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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고난을 이해하고 믿음의 반응을 보이라 (욥 5: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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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을 이해하고 믿음의 반응을 보이라 (욥 5:7-8)
   
우리는 다른 사람은 별 고난 없이 세상을 사는데 나만 어려움이 많은 것처럼 생각될 때가 있습니다. 이런 생각이 들 때 우리의 고통은 더 커지는 것입니다. 거기다가 나는 믿음으로 열심히 사는데 고통 속에 있고 어떤 사람은 엉망으로 사는데도 큰 어려움 없이 살아가는 것 같이 보일 때 우리의 고통은 더 크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 깊이 들여다보면 고난이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인생은 고해(苦海)라고 하는 것입니다. 물이 없는 바다는 없습니다. 물이 없다면 거긴 이미 바다가 아닙니다. 고난 없는 인생은 없습니다. 고난이 없다면 그 사람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표현을 하지 않아서 그렇지 누구나 고통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시 중에 도종환 시인의 ‘흔들리며 피는 꽃’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 이 세상 그 어떤 꽃들도 / 다 흔들리며 피었나니 /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꽃이 바람에 흔들리고 비에 젖는 것처럼 인생은 고난에 흔들리며 눈물에 젖으며 성장하는 것입니다.
   
본문은 고난 중에 있는 욥을 찾아온 친구 중에 엘리바스라는 친구가 욥에게 한 말입니다. 7절에서 엘리바스는 욥에게 “사람은 고생을 위하여 났으니 불꽃이 위로 날아가는 것 같으니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사람은 고생을 위하여 났다는 말입니다. 불꽃이 위로 날아가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인생에 고난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의 자녀 중에 세상에 태어날 때 “하하하”하고 웃으면서 태어난 자녀가 있으면 손 들어보세요. 아무도 없습니다. 아기는 세상에 태어나면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울음을 터트리는 것입니다. 천진난만한 아기도 세상에 태어나면서 고통을 겪으며 태어나는 것입니다.
   
오늘 설교는 고난의 종류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세 부분으로 나눠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는 신자의 고난입니다. 둘째는 불신자의 고난입니다. 셋째는 신자와 불신자가 공통으로 겪는 고난입니다.

1. 신자의 고난 
   
신앙생활을 하면 고난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은 내려놓으십시오. 믿음생활을 잘해도 고난이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 보시기에 합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의 인생은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우리도 신앙생활을 잘해도 고난을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고 고난을 믿음으로 이겨내기를 바랍니다.

1) 징계로 인한 고난 
   
여러분! 우리가 자녀를 키우면서 자녀가 잘못을 해도 가만히 내버려두면 어떻게 될까요? 자녀를 징계하지 않고 키우면 그 자녀는 안하무인이 되는 것입니다. 안하무인(眼下無人)이 무슨 뜻입니까? 사전적인 의미를 보면 눈 아래에 사람이 없다는 뜻으로, 방자하고 교만하여 남을 업신여김을 이르는 말입니다. 징계 없이 자식을 키우면 자식 망치는 것입니다.
   
요즘 학교에서 체벌을 없애버렸는데 저는 그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잘못된 교육이 아이들을 망치는 것입니다. 성경 잠언 13:24에서는 “매를 아끼는 자는 그의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징계하지 않는 것은 자식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자식을 사랑하면 매를 들어야 합니다. 지나친 징계는 독이 되지만 적당한 징계는 보약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이런 관계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잘못된 길로 가면 사랑의 매를 드시는 것입니다. 히 12:6에 보니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징계로 인한 고난을 받을 때는 징계의 목적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가 무슨 잘못을 해서 징계를 받는지 파악하시고 신속히 잘못된 부분을 회개하고 수정하시길 바랍니다. 그럼 징계는 사라지는 것입니다.

2) 연단과 훈련으로 인한 고난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들을 훈련하시고 연단하십니다. 목적은 예수님을 닮게 만들고 하나님의 일을 하기에 합당한 그릇으로 준비시키기 위함입니다. 연단과 훈련은 우리의 믿음을 강하게 만들어주고 결국은 하나님의 복을 받게 만드는 것입니다.
   
