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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모세와 선지자가 있다 (눅 16: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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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와 선지자가 있다 (눅 16:19-31)
     
우리 사람에게는 육신을 입고 살아가는 현재의 삶, 현세가 있고, 죽으면 가야하는 미래의 삶, 내세가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은 현세와 내세의 극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여러분, 죽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은 인간이 가지는 가장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죽으면 그만이란 사람은 죽자마자 그의 생각이 정말 어리석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사람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죽음이 찾아옵니다. 

우리 한국 사회의 문화와 관습은 죽음을 말하는 것을 금기-터부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외국에 나가보면 무덤이 동리 한복판에 많이 있습니다. 마카오에 가보면 동리 한복판에 천주교도들의 무덤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에도 예루살렘 성벽 아래에 무덤으로 가득합니다. 우리는 무덤이 동리 한복판에 들어온다고 하면 혐오시설이라고 하여, 용납이 안 됩니다. 

수백 년 내려오던 종중 묘지가 행정도시가 들어서면서 다른 산으로 이장해야 할 형편이 되었습니다. 가정묘지로 허락을 다 받고 이장하려고 하였지만, 해당 지역 주민들의 반발로 난항을 겪게 됩니다. 지역 주민의 양해도 구하지 않고, 우리 동리를 지나갈 수 없다고 경운기로 막고, 절대 이장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묘지란 꼭 필요한 것이지만, 우리 동리에는 안 된다는 생각이 가득합니다. 그러나 나의 죽음이란 것은 아주 가까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죽음은 저 앞에 오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죽음을 미리 경험해본 사람이 별로 없어서 죽음을 말하기가 정말 어렵기만 합니다. 죽음을 미리 경험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록한 책은 미국 의사들이 출판한 책들이 전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국 사람을 대상으로 조사한 것이 있는데, 지옥이 있다고 믿는 사람이 53%이고, 천국이 있다고 믿는 사람이 70%라고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천국이 있다, 없다, 지옥이 있다, 없다고 투표로 결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천국과 지옥은 있습니다. 분명합니다.

천국과 지옥을 넘나들면서 천국여행기, 지옥여행기를 쓴 스웨덴의 천재 과학자인 에마누엘 스베덴보리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뉴턴과 같은 과학자와 버금가는 당대 최고의 석학이었는데, 57세 때에 온 몸이 마비되면서 완전히 죽은 거나 다름이 없게 되었는데, 그렇다고 완전히 죽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영혼이 육체로부터 빠져나가면서 공중으로 떠올랐습니다. 

그가 살아 있어 활동할 때처럼 생각도 하고 보거나 들을 수 있고, 주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상황을 파악하고 알게 되었습니다. 그가 경험한 천상 세계에 대한 모든 것을 다 말씀드릴 수도 없고, 다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제가 경험해보지 않은 것이 되어서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거짓인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다 사실이라고 할 수도 없고, 다 거짓이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그가 만난 천사들이 스베덴보리에게 말해준 것이 있었습니다. 

‘사후의 세계’라는 책에 보면 “죽음이란 못쓰게 된 육체를 버리는 것에 불과하다. 인간은 한 영이 되어 비로소 영생할 수 있다. 그러나 오래도록 살기 위해서는 현세에서 한 일을 엄하게 반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가 천상에 올라가서 천상의 아름다움을 보고 그곳에서 영원히 있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자기를 인도하는 천사는 당신은 아직 지상에서 해야 할 일들이 남아 있으니 돌아가라고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나는 여기가 좋으니 그냥 머물게 해 달라”고 애원합니다. 그러나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 때 갑자기 어면 힘에 의하여 뒤로 끌려가는 느낌을 받았는데,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 새 그는 그의 육체 속에 돌아와 있었습니다. 이렇게 30년을 영계를 드나들면서 천국편과 지옥편을 기록합니다. 

엘리사벳 퀴블러로스는 스위스 취리히 태생의 여의사입니다. 그는 미국 시카고 대학병원의 부원장을 지내신 분으로, 20여 년 동안 임종환자를 돌보았습니다. 그는 의대생, 일반 대학생, 의료종사자, 사회복지사들을 위하여 대학에서 수많은 임종 세미나를 가졌습니다. 그는 사망진단을 확정 받은 환자들의 심리적인 변화과정을 관찰하였습니다. 그리고 죽음을 경험하고 정신이 돌아온 이들을 인터뷰한 것을 자료로 하여 ‘인간의 죽음’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이 책은 정말 우리가 읽어야 하는 고전입니다. 

