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은혜를 입은 자의 자세 (룻 2:8-13)

첨부 1


은혜를 입은 자의 자세 (룻 2:8-13)
  
옛날, 미국 보스턴 시에 <스트로사>라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가 사업을 하고 싶었는데 돈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도시에 살고 있던 ‘바턴’이라고 하는 부자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당돌하게 부탁을 했습니다. 

“사장님 제가 워싱턴에 소매상을 하나 차려 놓고 사업을 할 생각인데 제게 2천 불을 빌려주시길 바랍니다. 그런데 제게는 담보물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 말을 들은 바턴은 담보물이 없이는 돈을 빌려 줄 수 없다고 거절을 합니다. 결국 그 청년은 그냥 돌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바턴은 뒤돌아 가는 그 청년에게 관심이 생겼습니다. 담대하게 2천불을 빌려달라고 찾아온 용기가 기특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변 사람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빌려주었습니다. 

그 당시 2천불은 오늘날 가치로 치면 이천만원이 훨씬 넘는 돈입니다. 

바턴 사장은 생각하기를 ‘그 돈을 은행에 두기보다는 용기있는 저 젊은이의 앞길을 돕는 것이 훨씬 보람이 있을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무담보로 2천 달러를 빌려 주었습니다.   

그 후 10년이 지났습니다. 세계에 경제대공황이 불어 닥쳤습니다. 그 여파로 바턴 사장의 사업도 모두 도산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때 그를 찾아온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스트로사>였습니다. 그가 바턴 사장을 찾아와서는 바턴 사장의 부채를 대신 갚아주겠다고 하였습니다. 바턴 사장은 놀라면서 “아니 이보게, 자네는 그때 그 돈은 벌써 다 갚았지 않았는가? 뭘 또 갚아준다는 것인가?” 

그러자 스트로사가 대답합니다. 

“아닙니다. 그때 빌렸던 돈은 모두 갚았지만 그때 베풀어 주신 은혜는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결국 바턴 사장은 그 <스트로사>의 도움으로 다시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사람이 사람됨은 받은 은혜를 잊지 않는데 있습니다. 은혜를 망각하면 사람은 짐승보다 무서운 존재가 됩니다.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받은 자입니다. 그 은혜의 넓이와 높이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큰 은혜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어찌 우리가 구원받아 천국 백성이 될 수 있었습니까? 어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었습니까? 그저 은혜입니다. 헤아릴 수 없는 큰 은혜로 여기까지 온 것을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살아가기 힘든 분이 계십니까? 
혹시 살맛이 안 나고 하루하루 사는 것이 고역이라고 생각하는 분이 계십니까? 

그 원인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으나 가장 중요한 것은 받은 은혜를 망각하고 살기 때문입니다. 부모님의 은혜, 선생님의 은혜, 그리고 가족들의 사랑, 이런 것만 헤아려도 우리는 새 힘이 솟아나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 가지고는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는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나를 알고 계시고 나를 사랑하시고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분이 나를 창세전부터 알고 계시고, ‘나’라는 존재에 대한 위대한 계획을 갖고 계신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여기 서 있는 최 목사는 그 사실을 깨달은 후 인생관이 180도 바뀐 사람입니다. 

찬송가 310장을 아시지요?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 
내가 믿고 또 의지함은 내 모든 형편, 아시는 주님, 늘 보호해 주실 것을 나는 확실히 아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그 놀라운 은혜, 무엇으로 그 은혜를 표현할 길이 있겠습니까? 무엇으로 그 은혜를 갚을 길이 있겠습니까? 우리는 그저 은혜를 값없이 받은 자입니다. 

그러면 은혜를 받은 자로서 어찌 살아야 합니까? 방법은 하나입니다. 

그 은혜에 보답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은혜를 보답하는 방법은 뭘까요? 우리가 받은 은혜를 다른 사람에게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어떻게요?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보세요.   

본문의 등장하는 보아스라는 인물은 단순한 인물이 아닙니다. 이 사람은 은혜를 받은 자입니다. 이 사람은 구약성경에서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주는 그림자 역할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가 이방 여인인 룻에게 은혜를 베풀고 있습니다. 

