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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항상 기뻐하라 (빌 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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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기뻐하라 (빌 1:1-7)

(빌 4:1)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
(빌 4:2)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빌 4:3)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 자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부녀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위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빌 4: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빌 4:5)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빌 4:6)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빌 4: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근래에 기쁨에 대한 학자들의 연구가 활발합니다. 기쁨과 웃음이 건강에도 효과가 있고 삶에 전반적으로 크게 유익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웃음은 치료하는데도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웃을 때에 분비되는 엔케팔린이라고 하는 이 호르몬은 진통효과가 있어서 몰핀의 3백배의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미국의 메모리얼 병원에서는 외래환자를 대상으로 오랫동안 연구를 했는데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티졸의 양을 줄여주는 역할이 바로 웃을 때에 일어난다고 합니다. 우리 몸의 스트레스는 긴장과 병을 가져다 주는데 이걸 막아내는 약은 없으나 웃음을 통해서 치료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학계에서는 우리가 한 번 크게 웃으면 2일을 더 살 수 있고, 15초만 웃으면 이틀을 더 살 수 있다고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한 번 웃으면 5분을 에어로빅 하는 것보다 더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웃음은 근본적으로 안에 있는 가장 큰 뇌의 기능을 활발하게 움직여서 건강에도 그렇게 좋다고 합니다. 
  
캘리포니아 로마린다 의과대학에서는 웃음과 면역체에 대한 연구를 통해 웃을 때에는 체내에서 병균을 막는 항체인 인터페론감마 호르몬이 많이 분비된다는 것을 밝혀냈습니다. 동경의대에서는 만성통증 환자들에게 웃음이라고 하는 것은 불치의 병도 다 고칠 수 있다는 것을 밝혀냈다고 합니다. 

신경계에는 웃음이 신체 전 기관의 긴장을 완화시켜서 암환자의 통증을 경감시킨다고 합니다. 호흡기에는 웃음이 산소공급을 두 배나 증가시켜서 머리가 좋아진다는 임상 결과도 있습니다. 소화기에는 기쁨이 가득하면 소화호르몬이 촉진되어 음식물의 소화를 돕는다고 합니다. 

밥 먹을 때는 즐거운 이야기를 하며 웃으면서 먹기 바랍니다.  웃으면 우리 몸의 650개의 근육 중에 231개가 움직인다고 합니다. 얼굴 근육은 15개가 움직인다고 합니다. 내분비계는 혈액 내에 아드레날린과 스트레스호르몬인 코티졸의 양을 확 줄여준다고 합니다. 웃으면 세포도 증가된다고 합니다. 이 얼마나 좋은 것이 웃음입니까? 우리 조상들도 '일소일소 일노일노'라고 말했습니다. 한번 웃으면 한번 젊어지고 한번 화내면 한번 늙는다라는 것입니다.  

빌립보서는 사도 바울이 감옥에서 빌립보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빌립보서의 주제는 기쁨입니다.  바울은 빌립보교회 교인들이 모두 기쁨이 가득하여 기쁨이 가득한 교회를 만들어 가기를 간절히 소망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울 자신이 기쁨으로 충만했습니다. 

비록 감옥에 갇혀 자유를 잃어버린 어려운 환경이었지만 예수님과 함께 하는 생활이 억제할 수 없는 기쁨으로 행복하게 만들어주었습니다. 바울은 다른 사람들도 자신처럼 기쁨이 가득하기를 원했습니다. 특히 자신이 유럽에 들어와 전도하여 최초로 개척한 교회, 가장 애정을 가지고 있던 빌립보교인들도 늘 기쁨 속에 살아가기를 진심으로 원했던 것입니다. 

성도들이 언제나 기쁨이 샘물처럼 솟아나는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살전 5:16에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기쁨을 잃어버린 성도들이 많습니다. 경직된 자세와 굳어진 얼굴로 예배를 드리며 그것을 경건한 증거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 많습니다. 교회 안에서 사소한 문제로 서로 오해하고 섭섭해하며 서로 미워하며 상처를 주고 받으며 기쁨을 잃어버리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염려에 눌려 감사를 잃어버리고 억지로 봉사하며 기쁨이 메말라가는 교인들도 많습니다. 
  
