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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누구를 위한 서원입니까? (삿 11:2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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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를 위한 서원입니까? (삿 11:29-40)

거래를 할 때 한쪽에서 먼저 offer를 하면 상대방은 거기에 대한 counter offer를 합니다. 사는 쪽에서는 가능하면 싸게 사려고 하고 파는 쪽에서는 가능하면 비싸게 팔려고 합니다. 사는 쪽에서 너무 무리하게 깎으려 하든지 이것을 놓치면 다시는 이런 것을 구할 수 없다 하여 지나치게 조바심을 내면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 수 없습니다. 

반면에 파는 쪽에서 좀 더 받겠다고 배짱을 부리며 들어온 offer들을 거부하다가 결국은 팔지 못하고 나중에는 경기 후퇴로 인하여 그 물건마저 그냥 날리는 경우도 보았습니다. 같은 물건이라도 사는 사람에게 유리한 상황인지 파는 사람에게 유리한 상황인지에 따라 가격은 달라집니다. 

아마 이 자리에 계신 분들도 집이나 사업체를 사고 팔 때 밀고 당기는 협상을 하셨을 것입니다. 새 예배당을 마련하는 과정에서도 나름대로 우여곡절도 있었지만 이제 에스크로가 오픈이 되었고 이번 주에 시청에 conditional use permit을 신청합니다. 새 예배당을 마련하는 과정이 순적하게 진행되도록 계속해서 관심을 갖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사사기 11장은 입다가 세 번에 걸쳐 협상하는 과정이 언급됩니다. 길르앗 장로들과의 협상, 암몬 왕과의 협상, 그리고 본문에 나오는 하나님과의 협상입니다. 앞의 두 협상을 이끌었던 입다는 마지막 협상만 잘 해서 원하는 결과를 얻기만 하면 지긋지긋했던 과거를 멀리하고 미래의 성공이 보장된 삶을 살 것 같았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하나님의 관심을 끌만한 화끈한 조건을 제시해야 한다는 것이 입다의 생각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런 상황에 부딪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가 사용하는 방법을 기뻐하실까요? 함께 살펴보면서 각자의 경우에 적용하시기 바랍니다.


사람들과 협상하는 입다

본문에 기록된 이야기의 시대적 배경은 주전 1100여년경의 이스라엘입니다. 10장 6절에 보면 이스라엘이 섬긴 신들의 이름이 열거됩니다: 바알, 아스다롯, 아람 신들, 시돈 신들, 모압 신들, 암몬 신들, 블레셋 신들. 지리적으로 볼 때 아람과 시돈은 북쪽에 위치하고 모압과 암몬은 요단강 동편에 위치하며, 블레셋은 남서쪽에 위치합니다. 즉 이스라엘은 사방의 신들에게 둘러싸인 상태였습니다. 

하나님은 진노하셔서 동편에서는 암몬, 서편에서는 블레셋의 공격을 받게 하셨습니다. 특히 암몬 족속은 이스라엘을 무려 18년 동안 핍박하였고 심지어 요단강을 건너와 괴롭히기도 하였습니다. 

고난 속에서 이스라엘이 ‘우리가 당신께 지를 지었나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들을 섬겼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죄에 대한 인식은 있으나 하나님의 용서를 위한 간구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중심을 보시고 “가서 너희가 선택한 신들에게 부르짖어 고통의 때를 구원하게 하라”(10:14)고 조롱하십니다. 

이스라엘은 계속 하나님께 구원을 요청합니다. 뺀질뺀질한 이스라엘은 맞아도 싸지만 그들의 고통을 보시던 하나님은 ‘근심하셨다’고 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그들의 고통을 더 이상 볼 수 없어 비통해하신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향해 가지시는 마음입니다. 

