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디딤돌 인생, 걸림돌 인생(1) (삼상 11:14 - 삼상 12:5)

첨부 1


디딤돌 인생, 걸림돌 인생 (삼상 11:14-12:5)

옛날 시골에 다리가 놓이지 않는 냇가를 건너는 유일한 방법은 돌로 만들어 놓은 징검다리를 통해서 건너가는 것입니다. 같은 돌일지라도 그 돌이 놓여진 장소에 따라서 디딤돌이 될 수도 있고, 걸림돌이 될 수도 있습니다. 제법 커다란 돌이 아이들이 건너기 힘든 냇가에 있어서 냇가를 건너는 징검다리가 되어준다면, 그 돌은 분명 디딤돌입니다. 그러나 같은 돌이 자동차가 많이 왕래하는 길 한 가운데 있다면 그건 디딤돌이 아니라 걸림돌입니다.
  
돌뿐만이 아닙니다. 모든 것이 그렇습니다. 얼마 전 심방을 가기 위해서 집에서 차를 타고 나오는데, 차 굴러가는 소리가 좀 이상했습니다. 그래서 차를 멈추고 내려 바퀴를 살펴보았더니 앞바퀴 하나가 바람이 다 빠져 있는 것입니다. 심방 약속시간이 다 되었고 해서 겨우 교회당에 차를 끌어다놓고 교회 승합차로 심방을 가고 유 집사님께 보험사에 연락해서 바퀴를 좀 갈아놓아달라고 부탁을 드렸습니다. 심방 끝나고 와서 물어보았더니 바퀴에 못이 하나 박혀 있었다는 것입니다. 작은 못 하나가 바퀴에 박혀서 바람을 다 빼놓아버리니까 자동차가 운행할 수가 없었습니다. 작은 못 하나가 말입니다. 

그런데 그 못이 목수의 손에 들려져서 나무를 고정시키고 집을 짓는데 사용된다면 그건 아주 유용하게 쓰여진 것입니다. 작은 못 하나도 어떻게 쓰여지느냐에 따라서 유용하기도 하고, 무익한 것이 되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에 나오는 사무엘은 그 시대의 디딤돌이 되었던 사람입니다. 
사무엘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역사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던 선지자입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활동하던 시대적 상황을 사사기 마지막 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이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 21:25) 사무엘은 역사적으로 암울했던 때에 태어났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자기들이 하고 싶은 대로 행하던 그런 시대였습니다. 아무도 당시의 사회를 바르게 이끌어주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제사가 무너지고,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나 있었습니다. 영적으로 암울한 시대였습니다.
  
바로 그런 시대에 사무엘이 등장합니다. 사무엘은 하나님으로부터 이스라엘의 왕을 세우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이전까지는 사사를 중심으로 살아가던 사회였습니다. 이스라엘 주변 나라들은 모두 왕정체계를 갖추고서 막강한 군사력으로 이스라엘을 위협해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우리에게도 왕을 달라”고 졸라대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왕을 허락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에게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그들의 왕이 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 위에서 사람을 다스리는 왕이 주어지면 그 왕을 통해서 나라의 힘은 강해질지 모르지만, 그것은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길일뿐만 아니라, 왕을 통해서 백성들은 더 큰 시련과 고통을 당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을 잘 아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왕을 주시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계속해서 하나님께 왕을 세워달라고 졸라댔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요구대로 이스라엘에게 왕을 주시기로 허락하십니다. 그리고 사사시대에서 왕정시대로 바뀌는 사회적 변혁기에, 그 일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사람으로 사무엘이 선택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사무엘은 사울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웠습니다. 그리고 이제 자신의 역할을 마친 후에는 조용히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지려 하고 있습니다. 그는 한 시대의 디딤돌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디딤돌로 살아가는 인생은 어떠해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먼저 디딤돌로 사는 사람은 자신을 다른 사람을 위한 발판으로 내놓아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다른 사람을 짓밟고서라고 내가 더 높은 자리에 서야 성공한 인생이 된다고 배워왔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다른 사람의 발에 밟히는 발판으로 내놓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나를 위해서 다른 사람의 희생을 강요합니다. 내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권리나 권익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아야 합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을 밟고 올라가야 합니다. 그렇게 암묵적으로 세뇌되어온 우리는 내가 손해 보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전혀 손해 보려 하지 않고, 나를 위해서 다른 사람에게 손해 보라고 강요합니다. 
  