기쁨을 잃어 버린 채 예배 드리고 기도하며 모여 있는 교회를 교회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오랫동안 즐거운 마음을 잊은 채 살아가는 사람을 진정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 행복한 마음을 주체할 수 없어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쁨을 나누어주고 싶어서 전도하며 다른 사람을 즐겁게 섬기며 살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늘 기쁨이 충만한 삶을 살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주 안에서 든든히 서야 합니다.(1)
  
진정한 기쁨은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가장 먼저 강조한 것이 주안에 서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서 살아가면 기쁨이 충만할 수 밖에 없습니다. 참된 기쁨은 예수님이 주시는 기쁨입니다. 예수님 안에는 언제나 충만한 기쁨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요 15:11)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수님 안에서 샘솟는 기쁨을 우리에게 나누어 주고 싶어 하십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 예수님이 주시는 기쁨,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가질 수 있는 기쁨이 온전한 기쁨입니다. 
  
어떤 환경 속에서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온전히 거할 때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이 말씀은 결코 한 순간에 우리가 느끼는 감정적 환희를 강조하는 말씀은 아닙니다. 

왜 바울은 여기서 "주안에서"라는 표현을 사용했을까요? 이 표현은 본문이 시작되는 4:1에서도 사용되었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게 "주안에 서라"고 했습니다. '주안에서 기뻐하라' 고 한 것은 예수 안에서 살아갈 때 기쁨이 충만하다는 말씀입니다.

바울 자신이 주안에 서있으므로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복음을 전하다 억울하게 감옥에 갇혔지만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도무지 기뻐할 수 없는 환경에 있고 기뻐할 수 없는 많은 문제들이 바울을 괴롭혔지만 예수님과의 바른 관계 속에 있으니까 즐겁기만 했던 것입니다. 

바울을 공격하고 비난하는 사람들 속에서도 늘 웃을 수 있었습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심한 고초를 많이 겪지만 그로 인해 주님의 위로와 큰 사랑을 경험하였습니다. 주님 밖에 살 때는 문제만을 보며 사람을 미워하며 살았지만 주안으로 들어오니 문제는 작게 보이고 주님만 크게 보여서 기쁨이 줄어들지 않고 넘쳐났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기쁨을 찾아 예수님 밖으로 나가려고 합니다. 참된 기쁨을 구한다면 예수님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가야 합니다.  여러분,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 샘솟는 기쁨을 맛보시기 바랍니다. 

경기도 성남에 아주 가난한 여집사님이 있었습니다.  그 집사님은 혼자서 아이들을 데리고 어렵게 살아가는 분인데 직업은 목욕탕에서 때를 밀어주는 분이었습니다.  이렇게 어려운 환경인데도 매일 얼마나 기쁨과 은혜로 살아가는지 그분을 보면 곧 감동이 될 정도라고 합니다.  그래서 일년에 수십 명씩 그 집사님에게 감동되어 교회로 오는 분이 늘어난다고 합니다.  어떻게 하면 당신 같은 환경에서 그렇게 기쁨과 감사로 살 수 있느냐고 감동하여 교회로 인도되어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교회가 예배당을 건축하느라고 애를 쓰는데 집사님이 400만원을 헌금했습니다.  목욕탕에서 때를 밀어 번 때 돈으로 말입니다.  이 분의 기쁨은 아무도 빼앗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남편이 토닥거려주는 사랑도 아니요, 물질로 채워지는 기쁨도 아니며, 오직 성령이 주는 기쁨입니다.  내 안에 사시는 그리스도, 그로써 그는 이 같은 기쁨과 간증과 찬송으로 살게 되니 더 나은 환경에서 사는 사람들이 모두 부러워하고 선한 영향을 끼치며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기쁨이 늘 샘솟는 삶의 비결은 외적인 조건이 충족될 때 오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주안에 든든히 서게 될 때 가능합니다. 주 밖에서는 아무리 좋은 것을 소유하고 누린다 해도 잠깐은 기쁠지 몰라도 금방 시들어 버립니다. 진정한 기쁨은 주안에서만이 만날 수 있고 그 기쁨은 계속 샘물처럼 솟아나게 됩니다. 개인적으로 기쁨이 충만해지고 기쁨이 가득한 가정을 만들기 위해서 예수 안에 깊이 들어가기를 바랍니다. 주 안에 든든히 서게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2. 좋은 관계를 유지하야 합니다.(2)
  
우리들의 기쁨을 빼앗아 가는 가장 빈번한 이유는 인간관계의 갈등입니다. 한때 친밀한 인간 관계로 기쁨을 나누던 사람들이 사소한 문제로 갈등을 가지며 서로 상처를 입히고 등지게 될 때 우리는 많은 것을 잃어버립니다. 평안, 위로, 행복 등 셀 수 없이 많은 것을 빼앗깁니다. 

