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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양과 염소의 비유 (마 25:3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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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과 염소의 비유

1. 예수께서 ‘알곡과 가라지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밭 주인이 자기 밭에 좋은 씨를 뿌렸는데, 그 씨가 자라서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집 주인의 종들이 이를 보고 주인에게 말합니다. “(마13:27) 주인 어른, 어른께서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가라지가 어디에서 생겼습니까?” 주인이 종들에게 “원수가 그렇게 하였구나!” 라고 말하자, 종들이 주인에게 ‘그러면 우리가 가서, 가라지들을 뽑아 버릴까요?’ 라고 합니다. 

그러나 주인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아니다. 가라지를 뽑다가, 그것과 함께 알곡까지 뽑히면, 어떻게 하겠느냐? 거둘 때가 될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게 내버려 두어라. 거둘 때에, 내가 일꾼에게, 먼저 가라지를 뽑아 단으로 묶어서 불태워 버리고, 알곡은 내 곳간에 거두어들이라고 하겠노라.” 얼마 후 제자들이 예수께서 말씀하신 ‘알곡과 가라지 비유’를 설명해주시기를 부탁합니다. 예수께서 그 비유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13:37-43)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마귀요.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수꾼은 천사들이니 그런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 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리라.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다시 설명하면, 밭에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공존하듯 우리가 사는 세상에도 ‘알곡과 가라지’, 즉 ‘의인과 악인’이 함께 공존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추수 때가 되면 알곡은 거두어 곡간에 두고 가라지는 거두어 불에 태워버리듯이, 세상 끝, 즉 세상 종말이 되면, 의인은 천국에 들어가고 악인은 불에 태워버리는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세상 종말을 말씀하시며 그 때에는 알곡과 가라지를 분리하는 최후의 심판을 분명히 하신 말씀입니다. 

(마13:49-50)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 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리라 

지금 세상에는 ‘알곡과 가라지’, ‘의인과 죄인’이 함께 공존하지만 세상 종말 최후의 심판 때가 되면 ‘의인’은 천국에 들이고, ‘죄인’은 지옥에 던집니다. ‘천국과 지옥’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승천하실 때,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나타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행1:11)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에도 하나님 나라에 가셨다가 다시 오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한 번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 것도 잠시뿐이다. 너희는 나를 찾을 것이다. 내가 유대인들에게 말한 것처럼 너희에게도 말한다.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요13:33) 

그러자 베드로가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하고 묻자 예수께서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요13:36) 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마음에 근심하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14:1-3)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2. 이렇게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를 분명히 하시며, 그 날, 최후의 심판 날에 ‘양과 염소’를 분리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두시고,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고 하셨습니다. ‘그 때에’, 곧 최후의 심판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그들을 오른편, 즉 천국에 두게 된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25:34-39)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이에 오른편에 있는 ‘의인들’이 ‘주님, 우리가 언제,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잡수실 것을 드리고,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리고,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고, 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리고, 언제, 병드시거나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찾아갔습니까?’ 라고 말할 것이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의인들’의 반문에 대해 ‘임금’(하나님)은 “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25:40) 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행한 것’이 바로 ‘임금’되시는 예수께 행한 것, 하나님께 행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선행을 베푼 것이 ‘지극히 크신 하나님’께 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라도 결코 소흘히 여기지 아니하고 소중하게 여겨 그들을 사랑으로 섬겼다는 것입니다. ‘의인들’은 그렇게 사랑으로 섬겼음에도 ‘우리가 언제 그랬습니까? 그러한 적이 없었는데요?’라고 반문했던 것처럼 그 대가(代價)를 바라지 아니하고 묵묵히 이웃을 사랑으로 섬겼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하늘 보좌를 버리고 세상에 내려와 ‘지극히 작은 자들’, 즉 약하고 병든 자들, 세상에서 소외되고 갇힌 자들, 괴로움과 고난받는 자들과 함께 하셨던 것처럼 ‘지극히 작은 자 하나’를 사랑으로 섬긴 사람들이 오른편, 즉 의인이 되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는 이렇게 그 심판을 선고하시고 그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25:41-43)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

이러한 말씀에 ‘왼편에 있는 자들’이 이렇게 반문합니다.