그러나 디딤돌로 사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희생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먼저 그의 희생물이 되어주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그렇게 사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당신을 위해서 우리의 생명을 바칠 것을 요구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이 먼저 우리를 위해서 당신의 생명을 내어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나를 사랑하라’고 요구하지 않으시고 당신이 먼저 우리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당신이 먼저 우리를 위해서 모든 것을 버리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주님을 가리켜서 모퉁이 돌이요(엡 2:20),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셨다(마 21:42)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퉁이 돌’이란 말은 또는 ‘모퉁이의 머릿돌’이란 말은 건물의 기초석이 되셨다는 말씀입니다. 건물의 가장 아래에서 모든 건물을 떠받치고 있는 돌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그런 돌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가장 낮은 곳에서 자신을 희생하시며 이 땅에 교회를 세우셨고,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모퉁이 돌이 되시기 위해서 당신의 생명을 십자가에 내어놓으셨습니다. 가장 낮은 자리에 자신을 놓음으로서 모든 사람이 그 모퉁이 돌을 밟고 지옥에서 천국으로 올라가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인류를 위한 디딤돌이 되신 분이셨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아낌없이 주는 나무’라는 동화가 있습니다.
옛날에 나무가 한 그루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나무에게는 사랑하는 소년이 하나 있었습니다. 매일같이 그 소년은 나무에게로 와서 나무와 함께 놀았습니다. 놀다 지치면 소년은 나무 그늘 아래서 단잠을 자기도 했습니다. 그런 소년의 모습을 보면서 나무는 너무 너무 행복했습니다. 
  
시간은 흘러갔습니다. 소년도 점점 나이가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나무는 홀로 있을 때가 많아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무를 찾아온 소년은 나무와 놀아주기는커녕 뭔가를 사고 싶은데 돈이 없다며 근심스런 표정을 지었습니다. 나무는 그 소년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 사과를 따다가 팔아서 돈이 생기면 그것으로 네가 사고 싶은 것을 사려무나.” 소년은 나무 위로 올라가서 사과를 따서는 가지고 가 버렸습니다. 그러나 나무는 행복했습니다. 사랑하는 소년을 위해서 자신이 뭔가를 줄 수 있다는 것이 행복했던 것입니다. 
  
떠나간 소년은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다시 나무를 찾아왔습니다. 나무는 너무 기뻐서 나뭇가지를 흔들며 소년을 맞았지만, 소년은 여전히 시무룩했습니다. 소년은 ‘자신에게 집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나무는 소년에게 ‘자신의 가지를 베어다가 집을 지으라.’고 말합니다. 소년은 자신의 집을 짓기 위해 그 나무의 가지들을 베어서 떠나갔습니다. 그래도 나무는 여전히 행복했습니다.
  
또 다시 오랜 세월이 흘렀습니다. 제법 나이가 들어버린 소년이 다시금 나무를 찾아와서, 이번에는 ‘바다 건너 먼 곳으로 가기 위해서는 배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나무는 ‘자신의 몸통을 베어다가 네가 원하는 배를 만들어 가고 싶은 먼 곳에 다녀오라.’고 말합니다. 소년은 나무의 줄기를 베어 내서 배를 만들어 타고 멀리 떠나 버렸습니다. 자기의 몸통까지 다 주어버렸지만, 그래도 나무는 행복했습니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 소년은 다시 돌아왔습니다. 이제 나무는 소년에게 줄 것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미안한 마음으로 소년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얘야, 미안하다, 이제는 너에게 줄 것이 아무 것도 없구나. 사과도 없고, 그네를 뛸 수 있도록 해주고 싶으나 가지가 없고, 몸통마저 없으니 네가 옛날처럼 나무를 타고 오르며 놀 수도 없구나. 미안하구나.” 그러자 늙어버린 소년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이제 내게 필요한 것은 별로 없어. 난 몹시 피곤해. 앉아서 조용히 쉴만한 곳이나 있었으면 좋겠어.” “그래? 쉬기에는 늙은 나무 밑둥이 그만이야. 얘야, 이리로 와서 여기 앉아 쉬려무나.” 나무는 소년을 위해서 마지막 남은 자신의 밑둥이를 내어주었습니다. 늙어 지쳐버린 소년은 나무가 시키는 대로 피곤한 몸을 납작한 나무의 밑둥에 앉아 편히 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무는 행복했습니다.