그 중에서 우리 안에 있는 기쁨을 잃어버리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손실입니다.  이것은 교회생활에서도 예외가 아닙니다. 한때 교회 안에서 서로 마음을 같이하여 함께 주의 일을 감당하던 교우들이 서로 외면하고 얼굴을 붉힐 때 우리는 교회생활의 보람과 즐거움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바로 이런 문제가 빌립보 교회 내에도 일어났던 것입니다. 빌4:2을 읽어보십시오.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아마도 유오디아와 순두게는 빌립보 교회 내에서 헌신적으로 수고하던 두 여성 지도자들이었을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3절에서도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부녀들"이라고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무슨 문제 때문인지 같은 마음을 품지 못하고 갈등을 빚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결국 유오디아와 순두게 두 사람의 마음에 충만하던 기쁨을 삼켜버렸고  빌립보교회 공동체에 상처를 남기고 모두를 근심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심지어 바울까지도 감옥에서 그 사실을 알고 근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단은 끊임없이 성도들의 기쁨을 빼앗고자 성도들을 이간질하고 아무 것도 아닌 사소한 일로 마음을 상하게 만듭니다. 서로를 미워하게 만듭니다. 서로 오해하고 서로 관계가 멀어지게 만듭니다. 이것은 기쁨을 빼앗아가려는 사단과의 영적 전쟁임을 깨닫고 깨어진 관계를 회복해야만 합니다. 

그렇다면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고 좋은 인간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본문 5절에서 바울은 인간관계의 갈등의 처방으로 관용을 강조합니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여기서 '관용'이라는 말은 달리 말하면 '부드러운 절제'라는 뜻입니다.  

비본질적인 문제로 싸움이 되지 않도록 자기 절제를 할 줄 아는 사람이 관용하는 사람입니다. 관용이 있는 사람은 결코 경직된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부드럽고 온유하여 이웃을 용서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자기 입장에서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 않고 상대를 이해하려고 최선을 다하는 사람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친한 사람뿐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우리의 관용을 나타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로 "주께서 가까우시니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우리가 곧 죽어 주님 앞에 서게 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인생의 결산의 날에 부끄럼 없이 이웃들과 관계하며 살았음을 주께 보고하도록 준비해야 할 것입니다. 그때에 우리는 주님의 긍휼을 간청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주 앞에 서서 심판을 받을 때 우리 자신이 무엇보다 주님께 우리의 허물에 대해 관용을 베풀어 달라고 호소할 것입니다. 그때 주께서 그러면 너는 너에게 필요한 관용을 얼마나 이웃들에게 베풀며 살았느냐고 물으실 것입니다.   

링컨 대통령이 한번은 국방장관을 대동하고 야전 사령부를 방문하였습니다. 그런데 맥클레런 장군이 전장에 나가고 자리에 없어서 몇 시간 동안 사령관 실에서 기다렸습니다. 얼마 후 멕클레런 장군이 돌아왔지만 그는 대통령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면서도 한 마디 말도 없이 2층 숙소로 올라가 버렸습니다. 한참 후 부관이 나타나 "장군께서는 너무 피곤하여 잠자리에 드셨습니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스탠턴 국방장관이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올라 "대통령 각하 저렇게 무례한 놈은 제 생전에 처음입니다. 저런 놈은 당장 직위를 박탈해 버려야 합니다."
  
링컨이 잠시 침묵하더니 "아닙니다. 맥클레런 장군은 우리가 이 전쟁에서 이기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사람입니다. 장군 때문에 전쟁이 조금이라도 빨리 끝날 수 있다면 나는 기꺼이 그의 말고삐라도 잡아 주고 그의 군화라도 닦아 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링컨은 장군이 잠도 못 자고 전투에 시달렸기 때문에 휴식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사령부를 떠났습니다. 

