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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막의 축복 (출 2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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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막의 축복 (출 25:1-9)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10가지 재앙의 능력으로, 애굽을 탈출했다. 그래서 행복했지만, 고난의 끝이 아니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로 몰아넣었다. 광야는 살기 힘든 곳이다. 불뱀과 전갈로 인한, 죽음이 있고, 농사를 지을 물도, 먹을 물도 없다. 
하나님은 이런 광야에, 이스라엘 백성을, 40년간 살게 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광야와 같다. 죽음과 고통이 있지만, 반드시 지나가야 할 광야다. 여기에는 비밀이 있다. 광야는 하나님을 깊이, 만날 수 있는 곳이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쓴 물을 단 물로 바꿔주었다. 

먹을 음식이 없을 때, 하늘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서, 배불리 먹도록 했다. 원수들이 공격해 올 때 막아주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지켜주었다. 이렇게 지켜주던 곳이 광야다. 행복은 많이 가지고 있음이 아니라, 누구와 함께 하느냐에 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면, 광야도 행복하다. 
따라서 성도는, 사랑하는 하나님과 함께할 때, 가장 행복하다. 아무리 어려워도, 창조주 하나님이, 함께 하면, 어떤 고난이 있어도 괜찮다. 광야는 나의 사랑을, 하나님께 고백하며,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다고 증명하는 곳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한다는 말씀을, 광야에서 확실하게 증명해주었다. 

하나님은 인간의 연약함을 알고, 성막을 만들도록 명령했다. 성막에서 죄를 해결해고, 교제를 나눌 수 있는 장소를, 만들라는 말이다. 거룩한 하나님이 함께 하면서, 죄를 용서해주고,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준 장소가, 바로 성막이다. 
성막은 성경에 50장 정도로 나온다. 단일 주제로, 50장 정도로 언급된 곳은, 성막(성소)밖에 없다. 그만큼 성막이 중요하다. 성막은 예수님의 모형이다. 동시에 교회의 모습이며, 인간이 어떻게,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지, 깨닫게 되는 곳이, 바로 성막이다. 성막은 축복이다. 왜 성막이 축복인가? 

하나님이 그 속에 거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집을 세우면, 누가 더 좋은가? 사람이다. 죄를 범한 인간이, 하나님 만나는 것보다, 큰 축복이 어디 있는가? 국민들이 대통령을 만나는 것이, 더 좋은가? 대통령이 국민들을 만나는 것이, 더 좋은가? 

성막의 축복이 무엇인가? 율법으로 절망하고 좌절하고, 죄지은 것을, 용서받을 자리가 성막이다. 성막이 없었다면, 우리는 절망하고 말았을 것이다. 말씀을 깨닫지 못한다. 죄를 지어서 잘못했는데, 해결할 곳이 없다면 불행이다. 이처럼 죄를 용서받는 장소가 성막이기에, 하나님은 성막을 허락했다. 
따라서 성막에 들어가면, 하나님이 행한 일에, 감사하는 마음이 생겨, 감사의 제사를 드리게 된다. 하나님께 경배하고, 예배하고 찬양하고 싶어진다. 이러한 성막의 축복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 동안 광야에서 안심하고 살 수 있었다. 

1. 기쁜 마음으로 성막을 세워라(1-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내게 예물을 가져오라 하고, 기쁜 마음으로 내는 자가, 내게 바치는 모든 것을, 너희는 받을지니라.”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예물을 가져오라고 한 이유는, 성막을 만들기 위해서다. 백성들이 드린 예물이, 바로 성막의 기초가 되었다. 하늘의 재료가 아니다. 이 땅의 예물이다. 백성들이 드린 그 예물에 하나님이 거함은, 놀라운 축복이다. 성경에서 성막은, 여러 가지 명칭으로 나온다. 

(1) 성소(8).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이 나를 위하여 짓되” 성소(미크다쉬)는, 거룩한 장소이란 뜻이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 가운데 세워진 장막을 보면서, 이런 신앙을 고백했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 

(2) 회막(레1:1). 
“여호와께서 회막에서 모세를 부르시고, 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회막은 ‘오헬 모에드’(ד󰘠וֹמ ל󰕛󰔠)이다. ‘오헬’은 장막, 천막을 말하고, ‘모에드’는 지정했다는 말에서 온, ‘정한 장소, 정한 때’를 말한다. 