그 여인은 오늘 우리를 상징합니다. 우리도 이방인이었고 소망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베푼 은혜는 어떤 은혜인가요?
그것은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와 같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도 그 은혜를 받은 자라면 우리도 보아스처럼 은혜를 베푸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은혜를 받은 자로서 다른 사람에게 어떤 은혜를 베풀어야 할까요? 
 

1. 은혜의 길로 인도해 주어야 합니다. 

13절 첫 부분을 보세요. 

13 룻이 이르되 내 주여 내가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오늘 본문에 룻은 은혜를 사모하는 자입니다. “내가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합니다” 
룻이 생각하기를 자기가 살길은 은혜를 입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은혜를 입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 은혜가 늘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 주변 사람들에게 어찌 해야 합니까? 그들에게 은혜의 길로 인도해 주어야 합니다. 
8절을 보세요. 

“보아스가 룻에게 이르되 내 딸아 들으라 이삭을 주우러 다른 밭으로 가지 말며 여기서 떠나지 말고 나의 소녀들과 함께 있으라”   

룻은 시어머니를 따라 베들레헴에 왔지만 앞날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이 가득차 있었을 것입니다. 아는 사람도 없고 친척과 친구가 없었습니다. 문화도 다르고 더욱이 이방인을 대하는 유대인들의 시선이 두려웠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에게는 누군가가 돕는 손길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살아갈 길을 도와주고 인도해 줄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의 발걸음을 인도하시어 보아스라는 사람을 만나도록 인도하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 보아스를 통해 도움을 받게 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 주변의 사람들은 누굽니까? 하나님이 그들을 왜 여러분에게 붙여 주셨나요? 그 이유는 그들을 통해 복을 누리게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여러분에게 붙여준 것은 그들이 복의 통로인 것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여러분을 힘들게 하는 원수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만난 돕는 손길임을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더 나아가서 잠언3:5-6절의 말씀을 잘 아시지요? 

5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6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이신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분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형통하게 되는 것을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도 우리 주변에 은혜가 필요한 자에게 주님의 은혜를 나누며 그들을 인도해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이 세상에 우리의 앞길을 아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 자신도 우리의 미래를 모르고 살아갑니다. 내 자신 조차도 내 앞길을 모르는데 어찌 내 인생은 내가 이끌어 갈 수 있겠습니까? 

어떤 교수님이 말하기를 우리가 우리 앞날을 단 5분만 미리 안다면 우리는 떼부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5분 앞에 뭔 일이 벌어질지 알면 주식을 통해 엄청난 부를 축척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단 한치 앞을 알 수 없습니다. 

왜 모르게 하셨을까요? 하나님만 의지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나의 갈 길을 인도해 주십니다. 

그러기에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보다 앞서서 행하시는 하나님이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우리의 삶을 인도해 주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도 우리 주변에 은혜를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그 주님을 만나도록 인도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보아스는 그 은혜를 룻에게 나눕니다. 그래서 그녀의 길을 인도합니다. 
“다른 밭으로 가지 말며 여기서 떠나지 말고 나의 소녀들과 함께 있으라” 

이것이 은혜 받은 자의 모습입니다. 
‘남이야 어딜 가든 뭔 상관이야. 나만 잘 먹고 잘살면 되지’하는 자는 은혜를 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내가 은혜를 받은 사람이라면 나도 남에게 은혜를 끼치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그러려면 그 사람을 은혜의 길로 인도해 주어야 합니다. 
  

2. 보호의 은혜를 베풀어 주어야 합니다.

보아스는 룻에게 일방적인 은혜를 베풀어 주고 있습니다. 

9 그들이 베는 밭을 보고 그들을 따르라 내가 그 소년들에게 명령하여 너를 건드리지 말라 하였느니라 목이 마르거든 그릇에 가서 소년들이 길어 온 것을 마실지니라 하는지라 

저는 이 구절이 마치 우리 주님이 나를 향해 주시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룻은 젊은 과부였습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보호받는 것입니다. 룻은 모압 여인입니다. 거기다가 남편도 없고 자식도 없는 여인입니다. 더욱이 유대인들이 멸시하는 모압 출신의 외국인이었습니다. 그런데다 가난하기 그지없는 형편의 여인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그에게는 무엇보다 보호의 은혜가 필요했습니다.   

