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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네가 왕이 아니냐? (요 18:2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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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왕이 아니냐? (요 18:28-40)


네팔의 숲속에 살고 있는 코뿔소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다른 동물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트레비아 나무의 열매입니다. 숲속을 거닐던 코뿔소는 트레비아 나무 열매를 발견하기만 하면 먹을 수 있는 만큼 포식을 한 뒤 그 자리를 떠납니다. 트레비아 나무 열매 입장에서 생각해본다면 참으로 기막힌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열매가 열매로 영 글어져 떨어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과 정성과 노력이 기울여 졌겠습니까? 단 하루, 단 한시간도 어설프게 보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익을 대로 익어 땅에 떨어지기가 무섭게 무지막지한 코뿔소의 밥이 되어버린다면 얼마나 허망한 일입니까? 열매로서는 가슴을 치고 통탄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신비로운 생명의 역사는 정작 그 순간부터 시작됩니다. 코뿔소의 배속에 들어간 트레비아 나무 열매는 다 소화되어 버리지만, 그러나 그 속에 들어있는 씨앗은 그대로 남아 있다가 다음날 코뿔소의 배설물에 섞여 다시 세상으로 나옵니다. 그리고 코뿔소의 배설물을 거름 삼아 트레비아 씨앗은 싹을 틔우면서 나무로 자라게 되는 것입니다. 이 방법 이외에는 트레비아 나무가 생존할 도리가 없습니다. 다 익어 숲속 음지에 떨어진 트레비아 나무 열매는 음지에서는 절대로 싹을 틔우지 못합니다. 

반드시 양지로 나가야만 생존할 수 있는데 스스로는 움직일 수가 없기에 자력으로는 전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고맙게도, 어떤 짐승도 관심을 갖지 않는 그 열매를 유독 코뿔소만 좋아하여 자기 몸으로 음지에서 양지로 옮겨 주는 것입니다. 만약 네팔에서 코뿔소가 멸종되어 버린다면 그 날은 곧 트레비아 나무의 장례식이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놀라운 일은 아프리카의 아카시아와 코끼리 사이에서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아프리카의 아카시아 나무 열매들은 거대한 코끼리가 자기를 먹어치우는 것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 나무가 정작 두려워하는 것은, 코끼리와 비교한다면 미물에 불과한 조그마한 나방이의 유충입니다. 그 유충은 아카시아나 무의 열매를 먹을 뿐만 아니라 그 속에 있는 씨앗까지 갉아먹을 수 있어서, 아프리카 아카시아를 멸종 시킬 수 있는 가장 무서운 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코끼리는 아카시아 열매와 거기에 붙어 있는 유충을 한꺼번에 먹어버리는 반면, 아카시아 열매 씨앗을 소화시킬 수 있는 효소는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그 씨앗 역시 배설물과 함께 나와 배설물을 거름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카시아 열매에게 있어서 코끼리는 단순히 씨앗을 퍼트려주는 역할뿐만 아니라, 유충을 제거해주는 살충제의 역할까지도 감당해주는 은인인 것입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유대인들의 간악함입니다. 
“저희가 예수를 가야바에게서 관정으로 끌고 가니 새벽이라” 
여기에서 관정이란 당시 유대 총독이었던 빌라도의 공관을 의미합니다.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의 심문을 차례로 받았던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지시에 의해 이번에는 빌라도 총독에게로 끌려갔는데, 그때의 시각은 십자가에 못 박히시던 당일 즉 금요일 새벽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고소하는 이들이 얼마나 합법적인 절차를 밟고 객관성을 가지고 일을 처리하는가를 보고 있노라면 씁쓸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죄란 반드시 부도덕하고 사납고 더럽고 악한 모습으로만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생각도 없습니다. 오히려 가장 도덕적이고 가장 의로울 것 같은 곳에서 감쪽같이 죄악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26장을 보면 “예수를 잡은 자들이 끌고 대제사장 가야바에게로 가니 거기 서기관과 장로들이 모여있더라”고 했고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거짓증거를 찾았다”고 했습니다. 여기 공회란 오늘날의 국회를 가리킵니다. 당시 최고 의결기관이었습니다. 오늘날 말로 하면 입법 사법 행정 삼권을 쥔 지도자들이 다 합세해서 예수님을 죽이려고 거짓 증거를 찾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거짓 증거를 제대로 찾지를 못했다고 했습니다.