신 8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 40년 동안 연단하시고 훈련시키셨습니다. 신 8:16에 보니 연단과 훈련의 목적을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고 말씀합니다. 마침내 복을 주시기 위해서 연단과 훈련을 통해서 고난을 겪게 하시는 것입니다.
   
세계지도를 펴놓고 보면 희한하게 북쪽 추운지방에 사는 사람들이 장수한다고 합니다. 추위를 통해서 강해지기 때문입니다. 추위를 겪으면서 몸도 정신도 강해지는 것입니다. 더운 지방에 사는 사람들의 평균수명은 고작 50세 정도입니다. 좋은 환경이 사람을 무력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연단과 훈련은 잘 인내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양으로 자신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조각가가 정과 망치를 가지고 아름다운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 바위를 칩니다. 언제까지 바위를 칠까요? 조각가가 원하는 모양이 만들어질 때까지입니다. 우리의 연단과 훈련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이 될 때가지 입니다. 그러므로 연단과 훈련을 받는 사람은 환경의 변화보다 자신의 변화에 집중해야 합니다.

3) 시험으로 인한 고난 
   
저는 가끔 시험 없는 교회를 꿈꾸기도 합니다. 교인 한 사람이 교회에 들어와서 주님 앞에 부름을 받을 때가지 문제도 없고 고난도 없고 시험도 없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시험 없는 신앙생활은 없습니다. 신앙생활은 시험의 연속입니다. 학교를 다니는 동안은 계속해서 시험을 치러야 하는 것처럼 신앙생활 하는 동안 시험은 계속되는 것입니다.
   
다양한 시험이 있지만 여기서는 신자의 고난과 관련해서 몇 가지 시험을 말씀드리겠습니다.
   
① 욕심으로 인한 시험
   
신자들이 겪는 고통의 원인 중에 하나가 욕심입니다. 마음에 욕심은 큰데 현실이 따라주지 않을 때 내적인 고통이 있습니다. 욕심과 현실 사이의 괴리 때문에 겪는 고통입니다.

성경 약 1:15에서는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인류의 타락은 선악과에 대한 욕심 때문이었습니다. 그 욕심 때문에 땅에서 가시와 엉겅퀴가 나오게 되었고 인류는 고통을 당해야 했습니다.
   
② 마귀의 공격으로 인한 시험
   
마귀는 성도들을 공격하는데 핍박이라는 방법을 사용합니다. 초대교회는 극심한 핍박으로 고난을 당했습니다. 중국교회도 문화혁명 이후에 엄청난 핍박으로 고난을 당했습니다. 북한 교회 역시 마찬가지이고 이슬람권에 있는 교회들 역시 핍박을 받고 있습니다.
마귀가 신자를 공격하여 고난을 겪게 하는 것은 핍박 외에도 많습니다. 마귀는 질병으로, 가난으로, 인간관계의 문제로, 환경적인 문제 등으로 신자를 공격합니다.
마귀의 다양한 공격으로 신자들에게 고난이 있지만 그래도 감사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런 모든 고난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어느 지역에 산양이 떼를 지어 살았습니다. 산양이 살다보니 산양을 먹이로 하는 늑대나 여우와 같은 맹수도 많았습니다. 지역 주민들이 볼 때 맹수가 너무 많아 산양의 수가 줄어드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산양을 보호하기 위해 사냥꾼들을 초청하여 맹수들 잡아 죽였습니다. 그러자 양들의 피해는 줄어들었습니다. 만족한 결과가 나타난 것입니다. 그런데 얼마 후 겨울에, 그렇게 춥지도 않았는데 많은 양들이 얼어 죽어버리는 일이 생겼습니다. 이유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생태학자들의 와서 조사한 후에 이유가 밝혀졌습니다. 늑대나 여우같은 적이 없어지자 산양들은 긴장이 풀려서 저항력이 약해졌다는 것입니다. 맹수가 옆에 있을 때 양들이 강인해져서 웬만한 추위를 이길 수 있었으나 천적이 사라지자 저항력이 줄어들어 추위에 죽어갔다는 이야기입니다. 산양을 공격하는 맹수들이 산양들의 적 같았지만 오히려 맹수들 때문에 산양들이 건강했던 것입니다. 마귀의 공격도 마찬가지입니다. 마귀가 다양한 방법들을 동원하여 신자들을 괴롭히지만 결국 하나님은 그것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것입니다.
   