그러던 중 암몬 족속이 길르앗 지역을 침공하자 길르앗 장로들은 여호와께 묻지 않고 누군가 자신들을 위해 싸워줄 사람을 찾았습니다. 그 사람을 머리로 삼겠다고 합니다.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자 장로들은 입다를 찾아갑니다. 입다는 길르앗과 기생 사이에 태어난 큰 용사입니다. 그런데 길르앗의 아내도 아들들을 낳았습니다. 정실 소생들은 입다가 아버지의 기업을 이을 수 없다고 쫓아내었습니다. 입다는 분노와 원한을 품고 그 땅에서 쫓겨나 아람 지역인 돕 땅으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입다는 잡류들의 우두머리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입다가 길르앗 장로들과 협상을 벌입니다. 장로들이 먼저 입다에게 자기들의 장관이 되어 달라는 제안을 합니다. 지금은 매물이 부족한 seller market 상황입니다. 입다가 버팁니다. 나를 미워하여 쫓아낼 때는 언제이고 이제 환난을 당하였다고 찾아왔느냐고 하면서 그 제안을 넌지시 거부합니다. 다급해진 장로들은 입다를 자신들의 머리로 삼겠다며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합니다. 그러자 입다의 마음이 끌립니다. 계약 조건을 꼼꼼이 살핍니다. 자기가 싸움에서 이기면 과연 그들의 머리가 되는지 재차 확인합니다. 

장로들은 여호와가 증인이라고 하면서 약속이행을 다짐합니다. 협상이 마무리됩니다. 입다가 미스바에서 이 말을 여호와께 아룁니다. 평소에는 믿음으로 행동하지 않는 사람들이 협상을 할 때는 수시로 여호와를 들먹이면서 경건한 척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행동을 보실 때 얼마나 가소로우시겠습니까? 우리가 이스라엘 사람들을 탓하지만 알게 모르게 우리도 그들처럼 행동할 수 있습니다. 

암몬 군대를 눈앞에 두고 입다는 먼저 협상을 시도합니다. 암몬왕은 이스라엘이 아르논에서 얍복과 요단까지의 땅을 취했기 때문에 그 땅을 돌려달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입다는 그 지역은 역사적으로 암몬의 땅이 아니라 원래 아모리인의 땅이라고 하면서 암몬 왕의 주장은 근거가 없는 것이라고 합니다. 또한 그 지역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것이기에 당연히 이스라엘 땅이라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그 땅이 암몬 땅이라면 왜 300년 동안 찾지 않다가 이제 와서 그러느냐고 반문합니다. 마치 일본이 독도는 자기 땅이라고 우기는 것과 같습니다. 입다는 평화적으로 해결하려 했으나 암몬 왕은 막무가내로 나와 협상은 실패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입다 편에서는 손해날 것이 없는 협상이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입다가 힘은 좀 쓰지만 무식한 불량배들의 두목이 아니라 역사적 식견과 여호와 신앙을 가진 지도자라는 인상을 사람들에게 강하게 심어주었습니다. ‘사사 되신 여호와께 판결하소서’ 라고 호소함으로 암몬과의 전쟁에서 이긴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입다를 위하여 일하신 것이 되이 입다의 입지는 더욱 견고해지는 결과가 되게 합니다.   
 

하나님과 협상하는 입다 

본문은 여호와의 신이 입다 위에 임하신 것으로 시작합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고통을 차마 못 보시던 여호와의 개입입니다. 암몬은 이스라엘의 징계를 위하여 하나님이 사용하신 도구이기에 사실 입다가 협상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개입만이 문제 해결의 열쇠입니다. 입다가 길르앗 장로들과의 협상에 의해 세워진 리더이지만 여호와는 그의 백성을 긍휼히 여기시고 그의 신을 입다 위에 내리십니다. 

사사기에서 반복하여 보게 되는 일은 사사들이 전쟁에 나가기 전에 성령이 임하시는 체험을 하는 것입니다. 구약성경 중에 사사기만큼 빈번하게 성령의 기름부음과 역사에 대해 말씀하는 책이 없습니다. 사사들은 자기 힘으로 나가 싸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성령의 능력이 임하기 전에는 그들 역시 능력 면에서 다른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그들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입다는 암몬 자손들의 영토 깊숙이 치고 들어가 그 나라의 주요 지역들을 점령하고 결국 암몬 전체의 항복을 받아 내는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복이나 귀중한 선물을 주실 때 그것을 자신의 믿음이 좋았다든지 내가 기도했으니까 하며 당연한 결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그 좋은 것을 주시려고 이미 작정하셨고 나의 상태나 믿음과 상관없이 그 작정한 일을 실천하신 것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큰 이김을 주셨을 때, 그 모든 것이 나의 공로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결과임을 깨닫고 감사해야 하며 더욱 겸손해야 합니다.