물론 이 이야기는 동화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이야기를 통해서 사랑하는 한 소년을 위해서 자신 모두를 희생하는 정말 아름다운 사랑의 모습을 보며 가슴 찡한 감동을 받게 됩니다. 디딤돌이란 바로 이런 희생을 통해서만 그 역할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나를 밟히도록 자신을 내어놓지 않으면 디딤돌이 될 수 없습니다.
  
디딤돌이란 자신은 밟히면서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돌을 말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사람이 된다고 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무엘 선지자은 역사적인 위기 상황 속에서 사울을 왕으로 세우는데 자신이 디딤돌이 되어 주었습니다. 자신은 스스로 왕이 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습니다. 온 백성이 그를 존경했습니다. 어쩌면 자신이 왕이 되겠다고 말한다면 그는 온 백성들로부터 박수를 받으면 왕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왕이 되려 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 사울을 왕으로 세우는데 가장 앞장 설 뿐입니다.
  
사울이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 되는 데에 사무엘은 디딤돌이었습니다. 왕을 요구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욕구를 채워주는데 그는 디딤돌이 되었습니다. 자신이 팔을 벌리기만 하면 그의 팔 안에는 수없이 많은 것들이 들어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팔을 벌리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팔을 사울의 발아래 내려 놓습니다. 사울이 자신을 팔을 딛고 왕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여러분, 세상 모든 사람들이 자신들의 욕심을 움켜쥐고, 더 많은 것을 손아귀에 넣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을 때에, 우리는 조용히 우리 자신을 희생의 자리에 내놓음으로 세상에 디딤돌들이 되어야 합니다. 끊임없이 자기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세상의 방법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사랑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 아들과 함께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닮아 가는 삶을 통해서 디딤돌이 되어야 합니다.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내가 있음으로 내 가정을 행복한 공동체로 만들어 가는 디딤돌이 되어야 하고, 내가 먼저 섬김으로 우리 교회를 행복한 교회로 세워 가는 디딤돌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먼저 양보하고 먼저 희생함으로 내 직장이 화기애애하고, 내가 한 번 더 져주고 한 번 더 양보함으로 해서 친구들 사이에서도 디딤돌이 되어야 합니다.

디딤돌 인생은 다른 사람을 높이고 자신은 낮아질 뿐만 아니라, 영광의 자리에서 조용히 물러날 줄 아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무엘은 이제 자신은 물러갈 때가 되었음을 알았습니다. 자신의 역할은 이스라엘에 왕을 세우는 것으로 다 끝났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울을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드러내 놓고 자신은 역사의 뒤편으로 조용히 물러가려 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사무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오늘이 자신의 생애에 마지막’으로 알고 마지막 연설을 하는 말씀입니다. 그는 사울을 왕으로 세우는 일을 했기 때문에 더 이상 자신이 역사 앞에 존재해야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제 자신은 역사 뒤편으로 물러나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 위에 세운 사울이라는 새로운 왕이 그의 역사를 펼쳐나갈 것입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위대하다는 것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 곳곳에는 자신이 물러나야 할 때임에도 불구하고 물러나지 않음으로 해서 여러 가지 문제와 갈등을 야기시키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물러나야 할 때에 조용하고 깨끗하게 물러나지 않으면 그 동안 쌓아왔던 모든 인품과 덕망이 한 순간에 무너지고 맙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바나바도 스스로 역사 뒤로 숨을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안디옥 교회의 첫 번째 지도자였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안디옥 교회로 파송 받았고, 안디옥 교회에 가서는 교회를 굉장히 부흥시켰습니다. 교회가 커지자 바나바는 자신 혼자서 안디옥 교회를 섬길 수 없다고 생각하고, 회심한 사울을 불러와 함께 교회를 섬겼습니다. 그 결과 안디옥 교회는 더욱 성장하게 되었고, 안디옥 교회는 세상 사람들로부터 ‘그리스도인’이라는 칭호를 받을 만큼 모범적인 교회가 되었습니다.
  