(마25:44) 주님, 우리가 언제, 주께서 굶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도 돌보아 드리지 않았다는 것입니까? 

이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마25:4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는 말씀으로 그들이 ‘왼편’, 즉 지옥 심판에 처하게 된 이유를 분명히 밝혀 주셨습니다. 그리고 왼편에 있는 자들은 ‘영벌’, 즉 영원한 지옥에 들어가 영원히 형벌을 받게 될 것이고, 오른편에 있는 자들을 ‘영생’, 즉 영원한 생명으로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축복을 누리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마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최후의 심판 날에 많은 사람들이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하나님 말씀을 전하고,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주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행하지 않았습니까?’ 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그때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이 악한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거라.’ 하고 분명히 말할 것이다. 

그러므로 내 말을 듣고 실천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지혜로운 사람과 같다. 비가 내려 홍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몰아쳐도 무너지지 않는 것은 그 집을 반석 위에 세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 말을 듣고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 비가 내려 홍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몰아치면 크게 무너지고 말 것이다.(마7:22-27)

‘지극히 작은 자 하나’를 소중히 여기며 사랑으로 섬기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자들이 무너지지 아니하는 인생으로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3. B.C.1020년경, 사울 왕의 집요한 추격을 받던 다윗이 이스라엘 밖, 모압으로 도피했습니다. 그러나 선지자 갓은 이스라엘 밖에서 은신처를 찾지 말라고 조언합니다. 이 조언은 아무리 피할 곳이 없다할지라도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떨어져 지내지 말라는 뜻입니다. 

또한 오직 하나님만을 유일한 은신처와 요새로 삼는 믿음을 가지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항상 함께 하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다시 유다 땅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이 당시 다윗은 사울 왕의 정적이 되어 전국에 걸쳐 현상 수배되어 살해명령까지 내린 도망자였습니다. 

따라서 다윗과 함께 하거나 도와주는 사람은 사울 왕으로부터 처형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을 따르는 무리들은 제한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다윗에게 물려든 사람들을 ‘압제를 받는 사람들과 빚에 시달리는 사람들과 원통하고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들’(삼상 22:2)이라 했습니다. 

이는 다윗을 따르는 사람들에 대한 사회학적 단평입니다. 그들은 압제받고, 빚에 시달리며, 원통하고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회의 중심부에서 밀려난 변두리 인생들이었습니다. 사회에서 성공하지 못한 자들, 거절당하고 실패하고 탈락한 자들이었습니다. 다윗은 광야에서의 10년을 바로 이런 이들과 함께 보냈습니다. 그들은 함께 먹을 것을 구하고, 함께 먹고, 함께 기도하고, 함께 싸웠습니다. 

다윗은 기도하는 사람이었고 항상 하나님을 마음 중심에 두고 사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러한 사회적 약자들과 함께 하는 생활을 통해 기도를 가르치고, 아무리 어렵고 적대적인 환경에 처할지라도 그것들을 이겨낼 수 있게 하시는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가르치고, 깨닫게 했습니다. 사랑받지 못했고 또 사랑스럽지도 못한 어중이떠중이들, 압제받고, 빚에 시달리며, 원통하고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은 놀라울 만큼 사기충천한 집단으로 변화되었습니다.(역대상 12장) 

사회적 하류층이었던 그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변할 수 있었던 것, 환난당한 자, 빚진 자, 원통한 자들로 이루어진 그 집단이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다윗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윗과 함께 했던 사람들은 그야말로 ‘지극히 작은 자들’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지극히 작은 자들’과 함께 했던 다윗은 도피생활을 하는 중에도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돕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광야에서 좋은 일을 하나 벌였습니다. 그는 그를 따르는 ‘지극히 작은 자들’을 모아 어려운 이웃을 돕고자 이른 바 ‘선한 사마리아인단’을 결성했습니다. 당시 사회적 약자들, ‘압제를 받는 사람들과 빚에 시달리는 사람들과 원통하고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들’(삼상 22:2)을 모아 결성한 것입니다.