그러나 입다의 승리는 또 한편으로는 비극의 시작입니다. 입다가 전쟁을 마치고 평안히 돌아올 때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를 여호와께 번제로 드리겠다’고 서원했습니다. 왜 하나님께 서원을 했을까요? 암몬이 강한지라 자칫하면 질 수도 있다는 불길한 생각과 인생역전을 이룰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 없다는 강박관념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큰 것을 요구하는 만큼, 자신도 큰 것을 걸겠다며 승부사의 기질을 가지고 하나님과 협상하려 하였습니다. 서원이 없었다면 29절에서 32절로 내용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면서 입다는 승리를 하나님의 선물로 감사히 받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드린 서원 때문에 입다의 승리는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선물이 아니라 거래의 대가처럼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여호와의 영이 임한 사사가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것이 당시 이스라엘의 영적 수준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서원과 상관없이 자기의 일을 이루어내십니다. 입다는 서원을 하기보다 자신이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사람이며, 하나님의 성령이 함께 하시는 이상 어떤 적이라도 물리칠 수 있다는 것을 믿었어야 합니다. 


협상의 후유증 

입다는 승리를 거머쥔 채 영웅이 되어 길르앗으로 돌아 왔습니다. 길 가에 많은 사람들이 ‘입다 장군 만세’ 하며 대대적인 환영을 하였을 것입니다.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있다고 기생의 아들로 태어나 천덕꾸러기로 자라온 과거를 멀리하고 이제부터 길르앗의 머리로서 펼쳐질 장밋빛 미래를 꿈꾸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입다가 미스바에 있는 자기 집으로 돌아올 때 제일 먼저 그를 맞으러 나온 것은 그의 무남독녀였습니다. 

히브리어 원문에는 ‘그녀는 그의 유일한 자녀였다. 그녀 외에는 그에게 아들도 딸도 없었다’고 자세히 설명되어 있습니다. 입다는 딸을 본 순간 하나님께 서원한 것이 생각났습니다. “너는 나를 괴롭게 하는 자중의 하나로다”라는 표현은 딸의 죽음 때문에 괴로워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묘사한 것이 아닙니다. ‘괴롭게 하다’라고 번역된 히브리 단어는 대부분 이스라엘 공동체나 한 집안을 멸망하게 만드는 행동을 묘사하는데 사용됩니다. 따라서 입다는 딸의 죽음보다 자신의 집안의 대가 끊기게 된 것 때문에 더 괴로워합니다. 

입다는 하나님이 주신 승리의 날에 자신의 서원에 발목이 잡혀 슬퍼하고 비통해합니다. 사령관이 이렇게 비통해 하는데 누가 기뻐할 수 있겠습니까? 갑자기 모든 백성은 패배라도 당한 듯이 입을 다물고 슬금슬금 흩어졌을 것입니다. 입다가 하지 말았어야 할 서원을 하는 바람에 18년의 압제에서 해방되는 기쁨을 나누어야 할 시간이 처녀의 임박한 죽음을 슬퍼하는 시간으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입다는 “내가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열었으니 능히 돌이키지 못하리로다”하며 하나님을 원망하는 듯한 말을 합니다. 그런데 입다의 딸은 놀라운 믿음의 소유자입니다. 아버지의 서원을 그대로 행하라고 합니다. 생명이 걸린 일인데 어떻게 자기 의사와 상관없이 결정하였느냐고 입다의 딸은 아버지에게 따지지 않았습니다. 

입다의 딸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놀라운 승리를 주심으로써 전부 죽어야 할 상황에서 살려 주셨으니 감사하면서 자기가 기꺼이 죽겠다고 합니다. 다만 처녀로 죽음을 슬퍼할 수 있도록 두 달의 여유만 달라고 부탁합니다. 뛰어난 언변으로 성공가도를 달렸던 입다가 딸에게 한 마지막 말은 단 한 마디. “가라.”

그 외에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겠습니까? 모든 생명이 다 아깝고 귀하지만 아리따운 처녀가 결혼도 못한 채 죽는다는 것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입니까? 그 딸은 두 달 동안 산에서 친구들과 애곡하다가 돌아와 죽임을 당했습니다. 자식이 죽으면 부모는 가슴에 묻는다고 하는데 자기에게 기쁨을 주던 외동딸이 죽었을 때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요? 