안디옥 교회를 섬길 때에는 바나바가 '나중에 바울로 이름이 바뀐 사울'보다도 훨씬 더 좋은 지도력을 발휘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이 함께 소아시아 지역에 선교사로 파송 받은 이후에는 달라졌습니다. 처음 선교사로 파송 받았을 때에는 바나바가 사울을 리드했습니다. 사도행전 13:2절과 7절에 보면 그 두 사람의 이름을 기록하면서 “바나바와 사울”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나바의 이름이 사울보다 앞에 기록함으로서 첫 번째 선교여행은 바울 중심이 아니라 바나바 중심임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선교가 시작되면서 사도행전 13:13절 이하에서는 이름의 순서가 점차 바뀝니다. ‘사울과 바나바’로. 그리고 나중에는 바나바의 이름이 사도행전에서 사라지고 맙니다. 대신 바울의 이름이 역사의 전면에 나타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나바는 바울에 대해서 어떤 불평도 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보면 바나바는 바울에게 있어서 신앙의 은인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아무도 사울의 회심을 믿어주지 않을 때 사울을 믿어주었던 사람이 바나바였습니다. 아무도 사울과 함께 사역하려 하지 않을 때에도 바나바는 사울을 안디옥 교회로 불러 함께 사역하도록 했습니다. 사울이 안디옥 교회에서 복음의 훈련을 받은 것은 바나바가 아니면 안 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사울이 사도 바울이 되는데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바나바였습니다. 

그런데 선교여행을 떠나면서부터는 바나바의 이름은 점점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사울 - 사도 바울의 이름은 점점 드러나는데, 바나바는 역사 뒤로 사라지고 맙니다. 그런데도 바나바는 바울에게 은인으로서의 어떤 대우를 받으려 한다든지, 자신이 바울보다 더 나은 사람이라는 것을 드러내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게 바나바를 존경스럽게 만든 모습입니다.

여러분, 내 권리를 포기할 수 있는 사람, 마땅히 내가 누려야 할 어떤 특권을 기꺼이 포기하고 조용히 사라질 수 있는 사람, 그 사람이 역사에 디딤돌이 될 수 있습니다. 
  
세상에 쉽게 자기의 권리를 포기하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현실적인 이익에 우리의 눈이 고정되어 있는 한 우리의 권리를 포기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나 자신에게 고정되어 있는 눈을 들어, 좀 더 크고 좀 더 넓은 새로운 시대를 바라볼 수 있는 사람만이 현실적인 권리와 이익을 내려놓고 디딤돌과 같은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여러분, 강경환이란 분의 이름을 들어보셨습니까? 
충남 서산 일대에는 해마다 명절이 되면 독거노인들 집 앞에 깨끗한 천일염 30kg 짜리 포대 수십 포가 놓여 있곤 했습니다. 지금까지 14년째 명절 때마다 같은 일이 반복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누가 그렇게 하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지난 해 그가 바로 강경환이라는 사람이라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13년 동안 혼자서 명절이 되면 30kg 짜리 소금 포대를 갖다놓았는데, ‘이제는 몸이 약해져 힘이 들어서 혼자서는 못하겠다’고 읍사무소에서 직접 노인들에게 나눠주었으면 좋겠다고 소금 한 트럭을 실고 왔던 것입니다.
  
염전을 운영하는 그는 두 손이 없는 장애인입니다. 그가 초등학교 6학년이던 13살 때였습니다. 겨울방학 때인 1972년 12월 24일 아침 9시 40분경, 자신이 살던 서산 해안가에서 놀다가 안티푸라민 통과 비슷한 깡통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신기한 그 통을 발견하고는, 나비처럼 생긴 철사가 있어서 그것을 떼어내고 가지고 놀 요랑으로 돌로 깡통을 두들겨댔습니다. 그 순간 그 앞에는 참혹한 일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그 깡통이 폭발한 것입니다. 그것은 6.25 전쟁 때 묻어놓은 대인지뢰였습니다.
  
