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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이해하고 행하는 사람 (삼하 23:8-17, 잠 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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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이해하고 행하는 사람 (삼하 23:8-17, 잠 25:13)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가장 좋아하실까요? 우리는 지난 두 주에 걸쳐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과 “하나님 앞에서 끝까지 겸손한 사람”을 하나님께서 좋아하시고 그들에게 사랑과 은총을 베풀어주신다는 내용의 말씀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오늘은 이 질문에 대한 세 번째 대답으로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이해하고 행하는 사람”이란 제목으로 말씀 드리겠습니다.

복음 성가 중에 “하나님 아버지 마음”이란 노래가 있습니다. 저는 그 찬양을 부를 때마다 그 가사에 큰 감동과 은혜를 받습니다. 

아버지 주님의 마음이 있는 곳에 나의 마음이 있기를 원해요
아버지 주님의 눈물이 고인 곳에 나의 눈물이 고이길 원해요.
아버지 주님이 바라보는 영혼에게 나의 두 눈이 향하길 원해요.
아버지 주님이 울고 있는 어두운 땅에 나의 두발이 향하길 원해요.
나의 마음이 아버지의 마음 알아 내 모든 뜻 아버지의 뜻이 될 수 있기를
나의 온 몸이 아버지의 마음 알아 내 모든 삶 주님의 삶 되기를.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과 뜻을 이해하고 그 뜻대로 살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이 담긴 고백의 찬양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찬양을 들으시고 얼마나 좋아하실까? 진실 된 마음으로 이러한 고백의 찬양을 드리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실까? 이러한 생각을 하면서 저도 그 찬양을 수도 없이 불러 보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주(Lord)”로 고백합니다. 히브리말로 “아도나이”라고 하는 말입니다. 이 말은 본래 종이 주인을 부를 때에 사용하였던 말인데,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못하였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을 그렇게 불렀던 것입니다. 편의상 하나님을 그렇게 부른 것만은 아닙니다. 정말로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주인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을 지으신 분이시고, 우리들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주인이 되신다면, 우리는 당연히 그의 종입니다. 그러면 종의 사명이 무엇입니까? 종의 사명은 주인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입니다. 자기의 뜻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주인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것입니다. 주인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일을 통하여 자신의 삶에 의미와 기쁨과 보람을 찾는 것이 종의 바른 태도입니다. 현대인들에게 “종”이라는 말이 불편하게 들릴지는 모르지만, 성경적으로 본다면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입니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의 종이 된다고 하는 그 자체가 우리들에게는 큰 축복이요 특권입니다. 

그렇다면 종 된 우리들이 우리들의 삶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께 마땅히 해야 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주인 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종 된 우리들의 본분입니다. 우리들은 그 본분을 잘 감당하면서 삶의 의미와 기쁨과 보람을 찾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성경적 원리를 전도서 기자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전 12:13)라는 말로 가르치고 있고, 여러 차례 말씀 드렸지만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서(The Westminster Catechism)”에서는 다음과 같은 말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제 1문)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무엇인가? (What is the chief end of man?)

(답)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분을 즐거워하는 것이다. (Man’s chief end is to glorify God, and to enjoy Him forever.)

그러면 이러한 종의 사명을 가장 잘 감당하는 비결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오늘 설교 제목처럼 “주인의 마음과 뜻을 잘 이해하고 그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이런 종이 주인의 마음을 기쁘게 해 드리는 지혜로운 종입니다. 오늘 설교 본문 말씀 두 번째로 인용한 잠언서는 이런 종을 다음과 같은 비유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믿음직한 심부름꾼은 그를 보낸 주인에게는 무더운 추수 때의 시원한 냉수와 같아서,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준다. (잠 25:13)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첫 번째 본문 말씀은 다윗이 전쟁터에 있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다윗은 산성 요새에 있었고, 블레셋 군대의 진은 베들레헴에 있었습니다. 베들레헴은 다윗의 고향입니다. 고향을 바로 옆에 두고도 가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다윗은 그때 고향에서 마셨던 우물물이 생각났던 것입니다. 다윗이 양 치던 어린 시절에 마셨던 그 우물물. 전쟁에 지친 다윗은 고향을 그리워하면서 그 우물물 생각이 간절히 났던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그곳은 블레셋 군대들이 진을 치고 있기 때문에 도무지 갈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넋두리 하듯이 말합니다. "누가 베들레헴 성문 곁에 있는 우물물을 나에게 길어다 주어, 내가 마실 수 있도록 해주겠느냐?" 

그러자 이 말을 들은 다윗의 세 용사는 블레셋 진을 뚫고 나가, 베들레헴의 성문 곁에 있는 우물물을 길어 가지고 와서 다윗에게 바칩니다. 자기들의 주군(主君: 주인처럼 모시는 임금)이었던 다윗의 마음을 헤아리고 목숨을 걸고 블레셋 진영을 뚫고 들어가서 그 우물물을 길어 온 것입니다. 