“거짓 증인이 많이 왔으나 얻지 못하더니 후에 두 사람이 와서 가로되 이 사람의 말이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 동안에 지을 수 있다 하더라” 신명기 19:15에 있는 모세의 법에 보면 한 사람에 대한 고소를 할 때 증인이 하나밖에 없으면 안 됩니다. 증인이 적어도 둘은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두 사람의 증인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한 사람만의 증언으로는 어떤 사람을 범법자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을 미워하여 죄가 있는 것처럼 무고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제도가 바로 증인이 두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를 거꾸로 악용해서 두 사람만 데려다가 거짓 증인이 되게 하면 죄 없는 사람도 죄인으로 만드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기 위해 이세벨이 거짓 증인을 나봇을 쳐 죽이는 일이 있지 않습니까? 

제사장, 서기관, 공회원들은 모두가 하나님의 법에 도무지 저촉되지 않는 사람들 같이 보입니다. 증인도 둘 이상 세워라 그래서 둘 이상 세웠고 그들이 스스로 목숨을 뺏지 않고 빌라도 총독에게 보내서 합법적인 절차를 밟아 예수님을 사형에 처하도록 요구합니다. 
예수님을 가야바에게서 관정으로 끌고 가니 새벽이라 저희는 더럽힘을 받지 아니하고 유월절 절기를 지키려고 하여 이방인의 관정에 들어가지 않았다고 오늘 본문은 기록합니다. 

유월절을 지키기 위하여 이방인 된 로마인의 관정에 들어가서 부정하게 될까봐 철저히 조심할 정도로 하나님의 율법과 거룩함에 치밀한 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열정을 가진 자들이 유월절의 어린양 되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죽였습니다. 이 얼마나 기가 막힌 이야기입니까? 
“화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는 도다!” 다시 말해 유월절을 얼마나 거룩하게 지켜야 되는지, 그리고 두 세 증인이 있어야만 고소할 수 있는 것도 잘 지킵니다. 이게 하루살이를 걸러내는 일입니다. 

즉 남의 눈의 티는 잘도 알아봅니다. 그러나 약대는 삼키는데 목에 걸리지도 않습니다. 하루살이는 먹어도 목에 걸리기 전에 잇새에 끼일 정도로 철저하게 율법을 지키는 열심을 냅니다. 그러나 약대같이 큰 문제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저질러 놓고 태연자약합니다. 그야말로 약대는 통째로 삼키는 무서운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화있을진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작은 죄 문제에 대해서는 그렇게도 철두철미 작고 작은 하루살이 걸러내듯 잘도 구별해 지키면서 예수님을 죽이는 일에 있어서는 주저없이 일어섰던 자들입니다. 적어도 우리도 예수님을 미워했었던 사람들입니다. 왜 미워했습니까? 우리를 죄인이라고 해서 미워했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대표로 세워서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중요한 핵심중 하나입니다. 다시 말해 나는 적어도 제사장이고 공회원이요 바리새인입니다. 왜냐하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그 언행심사를 오늘날 우리들에게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누가복음 5장의 금식 논쟁 사건을 보십시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무엇으로 예수님을 비방하는가 보십시오. 왜 죄인들과 섞여서 노느냐? 왜 거룩한 생활을 안 하느냐? 그리고 또 따지는 것이 왜 당신은 금식을 안 하느냐라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한 가지 목적 달성을 위하여 이 모든 종교적인 지식과 율법들을 동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슨 목적입니까? 예수님을 책잡아 죽이기 위한 목적뿐이었던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원래 의도하셨던 이스라엘을 향한 율법의 방향은 온 데 간 데 없어지고 그 주신 율법으로 누구를 때려잡을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이것은 비단 바리새인 서기관들의 문제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들에게 있어서도 중요한 신앙의 싸움거리입니다. 율법을 준 중요한 목표가 무엇입니까? 로마서 13장을 보십시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이 말씀은 율법을 주신 목적이 단지 간음하지 않고 살인하지 않고 도적질하지 않는 등 겉으로 드러나는 잘못을 안 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율법을 주신 것은 우리 자신과 인생을 악에게 병기로 드리지 말고 의의 병기로 드리며 선을 이루고 성령의 열매를 맺으라는 데에 그 목적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정작 맺혀야 할 성령의 열매와 선한 일에는 힘쓰지 않고 노상 앉아서 하는 일이 누구누구는 기도를 잘 하지 않고, 누구는 거짓말을 했고, 누구는 술을 먹었고, 이런 것이나 적어 가지고 자기가 무슨 친위대 대원이나 되는 것처럼 하나님 앞에서 그런 것이나 보고하고 있어서 되겠습니까?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을 받아놓고 기껏 한다고 하는 일이 이런 식으로 다른 사람을 흠잡는 일에 사용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중심에 사람을 살릴 생각이나 거룩한 완성이나 생명과 영생을 향한 목표가 없다는 것입니다. 있다면 여전히 남을 죽이고 시기하며 원수 맺는 악한 일에 빠져있을 뿐이었습니다. 그 하는 일의 조목조목은 다 옳은데 결국 그렇게 해서 사람을 죽이는 일을 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칼로 찔러 죽이나 나쁜 소문을 일으켜 그를 사회에서 매장시켜 죽이는 일이 죽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눅18:9~14에 보면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신앙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결국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며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아야 될줄을 알고 하나님 앞에 도우심을 구하러 나아온 가난한 심령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나아와 하는 말이 `하나님 심판해 주십시오! 이 사람이 낫습니까? 내가 낫습니까?'라는 질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얼마나 여기에 나타난 바리새인과 같은 자세를 취하는지 모릅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다릅니다. 하나님 나를 그렇게 만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합니다. 