서원의 바른 의미

원래 서원이란 감사제의 일종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감사해서 그것을 헛되지 않기 위해 자신이 누리고 있는 행복의 일부를 포기하거나 어떤 희생을 감수하기로 하나님께 자진해서 약속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입다는 은혜에 대한 감사로 드려야하는 서원을 조건부 약속으로 변질시켰습니다. 상황이 다급하고 해결의 가능성은 전혀 보이지 않을 때, 사람들은 마치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서원을 합니다. ‘하나님, 이 문제를 해결해주시면 내가 무엇을 바치겠습니다. 내 자식을 목회자로 드리겠습니다.’ 하는 식으로 조건부 약속을 내겁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마 6:8) 하시면서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십니다. 하나님은 기도하지 않아도 우리의 사정을 아십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기도할 때 주십니다. 

그분은 우리와 더불어 기도를 통하여 교제를 갖기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조건을 달지 않아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 주기를 기뻐하시며 우리를 어려움에서 건져 주기를 기뻐하십니다. 그런데 불신앙 때문에 어떤 조건을 내걸게 되면, 하나님이 응답하신 후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기뻐하기보다 도리어 그 서원이 올무가 될 수 있습니다. 

입다는 하나님께 한 서원을 지켜야 했을까요? 하나님께 드린 서원은 무리한 것이라 해도 꼭 지켜야 하나요? 서원에 대한 바른 자세는 무엇입니까?

1) 서원보다 믿음이 먼저입니다 

입다에게 하나님의 신이 임한 것은 이제부터 하나님께서 입다를 통해 일하겠다는 사인입니다. 입다는 자신의 능력이나 경험에 많고 적음에 상관없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며 그분의 순종하며 하나님이 베푸시는 승리를 믿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입다를 도우시기로 이미 작정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입다는 여호와께 서원했습니다. 

그러다보니 하나님 앞에 기뻐 뛰며 영광을 돌려야 할 승리의 날에 오히려 비통한 눈물을 흘려야 했습니다. 아무리 어렵고 힘들고 절박한 순간을 만난다 해도 조용히 하나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시 62:5). 하나님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은혜를 베푸십니다. 서원을 자기 욕심을 이루기 위한 거래로 전락시켜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택함을 받고 예수님의 보혈로 구속함을 얻은 하나님의 백성임을 확신하며 서원이 아니라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2) 하나님의 뜻대로 서원을 지켜야 합니다 

만약 하나님께 서원한 것이 있다면 일단 약속대로 지켜야 합니다. 처음에는 간절하게 하나님께 서원하고 기도했는데 막상 일이 해결된 후에 약속대로 행하는 것을 주저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로 서원했다면 때론 힘들어도 힘써 지켜야 합니다. 물론 서원 자체를 무조건적으로 지키는 것만이 하나님의 뜻은 아닙니다. 입다처럼 사람을 제물로 바치겠다고 서원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 무관합니다. 그런데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서원을 했다고 생각되거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회개하시고 새로운 출발을 하기 바랍니다.

살아가면서 많은 결정을 해야 합니다. 많은 경우 1+1=2처럼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선택을 하기 어렵습니다. 또한 선택은 선택으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한 선택의 열매를 자기가 거두어야 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그릇된 선택을 인하여 두고두고 후회를 하거나 큰 후유증으로 인하여 고통을 당하기도 합니다. 입다처럼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행한 결과가 얼마나 비참합니까? 그 슬픔이 입다와 그의 딸뿐만 아니라 친구들과 이스라엘 전체에 퍼졌습니다. 반면에 잘된 선택을 하면 두고두고 유익한 열매를 거두게 됩니다. 

그렇다면 무슨 일을 앞두고 있거나 혹은 범사에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우리의 자세는 어떠해야 합니까? 

1) 하나님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본문을 읽다보면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서원을 지키기 위해 딸을 번제로 드리는 것보다 취소하는 것이 더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행위가 아닐까? 하나님은 왜 입다의 서원을 막지 않으셨을까? 입다는 열정도 식견도 리더십도 있었고 하나님과의 약속도 지켜야 한다는 믿음도 있었지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제대로 몰랐습니다. 하나님은 믿고 따르고 순종하고 신뢰할 분이시지, 거래의 상대가 아닙니다. 