퀴블러로스가 죽음을 맞이하는 5단계를 발표하였습니다. 이것을 뒤집을 만한 다른 견해는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제1단계가 부정과 고립입니다. 자신에게 사형선고가 내려지면 부정합니다. 다음 단계는 분노입니다. 

간암으로 세상을 떠나신 동기목사님이 계셨습니다. 그는 수직간염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감염을 물려받았습니다. 40세 때에 병원에서 종합검진을 받았는데, 의사가 지금 간 이식을 하면 천수를 누릴 수 있고, 간 이식을 하지 않으면 65세를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때는 조금도 이상이 없고, 펄펄 날고 있었으니, 수술비도 엄청나니, 의사의 조언을 귀담아 듣지 않았습니다. 60이 넘어가면서 급격하게 간 기능이 떨어지는데 아들이 간을 주고 싶어도 줄 수도 없었고, 목사님은 받을 수도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가 간암 말기 판정을 받았을 때는 그 사실을 믿고 싶지 않았습니다. 

말기 암 환자라는 것이 확실해지자 분노합니다. 누구보다도 개척교회 하느라고 수고하였고, 사회적인 약자를 위하여 헌신적으로 살아왔습니다. 그는 교회와 아내와 자식들을 위하여 너무나 필요한 사람인 것을 알았기에 분노합니다. 이때는 누가 찾아오는 것도 싫어합니다. 

이 무렵에 소식을 듣고 동창회 임원들과 함께 찾아갔는데, 건강한 친구들이 찾아온 때문인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무엇이라고 위로할 수가 없었습니다. “목사님, 어서 일어나야 합니다.”라고 했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 말이 무슨 위로가 될 수 있습니까? 차라리 “천국가서 봅시다”라고 해야 합니다. “나도 뒤 따라 갑니다. 천국에 만납시다”라고 하십시오. 

세 번째 단계로 타협합니다. 어떤 사람을 보면 이제부터 정말 하나님의 신실한 일꾼이 되겠다고, 신학교를 들어가서 선교사로 일생 보내겠노라고, 하나님 앞에 히스기야의 기도를 떠올리면서 십오 년만 연장해달라고 기도합니다. 기도원을 찾고, 어떤 신유의 은사를 가진 여자 목사님을 찾아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점점 병세가 깊어지니 우울 상태에 빠집니다. 

네 번째 단계가 우울입니다. 이때는 타협의 시기보다 더 찾아가기가 어렵습니다. 사랑하는 모든 사람과 헤어져야 한다는 생각, 나 홀로 죽는 것 같은 극도의 상실감에 빠집니다. 우울증은 이 세상을 혼자 하직해야 한다는 예비적인 비탄입니다. 이제 병세가 매우 급해집니다. 하루가 달라집니다. 이제는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할 때가 됩니다. 

그러면 마지막 다섯 번째 단계로 순응하게 됩니다. 순응입니다. 다 받아들입니다. 죽음도 하나님의 안식으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관문으로 받아들입니다. 담담히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이런 과정을 다 거치면서 죽어야 합니다. 그러니 죽는 것이 어려운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죽음을 수용하는 5단계를 동일하게 거치는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어떤 이는 이 다섯 단계 중 어떤 단계를 생략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자신의 죽음을 수용하지 못하고 죽는 이도 있었다고 합니다. 아들이 목사인데, 수없이 예수 믿자고 하여도 예수는 왜 믿느냐고 하면서 죽어가면서 쓸데없는 말하지 말라고 악쓰고 죽습니다. 