③ 하나님의 테스트로 인한 시험
   
제가 군생활을 할 때 자대 배치를 받기 까지 11번의 신체검사를 받았습니다. 저는 그렇게 많은 신체검사를 통과하고 그 부대에서 근무하기에 합당하다는 판정을 받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하시기 전에 우리를 테스트하십니다. 그 테스트는 우리에게 고난이지만 반드시 필요한 과정입니다. 우리가 그 테스트를 통과하면 하나님께 쓰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테스트 하셨습니다. 100세에 얻은 아들 이삭을 모리아산에서 제물로 드리는 테스트였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시험에 통과해서 하나님께 인정을 받았습니다. 창 22:12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테스트에 통과한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입장이 돼서 생각을 해보면 하나님께 시험 받던 3일은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이 죽어도 살 것이라는 믿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아들이 죽음을 통과해야 하는 것을 알았기에 그 3일이 고통의 시간이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테스트 받은 것입니다.

4) 자원함으로 받는 고난 
   
하나님의 부르심에 자원하여 고난을 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사야서 6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사 6: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물음에 이사야 선지자가 대답했습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이사야 선지자는 자원하여 선지자가 되었고 선지자의 길을 가면서 많은 고난을 겪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자원하여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육신 하시고 인간의 몸을 입고 33년간 이 땅에서 사셨고 마지막에는 십자가를 지시고 고통당하셨습니다. 주님의 고난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자원하신 고난입니다.
   
교회생활을 하다보면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주와 교회를 위하여 수고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교회의 일을 하지 않아도 누가 뭐랄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도 주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고 목회자를 사랑하고 성도들을 사랑해서 자원하여 수고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골 1:24에서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의 고난 역시 자원한 고난입니다.

5) 사명으로 인한 고난 
   
주님은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 24)
   
삼상 6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블레셋 사람들에게 빼앗긴 법궤가 돌아오는 내용이 나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젖 나는 소 둘을 끌어다가 법궤를 실은 수레를 끌게 했습니다. 송아지들은 집에 가두어놓았습니다. 이 때 젖 나는 두 암소는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행하여 대로로 가며 갈 때에 울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습니다. 여기서 젖 나는 암소 두 마리는 사명자의 모습이 어때야 하는 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명자는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사명을 길을 가야 합니다. 사명의 길을 가는 데는 포기해야 할 것이 많습니다. 여기서 포기가 바로 고난입니다.
   
사도 바울은 사명의 길을 가기 위해서 세상의 부귀와 영화를 포기하고 고난의 길을 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류구원의 사명을 위해서 하늘보좌를 포기하시고 고난의 시간을 사셨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사명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명을 위하여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비록 세상 것을 포기하므로 고난을 받는다 하더라도 사명의 길을 가는 것이 인생을 성공적으로 사는 것입니다.


2. 불신자의 고난 
   
불신자의 고난은 불신앙과 관련해서 3가지만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1) 율법의 저주로 인한 고난 
   
율법의 저주는 크게 3가지입니다. 영적인 죽음, 환경적인 저주, 육체의 질병입니다. 이 3가지는 사람에게 고통입니다. 율법의 저주는 곧 고난입니다.
   
구약 율법은 613가지 조문이 있습니다. 하라는 명령이 248개이고 하지 말라는 명령이 365개입니다. 이것을 요약한 것이 10계명입니다. 신 28장에 보면 율법을 지키는 사람은 복을 받고 율법에 불순종하는 사람에게는 저주가 임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 구약의 율법 613가지를 다 지킬 수 있는 능력이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결국 율법의 저주를 받는 것입니다.
   
