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위험한 유혹 (고전 10:7-13)

첨부 1


위험한 유혹 (고전 10:7-13)


사탄이 사람을 유혹할 때 네 종류의 말을 한다고 합니다. 첫째는 “누구나 다 하는 일이니까” 하는 소리입니다. 이 말은 나를 모든 사람 속에 용해시켜 버리는 마력이 있습니다. 
이 마력에 걸려들면 이제까지 성실하고 정직하게 살아온 나, 헌신하고 충성했던 나라는 자아는 사라져 버리고 대중 속에 몰입되어 살아갑니다. 
시류에 휩쓸려 아무런 죄의식 없이 살아갑니다. 이제는 부끄러움으로 영광을 삼아 대다수의 사람들이 가는 대로 가게 됩니다.

둘째 “대수롭지 않은 일이니까” 하는 소리입니다. 예를 들어 사탄은 우리에게 주일을 범하는 일은 정말 대수롭지 않다고 속삭입니다. 별것 아니니까 심각하게 생각하거나 신경 쓸 것이 없다고 합니다. 
셋째, “너는 아직 젊으니까” 하는 소리입니다. 젊다는 말은 아직 미완성, 불완전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사탄은 우리가 실수할 때나 잘못했을 때 우리를 감싸며 “괜찮아, 아직 어리잖아. 너는 아직 어른이 아니잖아”하고 속삭입니다. 아직은 잘못해도 괜찮다는 식으로 속삭입니다. 
넷째, “이번 한 번 뿐이니까” 하는 소리입니다. “단 한 번의 거짓말인데 뭐 그리 괴로워하느냐”고 하면서 사탄은 우리의 양심을 부패하도록 부채질 합니다.

그런데 이 한번이 가정을 파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남편의 한 번의 외도나 아내의 단 한 번의 실수가 가정을 파괴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사탄이 어느 날 한 청년을 찾아왔습니다. 그는 열 개의 병을 보이면서 말했습니다.
“이중 아홉 개의 병에는 꿀물이 들어 있고, 한 개에만 독약이 들어 있는데 열 개 중에 하나를 마시면 엄청난 돈을 주겠다.”
청년의 눈 앞에는 산더미 같은 돈이 오락가락했습니다. “그래, 딱 한 번만 하는 거야. 이번 한 번이면 평생을 고생 안 해도 될 테니까!”

청년은 떨리는 손으로 진땀을 흘리며 한 병을 골라 마셨습니다. 아찔했습니다. 곧 청년이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야, 내가 살았구나!”
사탄은 청년에게 엄청난 돈을 주고 돌아섰습니다. 그러면서 다음번에 언제라도 아홉 개 중의 하나를 마시면 돈을 곱으로 주겠다는 말과 함께 웃으며 유유히 사라졌습니다. 
청년은 오랜 방탕 생활로 세월을 보냈습니다. 온 몸이 만신창이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돈이 떨어지자 사탄을 불러내기 바빴습니다.

처음에는 고민했으나 나중에는 어느 병을 골라야 할까 고민하지도 않았습니다.
어느덧 청년은 백발 노인이 되었습니다. 이제 딱 두 병이 남았습니다. 노인은 벌벌 떨리는 손으로 그 둘 중에 하나를 골라야 했습니다.
노인은 마침내 마지막 잔을 마셨습니다. 노인은 끝까지 살아남았습니다. 노인은 기뻤습니다.
그러나 그때, 사탄은 남은 마지막 한 잔을 훅하고 들이마셨습니다. 그리고는 말했습니다.
“처음부터 독약이란 없었다. 그러나 너는 돈이라는 나의 독약에 이미 죽어가고 있어. 나는 너의 청춘을 망가뜨렸지. 사람으로 태어나 다른 것은 아무것도 모르고 오로지 돈만 아는 최고의 바보로 만들었지. 너는 이제 영원히 죽게 된다.”

사탄은 유유히 웃으며 돌아갔습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죄는 한 번 맛들이면 그 유혹에서 벗어나는 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삶을 지배하지 않으면, 말씀에 의해서 삶에 하나님 중심의 신앙이 잡히지 않으면 작은 유혹에도 쉽게 넘어갑니다.
하나님 중심의 신앙이 없으면 ‘꼭 한번만,’ ‘단 한번만’이라는 유혹에 넘어가서 아담과 하와처럼 타락하게 됩니다. 

