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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또 한 번의 눈물 (렘 5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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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번의 눈물 (렘 50:1-5)    

지난 주 예배가 끝난 후, 몇몇 교우님들께서 예배 중에 울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지난 주일에 우리는 <멍에를 지는 마음>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바벨론에 멸망할 위기를 맞고 있던 유다 백성들에게 거짓 선지자 <하나냐>는 <하나님께서 바벨론의 멍에를 꺾으시고, 이 년 안에 잡혀간 포로들과 빼앗긴 은금 기명을 되찾게 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모든 백성들은 하나냐의 예언에 열광했고, 그 예언이 이루어지길 간절히 바랐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들이 바라는 대로 진행되지 않았습니다. 포로가 돌아오고 빼앗겼던 보물을 되찾기는커녕, 바벨론 군대는 그나마 남아있던 예루살렘을 완전히 멸망시켰습니다. 성과 성전은 다 무너져 폐허가 되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우리의 현실도 그와 같습니다. 냉혹한 현실은 기대하는 것처럼 호전되기는커녕 악화되는 일이 너무도 많습니다. 멍에가 꺾이기를 간절히 원하지만, 눈물로 멍에를 메지 않으면 안 될 때가 많습니다. 지난 주일에 우신 분들이 있다면, 그 눈물은 각자가 처한 안타까운 현실을 생각하는 데서 오는 눈물이었을 것입니다. 

저는 오늘 또 하나의 눈물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드리고자 하는 눈물은 지난 주일에 우리를 적시던 눈물과는 다릅니다. 오늘 본문 4절 중간을 보면 <그들이 울면서 그 길을 가며>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 눈물은 좌절의 눈물이 아닙니다. 슬픔의 눈물이 아닙니다. 멍에를 메는 고통에서 비롯된 눈물이 아닙니다. 이 눈물은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데 대한 감격의 눈물>입니다. 

어떤 분이 1945년 8월 15일 새벽에 꿈을 꾸었습니다. 꿈에 보니 이미 빛을 잃은 거대한 태양이 서쪽 바다로 가라앉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넓은 들에서 소에 연장을 메운 채 이제 막 밭을 갈기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밭은 매우 넓었습니다. 그는 넓은 밭을 빨리 다 갈고 씨를 뿌려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가 깼습니다. 

아침이 되었을 때 아버지께 꿈 이야기를 했더니, 아버지께서도 태양에 대한 꿈을 꾼 적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네 나이 무렵에 꿈에 보니 작은 태양들이 무수히 동쪽에서 떠올라 온 땅에 가득 차더라. 그리고 얼마 안 되어 일장기가 방방곡곡에 달리지 않았겠니? 일본의 침략이 시작되었을 때였거든........> 

그 날 아침 아버지는 평양에 다녀오라고 심부름을 시키셨습니다. 조반을 먹은 뒤 20리길을 걸어 평양까지 갔습니다. 생각보다 그리 더운 날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누이동생 집에 들렀다가 전차를 타고 평양 중심지를 지나고 있을 때였습니다. 갑자기 전차가 멎었습니다. 거리에서는 일본 국가가 흘러나오고 있었고, 천황의 중대 발표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는 전차에서 내려 방송을 들었습니다. 그 내용은 일본이 항복을 하고, 전쟁은 끝날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귀를 의심했다고 합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일본이 승리하고 있고 대동아공영권이 이루어진다고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전에 자신이 다니던 숭실학교로 이어진 국도를 따라 집에 돌아왔다고 합니다. 돌아오는 길에 누가 먼저였는지 알 수 없지만, 사람들의 입에선 <대한독립만세>의 함성이 터져 나왔고, 사람들은 서로 끌어안고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연세대학교 명예교수이신 김형석 교수께서 『나의 인생 나의 신앙』이란 책에 쓰신 해방의 감격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8.15광복은 우리 민족에게는 믿어지지 않는 소식이었을 것입니다. 일본이 무너질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이때의 눈물은 어떤 눈물이었겠습니까? 이 눈물은 믿어지지 않는 일이 일어난 데 대한 감격의 눈물이었습니다. 지난 세월의 모진 고생을 생각하면서 터져 나온 울음이었습니다. 