(삼상22:2)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그와 함께 한 자가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 

광야는 자연 재해가 많을 뿐 아니라 범죄발생률도 대단히 높은 지역이었습니다. 강도들이 자주 출몰해서 여행자들을 약탈했고 두둑한 지갑이나 값나가는 물건이 있을 것 같은 사람들을 습격하곤 했습니다. 다윗과 그의 동지들은 광야에서 바로 강도들의 습격으로부터 보호하고 구조 작업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다윗이 나발이라는 부유한 목축업자를 알게 된 것도 이러한 때였습니다. 나발의 가축을 돌보던 목자들은 광야의 무법자들과 가축 도둑들에게 특히 많은 해를 당하고 있었는데, 다윗은 이들을 적어도 한 계절 동안 보호해 주었던 것입니다. 다윗으로부터 큰 은혜를 받은 나발의 목자들 중 하나는 다윗과 그의 동지들에 대해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삼상25:16) 우리가 양을 지키는 동안에 그들이 우리와 함께 있어 밤낮 우리에게 담이 되었음이라 

‘우리가 그들과 함께 있으면서 양을 칠 동안에는 그들이 밤이나 낮이나 우리를 성벽과 같이 잘 보살펴 주었습니다.’는 뜻입니다. 광야 생활 중에 할 수 있는 일 중에 이보다 더 좋은 일이 또 어디있겠는가? ‘광야’는 다윗이 안주(安住)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계속 사울에게 쫓겨다녀야만 하는 처지였습니다. 그렇다고 마냥 쫓겨다니기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중간 중간에 숨 돌릴 틈도 생기게 되면, 위험에 처해 있는 사람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돕고 보호해주었던 것입니다. 나발의 목자들이 소리 높여 한 말, “그들이 우리와 함께 있어 밤낮 우리에게 담이 되었음이라.”는 말을 보면, 다윗과 그 일행들은 일종의 비공식적 지역경비대 역할을 하며, 오늘날로 말하면 비상시 구급차 서비스를 함께 제공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무자비한 무법자들이 협곡과 평원 등지를 판을 치며 돌아다니는 도덕적 무정부 상태에, 다윗은 비록 쫓겨 다니는 신세지만 광야생활의 보호자로 일종의 법과 질서를 지켜 준 것입니다. 이로 인해 나발의 목자들은 큰 혜택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양털을 깎는 시기가 왔습니다. 이 때는, 일은 힘들지만 한편 흥겹고 신나는 기간이기도 합니다. 

한 해 동안 공들인 양모를 거두어들이는 시기이므로 술과 음식이 가득한 잔칫상이 차려졌습니다. 양털을 깎는 길고도 힘든 작업 후에는 굉장한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이웃에 살던 다윗은 열 명의 동지를 보내 잔치 음식과 떡을 좀 달라고 요청합니다. 이는 사리에 맞고 상황에 적절한 요구였습니다. 그들은 1년내내 나발의 목자들을 보호해 주었고, 그 동안 음식은 겨우 죽지 않을 정도만 먹었었습니다. 광야에는 먹을 것이 풍부하지 않았고 도피생활로 식량을 제때에 공급받기가 매우 어려웠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저 신선한 과일과 빵 몇 조각만으로도 그들은 흔쾌히 만족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발은 그 요청을 듣자 마치 다윗에 대해 처음 들어 보는 양 말하며, 그를 광야에 출몰하는 강도 같은 부류로 취급했습니다.

(삼상25:10) 나발이 다윗의 사환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다윗은 누구며 이새의 아들은 누구냐. 요즈음에 각기 주인에게서 억지로 떠나는 종이 많도다. 

그는 잔치 음식을 나눠 주기를 거절했을 뿐만 아니라, 다윗과 그 동료들을 모욕했던 것입니다. 떠돌이 종들과 같은 하찮은 무리들로 보고 업신여겼습니다. 다윗은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솟았습니다. 은혜에 보답하기는커녕 모욕과 멸시로 대하는 나발을 피로써 갚아 주겠노라고 결심했습니다. 그는 동지들을 불러 무장시키고 나발의 잔칫집으로 출발했습니다. 배은망덕하게도 터무니없이 자신을 모욕하고 멸시한 무례하기 작이 없는 나발을 쳐 죽일 참이었습니다. 