감사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율법의 저주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딱 한 가지 만들어주셨습니다. 갈 3:13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 이유는 인간을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율법의 저주로부터 자유롭습니다. 하지만 아직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들은 율법의 저주 가운데 놓여있는 것입니다. 불신자가 율법의 저주로 인한 고난을 벗어나는 길은 오직 한 가지 방법 밖에 없습니다. 나무에 달려서 우리를 대신해서 저주를 받으신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그 길 외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2) 심판으로 인한 고난 
   
계 20장에 보면 천년 왕국과 인류 최후의 전쟁인 곡과 마곡의 전쟁이 끝나고 흰 보좌 심판이 시작 됩니다. 흰 보좌 심판은 죽은 자들이 받는 심판입니다. 여기서 죽은 자들은 영적으로 죽은 자들 즉 불신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 행위를 따라 심판을 받고 불못에 던져집니다. 이 불못이 바로 지옥입니다. 불신자는 죽음 후에 그곳에서 영원토록 고통당하는 것입니다.
   
막 9:48, 49을 보면 지옥은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고 사람마다 불로서 소금 치듯 함을 받는 곳입니다. 구더기도 죽지 않는다는 말은 지옥은 끝이 없이 영원하다는 말입니다. 이 세상에서 구더기는 너무나 약한 존재입니다. 사람의 손가락 하나로도 죽일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지옥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습니다. 또 불로서 소금 치듯 함을 당한다는 말은 고통이 얼마나 큰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불속에 굵은 소금을 넣으면 탁 탁 튑니다. 사람이 불 속에서 뜨거워서 튄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그런 고통이 영원한 곳이 지옥입니다. 불신자가 죽음 후에 당하는 고난은 영원합니다.
   
지옥의 고통을 벗어나는 길은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는 길 밖에는 없습니다. 계 20:15입니다.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는 방법은 참 생명이신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 길 외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인간이 구원 받을 수 있게 주신 이름이 예수님 밖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행 4:12입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3) 마귀에게 끌려서 받는 고난 
   
성경 엡 2:2과 고전 12:2은 불신자들은 마귀를 따르고 마귀가 끄는 대로 끌려 다닌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마귀가 이 세상에 온 목적은 인간을 파괴하는데 있기 때문에 마귀를 따르는 자들은 고통스러운 인생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요 10:10에 보면 마귀를 도둑놈으로 비유하면서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라고 말씀합니다. 결국 마귀가 하는 일은 사람을 망하게 하는 일 밖에 없는 것입니다.
   
요즘은 가수들 가운데 자신의 영혼을 마귀에게 팔고 스타가 된 사람들이 있다는 글을 읽었습니다. 한국에서 유명한 서00이라는 가수도 마귀에게 자신의 영혼을 팔고 스타가 되었다고 들었습니다. 이것이 말세의 징조 중에 하나입니다. 계 18장에 보면 바벨론 즉 이 세상의 멸망에 대해서 나옵니다. 이 세상이 멸망할 때 땅에서 장사하는 자들이 애통을 합니다. 계 18:13에 보면 이 세상 이 멸망하기 직전에 거래 되었던 상품의 품목들이 나오는데 그 중에 마지막이 사람의 영혼들입니다.
   
마귀가 자기에게 영혼을 판 사람들을 스타로 만들어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망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결국이 중요한데 결국은 망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불신자가 마귀의 손에서 벗어나는 길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영접하면 내 안에 계시는 예수님 때문에 마귀가 나를 마음대로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휴가철에 빈집털이범들이 기승을 부립니다. 왜 도둑이 빈집을 털까요? 주인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면 우리의 주인이 예수님이 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하시는 일이 마귀의 일을 멸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마귀가 우리를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성경 요일 3:8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3. 신자와 불신자의 공통적인 고난 
   
신자와 불신자가 당하는 대표적인 고난 2가지만 다루겠습니다.
   