정한 때는 절기이고, 정한 장소가 회막이다. 우리가 모여서 의논할 때 ‘회의’라고 한다. 회막에서는 하나님과 사람이 만난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죄인 된 인간들은, 만날 수가 없다. 그래서 죄인들이 용서받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가, 바로 회막이다. 

(3) 증거막(출38:21). 
“성막 곧 증거막을 위하여, 레위 사람이 쓴 재료의 물목은, 제사장 아론의 아들 이다말이, 모세의 명령대로 계산하였으며.” 증거막(미쉬칸 하에두트) 진리를 ‘증거 하는 성막’이라는 말이다. 

하나님은 우주를 만든 분이다. 해와 달과 별을 만들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계시지 않은 곳이, 한군데도 없다. 그렇기에 하나님을 만나기가 쉽지만, 만나는 방법을 모르기에 어렵다. 자기 멋대로 섬긴다. 그래서 범신론과 미신이 생긴다. 해도 섬기고 달도 섬긴다. 
하나님은 육체가 아니고, 영이기에 만날 수가 없다. (요4: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고 했다. 우리는 영도 있지만, 육체도 있다. 이 육체을 가지고 하나님을 만나고, 섬기는 일은, 그렇게 쉽지 않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아들 예수님을, 육신이 있는 몸을 통해서, 세상에 보내셨다. 그래야 인간이 제일 쉽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하나님은 그런 방법으로, 우리를 구원하기로 작정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가 너와 만날 수 있는 장소를, 만들어 놓고, 진리를 가르치겠다.’고 했으니, 얼마나 감사한가? 여기저기서 방황하지 않도록, 한 곳에서, 정기적으로, 너를 만나주겠다는 것이다. 따라서 성소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진리를 알게 된다. 

(4) 장막(9). 또는 성막(출26:1上). 가장 많이 쓰인다. 138번 쓰인다. 
“무릇 내가, 네게 보이는 모양대로, 장막을 짓고, 기구들도 그 모양을 따라 지을지니라.” “너는 성막을 만들되…” 장막과 성막은 미쉬칸(ן󰗇󰚉󰗬)인데, 샤칸(거주하다, 머무르다)에서 파생됐다. 

하나님이 한 장소에, 머문다는 뜻이다. 한 장소에 머물러 있어, 자신을 죄인에게 계시하는 곳이다. 하나님이 자신을 인간에게 보여주지 않으면, 유한한 인간은 하나님을 알 수 없다.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를 깨달을 수 없다. 하나님이 거하고, 만나 주는 곳이, 바로 장막이니, 얼마나 기분 좋은가? 
기쁨으로 드린다는, 나다브(ב󰕈󰗺, 자원하여 드리다, 아낌없이 드린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빼앗지 않는다. 기쁨으로 헌신하라 했다. 하나님이 ‘억지로 내거나, 체면으로 내는 것을 싫어하니, 기쁨으로 내는 것을, 좋아한다.’고 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알면, 예물을 기쁜 마음으로, 드리게 되어있다. 

사람은 다양한 이유로, 예물을 드리지만, 하나님은 기쁨으로 드리는, 예물을 받으라고 했다. 기쁜 마음으로 드린다는 말은, 은혜를 안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자들, 은혜를 아는 자들 가운데, 함께 하신다. 백성들이 기쁨으로 드린 예물이, 성막의 기초가 되었다. 
만일 예물을 드리지 않으면, 다리가 부러지거나, 집에 불이 날 수 있다는 협박을 받아서, 두려운 마음으로 드리는 예물은,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다. 또한 ‘돈 내고, 돈 먹기 식으로 해보면, 100배로 뻥튀기가 된다.’ 이런 투자의 목적으로, 드리지 않는다. 체면 때문에, 예물을 드리지도 않는다. 

2. 받으시는 예물의 종류(3-7). 