퀴블러로스는 이런 말을 합니다. 마지막 모든 사람이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것을 보면서 “인생은 최후는 너나없이 평등하다”고 말합니다. 세상에서 온갖 부귀와 영화를 누리던 사람도 임종의 순간에는 철저히 홀로 죽음에 직면하게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귀블러로스는 사실 죽음보다도 죽음을 대하는 자세가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임종 시에 보여주는 태도는 평소에 그가 어떻게 살아왔느냐 하는 것과 연결된다고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어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죽음을 맞이해야 합니다. 주님의 손에 붙들려 올라가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은 한 사람이 이 세상의 현세를 살았고, 죽어 내세에 들어가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이 한 어리석은 부자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예전에 한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화사하고 값진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로운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을 말하지 않은 것은 그의 이름이 하나님의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입은 옷은 자색 옷이요, 고운 베옷이었습니다. 그런 옷은 제사장의 옷이요, 왕족의 옷이었습니다. 그는 호화롭게 날마다 잔치하였습니다. 산해진미로 먹었습니다. 

예전 성경에는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는데”라고 했습니다. ‘연락한다’는 말은 산해진미로 음식을 준비하고 즐기는 연회를 말합니다. 사람이 어쩌다가 존경하는 분들을 모시고 조촐하게 음식을 나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날마다 호화롭게 잔치하고 즐긴다고 하면 이 사람, 안식일도 모르고 절기도 모르고 금식일도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4계명은 출20:8-11까지입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대전제만 암송하지 말아야 합니다. 계속해서 말씀하셨습니다. 9절입니다.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한 주간 동안 힘써 모든 일을 해야 합니다. 안식일 명령에는 노동의 명령도 들어 있습니다. 10절에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날마다 호화롭게 잔치하려고 하면, 집안의 아무도 쉬지 못합니다. 

11절입니다.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안식일의 명령에 하나님 안에서 안식해야 함을 말씀하셨습니다. 

이 한 부자는 하는 일이란 물려받은 재산, 그동안 힘써 일하여 벌어놓은 재산을 가지고 호화롭게 즐기는 일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집 대문간에는 사람들이 들어다 놓은 나사로라고 하는 거지가 종기투성이의 몸으로 앉아 그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주린 배를 채우려고 하였습니다. 이 거지 나사로는 얼마나 딱한 사람인지, 개들까지도 몰려와서 그의 종기를 핥고 있었습니다. 

성경에 예수님이 비유를 말씀하는 중에 한 사람의 이름을 거명하여 말씀하신 것은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 이 어리석인 부자의 비유가 유일합니다. ‘나사로’라는 이름은 히브리어의 엘르아살이라는 이름을 라틴어화 한 이름입니다. 그 뜻은 “하나님은 나의 도우심”이라는 뜻입니다. 

그는 남의 도움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걸인이었고, 병약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몸이 몹시 쇠약하여 불결한 들개들을 막아낼 힘이 없었습니다. 나사로는 무력한 사람, 빈곤한 사람의 대표자였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을 들어 비유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 교부들은 이 나사로는 실제의 인물이요, 기독교인들을 자세히 설명하지 않아도 하나님을 경외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기독교인이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그가 가난하여 구원받은 것도 아니고, 그가 멸시와 천대를 받았기에 하늘나라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 그도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그도 하나님을 경외하였고, 메시아의 오심을 기다리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성도들은 이 사람 나사로가 성도요, 예수 믿은 사람이라는 것은 극히 상식적인 이야기입니다. 예수 믿어 구원받는 것은 기본입니다.

부자도 죽어야 하는 한 사람이요, 가난한 나사로도 죽어야 하는 유한의 인생입니다.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장 해결하기 어려운 난제가 있습니다. 우리들이 인생을 살면서 가장 큰 실존의 문제는 죽음의 문제입니다. 사람이 태어나면서 그에게 주어진 시간을 잘라 먹다가 모래시계의 모래가 다 떨어지는 것처럼 우리 인생이 끝나고 있습니다. 

목욕탕에 가면 땀을 내라고 한증막이 있는데, 한 5분만 땀내고 나가라고 모래시계를 두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의 모래시계가 멈출 날이 다가옵니다. 그것이 바로 죽음입니다. 우리 인생에 있어 죽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위력을 가진 존재인지, 죽음 앞에서 두려워 떨 수밖에 없습니다. 인생은 영원이라는 시간에 비하면 너무 보잘것없고, 정말로 짧은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작년 한 해 동안 이 지구촌에는 5700만명이 죽었다고 합니다. 하루 동안에는 156,000명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한 세기 안에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을 바꾸어놓고 있습니다. 다윗왕은 죽음을 이렇게 말합니다. “나와 사망은 한 걸음 사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인 모세는 “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순간 같을 뿐이다”고 했으며 “주께서 그들을 홍수처럼 쓸어가시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 인생은 아침안개와 같으며, 잠시 피었다고 시들어버리는 풀의 꽃과 같습니다. 

