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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최고의 자랑거리 십자가 (렘 9:23-24, 갈 6: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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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자랑거리 십자가 (렘 9:23-24, 갈 6:13-15)
  
오래 전 ‘TV진품명품’이란 프로그램에 어떤 남자가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진품이라는 문서를 가지고 나왔습니다. 그 남자는 이 문서가 가문이 자랑하는 가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문서를 감정한 결과 그 문서가 ‘노비문서’로 밝혀졌습니다. 

자신의 자랑거리를 알지 못하고 자랑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우리가 쉽게 하는 자녀자랑, 취직자랑, 돈 자랑, 지식자랑, 이 모든 것이 사실은 자랑할 만한 것이 되지 못하는 헛된 것입니다. 자랑은 잘 못하다보면 자랑이 아니라 수치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끼리 하는 이야기로 교인을 다음과 같이 구분한다고 합니다. ‘달구지 교인’이 있습니다. 뒤에서 밀어줘야 비로소 한발씩 앞으로 나아가는 교인입니다. ‘연 교인’이 있습니다. 서로 연결되어 있는 실을 붙들어 주지 않으면 소리 없이 사라지는 교인입니다. ‘풍선 교인’이 있습니다. 잔뜩 부풀어 언제 터질지 모르는 교인입니다. ‘크리스마스추리 교인’이 있습니다. 쉴 새 없이 켜졌다 꺼졌다를 반복하는 교인입니다.

‘시험관 교인’이 있습니다. 설교시간만 되면 점수를 매기는 교인입니다. ‘공작 교인’이 있습니다. 교회에 올 때마다 활짝 펼 자랑거리를 가지고 와서 자랑하기 시작하는 교인입니다. ‘묵상 교인’이 있습니다. 설교를 시작했다 하면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교인입니다. 자랑거리가 뭔지, 언제 자랑해야 하는지 구분 못하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도 있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야고보서 4:16에는 “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오만함을 의미합니다. 온갖 종류의 세상적인 확신은 어리석은 확신이며 천박한 자만심이며 결국 악으로 치닫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사회에는 자랑이 많습니다. 맛 자랑도 있고, 멋 자랑도 있고, 노래자랑도 있고, 몸매 자랑도 있고, 솜씨 자랑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자랑들은 뒤돌아서면 아무 것도 아니고 심지어 후회할 것들 천지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겸손한 사람은 자랑할 것이 하나님께만 있고 내게는 아무 것도 자랑할 것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9:23에는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고 합니다. 자랑해도 될 만한 가장 큰 자랑거리를 자랑하지 말라고 합니다. 자랑거리가 아닌 것은 아예 자랑하지 말라고 할 가치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자랑할 가치가 있는 그것을 자랑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인간의 지혜나, 용맹이나, 부함은 다 자랑거리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하나님 앞에서는 허탄한 것입니다. 악한 것입니다. 자랑거리도 아닙니다. 모든 것을 지으시고 소유하신 하나님 앞에서 그 분이 주신 작은 것을 자랑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자랑은 하나님께 허탄한 일입니다. 
  
어떤 사람은 친구와 술을 마시다 술김에 자신의 범죄를 자랑하다가 덜미를 잡혔습니다. 자신의 친구가 전과를 자랑하니 “그걸 자랑이라고?” 하면서 자신이 저지른 살인사건을 술김에 발설했고 결국 체포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자랑이 얼마나 헛된 일입니까? 
  
시편 52:1에는 “포악한 자여 네가 어찌하여 악한 계획을 스스로 자랑하는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항상 있도다”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알면 악한 계획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알면 악한 계획은 아예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자랑은 다 헛됩니다. 바울은 자신의 약함을 자랑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자랑했습니다. 요한은 믿음을 자랑했습니다. 바울은 다시 십자가를 자랑합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라고 합니다. 정말 바울은 자랑할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으며 이 자랑은 대단한 자랑이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십자가의 자랑이 있기를 바랍니다. 
  