우리가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이해하려고 노력할 때 관용을 베푸는 것이 쉬워집니다.  그리고 관용을 베풀면 우리의 가슴이 넓어집니다. 사람을 얻게 되고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게 됩니다. 나아가 사람들에게 놀라운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기쁨을 풍성하게 누리기 위하여 우리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관용하는 삶의 자세를 보이는 것만이 최선입니다. 좋은 관계를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하여 날마다 기쁨이 샘솟는 삶을 살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3. 염려에 붙잡히지 말아야 합니다.(6)

인간관계의 갈등 못지 않게 우리의 기쁨을 빼앗아 가는 것이 있다면 염려입니다.  본문 6절에 사용된 '염려'라는 단어는 본래 "마음을 나눈다"는 뜻입니다. 마음이 나누어지고 찢어지면 걱정이 생깁니다. 이 생각 저 생각으로 마음이 표류하면서 마음을 잡지 못하는 상태- 그것이 바로 염려인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이런 염려들을 무엇으로 극복할 수 있단 말입니까? 

성경적 처방이 기도입니다. 염려할 모든 것을 기도할 모든 것으로 바꾸라는 말입니다. 그냥 기도할 뿐 아니라 기도하고 간구하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우리가 어떤 문제를 붙들고 간절하게 지속적으로 기도하다 보면  상황은 달라집니다. 염려는 극복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염려 그 자체는 전혀 상황을 바꿀 수 없습니다. 일단 염려 그 자체를 중단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어떤 아주 병약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집 앞에 큰 바위가 버티고 있어서 드나들기에 몹시 불편했습니다. 꿈에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내일부터 힘껏 바위를 밀라.'고 하셨습니다. 이 사람은 큰 기대를 가지고 날마다 바위를 밀었습니다. 수 개월 동안 바위를 밀었습니다. 그러나 바위는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바위가 얼마나 움직였는지를 

측량해 보았더니 1센치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너무 실망이 되고 화가 나서 주저앉아 울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왜 우느냐?고 물었습니다. 하나님 때문에 화가 났습니다. 날마다 바위를 밀면 움직일 것이라고 하여 열심히 밀었는데 일센치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나는 너에게 바위를 밀라고 했지 바위를 움직이게 해주겠다 말한 적은 없다. 가서 너의 모습을 보아라." 

그가 거울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병약한 남자는 온데 간데 없고 거울 속에는 근육질의 몸짱 남자가 서 있는 것이었습니다. 생각해보니 밤마다 단잠을 잤습니다. 음식도 가리지 않고 날마다 맛있게 먹었습니다. 질병도 사라졌고 날마다 활기차고 의욕에 넘치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바위는 여전히 그 자리에 버티고 있었지만 자신이 놀랍게 변화된 것입니다. 이처럼 기도하면 우리 자신이 변화됩니다. 그러면 문제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염려대신 기도하고 간구하라고 가르칩니다. 우리의 기도와 간구가 상황을 바꾸지 못한다 해도 우리 자신을 바꿀 수 있다면 얼마나 다행한 일입니까? 그래서 바울은 우리가 기도하고 간구할 때 감사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하면 어떻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까?  7절에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이런 상태를 일체의 물결이 잔잔해진 고요한 호수에 비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평화가 임한 마음이 그렇습니다. 이제 그의 마음은 더 이상 동요하지 않습니다. 그는 염려할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기뻐합니다. 그리고 그는 이제 모든 것을 하나님의 마음으로 잘 판단할 수 있게 됩니다. 마침내 그는 하나님의 지혜로 인생의 위기를 기회로 바꾸게 됩니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기쁨이 가득해지고 하나님의 평강이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시는 삶으로 변화되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을 한 마디로 표현하라면 기쁨이 가득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였기에 기쁨을 회복한 새로운 삶을 사는 것입니다.  초막이나 궁궐이나 어디에 살든 예수님을 모시고 살기에 내가 있는 곳이 천국으로 바뀝니다.  동시에 그런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 교회이기에 교회생활을 통해 천국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를 세상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참 기쁨으로 가득 찬 공동체로 만들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그럴 때 여러분의 가정도 천국처럼 기쁨이 충만한 아름다운 곳이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 항상 기뻐함으로 천국을 경험하며 살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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