(삼상25:22) 내가 그에게 속한 모든 남자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아침까지 남겨 두면 하나님은 다윗에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내가 내일 아침까지, 그에게 속한 모든 사람들 가운데서, 남자들을 하나라도 남겨 둔다면, 나 다윗은 하나님께 무슨 벌이라도 받겠다.’ 이제 나발은 죽은 목숨이나 다를 바 없었습니다. 다윗은 이성을 잃었습니다. 다윗은 지금껏 도망자로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수차례 있었지만 그에 대한 심판을 하나님께 맡겼었지만 나발의 태도에 그만 이성을 잃어버렸습니다. 다윗은 광야 생활을 통해 배운 아름다운 거룩성을 잃어버렸습니다. 

사울 왕이 마치 미치광이처럼 자신을 죽이려했을지라도 하나님께서 기름부으셨던 사실을 존중했던 다윗이었지만, 이제 그의 눈에 나발은 악취를 뿜어대는 더러운 쓰레기로밖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토록 강도가 들끓는 광야에서 1년여 동안 그들의 양떼들을 지켜 보호해 주었건만 고마움을 표시하기는커녕, 한 끼 먹을 빵 좀 도와달라는 손길을 모욕하고 멸시하는 나발은 치워버려야 할 인간 쓰레기로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다윗의 눈에 나발은 인간 말종이었습니다. 

이와같은 사태를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이 직감하고, 다윗을 모독한 남편 나발에게 어떠한 결과를 올 것이라는 것을 예상했습니다. 그녀는 다윗의 분노를 가라앉히기 위해 재빨리 필요한 조치를 취했습니다. 그녀는 잔치 음식을 가득 싸서 나귀에 싣고 중간에서 다윗을 만나기 위해 길을 떠났습니다. 그녀는 다윗을 보자 황급히 나귀에서 내려 무릎을 꿇고 공손하게 예를 갖추어 얼굴을 땅에 대며 간청합니다. 

“부디, 제발, 간청하오니 참아 주십시오. 이것은 이스라엘의 왕자가 하실만한 행동이 못 됩니다. 당신이 누구인가를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기름부음, 하나님의 자비를 잊지 마십시오. 원한을 풀기 위해 싸우려하지 마십시오. 당신은 여호와를 위해 싸워야 할 분이 아니십니까?” 

아비가일은 다윗이 지금은 비록 사울 왕의 추격을 받고 있는 도망자이지만, 장차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존귀하신 분께서 배은망덕하여 인간 쓰레기에 불과한 나발을 상대하지 마시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녀는 연이어 이렇게 말합니다. 

“내 주의 생명은 내 주의 하나님 여호와와 함께 생명싸개 속에 싸였을 것이요, 내 주의 원수들의 생명은 물매로 던지듯 여호와께서 그것을 던지시리이다.”(삼상25:29). 마치 시처럼 들리는 이 말은 이런 뜻입니다. 

어느 누가 당신의 앞길을 막으려 한다 하더라도
어느 누가 일어나 당신을 해하려 한다 하더라도
당신의 생명은 당신이 섬기시는 주 하나님이
생명 보자기에 싸서 보존하실 것이요,
당신의 적들의 목숨은,
주님이 물매로 던지듯이 던져 버리실 것입니다.

아비가일은 하나님께서 다윗과 함께 하시므로 그 누가 그 앞길을 막으려 해도 막을 수가 없었고, 그 누가 해하려 해도 해할 수 없었다며 이는 하나님께서 생명 보자기에 싸서 보존하시기 때문이라고 증언한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을 대적하는 적들은 마치 물매 하나로 쓰러진 골리앗처럼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일들이 하나님께 대한 다윗의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며, 또한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약속하신 바를 이루시기 위해 항상 다윗과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아비가일의 말은 사실 이런 뜻입니다. 

“다윗이여, 원수를 갚는 일은 당신이 할 일이 아닙니다. 원수 갚는 일은 하나님이 하실 일이고, 당신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당신이 여기 광야에 있는 것은,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하시며 하나님 앞에서 당신이 누구인가를 발견하기 위해서입니다. 광야는 당신이 스스로를 시험해 보며 자신이 얼마나 강인하고 꼿꼿한지 알아보는 시험장이 아닙니다. 광야는 당신의 삶 속에서 그리고 당신의 삶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능력을 발견하는 곳입니다. 나발은 어리석은 자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당신도 어리석은 자가 되시렵니까? 여기서 어리석은 자는 하나로 족합니다.” 