1) 보응으로 인한 고난 
   
하나님께서는 심는 대로 거두는 법칙을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갈 6:7입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심고 거두는 이 법칙은 신자나 불신자 모두에게 적용 되는 법칙입니다. 콩 심은데 콩 나고 밭 심은데 팥 나는 것입니다.
   
어느 감리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점심식사가 끝나면 속회별로 돌아가면서 설거지를 하였습니다. 어떤 남자 집사님이 어찌나 설거지를 깔끔하게 잘 하는지 여 집사님들이 감탄을 하면서 물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집사님은 설거지를 깔끔하게 잘하세요. 남자들 설거지 하는 걸 보면 더러워서 여자들이 다시 하는데...” 그 남자 집사님이 말했습니다. “예. 제가 고등학교 때 수련회를 갔습니다. 선생님들이 간식시간에 먹을 토스트를 준비해 놓은 것을 우연히 보았어요. 너무 먹고 싶었어요. 그 중에 토스트 하나를 들어서 계란을 몰래 살짝 빼먹어버렸답니다. 드디어 간식시간이 되었습니다. 선생님들은 계란이 하나 없어진 줄을 모르고 토스트를 나누어주셨지요. 

그런데 그 계란 없는 토스트가 정확하게 제 앞에 놓이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 저는 가슴이 얼마나 철렁했는지 몰라요. 그래서 나는 그 때부터 내가 저지른 행동은 내게 돌아온다는 것을 정확하게 알았지요. 그래서 무슨 일을 하든지 성실하게 하기로 결심하였지요. 만약에 지금 제가 이 그릇 중에 하나라도 제대로 닦지 않으면 분명히 다음 주에 제 밥이 그 밥그릇에 담길 것입니다. 나는 성실하게 살기로 결심하고 살고 있지요.”
   
아마 어떤 분들은 그 집사님이 지나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저는 내가 잘못 닦은 접시가 꼭 다음 주에 내게로 오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인생을 길게 보고 넓게 보면 우리의 모든 언행심사는 반드시 열매가 되어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나의 현재는 과거에 내가 뿌린 씨앗의 열매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리고 현재 내가 뿌린 씨앗으로 나의 미래가 결정 됩니다. 나의 현재의 고난은 과거의 내가 잘못 살았기 때문에 받는 보응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부터라도 좋은 씨를 뿌립시다. 그래야 앞으로 좋은 열매를 거두는 것입니다.

2) 애매한 고난 
   
벧전 2:19입니다.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여기서 부당하게를 개역 성경에서는 ‘애매히’라고 번역 했습니다. 애매히라는 말의 원어는 ‘아디코스’인데 그 의미는 ‘부당하게, 불의하게’입니다. 그래서 애매히 고난을 당한다는 말은 다른 사람이 저지른 잘못 때문에 내가 고난을 당하는 것을 말합니다. 다른 사람이 잘못했으면 그 사람만 고난당해야 합니다. 그런데 내가 고난을 당한합니다. 그것은 불의하고 부당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는 그런 고난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잘못해서 불이 났는데 내 재산이 날라 갈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운전을 잘못했는데 내가 다칠 수 있습니다. 후쿠시마 원전에서 사고가 터졌는데 원전과 상관없는 사람이 방사능에 피폭이 되어 고난을 당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애매한 고난은 공동체로 존재하기 때문에 당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했는데 자식들이 물질적인 고통을 당하기도 합니다. 가족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정치 지도자들이 잘못해서 국민들이 고통을 당하기도 합니다. 국가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군대에서는 소대원 중에 한 명이 잘못했는데 소대원 전체가 기합을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소대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애매한 고난이 주는 교훈은 3가지입니다. 하나는 만남이 중요합니다. 복된 사람을 만나면 함께 복을 공유할 수 있지만 저주가 따라는 사람을 만나면 그 저주를 나도 어느 정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만남이 중요합니다.
   