폭발 소리에 놀란 마을 사람들이 그를 업고 병원으로 달려갔습니다. 사흘 뒤에 깨어나 보니 손목 아래 두 손이 모두 절단되고 없었습니다. 두 손이 없는 장애인이 되고 만 것입니다. 그는 그게 부끄러워서 중학교에도 가지 않았습니다. 나이가 점점 들어가는데 그는 인생을 포기한 채 하루하루 살아갔습니다. 모든 게 귀찮아서 농약을 먹고 죽어버리고 싶을 때도 있었습니다. 17살 때부터는 매일 주막으로 출근을 했습니다. 아침 10시에 주막에 가서 술을 먹기 시작하면 밤 12시가 되어야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집에 유인물 하나가 와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두 팔과 다리 하나가 없는 정근자 전도사가 인근 교회에 와서 간증집회를 한다는 전단지였습니다. ‘나보다 더한 이런 사람도 있구나...’라고 생각하고는 정근자 전도사에게 ‘나도 당신처럼 살 수 있느냐?’고 편지를 썼습니다. 그랬더니 ‘당신도 나처럼 살 수 있다’고 답장이 왔습니다. 그 말에 용기를 내어 ‘이런 분이 믿는 하나님, 나도 믿어보자.’ 그리고 교회에 등록하여 신앙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신앙을 갖게 되면서 그의 인생은 180도 바뀌어졌습니다. 술을 끊고 열심히 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더 이상 불행한 자신의 삶을 한탄하지 않았습니다. 손이 없기에 오른쪽 손목에다가 낫을 테이프로 감고서 낫질을 배웠습니다. 아버지의 농사일도 도왔습니다. 그러던 중 교회에서 만난 여인과 결혼도 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35살이던 1994년 아버지의 친구가 그에게 ‘너 염전 할 수 있겠느냐?’고 물어왔습니다. 그는 하겠다고 대답했습니다. 주변에서는 두 손이 없는 그가 염전을 한다는 것을 비웃었스니다. 그러나 그는 그런 것에 개의치 않았습니다. 두 손이 없기에 일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힘들고 고되었습니다. 하루 두 시간씩 자면서 그는 염전에서 일했습니다. 그러던 중 1996년 그는 ‘손을 잃은 대신 사랑을 얻었으니 남을 도와야겠다.’고 생각하고, 어려운 중에서도 명절만 되면 독거노인들에게 소금을 갖다 주었고, 김장철이 되면 소록도에도 소금을 보냈습니다. 생활이 넉넉했기 때문이 아니라, 어려운 중에서도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는 지금 서산 충서감리교회 권사로 봉사하고 있습니다. 그는 두 손이 없는 1급 장애인이지만 장애인에게 지급되는 장애인기초연금도 스스로 거절했습니다. 지금은 부인과 함께 1만 2천 평의 염전에서 열심히 소금을 만들며 일하고 있습니다. 1년 매출은 약 6천만 원 정도 되지만, 이것저것 다 제하고 나면 순수익이 한 해 1800만 원 정도 된다고 합니다. 그 중에 약 10%인 200만 원은 반드시 어려운 이웃을 위해 쓰고 있습니다. 

여러분, 1급 장애인도 남을 돕는 일에 쓰임 받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알기 전까지 그는 남에게 걸림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난 후에 그의 인생은 디딤돌로 바뀌어졌습니다. 
  
남보다 더 많이 가졌기 때문에 디딤돌 인생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남보다 더 건강해야만 남들을 위한 디딤돌 인생으로 살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남들보다 더 많이 배워야만 디딤돌 인생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 안에 예수님의 사랑이 있으면 됩니다. 예수님의 말슴을 따라 살면 우리는 디딤돌 인생으로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길목에서 걸림돌이 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우리 주님이 우리를 위해 디딤돌이 되어주셨던 것처럼, 주님을 믿는 우리 역시 우리의 삶에서 디딤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디딤돌은 밟힐수록, 그리고 자신이 드러나지 않고 감추어질수록 그 향기가 더 진해지고 더 멀리 갑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물으십니다. 너는 지금 어떤 인생을 살고 있느냐? 디딤돌 인생을 살고 있느냐? 걸림돌 인생을 살고 있느냐?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