세상이 살만한 이유는 가끔 믿어지지 않는 일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논리에 부합하고, 상황에 따라 예측 가능한 일만 일어난다면 어려운 상황에 놓인 사람들은 살맛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네 인생에는 일본이 항복하고 해방을 맞이하듯이, 종종 믿겨지지 않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공부에 취미가 없어 방황하면서 부모 마음을 졸이게 하던 아이가 특별한 방면에 두각을 나타냅니다. 희망 없던 환자가 기적적으로 건강을 회복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상상도 못할 일은 이루시는 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다 백성들이 상상도 못할 일을 이루셨습니다. 그것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백성들로 하여금 꿈에도 잊지 못하던 고국 땅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하신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시편 126편은 이때의 감격을 잘 노래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려보내실 때에 우리는 꿈꾸는 것 같았도다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그 때에 뭇 나라 가운데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큰일을 행하셨다 하였도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큰일을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  여호와여 우리의 포로를 남방 시내들 같이 돌려보내소서>라고 했습니다.  

어느 날 페르시아의 고레스왕은 유다 백성들을 향해 고향으로의 귀환을 허락하는 조서를 발표했습니다. 에스라 1장 1절 이하를 보면 이렇습니다.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을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게 하시려고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그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이르되  바사 왕 고레스는 말하노니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세상 모든 나라를 내게 주셨고 나에게 명령하사 유다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참 신이시라 너희 중에 그의 백성 된 자는 다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라 그는 예루살렘에 계신 하나님이시라>  

이 조서를 접한 유다 포로들은 감격했습니다. 얼싸안고 울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먼 길을 떠날 준비를 했겠지요. 가재도구를 정리하고, 밭을 팔고, 집을 팔았을 것입니다. 아이들은 영문을 몰라 물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지난 세월의 눈물과 이 길의 의미를 가는 길 내내 자녀들에게 설명했을 것입니다. 바벨론에서 예루살렘까지는 먼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발걸음은 가벼웠습니다. 수십 년 전 예루살렘이 무너지고 포로가 되어 끌려갈 때는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고, 가는 내내 비통하게 울었고, 맨 몸에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었지만, 이제는 달랐습니다. 

드디어 포로로 살던 땅을 떠나던 그 날 누군가가 감격에 겨워 먼저 울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수십 년 전 포로로 끌려와 청춘을 바벨론 땅에서 보낸 노인들이 먼저 울었을 것입니다. 바벨론에서 태어난 새 세대와는 달리 노인들은 과거 예루살렘이 무너지기 전 일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 화려하던 성전과 웅장하던 성을 기억했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날 때는 청춘이던 그들이 이제는 백발이 되었습니다. 

노인들은 자신들의 한에 울고, 잃어버린 세월에 울고, 다시 돌아가는 기적 같은 일에 감격하여 울었을 것입니다. 눈물은 곧 옆 사람들에게로 옮겨져서 늙은 부모님의 가슴의 한을 알고 있던 자녀들이 함께 울고, 부모의 울음소리에 어린 것들도 영문도 모른 채 울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그 행렬은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는 이상한 행렬이 되었습니다. 

저는 유다 백성의 눈에서 흘러내린 이 눈물이 우리에게도 있길 원합니다. 지금까지 상실 때문에 울었다면, 이제는 되찾음에 감격하여 울길 원합니다. 지금까지는 절망 때문에 울었다면, 이제는 소망으로 울길 원합니다. 지금까지는 자유를 잃고 울었다면, 이제는 다시 얻은 자유로 인해 울길 원합니다. 지금까지는 무거운 멍에 때문에 울었다면, 이제는 그 멍에를 벗게 된 감격으로 울길 원합니다. 저는 땅끝교회 교우들이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너무 감사해서 울길 원합니다. 우리가 상상도 못할 일들로 인하여 울게 되길 기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다 백성들을 돌려보내기 위해 무슨 일을 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을 무너뜨리셨습니다. 사실 바벨론이 무너진다는 것은 아무도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바벨론은 너무도 강력했기 때문입니다. 느부갓네살은 기원전 605~562년에 걸쳐 43년 동안 재위했습니다. 그는 주변 나라를 모두 점령했습니다. 그는 엄청난 건축 사업을 일으켰습니다. 그 중 하나가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꼽히는 <공중정원>입니다. 

또 바벨론의 이중 성벽은 난공불락이었습니다. 내벽의 폭은 7m, 외벽의 폭은 약 4m나 되었습니다. 성벽 위에는 18m-20m 간격으로 탑이 서 있어 적의 침입을 방비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성 밖에는 깊은 해자가 있었고, 성안에 들어가려면 해자의 다리를 건너 이중 성벽을 통과해야만 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이 성을 <세계의 배꼽>이라 불렀습니다.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투스>는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어떤 성읍보다 강하고 아름다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강력한 바벨론을 무너뜨렸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나라들 가운데에 전파하라 공포하라 깃발을 세우라 숨김이 없이 공포하여 이르라 바벨론이 함락되고 벨이 수치를 당하며 므로닥이 부스러지며 그 신상들은 수치를 당하며 우상들은 부스러진다 하라>고 했습니다. 영원할 것처럼 보이던 바벨론의 멸망에 세상이 놀랐지만, 하나님께는 놀라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3절에 보면 <이는 한 나라가 북쪽에서 나와서 그를 쳐서 그 땅으로 황폐하게 하여 그 가운데에 사는 자가 없게 할 것임이라>고 했는데, 북쪽에서 나오는 나라는 페르샤, 즉 바사를 의미합니다. 메대와 바사는 바벨론을 무너뜨렸습니다. 