그리고 십일조도 꼬박꼬박 냅니다.” 이렇게 자랑해 놓고 결국 바리새인들은 뭘 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고 말았습니다. 도적질하는 자와 거짓말하는 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 아니라, 한 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고 십일조를 잘 내는 자들이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여러분, 이 강력한 지적을 가볍게 넘기시지 말아야 합니다.

신앙이란 율법을 지키는 싸움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십일조를 바쳤느냐 주일을 지켰느냐의 싸움도 아닙니다. 문제는 하나님을 사랑하느냐 이웃을 사랑하느냐 하는 싸움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이 십일조를 내고 주일을 성수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맛이 상한 음식과 같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주일을 지키는 것이 기쁜 일이 되는 것이고 주를 사랑한다면 나에게 못 되게 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주님이 사랑하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어떤 나라에서는 상대방이 정말 자기를 사랑하는가? 아닌가를 확인하기 위해서 그 사람을 자기 집에 불러다가 식사 대접을 해 본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음식에다 소금을 평소에 열배 정도를 쳐놓고 음식을 내놓는답니다. 못 먹을 만큼 음식을 짜게 해서 내 놓았는데도 말없이 그 음식을 먹으면 정말 자기를 사랑한다고 인정한답니다. 사랑한다면 상대방이 좋아하는 것을 나도 좋아하려고 발버둥 치게 되어 있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이란 우리가 억지로 지키도록 요구된 것이 아닙니다. 율법은 정말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가 하는 기준일 뿐입니다. 그렇다고 안 지켜도 좋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안 지키면 여러분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언가 꼭 하라고 시키시는 일이 있다면 그것이 반드시 나에게 복이 되기 때문에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괴롭히시는 분이 아닙니다. 율법을 대할 때에 그것을 괴롭고 고달픈 것으로만 이해하고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너무도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통해 우리를 살리시고 복을 주시고자 하는데 그 목적을 두셨는데 우리는 지금 어떠합니까?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이 신앙 상의 모든 지식들을 가지고 이웃을 얼마나 살려냈으며 위로했는지 한번 깊이 돌이켜 보아야 합니다.