더욱이 추수기에는 일을 마친 다음에는 모두가 술 한 잔 하며 취하고 흥겹게 지내기 때문에 힘없는 룻에게는 위험이 늘 따르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보호가 더욱 필요했습니다. 그러기에 보아스가 룻에게 말하기를 ‘내 일꾼들에게 너를 건드리지 말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그는 룻에게 마실 물도 마음껏 마시라고 합니다. 당시에 이것은 특혜입니다. 일꾼이 마실 물을 함께 마실 수 있는 특권을 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특별한 보호를 해주고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 보아스는 룻에게 든든한 보호자가 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의 보호자는 누굽니까? 제가 언젠가 병원을 갔더니 간호사가 보호자를 찾더라고요? 보호자 어디 있냐는 것입니다. 내가 나의 보호자라 했더니 아니랍니다. 

그때 조복희 라는 분이 제 보호자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세상 보호자는 세월이 흐르면 다 떠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이 우리의 보호자 되심을 믿습니까? 
그분도 우리가 마실 물을 넉넉하게 베풀어 주시는 분인 것을 믿습니까? 

주님은 우리의 선한 목자이십니다. 그는 졸지도 않고 주무시지도 않으시며 우리를 보호하시고 우리가 목마르지 않도록 우리를 잔잔한 시냇가로 인도해 주시는 선한 목자이심을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하셨습니다.   

성경을 읽다보면 수시로 볼 수 있는 구절이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 “내가 너를 지켜 주리라” 

그렇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언제나 나를 보호하고 계심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요 우리의 산성이 되셔서 우리를 항상 보호하심을 믿습니다.   

시편121편을 잘 아시죠? 

1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2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3 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4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5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여호와께서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6 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 
7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8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성도 여러분! 
이 시편 말씀이 저와 여러분에게, 그리고 우리 교회를 향하신 하나님의 약속이심을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문제는 우리 주변에는 이런 보호의 은총이 필요한 자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보호가 하나님의 은혜인줄 모릅니다. 그리고는 돈으로, 권력으로, 또는 건강으로 자기를 보호하려 합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그런 것으로 자신을 보호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주님의 보호하심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주신 보호의 은혜를 받은 우리, 우리도 그 은혜를 주변 사람에게 나누어 주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 주변에는 여러분이 보호해주어야 할 사람이 많습니다. 가깝게는 여러분 아내가 여러분의 보호를 필요로 합니다. 여러분의 남편이 여러분이 보호를 필요로 합니다. 여러분 자식도 보호대상입니다. 그들을 주의 사랑으로 돌보아 주셔야 합니다. 

그러나 거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힘들게 살아가는 우리 이웃들, 우리 땅에 들어와 힘들게 살아가는 외국인들, 그리고 선교지에서 목숨 걸고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님들, 그리고 죄가 무엇인지 심판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살아가는 불신자들과 선교지 백성들...... 이들을 누가 보호해 주어야 할까요? 

먼저 보호의 은총을 누리고 사는 우리가 베풀어야 할 것을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나도 살기 힘든데 남을 돕고 보호해 주어야 할 이유가 뭐냐고요?” 그것이 은혜에 보답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에 네게 복을 가져다주는 통로임을 믿어야 합니다. 

보아스가 룻을 보호하고 돌보았더니 그의 아내가 되고 그를 통해 그 가문을 믿음의 가문으로 만들고 그 가문에 다윗이라는 왕이 배출됩니다. 할렐루야!  


3. 위로의 은혜를 베풀어 주어야 합니다. 

룻은 보아스에게 ‘어째서 내게 이런 은혜를 주시느냐’고 질문을 합니다. 그때 보아스가 말합니다. 11~12절을 보세요. 