그 누구도 무너뜨릴 수 없을 것 같은 강적을 무너뜨리는 일은 하나님께는 익숙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앞에서 여리고성을 무너뜨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 앞에서 골리앗이 쓰러지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과 모세 앞에서 홍해를 가르기도 하셨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과 가정과 일터를 위협하고 울게 만드는 적들을 무너뜨리실 줄 믿습니다.  <우리 부부는 이제 행복할 수 없다>는 좌절을 무너뜨리실 줄 믿습니다. <우리 아이에게 희망은 없다>는 절망감을 무너뜨리실 줄 믿습니다. 교회를 에워싸고 비방하는 이 세상의 적들을 무너뜨리실 줄 믿습니다. 교회가 부흥되지 않는다는 좌절감을 무너뜨리실 줄 믿습니다. <영도와 부산은 교회 부흥이 어렵다>는 고정관념도 깨뜨리실 줄 믿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바라보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실 큰일을 사모하십시오. 

바벨론의 멸망과 유다 백성의 예루살렘 귀환은 갑자기 결정된 일이 아니었습니다. 우연히 이루어진 일이 아닙니다. 이미 예루살렘이 느부갓네살에게 멸망하기 전부터 이미 예고된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해서 예루살렘의 멸망과 유다의 구원을 말씀하셨습니다. 유다가 지은 죄가 너무 커서 얼마 동안의 형벌이 필요하겠지만, 그게 결코 끝은 아니었습니다. 칠십 년이 지나면 돌아오게 될 것이라는 예언을 미리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다의 멸망과 포로생활>이라는 판결문을 내리시면서, 그 판결문 아래에 이미 <바벨론의 멸망과 유다의 구원>이라는 사면 문서를 준비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쩌면 구원받을지도 모르는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의 구원은 이미 정해진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영원한 생명과 복이 이미 약정되어 있습니다. 우리들의 이야기는 해피엔딩으로 이미 결론이 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편이십니다. 그 하나님을 의지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시 울리실 그 날을 기대합니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하나님께서 하실 놀라운 구원의 큰일을 기대한다면, 우리는 비록 힘든 현실이지만,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도전하고 달려가야 합니다. 이 점에서 우리는 시편 126편 5-6절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라고 합니다. 

농부는 왜 울면서 씨를 뿌리는 것일까요?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란 부분을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그의 씨 주머니를 들고 울면서 나가는 자>입니다. 이 부분은 이중 부정의 방법을 사용하고 있는데, 어떤 학자는 <울지 않고는 그의 발걸음을 옮겨 놓지 않는 자>라고 번역하기도 하였습니다. 

여러분, 이 상황을 상상해 보십시오. 몇 해 째 흉년이 들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농사를 접고 떠났습니다. 그러나 믿음을 가진 농부는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땅을 사수했습니다. 이듬 해 봄이 왔을 때, 다시 힘써 밭을 갈고 씨를 뿌리게 되었습니다. 그 씨를 뿌리면서 그는 눈물도 함께 뿌렸습니다. 그의 손에서 뿌려지는 씨앗은 아끼고 아낀 종자였습니다. 하도 배가 고플 때면, 그 종자로 음식을 해 먹고 싶었지만, 농사를 위해 참았습니다. 아이가 보채도 <이걸 뿌려야 내년에 살 수 있다>며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고픈 배를 움켜쥐고 이제 다시 파종을 하러 나가면서 울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결과가 무엇입니까? 그가 뿌린 씨앗과 그 씨앗 위에 떨어진 뜨거운 눈물 위에 하나님께서 비를 내리셨습니다. 따스한 햇볕을 주셨습니다. 다른 곡식과 채소가 나게 하셨습니다. 가을 추수 때까지 먹을 수 있는 과일을 주셨습니다. 그들은 눈물로 씨를 뿌렸기에, 이제 기쁨으로 단을 거두게 된 것입니다. 무슨 의미일까요? 포로생활이 힘들어도 다시 돌아가게 하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눈물을 뿌리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기다리고 견딘 결과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힘들어도 멍에를 지십시오. 멍에를 지고 힘들어도 삶에 도전하십시오. 계속 공부하고, 계속 출근하고, 계속 달려가십시오. 때가 되면 반드시 추수할 때가옵니다. 비록 지금은 아무 것도 눈에 보이지 않아도 포기하지 마십시오. 