“너희가 그들에게서 받을 예물은 이러하니, 금과 은과 놋과,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는 베 실과, 염소 털과 붉은 물들인 숫양의 가죽과, 해달의 가죽과 조각목과,  
등유와 관유에 드는 향료와, 분향할 향을 만들 향품과, 호마노며 에봇과 흉패에 물릴 보석이니라.” 이 말씀에 명시된 물건은, 12개나 되는데, 관유와 향품은 여러 가지 품목이 있기에, 구체적으로는 30개의 물건이다. 예물에는 각각 뜻이 있기에, 예물을 지정했고, 마음을 담아서 드리라는 말이다. 

하나님의 마음에는, 모든 그림이 다 그려져 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자신들이 가진 것이 어디에 쓰일지, 구체적으로 알지 못한다. 그러나 이 성막이 완성되었을 때, 그들이 순종하여 바친 것들이, 놀라운 일에 쓰임 받음 알고, 감격했을 것이다. 따라서 내가 이해되지 않아도, 순종함이 중요하다. 
금과 은은 변함이 없다. 몇 천년된 무덤을 발굴해 봐도, 금관은 그대로다. 어제나 오늘이나 변함이 없는 분이,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안다면, 금과 은은 너무도 귀한, 예수님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연단된 믿음을 의미한다. 은과 금은 절대로 그냥 나오지 않는다. 불순물을 다 끄집어내야 한다. 

전부 녹여서, 잘못된, 불순물 등을 끄집어낼 때, 순수한 금이 되고, 은이 된다. 그래서 금과 은은 연단된 믿음을 의미한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연단을 받을 때가 있다. 그렇다고 절대 포기하면 안 된다. 연단이 끝난 후에, 정금과 같은 믿음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놋’(느호쉐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했던, 불평이 연상된다. 그들이 불평했을 때, 불뱀을 보냈다. 불뱀이 나와서, 아무나 막 물었다. 그러자 독이 퍼져, 다리가 썩고, 팔이 붓고, 죽었다. 그때 놋으로 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 물린 자마다 보면 살리라(민21:8)고 했다. 

그러자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서, 장대 위에 달았다(민21:9). (요3: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놋은 심판을 통한 구원을 의미한다. 놋뱀은 심판받은, 예수님을 상징한다. 믿음으로 바라보는 자들에게는 구원이지만, 바라보지 않는 자에게는, 심판받아 죽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드려진 예물은 중에, 네 가지 색깔의 실은 무엇을 뜻하는가? 청색은 하늘색으로, 생명을 나타낸다. 생명이 되신 예수님을 말한다. 자색은 제일 비쌌기에, 큰 부자나 임금만 입을 수 있었다. 만왕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말한다. 홍색은 피의 색깔이며, 고난당한 예수님을 의미한다. 

가는 베실은 하얀색으로, 죄 없으신 예수님을 상징한다. 염소는 사람이 지은 죄를 대신해서 죽은, 제물 중의 하나다. 붉게 물들인 숫양의 가죽에서 피 흘린 예수님을 의미한다. 해달의 가죽은, 강한 햇볕도, 비, 우박, 바람도 뚫지 못한다. 이렇게 지키고 보호해준다. 
조각목은 가시나무이다. 엄청나게 생명력이 강하고, 잘 죽지 않는다. 죄와 저주를 짊어지고 죽으신 예수님을 의미한다. 그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신다. 기름은 성령님을 상징하는데, 예수님이 보내준다. 예수님의 영으로, 세상을 비추며 살라는 말이다. 

향품은 다섯 가지의 물건들이 들어갔다(출30:34-36). 소합향과 나감향과 풍자향의 향품을 가져다가 그 향품을 유향을 섞고, 소금을 쳤다. 이 향은 하나님을 직접 만나러, 지성소에 들어가기 전에 피웠다. 이는 기도를 말한다. 예수님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다. 
에봇은 제사장이 입는 옷이다. 이 옷에 12개의 보석을 달았다(출28:15-21). 이 보석 12개를 금으로 두르고, 그 위에 이스라엘 12지파의 이름을 썼다. 이스라엘 12지파는, 믿음으로 예수님을 구세주와 주님으로 받아들인, 하나님의 백성들을 말한다. 예수님 안에서, 보석 같은 자녀가 되었다는 말이다. 