그 물을 받고 다윗이 감동하였으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부하들의 행동에 감격한 다윗은 그 물을 마시지 않고, 길어 온 물을 하나님께 부어드리면서 다음과 같이 기도합니다. "주님, 이 물을 제가 어찌 감히 마시겠습니까! 이것은, 목숨을 걸고 다녀온 세 용사의 피가 아닙니까!" 다윗의 마음을 감동시킨 세 용사.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킨 다윗의 헌신. 이 얼마나 아름답고 감동스런 이야기입니까?

이 세 용사들은 다윗의 30인 특별부대에 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무엘하의 본문 말씀은 이 세 용사들 외에도 다른 용사들에 대하여 소개하고 있습니다. 특히 30인 특별부대의 우두머리인 아비새도 소개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가 가장 뛰어난 용사였음에도 불구하고 앞에서 말한 세 용사보다 못했다고 평가합니다.

스루야의 아들이며 요압의 아우인 아비새는, 삼십인 특별부대의 우두머리였다. 바로 그가 창을 휘둘러서, 삼백 명을 쳐죽인 용사이다. 그는 세 용사와 함께 유명해졌다. 그는 삼십인 특별부대 안에서 가장 뛰어난 용사였다. 그는 삼십인 특별부대의 우두머리가 되기는 하였으나, 세 용사에 견줄 만하지는 못하였다. (삼하 23:18-19)

삼손처럼 힘이 장사였던 브나야도 소개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가 얼마나 힘이 센 용사였으며, 얼마나 큰 공을 세웠는지를 소개하면서도, 앞에서 말한 세 용사보다 못했다고 평가합니다. 

여호야다의 아들인 브나야는 갑스엘 출신으로, 공적을 많이 세운 용사였다. 바로 그가 사자처럼 기운이 센 모압의 장수 아리엘의 아들 둘을 쳐죽였고, 또 눈이 내리는 어느 날, 구덩이에 내려가서, 거기에 빠진 사자를 때려 죽였다. 그는 또 이집트 사람 하나를 죽였는데, 그 이집트 사람은 풍채가 당당하였다. 그 이집트 사람은 창을 들고 있었으나, 브나야는 막대기 하나만을 가지고 그에게 덤벼들어서, 오히려 그 이집트 사람의 손에서 창을 빼앗아, 그 창으로 그를 죽였다.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가 이런 일을 해서, 그 세 용사와 함께 유명해졌다. 그는 삼십인 특별부대 안에서 뛰어난 장수로 인정을 받았으나, 세 용사에 견줄 만하지는 못하였다. 다윗은 그를 자기의 경호대장으로 삼았다. (삼하 23:20-23)

성경은 앞에서 말한 그 세 용사들 외에도 이렇게 화려한 업적과 경력을 가진 용맹스러운 장수들이 다윗 곁에 많이 있었다는 사실을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성경은 그 모든 사람들이 베들레헴에서 물을 길어다가 다윗에게 주었던 그 세 용사들에 비할 수 없었다고 평가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이 세 용사들로 하여금 이러한 놀라운 평가를 받게 한 것일까요?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다른 장수들보다 다윗으로부터 더 큰 신임을 얻게 하였던 것일까요? 그들이 가졌던 능력이 남들보다 월등하게 뛰어났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남들보다 공적을 더 많이 세웠기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이유는 단 하나였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주군이었던 다윗의 마음을 헤아리고, 또 다윗의 마음을 기쁘게 해 주려고 목숨을 아끼지 않고 충성심을 행동으로 옮겼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는 사람이 되는 방법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에게 남다른 능력과 재능이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선한 일을 많이 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많은 업적을 쌓아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단지 우리 삶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헤아리고, 또 그것을 이루어드리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면 되는 것입니다. 

서두에 소개하였던 복음 성가의 가사처럼, 하나님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가를 헤아리고,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드리려고 노력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나의 뜻을 이루어가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나의 삶을 통하여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며 노력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우리들에게 주기도문을 통하여 이러한 삶을 살도록 가르쳐 주셨습니다.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 6:9-10)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땅에서도 바라는 기도입니다. 또한 그러한 하나님의 뜻이 우리들의 삶을 통하여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나님께 기도하실 때에도 그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마 26:39)

내 생각과 내 뜻을 주장하는 기도가 아닙니다. 내 꿈을 펼치려는 태도도 아닙니다. 우리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이해하고 헤아리는 기도이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기를 간절히 원하는 마음이 담긴 기도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헤아리는 영적인 예민함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러한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이루어 드리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세 용사가 다윗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또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켜 드린 것처럼, 우리들도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켜 드리고, 무더운 추수 때에 시원한 냉수와 같이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드리는 복된 교회와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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