또 하나의 교훈은 내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입장이 되면 안 되겠다는 것입니다. 내가 맡은 일을 소홀히 하면 상대가 짐을 지어야 합니다. 제가 군대생활을 할 때 부대원 중에 키가 가장 작았습니다. 그래서 목봉 체조할 때는 목봉이 제 어깨에 닿지를 않았습니다. 목봉이 어깨에 닿질 않으니 저는 좋았습니다. 하지만 저와 함께 목봉을 들었던 다른 사람들은 제가 짊어져야 할 무게를 대신 짊어져야 했습니다. 저는 제 의지와 상관없이 그들에게 피해를 준 것입니다. 이와 같이 내가 맡겨진 일을 소홀히 하면 다른 사람이 고통을 당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구역별로 돌아가면서 식사 봉사와 교회청소를 합니다. 당번을 맡았을 때 나 한 사람 빠진다고 큰 일 나느냐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내가 빠지면 다른 사람이 그만큼 힘들어지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교훈은 공동체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책임을 내가 짊어져야 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건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럴 때 나에게 짐을 지게 하는 사람을 미워하지 마십시오. 받아드리고 감당하십시오. 그래야 평안합니다. 미워해도 감당해야 하는 것이고 받아드려도 감당해야 할 부분이라면 긍정적으로 반응하는 것이 좋습니다.
   
결론은 고난에 대해서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라고 말씀드립니다. 저는 고난의 종류를 묵상하면서 이렇게 많은 고난이 있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그런데 정말 중요한 것은 다양한 고난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고난에 대한 반응입니다.
   
무슨 일이든지 반응이 중요합니다. 가룟유다는 예수님을 은 30에 팔았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3번이나 부인하고 저주까지 했습니다. 누가 더 나쁠까요? 둘 다 나쁩니다. 둘 다 부끄러운 짓을 한 것입니다. 둘 다 용서 받기 힘든 짓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후 반응이 중요합니다. 가룟유다는 목매달아 죽었고 베드로는 회개하고 돌이켜 위대한 사도의 길을 갔습니다. 

행 2장에서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사람과 행 7장에서 스데반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모두 다 마음에 찔림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반응은 달랐습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회개하고 성령을 받고 구원을 받았지만 스데반의 설교를 들은 사람은 스데반을 돌로 쳐서 죽였습니다. 반응이 달랐습니다.
   
고난도 반응이 중요합니다. 자녀가 잘못해서 부모가 매질을 하면 어떤 자녀는 도망을 치지만 어떤 자녀는 부모의 품을 파고 들어갑니다. 저와 여러분은 고난을 당할 때 그 고난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품으로 더 깊이 들어가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엘리바스는 7절에서 인생에 고난이 있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한 후에 8절에서 “나 같으면 하나님께 구하고 내 일을 하나님께 의탁하리라”고 말했습니다. 고난 중에 가장 좋은 반응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맡기는 것이 믿음입니다. 제가 전도사 시절에 섬겼던 교회에 변씨 성을 가진 전도사님이 함께 사역을 했습니다. 변전도사님에게는 시온이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그 아이가 볼 때 제가 믿을 만 했는가 봅니다. 그 아이가 젖병을 들고 다니면서 놀았는데 놀다가 저를 보면 젖병을 저에게 맡깁니다. 그리고 또 놀다가 다시 저에게 와서 우유를 마시고 다시 젖병을 저에게 맡기고 가서 놀았습니다. 그 아이가 교인 중에서 유일하게 젖병을 맡기는 사람이 저였습니다. 자기 아버지에게도 안 맡기는 젖병을 저에게 맡겼습니다. 저를 믿었기 때문입니다.
   
고난이 있습니까? 주님에게 맡기십시오. 진짜 주님을 믿는다면 내가 근심하고 내가 염려하고 그 고난 때문에 속상해하고 괴로워하지 말고 주님에게 맡기십시오. 그게 믿음입니다. 못 맡겼다면 믿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맡기는 것이 믿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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