많은 종류의 예물들을, 하나님께로 가져왔다. 여기에 있는 물건 하나하나는, 하나님의 집에 필요한 물건들이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은 너무 좋아서, 내는 것만 가지고도 남는다. 그렇게 해서 세워지는 것이, 하나님의 집이다. 

3. 하나님이 함께 하는 성막의 발전 과정(8-9).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이 나를 위하여 짓되, 무릇 내가 네게 보이는 모양대로, 장막을 짓고, 기구들도 그 모양을 따라 지을지니라.” 성소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집’이다. 

모세는 하늘에 있는 성막을 보고, 이 지상에 성막을 지었다. 성막은 하늘의 그림자요, 모형이다. (히8:5) “그들이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이르시되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따라 지으라 하셨느니라.” 
모세가 하나님을 만났을 때, 너무도 크신 분임을 깨달았다. 그런 분이 어떻게 그들과 함께 하실 수 있는가?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라, 죄 있는 자는, 소멸될 수밖에 없다. 이렇게 놀라운 하나님이, 죄를 용서하고, 만나서 교제하기 위해, 성막을 만들라 했다. 성막은 이렇게 발전된다. 

① 최초의 성소는 에덴동산이다. 하나님은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와 같이 거닐었다. 하나님이 그 곳에 계셨고, 모든 영광을 드러내어 보여주었다. 에덴동산은 최초의 성전이었다. 그런데 에덴동산이, 왜 깨어졌나? 성소가 왜 깨졌나? 사단의 역사를 통해, 죄가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죄가 들어오고, 처음 사람이 죄를 범해, 아담과 하와는, 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그들은 거룩한 하나님과 같이 거하는, 특권을 상실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는 성소를 잃어버렸다. 그렇다고 하나님은 더 이상, 아담과 하와를 찾을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 

② 광야생활을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과의 만남의 장소로서, 하나님이 허락한 장소는 장막이다. 이 장막에서 죄를 용서 받았다. 죄 사함을 받은 다음에, 그들은 거룩하신 하나님과 함께 있게 되었고, 그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했다. 그것이 바로 장막이다. 

③ 성전이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만나고 싶으면, 장막으로 갔지만, 이제 가나안 땅에 들어온 후로는, 하나님을 만나고 싶으면, 성전에 갔다.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고, 죄를 용서받은 다음에, 성전 안에서 놀라우신 하나님과 만나며, 교제할 수 있었다. 

④ 예수 그리스도다. (요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거하시매(스케노오 σκηνόω, 천막을 치다, 거주하다)는 말이다. 이것이 모델이다.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는,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 있다. 

⑤ 신자의 몸이다. (고전3:16)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우리 몸이 바로 성전, 즉 성소라고 한다. 신자들의 몸이 성소다. 성소의 본래 개념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이다. 우리 안에 하나님이 거하시는가? 그렇다면 성전이다. 

⑥ 마지막 성소인,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천국이다. (계21:3)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천국에는 하나님이, 충만히 거하신다. 이 세상에는 죄가 있기에, 하나님이 충만히 거하지 않는다. 그러나 저 천국은, 죄가 다 제하여 졌기에,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히 거하는 장소다. 그래서 마지막 천국에는, 주님의 영광이 충만히 거한다. 이단들은 자기들이 있는 곳이, 하나님의 장막이라고 한다. 
그러나 새 하늘과 새 땅인, 하나님의 장막은 (계21: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사망도, 애통도, 곡함도,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않기에, 그들이 주장하는 곳은 가짜다. 

광야 40년 동안 축복받았던 성막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며, 또한 오늘날의 교회이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았는가? 그런데 만약 교회가 없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얼마나 방황하겠는가? 축복 중에 축복은, 하나님께 나와서, 예배드림으로, 하나님께 용서받고, 위로와 격려를 받는 일이다. 

그래서 세상을 향해, 다시 나갈 수 있는, 힘을 받아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40년을 넉넉히 버틴 이유는, 성막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교회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다. 하나님께 위로받고, 다시 세상으로 나가, 힘차게 승리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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