무리들이 예수님을 끌고 온 이유가 그들의 종교적인 문제인 것을 알아차린 빌라도 총독은 그들의 종교법대로 예수님을 재판하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러자 무리들은, 자기들에게는 사람을 죽일 권한이 없다며 버티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과연 사람을 죽일 권한이 없었습니까? 요한복음 8장에 의하면 유대인들은 간음한 여인을 돌로 쳐 죽이려고 했습니다. 사도행전 7장에 의하면 스데반 집사는 유대인들이 던진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 사도 바울이 하던 짓이란, 대제사장의 허락 하에 예수 믿는 자들을 돌로 쳐 죽이는 일에 증인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유대인들에게는 그들의 종교법에 따라 사람을 돌로 쳐 죽일 수 있는 권한이 분명히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사람을 죽일 권한이 없다고 빌라도 총독 앞에서 말하는 것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일 권한이 그들에게는 없다는 의미였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사람을 사형에 처하는 것은 로마법에 의해서만 가능했고, 로마법은 로마 총독에 의해서만 집행될 수 있었던 까닭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에서 한 가지 질문을 제기하게 됩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종교법으로 예수님을 돌로 쳐죽이면 그만이지, 왜 구태여 십자가 위에서 사형시키려고 했었습니까? 대제사장 무리들은 유대인들을 뒤에서 조종하여 예수님을 정치범으로 몰면서까지, 십자가 처형을 위해 왜 그토록 치밀하게 공작을 했습니까?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 이니라'는 신명기 21장 23절의 말씀을 인위적으로 실현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던 이유는 단지 하나, 예수님이 그들의 종교적 기득권을 뒤흔든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죽여도 그냥 죽이는 것이 아니라, 무슨 수를 동원해서라도 예수님을 나무 십자가 위에 매어 달아 하나님께로부터 저주받아 죽은 자임을 만천하에 공포하여, 예수님 죽은 후에라도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가 없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저주받은 자와는 결코 상종치 않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본문이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는 예수께서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가리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어라”
예수님께서 불의한 인간들에 의해 행악자로 몰려 십자가에 못 박히는 능욕을 받으시면서 까지도 오히려 자기를 못 박는 자들을 용서하실 수 있으셨던 것은, 그 절망적인 순간에서도 자기를 위해 역사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아셨고, 보셨고, 믿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우리가 그러나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에 나오는 유대인들의 모습이 바로 나의 모습은 아닌지 다시 한 번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변함없는 주님의 사랑과 역사 앞에 나를 온전히 내려놓고 판단하는 자요 내 눈에 들보가 들어 있는 자가 아니라 먼저 내 눈에 티를 빼고 사랑으로 품어주고 세워나가는 하나님의 사람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빌라도의 어리석음입니다. 
빌라도는 대단히 유능하고 탁월한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로마 황제의 특별한 인정을 받을 정도로 출세가도를 달려온 인물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대 총독을 임명되었던 것입니다. 유대 총독은 탁월하고 유능한 지도자만이 갈 수 있는 직책이었습니다. 

당시의 정치 상황으로 볼 때 유대인들은 나라를 찾기 위해 계속적인 폭동이나 음모를 꾸미고 있었으므로 유대인들을 달래기 위해 유대인들에게 종교의 자유를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정치적으로는 억압을 받고 있었으나 종교적으로는 자기들의 율법대로 마음껏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유대 총독은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선민이라는 대단한 자부심을 살려주면서도 반역활동을 전혀 못하게 하기 위해 정보망을 펼쳐 놓아야 했습니다. 

또 총독은 유대인들의 율법에 대해서도 충분한 지식을 갖추어야 하는 최고도의 정치 능력이 있어야 했습니다. 빌라도는 명석하고 기민한 판단력이 있어서 어느 상황, 어떤 문제도 처리할 수 있는 유능한 지도자였기에 그 나라 총독으로 적합한 인물로 인정을 받았던 것입니다. 한 마디로 그는 장래가 촉망되는 인재였고 출세가도를 탄탄히 달리고 있는 유망주였습니다. 그런데 그의 앞에 대단히 귀찮은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그것은 유대 지도자들이 빌라도를 찾아와서 예수란 자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해달라는 청원을 한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사형집행권이 없었습니다. 사형집행권만은 로마 정부에게 있어서 유대인들은 율법을 크게 범한 죄로 사형을 집행하려고 할 때는 로마 정부의 허가를 받아야 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죽이려는 죄목은 신성모독죄였습니다.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자기가 하나님과 같다’는 주장을 하는 죄는 신성모독 죄로 유대 율법에서는 사형을 피할 수 없는 큰 죄였습니다.
그러나 로마법에는 신성모독죄란 사형에 해당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신성모독죄 대신에 왕을 사칭한다는 정치적인 죄목으로 고소했습니다. 로마의 입장에서는 자기를 왕이라고 사칭할 때는 반역죄에 해당되므로 사형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빌라도는 비록 귀찮았으나 예수님을 심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빌라도의 심문이 시작되었습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다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다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는다”  빌라도는 전에 전혀 들어보지 못한 하나님 나라와 놀라운 진리의 말씀에 접하게 됩니다. 