  
첫째,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서 6:14에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고 합니다. ‘결코’라는 단어는 자신의 미래에 대한 단호한 부정적 소원을 표현합니다. 어떤 인간적, 율법적 상징이나 의식이 전혀 자랑이 아님을 강조합니다. 
  
바울은 이전에 세상의 영광, 인간적인 성공 때문에 십자가를 멸시하고 부정한 쓰라린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세상이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합니다. 세상의 모든 것들, 세상의 명예, 세상의 물질, 세상의 지식을 다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말입니다. 세상, ‘코스모스’란 인간의 자기주장에 의하여 움직여지는 불신앙적인 요소와 악의 총체를 의미합니다. 
  
세상은 나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나는 세상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합니다. 세상과 내가 아니라 십자가만이 유일한 구원과 가치라는 것을 말합니다. 목숨을 걸고 얻으려고 했던 세상의 것, 그리고 가장 사랑했던 내가 삶의 중심이 된 것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세상의 것을 가지고 자랑하는 자는 마치 주인 앞에서 종이 주인의 것을 가지고 자기의 것이라고 자랑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종의 것은 다 주인의 것인데 종이 자기의 것이라고 자랑하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입니다. 
  
어리석은 부자는 돈을 모두 자기 돈이라고 합니다. 어리석은 군왕은 권력을 자기의 힘이라고 합니다. 어리석은 학자는 지식을 모두 자기의 지식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에 이 모든 것이 허사이고 어리석은 일에 불과합니다. 
  
바울의 자랑거리는 오직 십자가입니다. 바울의 자랑거리는 자신의 약함입니다. 바울은 사실은 자랑거리가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건강은 좀 좋지 않았고, 전승에 보면 인물은 좀 잘 생기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좋은 가문에서 태어나 아버지의 많은 유산을 가지고 있었고, 좋은 스승 아래서 교육을 받아 지식으로 대가였고, 유대의 율법적 지위도 상당하여 부러울 것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모든 것이 자랑거리가 아니라 십자가만 자랑거리라고 합니다.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육체적인 것을 자랑거리로 삼는 자가 많이 있었습니다. 율법이 그렇습니다. 복음보다 율법적인 것들로 자랑거리로 삼고 위안을 삼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율법 속에 사는 사람은 누구나 언제나 마찬가지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여성들은 미모를 자랑하고, S라인이라는 체형을 자랑합니다. 남성들은 근육을 자랑하고, 훈남임을 자랑하고, 상남자임을 자랑합니다. 세상에서 예쁜 것이 미운 것보다야 좋지만 그렇다고 자랑거리라고 할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미모나, 체형이나, 근육이 삶을 얼마나 유익하게 합니까? 이것들이 얼마나 하나님의 나라에 도움이 됩니까?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이 하나님의 나라인데 하나님의 나라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아무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시몬느 베이유는 “자신의 지성을 자랑하는 지식인은 자신의 넓은 독방을 자랑하는 죄수와 같다”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학식을 남에게 내비치며 자랑해서는 안 됩니다. 많이 배웠다는 것은 결코 자랑이 아닙니다. 많이 배운 만큼 겸허한 마음과 지혜가 풍성한 품성이 자랑인 것입니다. 내가 남보다 더 많은 지식이 있다면 그 지식은 자랑이 아니라 섬김입니다. 
  
세상 나라는 칼의 힘을 믿습니다. 자신의 힘과 소유를 자랑합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나라는 십자가의 힘을 믿습니다. 십자가와 고난을 자랑합니다. 십자가를 자랑하는 것은 세상과 나를 십자가에 못 박았으므로 가능합니다. 
  
우리 찬송 가운데는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나를 죄에서 구속한 주님의 십자가만 보이면 참 신앙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세상과 나를 다 십자가에 못 박고 십자가의 주님만 우리 눈에 보이기를 바랍니다. 
  
