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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복있는 사람의 네비게이션 (시 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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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있는 사람의 네비게이션 (시 1:1-6)  

하나님의 말씀은 선포합니다. ‘인생은 똑같지 않다. 인생에는 두 갈래의 길이 있다.’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6절) 

하나님께 인정받는 인생이 있으며, 반대로 망하는 인생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열매맺는 형통한 인생이 있으며, 열매 없는 껍데기 인생이 있습니다. 복있는 사람과 복없는 사람, 의인의 길과 악인의 길을 갈라놓은 것은 무엇입니까? 복있는 사람은 다음과 같은 내비게이션이 있습니다.      

1. 빠름이냐, 바름이냐  (악인의 꾀 vs 여호와의 율법) ; 복의 안내(Guide)가 있다. 
 
복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1절 상). 악인들의 꾀는 무엇입니까? “빨리 가는 것이 좋은 것이다.” 악인들은 빨리 가자고 합니다. 빨리 갈 수 있다고 합니다. 자기가 빠른 길, 지름길을 알고 있다고 합니다. 악인들의 소리가 들릴 때 사람들이 달려가는 이유가 무엇인가? 이러다가 나만 뒤처지는 건 아닌가? 두려움이 몰려옵니다. 불안합니다. 악인들은 속도를 초과하게 하고 신호도 무시하게 합니다. 결국 정도를 벗어나게 해서 망하게 합니다. 빨리 간 것 같다고 착각하지만 결국 제자리로 돌아오게 합니다. 

여러분, 누가 인생의 목적과 목표가 빨리 가는 것이라고 했습니까? 속지 마십시요. 악인들의 소리이다. 그럼 느리게 가야 합니까? 느리고 빠르고 중요하지 않습니다. 빠름, 빠름, 빠름이 아니라 바름이 중요합니다. 빨리 가려고 하지 말고, 제대로 가야합니다.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2절) 

악인들의 꾀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것이 복있는 안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초시계를 들고 계시지 않고, 성경을 들고 계십니다. 주위의 사람들이 얼마나 빨리 가든, 최첨단으로 가든 상관없습니다. 빠르냐 느리냐 경쟁하고 키 재는 속도싸움에 우리는 상관없습니다. 나는 바르게 갑니다. 우리에게는 바른 소리가 있습니다. 내가 속도위반하고, 신호 지키지 않고, 정도로 가지 않을 때 나에게 경고해주시는 바른 소리가 있습니다. 그 복 여러분은 있으십니까? 
  

2. 다수냐, 예수냐  (죄인의 길 vs 의인의 길) ; 복의 방향(길)이 있다.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1절 중). 

길(way)이란 무엇입니까? 길은 목적지에 다다르게 하는 과정입니다. 길이 길을 선택하지 않고 목적지가 길을 선택합니다. 그러므로 죄인의 길, 의인의 길의 문제는 길의 문제가 아니라 목적지의 문제입니다.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 (잠 16:25) 

우리는 길을 잘 선택해야 합니다. 즉 목적지를 잘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죄인들의 길은 무엇입니까? 다수의 길입니다. 세상은 다수가 가는 길이 옳은 길이라고 합니다. 본문은 죄인들의 길을 ‘바람에 나는 대로 가는 길’이라고 표현합니다. 

누가 인생의 목표가 덜 고생하고 편안하게 가는 것이라고 그랬습니까? 하나님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고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 7:13~14)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넓은 길로 왜 따라갈까요? 반대로 가면 주목받지 못하는 길이니까. “이 길 아닌가? 나만 왜? ” 그럼 다수는 죄인의 길이니 소수로 가면 되겠습니까? 아닙니다. 숫자의 문제가 아닙니다. 다수냐 소수냐는 신앙에 있어서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길은 무엇인가? 바로 예수입니다. 우리의 목적지는 하나님입니다. 우리의 인생의 끝에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목적지를 하나님으로 잡을 때 길은 정해집니다. 주목하건, 주목하지 않건, 다수건 소수건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길로 갑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하나님으로 가는 길, 오직 예수입니다. 세상은 다수의 길을 따르지만, 복있는 우리는, 의인인 우리는 다수가 아닌 소수도 아닌 예수의 길을 따릅니다. 그 복 받았습니까? 


3. 특혜냐, 은혜냐 (오만한 자들의 자리 VS 시냇가) ; 복의 위치(자리)가 있다.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1절 하) 자리(seat)는 어떤 위치, 범위를 나타냅니다. 오만한 자들의 자리란 어디입니까? 높은 자리입니다. 

세상의 생각은 이렇습니다. “높은 자리가 성공한 것이다.”오만한 자의 자리는 남을 부리는 자리입니다. 남을 무시할 수 있는 자리입니다. 세상의 성공이란 특혜 받는 자리이며 남과 구별된 대우를 받는 자리입니다. 그러나 이런 자리는 겨처럼, 껍데기처럼 바람 한 번 불면 한 순간에 날아가 버리는 것입니다. 허상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왜 말씀과 하나님을 포기하면서까지 이 자리를 탐합니까? 남에게 무시당하는 건 절대 못 참기 때문입니다. 남에게 무시당하는 것보다 신앙을 타협해서라도 남을 밟을 수 있는 곳을 택합니다. “누가 손에 물 안 묻히고 신발에 먼지 하나도 안 묻히고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이라고 그랬습니까?” 세상의 속임수입니다. 

그럼, 세상에서 높은 자리가 아닌 낮고 천한 자리만 가라는 이야기인가요? 그것과 상관없습니다. 높고 낮음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구해야 할 자리는 은혜의 자리입니다. 우리가 지켜야 할 자리는 말씀이 들리는 자리입니다. 3절의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의 시냇가처럼 하나님의 은혜가 늘 공급되는 자리가 우리의 자리입니다. 

영적인 GPS가 잡히는 자리가 어디입니까? 예배의 자리입니다. 예배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게 됩니다. 말씀이 들리는 범위가 우리의 자리입니다. 5절에 ‘의인들의 모임’이 바로 교회입니다. 우리가 지킬 자리는 말씀이 들리는 자리, 말씀이 즐거운 자리, 예배의 자리. 자신을 부인하며 하나님을 높이는 자리입니다. 이것이 성공이며 복입니다. 
  
복있는 아름다운 성도 여러분! 복있는 사람이란 말씀있는 사람입니다. 복은 말씀입니다. 말씀은 예수님입니다. 따라서 복은 예수님입니다. 복있는 사람이란 예수있는 사람입니다. 예수의 사람이 복있는 사람이며, 의인입니다. 예수의 사람만이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영원히 우리를 인도하신다고 약속합니다. 예수님을 내 영혼의 인도자로, 말씀을 내 삶의 내비게이션으로 삼은 아름다운 성도, 바로 그대가 복있는 사람입니다. 아멘 (권오성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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