그래 빌라도는 심문하다 말고 난데없이 “진리가 무엇이냐?”고 질문할 정도였습니다. 빌라도는 그의 명석한 두뇌, 기민한 판단력, 그리고 많고 다양한 죄수를 심문한 경험을 통해서 볼 때, 예수님에게는 전혀 죄가 없고 한없이 진실한 분이라는 결론을 얻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빌라도는 예수님의 무죄를 선언했습니다. 그렇게 하기를 세 번이나 했습니다. 또한 그는 예수님을 풀어 주려고 무척 애썼다는 사실을 본문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는 무서운 흉악범인 바라바와 예수님과 함께 세우고는 “내가 누구를 놓아주랴?”고 묻기도 했습니다. 

이런 경우에 보통 같으면 아무리 예수님에 대해서 못 마땅할지라도 흉악범과 비교할 수 없으므로 예수님을 풀어주라고 외칠 것입니다. 그러나 군중들은 이미 뇌물을 먹었으므로 계속 “예수를 못 박으라”고 소리칠 뿐이었습니다. 빌라도는 이번에는 더 심한 방법을 썼습니다. 예수님을 심하게 매질하고 가시관을 씌워 피투성이가 된 예수님을 군중들 앞에 세웠습니다. 군중들의 동점심을 유발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피를 본 이리처럼 더 사나운 이빨을 드러내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더욱 더 고함을 질러대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유대 지도자들은 빌라도가 예수님을 놓아주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시도하는 것을 보고 더 강한 방법으로 빌라도를 압박하였습니다.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 빌라도의 가장 큰 약점을 찌른 것입니다. 

예수님에게서 아무 죄도 발견하지 못한 빌라도 총독은 자기의 권한으로 얼마든지 예수님을 풀어놓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군중들이 지금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점점 함성을 지르다 못해 그것이 발전하여 민란이 일어난다면 출세가도를 달리고 있던 빌라도에게는 막대한 지장을 받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자기의 세상 욕망인 출세길이 방해받지 않기 위해 비겁하게 물러서고 말았습니다. 
그는 대야에 물을 떠오게 한 후,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고 경고했습니다. 

그러니까 이미 미쳐버린 군중들은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리시오”라고 외쳐댑니다. 그 결과,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죄로 인해서 나라를 빼앗긴 채 수 천년동안 가장 무서운 형벌을 받았던 것입니다. 여하튼 빌라도는 진실이 무엇인가를 뻔히 알면서 세상의 출세를 위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비겁하게 내주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의 출세 때문에 진실을 거부한 빌라도는 그 후에 어떻게 되었을까요? 계속 출세를 했습니까? 아닙니다. 후에 빌라도는 어떤 예루살렘 사건에 연루되어 총독직에서 쫓겨났고 로마로 소환되었으며, 요세프스라는 역사가에 의하면 칼리쿨라 치세 하에서 자살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진리의 좁은 길을 버리고 욕망의 넓은 길을 택하다가 성경말씀대로 멸망을 자초했던 것입니다. 죗값이 이토록 무섭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회개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의 대가는 반드시 치러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다윗이 밧새바를 취하고 우리야를 전쟁터에 앞장 세워 죽였을 때 나단 선지자가 와서 책망을 합니다. 다윗은 이에 크게 울며 하나님 앞에 자복하며 용서를 구합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저를 용서하시지만 그에 따른 대가로서의 형벌은 면할 길이 없었습니다. 