우리가 죄의 영향력과 사탄의 유혹에서 이길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 즉 하나님만을 모시고 경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돈과 명예와 권력보다 하나님이 내 마음의 중심에 있기를 원해야 합니다. 그래야 요셉처럼 아무리 무서운 유혹이 와도 이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집트에서의 430년간의 노예 생활을 끝내고 출애굽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권능으로 홍해 바다를 육지처럼 건넜으며, 광야에서 하늘에서 내려주는 만나를 먹었으며, 반석으로부터 생수를 받아 마시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모든 축복을 잊어 버리고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그만 출애굽 세대 가운데 여호수아와 갈렙만을 제외하고 모두 광야에서 뼈를 묻어야 했습니다.
출애굽 세대가 모두 하나님의 은총을 받았으나 거의 모두 다 광야에서 죽음을 당한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은 어찌하여 그렇게 사랑하고 아끼던 이스라엘 백성 대부분을 광야에서 진멸하였습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축복으로 출애굽한 선민임에도 그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져버린 그들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구약학자인 빈센트는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의 멸망을 가리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은 많았지만 끝가지 그 은혜에 참여한 자는 소수에 지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우리도 예수를 주님으로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입었는데도 영원한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우를 범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의 생활을 방해하는 사탄의 유혹을 물리쳐야 합니다. 

1. 우상숭배를 삼가해야 합니다.(7절)

이스라엘 백성들의 지도자인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십계명 돌판을 받느라고 내려오는 것이 지체될 때 백성들은 모세가 죽은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리하여 그만 출애굽 시킨 하나님의 모습을 형상화하여 금송아지를 만들어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사드리는 모습을 성경은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7절)고 묘사하였습니다.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는 것은 이방인들의 제사의식을 묘사하는 말입니다. 
그 당시 고린도 교인들 가운데 신자들이 이방 신전의 제사에 참여하여 이방인들과 함께 즐거워하며 신전 제사에 사용된 제물을 먹었습니다.
이들의 행위는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 앞에서 축제를 하는 것과 똑같은 행위였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이방인들과의 교제를 위해서 이방 제사에 참여하여 그들과 함께 축제를 즐기는 것은 우상숭배에 해당하는 행위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이방 제사에 참여하는 것은 우상숭배입니다. 하나님 외에 그 어떤 것도 사랑과 숭배의 대상이 된다면 그것도 우상숭배입니다.
따라서 물질이나 명예나 권력이나 지식을 하나님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면 그것들 모두 다 우상숭배요, 우리가 하나님보다 배우자나 자식을 더 사랑하는 것도 다 우상숭배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으며(마6:24), 아들이나 딸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께 합당하지 않다고(마10:37)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보다 세상의 그 어떤 것이라도 더 사랑하면 우상숭배이므로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않습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겨야 합니다.

2. 음행을 삼가해야 합니다.(8절)

이스라엘 광야 생활 말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압 평지에 이르렀을 때 이스라엘 남자들이 모압 족속의 바알브올 신전 제의에 참석하여 모압 여자들과 간음한 사건(민25:1-3)이 있었습니다.
고대 종교의 신전 제의에서는 의례 신전 여사제와의 성행위가 필수적으로 수반되었습니다. 이 때 그곳에 참여하여 간음한 이스라엘 백성들 2만 3천명이 하나님의 염병 재앙으로 하루 동안에 죽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 지역에도 아프로디테 신전에 여사제 1천명이 있어, 그 이방 신전에서의 풍습을 끊지 못하고 교회에 들어온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몸은 하나님의 영이 거하는 성전인데, 어찌하여 음행으로 성전을 더럽힐 수 있습니까?
오늘날은 그 무엇보다 성적으로 타락해 있습니다. 이 성적인 더러움에 빠치면 결코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없습니다.
우리 몸은 성전이니, 우리 몸을 거룩하게 보존하여 우리의 몸으로 거룩한 일을 도모해야 합니다.

3. 주님을 시험하지 말아야 합니다.(9절)

여기서 ‘주를 시험하다’는 말은 순간적으로 의심하거나 회의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수없이 체험하고도 또 다시 하나님이 전능한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 시험하는 것을 말합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느비딤에 이르렀을 때 그들은 마실 물이 없다며 모세에게 물을 달라고 덤볐습니다. 