우리는 죽음 앞에 솔직해져야 합니다. 죽음 앞에서 겸손해져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 땅에서 확실한 내 것이란 죽음 밖에 없습니다. 내가 가진 집이라고 해도 사실은 내 것이 되지 않으며, 내가 그렇게 힘들게 벌어들인 돈, 재물이라는 것도 나의 것이 아니라, 다 두고 가야만 합니다. 

영국의 세익스피어는 “이 세상에서 죽음이란 것 밖에 내 것이라고 할 것이 하나도 없다”고 말했습니다. 우리에게 죽음이란 것은 피할 수 없는 운명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죽지 않을 사람이 없습니다. 

성경에 유명한 지혜자인 솔로몬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비록 사람이 천 년씩 두 번을 산다고 해도 마침내 한 곳으로 돌아간다”(전6:6)고 했습니다. 죽음을 준비해야 하고, 죽기 전에 예수 믿어야 합니다. 어머니 뱃속에서 지내는 것은 이 세상에 나와 살아갈 수 있는 준비의 시간만 주어지고 있습니다. 10개월, 280일만 있으라고 합니다. 그곳이 좋다고 마냥 있으면 자기도 죽고 엄마도 죽습니다. 때려서 내봅니다. 이 세상도 천년 만년 살아가라고 주어진 것이 아니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준비의 시간으로만 주어졌습니다. 영원히 살아갈 나라를 준비하는 시간이 주어졌습니다. 

이 부자가 적극적으로 나사로를 그의 대문에서 쫓아낸 적도 없습니다. 자기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먹고 사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저지하지도 않았습니다. 지나가는 길에 자기 집 대문에 앉아 있다고 발로 걷어찬 일도 없습니다. 어느 한 번도 고의적으로 나사로를 해롭게 하지 않았습니다. 부자는 나사로를 그냥 구경거리로 보았지, 사랑하고 돌봐야 하는 대상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부자가 사치 가운데 뒹굴고 있을 때에 고통과 굶주림 가운데 시달리는 한 거지를 당연한 것으로, 그의 자업자득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그가 지옥에 들어가게 된 것은 그가 무엇을 행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해야 하는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을 생각하지 않았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도 없었습니다. 내 것을 가지고 내 마음대로 쓰고 죽는데, 누가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느냐는 식으로 처신하였습니다. 이 세상의 고통과 궁핍을 보고 수수방관하였습니다. 

얼마 뒤에 그 거지 나사로는 죽어서 천사들의 인도를 받아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게 되었고, 부자는 죽어서 땅에 묻히게 되었습니다. 부자의 장례식은 거창하였습니다. 3일장이 아니라, 오일장을 지냈을 지도 모릅니다. 아니 십일장은 지냈을 것입니다. 묘지도 양지바른 곳에 넓게 잡고, 수많은 비석도 세워놓았을 것입니다. 거지 나사로는 죽어 천사들의 인도를 받아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게 되었고, 부자는 죽어 지옥에 떨어졌습니다. 

아브라함의 품이란 낙원을 말하고, 곧 천국을 말합니다. 아브라함의 품이란 믿음으로 가는 나라요, 하나님의 선민들이 가는 나라, 곧 하늘나라요, 천국입니다. 

부자는 죽어 음부에 들어갔습니다. 음부란 스올입니다. 구약에서는 무덤으로 번역되어 선악에 관계없이 죽은 자들이 가는 곳이었습니다. 신약에서 스올은 악인이 가는 곳, 영원한 심판을 받아야 하는 저주의 장소입니다. 

