복과 그 응답과 기적을 보는 것입니다. 저는 그것을 여러분과 함께 보기를 원합니다. 교회는 날마다 날마다 새로워져야 합니다. 부흥해야 합니다. 차고 넘쳐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기적을 오늘 이 시간에, 이 현장에서 우리가 맛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서 바로 서려다가 핍박을 받는 것이라면 심히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문제는 교회가 시끄러워서 성직자, 중직자가 덕德을 잃어서 핍박을 받는다면 이 얼마나 부끄럽고 가슴 아픈 일이겠습니까? 이 지경이 된 이유가 무엇일까요? 부활 신앙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현세부활이 안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활은 변화하는 것입니다. 신령한 변화를 해야 합니다. 영광의 변화를 해야 합니다. 성장의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변화하지 않고서는 내세부활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것도 육체가 이 세상에 있을 때에 변화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천적인 요소로 변화된 것만 하늘나라에서 써 먹을 수가 있습니다. 

교회가 선한 일을 열심히 하면, 즉 기도하고 전도하고 봉사하면 칭송을 받습니다. 그런데 옳은 일을 하다가 핍박을 받기라도 하면 엄청나게 칭찬 받습니다. 교회의 권위는 참 믿음, 부활을 믿는 참 믿음에서 드러납니다. 그리고 불의한 권세에 굴하지 않는 투지를 보여줌으로써 드러납니다. 

본문 말씀에 나타난 초대교회의 또 하나의 특징은 '모이는 교회'라는 것입니다. 마음을 같이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였습니다. 모이는 것입니다. 모인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모임으로써 예배하고, 모임으로써 기도하고, 모임으로써 저들은 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했습니다. 사도들로부터 성경을 배우고, 그리고 교제하고 봉사했습니다. 상급구원을 이루기 위해 상급을 쌓는 일을 했습니다. 하늘나라에서 누리기 위해 천적인 요소로 만들어 가는 일에 힘썼습니다. 그러므로 모이는 데에 힘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는 어떻습니까? 정말 열심히 모이고 있습니까? 열심히 모여야 합니다. 모이지 않는 교회는 죽은 교회입니다. 모이는 그만큼 교인들의 마음 속에 믿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모이는 것이 믿음의 증거입니다. 겸손의 증거입니다. 초대교회 사람들은 열심히 모였습니다. 사도를 중심으로 해서 모였습니다. 모이는 교회였습니다. 거기에 생명력이 있었습니다. 

초대교회는 마음을 하나로 모았다는 것입니다. 크게 중요한 말씀입니다. 마음이 하나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전체가 순종하는 것입니다. 사도의 권능 앞에 모두가 하나 같이 순종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직 한 마음,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 주님의 뜻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사도적 권위 안에서 하나가 되고,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또한 초대교회는 "백성이 칭송하는 교회"였습니다. 

안 믿는 사람들까지도 교회를 높이 칭찬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이야기입니까? 직접 솔로몬 행각까지는 가지 못했더라도 교회는 좋은 곳이다라고 칭찬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을 칭찬하더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사회성이 입증되고, 그로써 교회는 부흥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런 권세가 있어야 합니다. 핍박하는 사람도 감히 함부로 대하지 못합니다. 교회 안나오는 사람도 교회를 우러러 봅니다. 칭송합니다. 

그리고 교회에 나오는 사람이 열심히 모이고, 열심히 봉사하다 보니 어떻게 됩니까? "믿고 주께로 나오는 자가 더 많으니 남녀의 큰 무리더라"고 14절은 말씀합니다. 날로 부흥하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초대교회입니다. 은혜가 충만하고, 권능이 충만하고, 권세가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어디까지나 하나님께서 세워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피 값을 치루시고 믿음 안에서 이루워 주신 것입니다. 동시에 여러분 한 분, 한 분은 마음 속에 교회에 대한 존엄성, 교회에 대하여 그리고 교회의 권세에 대하여 다같이 순종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럴 때만이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들으신 여러분들이 무엇보다도 베드로에게 있었던 영적인 권위가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가 이런 영적인 권위를 끼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날의 모든 교회가 이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구원받는 수가 우리 교회를 통해서 많아질 것입니다. 이 축복이 오늘 저와 우리 교회와 여러분 모두에게 임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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