그들은 출애굽, 홍해 사건, 만나 등의 사건들을 통해 하나님의 전능한 은혜를 많이 체험했으면서도 물이 없다고 모세에게 덤벼들면서 하나님을 원망하였습니다.
이 때 모세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출17:2)며 그들을 책망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무수히 체험하고도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하고 물을 달라고 하나님의 능력을 시험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 또한 바울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축복을 받았고, 또 영적 체험을 많이 한 자들이었음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각종 죄에 빠졌습니다.
우리도 구원받은 이들로서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감사하며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4. 주님을 원망하지 말아야 합니다.(10절)

이스라엘 백성은 지루한 광야 생활에 지쳐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였습니다. 반란을 획책하다가 그만 하나님의 진노로 1만 4천 7백명이 염병으로 죽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인들도 하나님이 세우신 대사인 바울을 말재간이 없고 십자가만을 말한다고 원망하고 불평하며 주의 종들을 대적하는 때가 있었습니다.
자기는 의인인 체 하면서 남에 대해서 오해하고 불평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경우는 자기가 문제인 경우가 많습니다.
이 땅에 의인은 없습니다. 남도 부족하다는 것을 알아야 하지만 자기 또한 부족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내 마음에서 원망과 불평의 쓴 물이 아니라 감사와 기쁨이 나와야 합니다.
영국의 크랜취 감독은 말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의 가는 평탄한 길에 조그마한 구덩이만 있어도 벌써 하나님을 원망하고 사람을 원망한다. 
또 어떤 사람은 자기의 가는 험하고 캄캄한 길에 조그마한 빛만 비추어도 하나님이 주시는 자비로우신 빛이라 하여 감사의 기도를 올린다. 

화려한 궁전에 살면서도 생이란 왜 이리 괴로우며 기쁜 일은 하나도 없느냐고 얼굴을 찡그려 불평하는 사람이 있으며, 게딱지만 한 오막집에 살면서도 우리를 지키시는 하늘 아버지의 한없는 은혜와 사랑을 진심으로 감사하는 사람이 있다.“
두 사람이 죽어서 하늘나라에 갔습니다. 한 사람은 부지런하고 성실한 사람이었고 또 한 사람은 게으를 뿐만 아니라 늘 불만불평이 가득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살이가 어떠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러자 부지런한 사람은 힘들지만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다면서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불평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세상은 너무 불공평해서 자신은 단 한 번도 행복한 순간이 없었다고 하였습니다. 
그 사람은 자기가 살던 집도 좁고 돈도 마음껏 써 보지 못하였고 또 자식들도 다 속을 썩이고 남편도 마음에 안 들고 하는 일마다 되는 일이 없었다며 계속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이번에 하나님께서 그 두 사람이 거처할 곳을 안내해 주셨습니다. 두 사람은 자신 앞에 펼쳐진 광경에 놀라운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두 사람에게 주어진 땅은 세상에서 보지 못한 아름다운 신천지였습니다. 
부지런한 사람은 역시 하늘나라는 아름다운 곳이라며 감탄해 마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벌써부터 소매를 걷고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내 아름다운 집과 정원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원하는 것들을 이루어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불만 많은 사람은 똑같은 환경인데도 불구하고 집도 없고 차도 없고 무슨 하늘나라가 이러냐며 계속해서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계속 투덜댔지만 소용이 없자 하는 수 없이 먹을 것을 구하고 잠잘 집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만든 집은 이내 오물과 쓰레기로 가득차고 벌레들이 기어다녔으며 지붕에서는 비가 새고 벽은 금이 갔습니다. 그 사람의 불평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고 차라리 세상이 더 좋았다며 한탄만 거듭했습니다. 

얼마 후에 하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그 두 사람을 심판하시며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난 너희 두 사람에게 똑같은 조건을 줘 보았다. 하지만 한 사람은 그 조건으로 천국을 건설했고 또 한 사람은 그 조건을 갖고서도 지옥을 만들었구나.” 
그러자 불만 가득한 사람이 하나님께 따져 들었습니다. 천국은 무위도식하는 곳이지 이렇게 힘들게 일하는 곳이 아니지 않느냐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끝을 맺으셨습니다. 

“천국을 오해하지 말아라.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다. 그리고 심는 대로 거둔다는 진리는 땅의 논리가 아니고 애초 천국의 논리였다. 천국의 논리로 살면 그 사람은 지옥에서도 천국을 건설하며 살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천국을 거저 주어도 지옥으로 만들 것이다. 너는 그와 같은 자이기에 결코 천국의 땅 한평이라도 내줄 수 없다. 네가 만든 지옥에서 영원토록 살아라.”
신자의 믿음은 감사할 조건이 없는 것 같은데도 그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하고 감사하는 데서 나옵니다. 우리도 환경이 좋지 않다고 불평하고 원망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를 보고 도리어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출애굽한 많은 사람들을 가나안으로 인도하지 않고 여호수아와 갈렙, 곧 소수만을 인도하셨습니다. 우리도 우리의 교만한 마음을 버리고 삼가 두려워 하는 마음으로 우리의 구원을 향해서 나가야 합니다. (전병금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