어리석은 나발을 죽인다면 나발과 같이 어리석은 사람이 될 거라는 것입니다. 이같은 아비가일의 말에 놀랍게도, 믿을 수 없게도!, 다윗은 멈추어 서서 그녀를 바라보고 귀를 기울입니다. 잠시 잃었던 이성과 신앙을 찾게 됩니다. 어느 시점에서인지는 모르지만 다윗 앞에 무릎을 끊은 아비가일은 기도와 시를 통해 다윗 속에 다시 하나님을 불러일으켜 준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은 그녀가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두었습니다. 점점 고조되어 가던 복수의 불길이 금새 사그라져 가는 것이었습니다. 남자들이 주름잡는 세상에서, 칼부림하는 세상에서 그녀는 아무런 무기도 갖추지 않았지만 아비가일은 외모만큼이나 마음이 지혜롭고 아름다운 여인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그녀를 두고 이렇게 칭찬합니다.

(삼상25:33) 또 네 지혜를 칭찬할지며 또 네게 복이 있을지로다. 오늘 내가 피를 흘릴 것과 친히 복수하는 것을 네가 막았느니라. 

아비가일은 그 남편 나발로 인해 여지없이 파괴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지혜로운 마음과 생활이 그 파멸에서 자신을 구했습니다. 아비가일이 나발에게 돌아와 보니, 그는 자기 집에서 왕이나 차릴 만한 술잔치를 베풀고, 취할 대로 취하여서, 흥겨운 기분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비가일은 다음날 아침이 밝을 때까지, 큰 일이든 작은 일이든, 나발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침이 되어 나발이 술에서 깨었을 때에, 그의 아내 아비가일은 그 동안에 있었던 일을 모두 그에게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갑자기 심장이 멎고, 몸이 돌처럼 굳어졌습니다. 그렇게 열흘쯤 지났을 때에, 하나님께서 나발을 치시니, 그가 죽었습니다. 사울 왕의 추격을 받고 도망다니는 처지의 다윗, 그리고 그를 따르는 하찮은 무리들, 다시 말해 당시 사회적 약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 지나지 않은 무리들을 모욕하고 업신여기고, 왕궁 잔치에 버금가는 잔치를 베풀면서도 마실 물 한 잔, 떡 하나 베풀지 아니했던 나발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돌처럼 굳어져 죽임을 당했습니다. 나발은 ‘지극히 작은 자 하나’를 업신여겨 결국 ‘왼편’에 둔 ‘염소’와 같이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4.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마18:10) 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비록 세상에서 미약하게 보이는 존재일지라도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개별적인 관심을 받고 있는 절대적 가치를 지닌 존재라는 뜻입니다. 천사들의 수종을 받고 있는 성도는 비록 세상적으로는 비천해도, 영적으로는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소유하고 있는 존재이므로 결코 업신여김을 받을 수 없음을 강력히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18:14) 이와 같이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지극히 작은 하나’라도 실족케 하거나 잃어버리게 하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아니며 그것은 하나님 앞에 엄청난 죄악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팎에 있는 ‘지극히 작은 자 하나’라도 하나님의 눈이 그들에게 항상 있음을 기억하고 존중하며 사랑으로 섬겨야 합니다. 예수께서도 사기꾼, 매국노와 다를 바 없는 세리들, 그리고 창녀들과 함께 식사하셨습니다. 그야말로 당시 사회적으로 버림받은 사람들, 사회적 약자들, ‘지극히 작은 자 하나 하나’와 함께 하셔서 그들을 구원하셨습니다. 사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린도 전서1:26-31을 보겠습니다.

(고전1:26-31)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 

“(롬 5:8) 우리가 아직 죄인으로 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써, 죽기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세상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향한 하나님의 눈과 마음을 읽으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그들을 사랑으로 섬기는 생활로 하나님 오른편에 있는 의인들이 되시어 영생에 들어가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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