성경에는 나오는 비유란 모든 진리를 다 담아낼 수는 없습니다. 모든 진리는 성경 전체를 가지고 판단해야 합니다. 부자가 특별한 죄악을 범한 것도 아닌데, 지옥에 들어가고, 거지가 세상에서 선한 일을 한 것도 아니고, 고난을 받았다고 하여 천국에 들어간 것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여기에는 복음이 들어 있지 않은 것도 문제입니다. 십자가의 구속이라는 복음을 말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비유란 진리의 한 부분만 강조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종합적이고, 조직적인 진리는 성경 전체를 통하여 보완이 되어야 합니다. 이 비유의 일차적인 주지는 재물이란 하나님의 뜻을 따라 바르게 사용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른 또 하나의 교훈은 지옥에 들어간 부자의 간청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부자는 무지한 고통, 뜨거운 불 속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을 받고 있는 중에 눈을 들어보니 멀리 떨어진 곳에서 나사로가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부자는 소리를 질렀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저를 불쌍히 보시고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으로 물을 찍어 제 혀를 축이게 해주십시오. 저는 이 불꽃 속에서 심한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하고 애원하였습니다. 그 때 아브라함이 말씀합니다. “얘야, 너는 살아 있을 동안에 온갖 복을 다 누렸지만 나사로는 불행이란 불행을 다 겪지 않았느냐? 그래서 지금 그는 여기에서 위안을 받고 너는 거기에서 고통을 받는 것이다. 또한 너희와 우리 사이에는 큰 구렁텅이가 가로놓여 있어서 여기에서 너희에게 건너가려 해도 가지 못하고 거기에서 우리에게 건너오지도 못한다.”라고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도 부자는 또 애원합니다. “그렇다면 제발 소원입니다. 나사로를 제 아버지 집으로 보내주십시오. 저에게는 다섯 형제가 있는데 그를 보내어 그들만이라도 이 고통스러운 곳에 오지 않도록 경고해 주십시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네 형제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으면 될 것이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다시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그것만으로는 안 됩니다. 그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이 찾아가야만 회개할 것입니다.” 하고 호소합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도 듣지 않는다면 어떤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 해도 믿지 않을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비유의 또 하나의 교훈은 지옥의 무서운 고통과 지옥에 들어가는 것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을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지옥의 고통을 보여주시고 있습니다. 지옥은 벌레, 구더기도 죽지 않습니다. 

조나단 에드워드 목사님이 지옥에 설명할 때에 구더기도 죽지 않고 펄펄 끓는 불 가운데서 영원히 보내야 한다고 할 때에, 교인들 4사람이 그 말씀에 놀라서 기절하였다고 합니다. 우리는 강심장이어서 기절하지 않습니다. 지옥의 불은 무엇을 태우거나 죽이기 위한 불이 아니라, 고통만 더해주는 불이었습니다. 지옥은 출구가 없습니다. 수백 년이라도 고통을 받고 다시 나오면 된다고 하면 고통을 감내할 터인데, 출구가 없습니다. 자기의 인생은 살아온 대로 자기가 책임져야 합니다. 

부자에게는 형제 다섯 사람이 있는데, 그들을 그냥 그대로 두면 자기와 같이 지옥에 떨어질 것이 분명하니, 죽었던 나사로가 살아 돌아가서 지옥에 떨어진 형의 형편을 설명해주면 천국에 갈 것이 아니냐고 부탁했지만, 거절당하였습니다. 이 땅엔 모세와 선지자들, 예언자들이 있어, 그들에게 말씀을 들어야 하고, 복음을 들고 믿어 구원받아야지, 죽었던 사람이 살아 돌아가도 변화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또 한 사람의 모세와 선지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고, 듣고 믿어야 구원을 받습니다. 죽은 유령을 보았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나사로가 죽었다가 살아났어도 사람들은 그를 죽이려고 하였지, 예수를 믿어 구원받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구약의 사울 왕이 엔돌에 사는 접신무당을 통하여 죽었던 사무엘을 다시 현세에 불려 올렸지만, 사울이 회개하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이 너무나 소중하고 소망이 있기 때문에 이 복음을 전파해야 합니다. 

우리는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고백하고, 그 아들 예수님을 나를 구원하시고 나의 죄를 대속해주신 구주로 영접하였습니다. 그리고 날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한 사람의 모세와 선지자들이 되어야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심판을 함께 선포하면서 모세와 선지자들이 오시리라고 예언하셨던 메시아 그리스도는 우리 주님 예수님이라고 외치십시오. 죽어가는 영혼을 구원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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