우리나라에 온 최초의 장로교 선교사인 <언더우드 선교사>는 조선에 와서 힘들 때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님 ... 메마르고 가난한 땅 ...나무 한 그루 시원하게 자라 오르지 못하고 있는 땅에 저희들을 옮겨와 심으셨습니다. 
그 넓고 넓은 태평양을 어떻게 건너왔는지 그 사실이 기적입니다. 
주께서 붙잡아 뚝 떨어뜨려 놓으신 듯 한 이곳, 
지금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은 고집스럽게 얼룩진 어둠뿐입니다. 어둠과 가난과 인습에 묶여 있는 조선 사람뿐입니다. 그들은 왜 묶여 있는지도 모르고, 묶여 있는 것이 고통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고통을 고통인줄 모르는 자에게 고통을 벗겨주겠다고 하면 의심부터 하고 화부터 냅니다. 
조선 남자들의 속셈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 나라 조정의 내심도 보이질 않습니다. 장옷을 쓰고 다니거나 가마를 타고 다니는 여자들을 영영 볼 기회가 없으면 어찌하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조선의 마음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희가 하게 될 일이 어떤 것인지, 그 일이 어떻게 나타나게 될는지 ....조금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 ...순종하겠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황무지 위에 맨손으로 서있는 것 같으며 ... 
지금은 우리가 서양 귀신 양귀자라고 손가락질 받고 있사오나 
저들이 우리의 영혼과 하나인 것을 깨닫고, 하늘나라의 한 백성 한 자녀임을 알고, 눈물로 기뻐하는 날이 있음을 믿습니다. 
이곳이 머지않아 은총의 땅이 되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주여, 오직 제 믿음을 붙잡아 주소서.> 

지금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지만, 앞으로 은총의 땅이 될 것을 믿었던 선교사의 기도대로, 지금 한국 땅엔 곳곳에 주님의 교회가 세워져 있습니다. 

이제 우리도 기도하면서 나아가야 합니다. 4절 끝을 보세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 구할 것이며>란 구절처럼 돌아오는 사람들은 여호와 하나님께 구하였습니다. 수시로 자신들이 가는 길을 물었습니다. 그들 중 노인들은 아직 어리거나 젊을 때, 나라가 멸망한 슬픔으로 인해 포로로 끌려가면서도 길을 보아둘 겨를도 없었습니다. 바벨론에서 태어난 젊은이들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이 처음이었기에 길을 아는 자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들 모두는 하나님께 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기도는 포로로 끌려가는 사람에게만 필요한 게 아닙니다. 기도는 용서받고, 구원받아 돌아오는 사람들에게도 필요합니다. 기도는 실패하고 좌절한 사람만이 할 일이 아닙니다. 기도는 성공하고 잘 되는 사람에게도 똑같이 필요합니다. 기도는 위축되는 교회의 성도들에게만 필요한 게 아닙니다. 부흥하고 성장하는 교회의 성도들에게도 필요합니다. 기도는 모두에게 필요합니다. 이 가을에 엎드리길 원합니다. 성도의 모든 것은 기도에서 시작되고 기도에서 열매를 맺습니다. 기도는 모든 사람에게 필요합니다. 

잠시 후 우리는 <그 손 못 자국 만져라>는 찬송을 부르고자 합니다. <거친 세상에서 실패 하거든 그 손 못 자국 만져라 고된 일 하다가 힘을 얻으리 그 손 못 자국 만져라 // 네가 어둠속을 걸어 갈 때에 그 손 못 자국 만져라 주가 참 평안을 네게 주시리  그 손 못 자국 만져라> 

힘들 때 주님의 못자국난 손을 만지는 마음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그 손을 붙잡길 원합니다.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절망의 나락에서 주님을 붙잡고 힘을 얻었는지 모릅니다. 주님의 손은 못 박힌 손이었지만, 그 고난 후에는 부활의 영광을 보여주는 손이 되었습니다. 

이 가을 엎드려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눈물로 의지하길 원합니다. 그렇게 하면 반드시 우리는 슬픔의 눈물이 아닌, 기쁨의 눈물을 흘릴 때가 올 것입니다. <또 하나의 눈물>을 체험하는 그 날은 승리의 날이 될 것입니다. 그 때까지 힘써 노력하며, 끊임없이 기도하면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길 기원합니다.
(김운성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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