어느 역사학자가 비상한 기억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갑오경장이 1894년에 일어난 것이라고 아는 것은 기본입니다. 그건 저도 압니다. 우리교회가 창립된 해이기 때문입니다. 잔 다르크의 출생이 1412년 1월 6일, 프랑스혁명이 1789년 7월 14일, 러시아혁명이 1917년 10월 26일, 명성왕후의 출생이 1851년, 시해가 1895년이라고 자신의 기억력을 자랑하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아내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죄송합니다. 잠깐 전화받을께요”하더니 그는 구석에 가서 말합니다. “뭐라구, 오늘이 당신의 생일이라고?” 
  
우리는 무엇을 자랑합니까? 우리가 사는 세상이 좋은 세상이 되었다고 자랑합니다. 살기 좋아졌다고 자랑합니다. 나의 용모를 자랑합니다. 나의 출세를 자랑합니다. 내가 가진 물질을 자랑합니다. 나의 지식을 자랑합니다. 나의 명예를 자랑합니다. 나의 자식을 자랑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자랑해야 합니까? 세상과 나를 다 헛된 것을 알고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을 자랑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에 십자가만 드러나게 된 것을 자랑해야 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자랑해야 합니다. 십자가만 자랑해야 합니다. 바울과 같이 우리도 자랑할 것이 십자가뿐이기를 바랍니다. 

  
둘째, 십자가 때문에 새로 지으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서 6:15에는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고 합니다. 바울에게는 새로 지으심이 가장 중요합니다. 할례가 사람을 새로 지어줍니까? 아닙니다! 율법이 사람을 새로 지어줍니까? 아닙니다! 지식이 사람을 새로 지어줍니까? 아닙니다! 사람의 지위가 사람을 새롭게 지어줍니까? 아닙니다! 십자가만이 우리를 새롭게 지어줍니다. 
  
할례나 무할례가 십자가 앞에서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할례나 무할례는 구원도 생명도 아닙니다. 단지 율법적 의식이며 상징에 불과합니다. 할례는 구원의 표이지 그 자체가 구원은 아닙니다. 우리의 세례도 할례와 마찬가지입니다. 세례는 구원의 표이지 그 자체가 구원은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7:19에는 “할례 받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요 할례 받지 아니하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계명 즉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서 할례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율법 때문에 할례가 가치 있는 것입니다. 율법을 떠난 할례는 미신적 행위에 불과합니다. 말씀 때문에 세례가 가치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떠난 세례는 미신적 해위에 불과합니다. 
  
십자가의 삶을 살지 않으면서 세례 받은 것을 자랑하고, 성찬에 참여한 것을 자랑하고, 교회의 제직원이 된 것을 자랑하고, 자신의 지위를 자랑하는 것은 다 쓸모없는 자랑입니다. 새로 지음 받은 것 외에 어떤 것도 참 의미가 없습니다. 
  
“지으심을 받은”이란 말은 헬라어로 ‘크티시스’라는 말인데 만드시는 하나님의 행위를 의미합니다. ‘피조물’이란 말의 헬라어 ‘크티스마’와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사람을 새로 짓는 도구입니다. 십자가는 우리가 새로 지음을 받는 곳입니다. 왜요? 죽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는 죽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부활이 있기 때문입니다. 부활 없는 십자가는 없습니다. 십자가는 부활 때문에 우리에는 소망이며, 하나님께는 영광입니다. 
  
성경은 ‘한 알의 밀알이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합니다.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 것이 기독교의 진리입니다. 십자가의 도리입니다. 예수님은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산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곧 기독교의 소망의 메시지입니다.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합니다. 십자가의 죽음의 의미를 아는 자는 쉽게 죽습니다. 왜냐하면 죽는 것이 사는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죽어야 새롭게 태어나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5:17에는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고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라고 하였는데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 들어갑니까? 십자가를 통하여 들어갑니다.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 그리스도와 내가 하나가 됩니다. 
  