“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은즉 칼이 네 집에서 영원토록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고 여호와께서 또 이와 같이 이르시기를 보라 내가 너와 네 집에 재앙을 일으키고 내가 네 눈앞에서 네 아내를 빼앗아 네 이웃들에게 주리니 그 사람들이 네 아내들과 더불어 백주에 동침하리라 너는 은밀히 행하였으나 나는 온 이스라엘 앞에서 백주에 이 일을 행하리라 하셨나이다 하니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하매 나단이 다윗에게 말하되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 이 일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원수가 크게 비방할 거리를 얻게 하였으니 당신이 낳은 아이가 반드시 죽으리이다”  

때로 우리 기독교인들이 세상 것 때문에 양다리를 걸치고 사는 일이 많습니다. 하나님과 세상이라는 두 주인을 섬기려고 합니다. 세상에 나가서는 마음대로 죄를 먹고 마시고 죄에 취해 있다가 주일날 교회 와서는 성도처럼 행세합니다. 어느 때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이 무엇인지 뻔히 알면서도 세상의 것, 세상의 친구와 친척의 비난이 무서워서 주일을 범하고 불의를 따르므로 하나님의 진리를 벗어나는 성도들도 있습니다. 두 토끼를 다 쫓을 수는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은 이런 성도들을 뜨뜻미지근한 성도로 여기어 토하여 내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갈멜산에서 하나님과 바알신 사이에 서서 눈치만 보고 있는 백성들을 향해서 엘리야는 외치기를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고 했습니다. 이런 재미난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처녀에게 두 군데서 중매가 들어왔습니다. 한 총각은 성실치 못하나 돈이 많은 부자 집안이고, 다른 총각은 아주 진실하고 성실하지만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이었습니다. 

이 처녀는 둘 사이에서 누구를 택할 것인가를 고민하다가 탄식처럼 한다는 소리가 ‘두 사람하고 다 살았으며 좋겠다. 하루는 진실한 총각하고 살고 하루는 돈 많은 집에 가서 살면 좋겠다’고 하더랍니다. 얼마나 어리석은 말입니까? 이 처녀가 지혜로운 처녀라면 지금은 가난하지만 성실한 총각하고 결혼하면 어느 날 돈도 생기는 날이 올 터인데 두 사이에 끼어 머뭇거리다가 다 놓치거나, 아니면 오늘의 욕망에 따라 진실하지 못한 사람을 택한다면 빌라도처럼 비참한 결말을 맞을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에게도 때로 ‘이것을 택할 것인가, 저것을 택할 것인가?’하는 선택의 기로 앞에 설 때가 있습니다. 그 때에 우리 기독교인의 선택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해야 합니다. 세상 기준대로 선택하지 않고 하나님의 기준에 따라 선택하면 의식주 문제, 세상에서 필요한 것도 다 하나님이 책임져 주십니다. 그러나 세상을 기준해서 선택하면 하나님의 도우심이 나타나지 않음으로 실패로 끝나고 마는 것입니다. 

여기 어리석은 빌라도의 모습이 곧 나의 모습은 아닙니까? 때로 지금은 불리해 보이고 손해가 되어 보인다 할지라도 넓은 길을 버리고 단호하게 좁은 길을 택하십시오. 그 때 그 순종의 좁은 길에는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과 기쁨, 은혜의 복으로 채우신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빌라도는 말로써는 한 마디로 예수님을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잔인하게 예수를 매질하게 하고 그래도 안 되니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주었다는 점이 그가 얼마나 비겁한 사람인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빌라도는 무엇이 옳은 줄 알았습니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그 반대로 행하고 말았습니다. 빌라도가 진정 용기가 있고 주어진 선한 기회를 잘 결단했더라면 예수님을 진리의 왕으로 영접했을 것이요, 그러면 일시적으로는 어려움을 당했을지 몰라도 하나님의 강하신 도우심으로 예루살렘 통치에서도 그 판도가 달라졌을 것입니다. 

그는 “예수냐 세상이냐?”라는 선택의 기로에서 세상을 택함으로 영원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순식간에 잃어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토록 유지하고 싶었던 영화와 부귀도 다 잃어버리고 영원히 저주받을 이름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하는 그 대명사가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어리석음을 범하지 마십시다. “예수님이냐, 세상이냐?” “좁은 길이냐, 넓은 길이냐?”를 택할 수밖에 없을 때에 당장 큰 손해가 보인다 할지라도 지체하지 말고 예수님을 따라 좁은 길을 택하십시오. 그 길만이 생명과 영원을 얻는 길인 것입니다. 기회는 언제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기회를 잘 선용하고 오직 믿음을 택하고 순종의 길을 택하심으로 영원히 복을 누리고 자녀들에게도 복을 이어줄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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