11 보아스가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네 남편이 죽은 후로 네가 시어머니에게 행한 모든 것과 네 부모와 고국을 떠나 전에 알지 못하던 백성에게로 온 일이 내게 분명히 알려졌느니라 

12 여호와께서 네가 행한 일에 보답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날개 아래에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하는지라   

무슨 뜻입니까? 

간단하게 말하면 네가 시어머니에게 행한 것, 그리고 부모와 고국을 떠나 이스라엘 땅으로 찾아 온 일에 대한 열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이 네가 행한 일에 보답하시길 원하며 하나님이 그의 날개아래 보호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을 주시길 원한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한번 상상을 해보세요. 사실 룻은 지쳐 있었습니다. 

온종일 노동에, 삶에, 생활고에 너무나도 피곤한 상태였습니다. 이 지친 룻에게 보아스는 위로의 말을 주었습니다. 룻이 보아스의 이 말을 듣고 어떤 위로를 받았을까요? 본문에는 기록이 없지만 아마도 룻은 이 말을 듣고 펑펑 울었을 것입니다. 

자기를 알아주는 분의 위로, 그 위로는 엄청난 힘을 주었을 것입니다. “저런 분이 나를 알아주다니...” 룻은 가슴 깊이 감사를 드렸을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마찬가지로 우리 주님도 우리를 알아주십니다. 우리가 주를 위해 수고하고 애쓰는 모든 것을 알아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도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의 날개 아래에서 상 받기를 축복하실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위로가 여러분에게 늘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때로 아무도 안 알아주는 것 같고, 홀로 외롭고 힘들어 주저앉고 싶을 때가 있을 것입니다. 교회일이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비판과 정죄는 날카로운데 칭찬과 위로는 작은 곳이 교회입니다. 정반대가 되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우리를 알아주시며 우리를 위로해 주시는 분임을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고후1:3~5절을 보세요. 우리 하나님이 위로가 어떤 가를 보여줍니다. 

3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4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5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그렇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위로의 하나님이십니다. 

환난 중에 있는 우리를 그냥 버려두지 않고 위로 하십니다. 우리에게 찾아 오셔서 격려하시고 우리를 위로하십니다. 그 위로가 여러분 한분 한분에게 넘치는 것을 믿으시길 축원합니다.   

성도 여러분! 
그러기에 주님으로부터 위로와 격려를 받은 저와 여러분! 
이제 우리는 우리 주변의 누군가를 위로하고 격려해야 합니다. 우리 입에서 나오는 말 한마디는 놀라운 힘을 만들어 냅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정치도 경제도 너무나도 힘든 시간들을 보내고 있습니다. 가정도 그렇습니다. 교회도 그렇습니다. 이 어려움이 언제 끝날지 모릅니다. 

그러면 누가 이 땅에 백성을 위로해 줄 수 있습니까?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있으면 위로가 됩니까? 다 잊어버리고 술 마시고 살면 위로가 됩니까? 

세상이 우리에게 무엇으로 진정한 위로와 기쁨을 줄 수 있을까요? 없습니다.   

세상의 위로자는 예수 그리스도시고, 그분의 은혜를 먼저 받은 저와 여러분이 세상을 위로 할 수 있는 위로자임을 믿으셔야 합니다. 그러기에 내가 남에게 위로도 받아야겠으나 이제 남을 위로하는 성도되기를 축원합니다.   

바라기는 이 피곤한 세상 속에서 진정한 위로와 격려가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여러분에게 있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그 위로와 격려를 힘입어 우리 주변에 소외되고 힘들어 하는 사람들을 위로하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소망을 주시고 우리에게 용기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를 통해 세상이 위로받고 소망의 빛이 비쳐지기를 원하십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보아스가 보여주는 예수님을 통해 이미 엄청난 은혜를 받은 자입니다. 그러기에 보아스가 룻을 인도하고 보호하고 위로 했듯이 우리도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주께로 인도하고 그들을 보호하며 주님의 사랑과 말씀으로 위로와 격려를 주는 성도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엄청난 사랑과 은혜를 받은 자는 자세가 달라야 합니다. 
이기적 신앙이 아닌 이타적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를 향한 주님의 간정한 바람이십니다. (최일환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