입다의 스토리에서 하나님은 시종일관 침묵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침묵 가운데서도 말씀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침묵이 주는 교훈을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한 번도 사람을 제물을 드리라고 명령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것은 당시 고대 근동에서 성행하던 풍습일 뿐인데 입다가 알게 모르게 그 영향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하셨으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에 수양으로 대신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수양도 나타나지 않았고 천사도 입다를 말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침묵으로 일관하시면서 이 딸의 희생을 허락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습니까? 아브라함은 미음의 조상이고 입다는 기생의 아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사람 차별하시나요? 아브라함의 경우는 그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번 경우는 다릅니다. 하나님이 입다를 시험하신 것이 아니라 입다가 하나님을 시험했습니다. 입다는 자기의 이기적 욕망을 채우기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고 인간의 생명까지도 담보로 행하려고 하였습니다. 자기의 목적만을 이루기 위한 무분별한 서원과 약속은 자신은 물론이고 타인에게도 큰 아픔과 비극을 초래할 수 있음을 경고합니다. 그리고 입다의 딸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이스라엘 땅에서는 인신 제물이 드려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경고합니다.


2) 하나님을 올바른 방법으로 섬겨야 합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하는 것입니다. 자기 멋대로 자기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을 섬겨서는 안 됩니다. 절박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고 싶은 마음에서 서원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기도들이 이루어지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나 그런 경험이 신앙의 표준은 아닙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을 섬기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으로 영광과 존귀를 받으시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입다는 목적을 이루려는 조금함 때문에 무리수를 두었습니다. 사람의 생명을 거래를 위한 조건으로 만들고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행동했습니다. 

참된 신앙은 잘못된 관습이나 동기로부터 벗어나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올바르며 하나님이 기뻐하실 만한 것을 추구해야 합니다. 매순간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 무엇에도 맹세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늘 하나님 앞에 신실하게 살아가며 사람들에게 슬픔이나 부담이 아니라 기쁨을 주는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사사기에 나오는 입다의 스토리를 통하여 입다의 모든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스토리가 지금도 기록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스토리를 읽는다면 어떠한 느낌을 갖겠습니까? 여호와의 전쟁이 있고 기드온의 전쟁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하면서 실상은 자기를 위한 싸움을 싸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를 드러내고 자기 유익만을 찾으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는 누구를 위한 싸움을 싸우고 있는지 점검해보아야 합니다. 서원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서원이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그 서원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납니까? 자기의 야망을 실천하기 위한 수단으로 하나님과 협상을 벌이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은 오늘도 불꽃같은 눈으로 우리의 중심을 보십니다. 입다의 스토리는 자기의 이기적 욕망을 채우기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려는 어리석은 자들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킵니다. 무분별한 서원과 지나친 자기주장은 자신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들에게 아픔을 주고 상처를 남긴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성지 순례를 다녀온 어떤 목사님이 길르앗을 가보니 그 동네 사람들이 아직까지도 그 처녀를 기리고 있다고 합니다. 입다의 딸의 죽음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가슴 속에 입다의 승리보다 더 진한 감동을 남겼습니다. 그들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은 딸의 죽음을 통해 자신들을 돌아보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입다는 자신의 집안이 사라지는 것 때문에 괴로워했지만 그의 집안은 딸의 죽음을 통해 이스라엘 가운데 대대로 기념되는 복을 누립니다. 죄가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까? 바로 우리의 죄 때문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다시 사셨습니다. 그분의 순종이 없었다면 우리는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습니다. 우리도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영생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기쁨으로 섬겨야 합니다. 

우리만 구원받아 부활에 참여하게 된 것으로 만족할 것이 아니라 부지런히 우리의 이웃들도 이 귀한 복을 받도록 전해야 합니다. 죽고 썩을 육신만을 위하여 관심을 갖지 말고 영원을 위하여 투자를 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어야 합니다. 문제가 있을 때 두려워말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잠잠히 기다려야 합니다. 아쉬울 때만 찾는 주님이 아니라 날마다 그분과 다이나믹한 관계를 가지며 하나님을 알고 그분의 뜻을 바로 알고 하나님의 싸움을 싸우며 주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열매를 맺으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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