구약 전도서에는 “해 아래 새것이 없나니”이라고 합니다. 해 아래에서 하는 일이 다 괴로움이며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다 헌것입니다. 헛것입니다. 해 아래 새것이 없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새것으로 지어주십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은 완전히 새로워지는 비결입니다. 반쯤 새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워집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이전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져야 합니다. 십자가는 이전의 나를 완전히 죽게 하는 것입니다.  
  
오래 전에 ‘한국유리’ 공장에 가 본 적이 있습니다. 한쪽에는 모래를 잔뜩 쌓아두었습니다. 모래를 가지고 유리를 만든다고 하였습니다. 다른 한쪽에는 깨진 유리조각과 헌병들이 잔뜩 쌓여 있었습니다. 유리조각과 헌병에는 더러운 먼지와 이물질이 가득했습니다. 그러나 일단 유리조각과 헌병을 세척과정을 통하여 깨끗이 한 다음에 녹여서 새 유리로 만들어냅니다. 이전의 더러운 이물질도 깨끗이 씻어지고 깨지고 찌그러진 모습이 완전히 사라집니다. 문자 그대로 거듭난 것입니다.  
  
십자가가 새로 지었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십자가가 나의 더러운 것을 다 씻고, 완전히 내 모습을 죽여 질적으로 외형적으로 새것으로 태어나게 하였다는 의미입니다. 십자가는 아무리 죄가 쌓이고 더러워도, 아무리 모습이 망가져도 새롭게 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십자가를 경험하고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산 자들은 기독교 역사에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위인들 가운데도 아우구스티누스, 김익두목사, 이기풍목사 등 수많은 신앙의 선조들이 십자가 때문에 새로운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우리에게 ‘빙점’의 작가로 익히 알려진 미우라 아야코를 예수 믿게 한 인물이 있습니다. 마에가와 다다시라는 분입니다. 다다시가 아야코에게 복음을 전하자 아야코는 말합니다. 

“다다시씨, 나는 정말 크리스천이 싫어요. 아니 그게 뭐예요? 성인군자처럼. 나는 당신의 설교를 들을 마음이 조금도 없어요. 잘난 척 하기는? 크리스천들은 정신적 귀족이에요. 우리를 불쌍한 인간으로 취급하며 위에서 내려다보듯 하잖아요.” 

다다시는 아야코가 예수 믿기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였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아야코가 건강하게 살아주기를 얼마나 열심히 빌었는지 몰라. 아야코만 살 수 있다면 내 생명까지 줄 수 있단 말이야”. 

그 때 아야코는 결핵성 척추 카리에스를 앓아누워 있었습니다. 결국 다다시의 끈질긴 사랑은 아야코를 전도하여 예수를 믿게 하고 자신은 35세에 결핵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다다시가 세상을 떠난 다음 아야코는 1952년 7월에 병상세례를 받고 크리스천으로 많은 작품을 남기고 1999년 10월 12일에 하나님의 품에 안겼습니다. 
  
로마서 4:2에는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고 말합니다. 할례나, 율법이나, 행위나 어떤 것도 자랑이 아닙니다. 십자가만이 구원받은 자의 자랑입니다. 우리도 이 자랑으로 살기를 바랍니다. 
  
  
결론 

요한 웨슬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죄 만을 부끄러워하고, 십자가를 자랑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 100명만 있으면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다”. 

세상을 자랑하는 자는 세상을 타락시킵니다. 십자가를 자랑하는 자는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인간적 욕망으로 자랑하고 싶은 것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자랑거리가 아닙니다. 오히려 십자가에 못 박을 것들입니다. 세상과 나는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할 것들입니다. 
  
“참 군인은 갑옷을 입을 때에 자랑하지 아니하고 갑옷을 벗을 때에 자랑하는 법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의 자랑은 마지막에 할 것입니다. 세상에서의 모든 옷을 다 벗고 하나님 앞에 설 때에 비로소 자랑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승승장구할 때가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힐 때 자랑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십자가로 새로 지음 받은 새 사람됨을 감사하고 날마다 십자가 자랑꾼이 다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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