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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놀랍구나! (마 7:2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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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랍구나! (마 7:28-29)

[마태복음 7:28-29]
28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29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산상수훈의 말씀은 이전에 가르치던 사람들의 그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입으로는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자신을 주인으로 삼았던 것들에 대하여, 하나님께 기도한다고 하면서 자신의 정욕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다고 하면서 결국은 자신의 의를 드러내는 사람들에 대하여 심각하게 묻고 계셨습니다.
“너희의 행하는 모든 삶의 동기가 무엇이냐?”
아니 더욱 중요한 물음이 있습니다.
“너희의 삶의 주인이 누구냐?”

어쩌면 지금 한국교회를 위해 꼭 필요한 말씀을 주시고 계시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리스도의 몸으로, 그리스도를 머리로 삼고 세워진 교회의 실상을 보도록 하는 말씀입니다. 아무리 보아도 이제는 교회의 주인이 주님인 것 같지 않습니다. 아무리 보아도 주님이 드러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옛날 황해도 재령에 동부교회가 있었습니다. 그 교회에 정찬유라는 장로님이 있었습니다. 그는 본시 학교 앞에서 작은 문방구점을 운영하며 어렵게 살았던 사람입니다. 가난하게 살다 보니 하나님께 드려야 할 십일조도 드리지 못했습니다. 하루는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다가 그런 생각이 들게 되었답니다.
'그래. 내가 하나님께 마땅히 드려야 할 십일조를 떼먹고 드리지 않는다고 해서 내 형편이 더 나아지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이래도 배가 고프고, 저래도 배가 고프다면 차라리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리고 배가 고픈 것이 더 낫지 않겠는가?'

굶어 죽을 각오로 십일조를 하던 그의 삶이 윤택해졌고, 그는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건축자재 상회를 열었는데, 당시 집을 새롭게 고치려는 건축 붐을 타고 소위 떼돈을 벌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자신이 사는 허름한 집을 보고는 새로 지어야겠다는 생각에 건축 자재를 가득 쌓아놓았는데, 교회가 생각나더랍니다. 허름한 교회를 먼저 고치지 않고는 자신의 집을 고치지 않겠다는.
그래서 그는 당시 3만 환의 헌금(현 시세로 20억 쯤 된다고 하죠)을 하게 되었고, 교회의 건축이 이루어졌습니다. 교인들은 정찬유 장로의 귀한 뜻을 기리기 위해 예배당 머릿돌에 이렇게 적어 놓았습니다.
“정찬유 장로 기념 예배당”

그때부터 정찬유 장로는 그 교회를 다니지 않고 다른 곳에 출석하기 시작했답니다. 목사님과 교인들이 찾아가 이유를 물었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동부 교회에 출석한 것은 그 교회의 주인이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 교회의 주인이 바뀌어서 정찬유 장로가 지은 정찬유 개인의 교회가 되어버렸습니다. 저는 더는 사람이 주인으로 앉아있는 교회에는 다닐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그저 조용히 돌아가 주십시오.”

그제야 그 교회에 새겨져 있던 ‘정찬유 장로 기념 예배당’이라는 글씨를 깨끗이 지워버렸다고 합니다.

우리가 교회를 다녀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우리가 말씀을 순종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이유는 단 한 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주인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분의 주인 됨이 실종되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보다 교회의 뜻을 이루고,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의 뜻을 이루기 위해 애쓰고 있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의 가르치심이 놀라웠던 것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우리의 신념을 믿고, 우리의 뜻을 이루기 위해 애쓰던 속마음을 들켰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결국, 신앙의 문제는 그분 앞에서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느냐는 것이죠.
그분을 나의 삶의 주인으로 믿는다면?
그분이 단지 나의 삶의 선생님이라면?
그분이 나의 삶의 구세주가 되신다면?

놀라운 반응? 놀라운 반응!

낮은 울타리에 실렸던 감동적인 글입니다. 남편은 회사를 부도내고 도망 중이라 연락이 되질 않는데 법원 집달관은 매일같이 남편이 어디에 있느냐고 추궁하고, 아이들은 창피해서 학교를 못 다니겠다며 방안에서만 있었습니다. 여자는 숨이 막힐 것 같은 상황에서 친정어머니 생각이 간절했습니다. 어느 날 무작정 어머니를 찾아갔습니다.
“엄마, 너무 힘들어요.”

그러자 그녀의 어머니는 갑자기 부엌으로 가서 냄비 세 개에 물을 채웠습니다. 그리고는 첫 번째 냄비에는 당근을 넣고, 두 번째 냄비에는 달걀을 넣고, 세 번째 냄비에는 커피를 넣고는 끓이기 시작했습니다. 한동안 시간이 지난 후 불을 끄고 어머니는 딸에게 말했습니다.

“이 세 가지 사물이 다 역경에 처하게 되었단다. 끓는 물이 바로 그 역경이지. 그렇지만, 세 물질은 전부 다 다르게 반응했단다. 당근은 단단하고 강하고 단호했지. 그런데 끓는 물과 만난 다음에 부드러워지고 약해졌어. 달걀은 연약했단다. 껍데기는 너무 얇아서 안에 들어있는 내용물을 보호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끓는 물을 견디어 내면서 그 안이 단단해졌지. 그런데 커피는 독특했어. 커피는 끓는 물에 들어간 다음에 물을 변화시켜 버린 거야.”
딸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오늘 본문은 아주 간단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마치셨을 때 무리가 그의 가르치심에 놀랐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 속에서 이들의 놀람이 무엇일까를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는, 호기심이었을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들의 양심을 때리는 놀라움이었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또 주목하고 싶은 것은 놀란 ‘무리’입니다.

예수님께서 무리를 놓고 말씀하셨지만, 이 말씀은 철저하게 제자의 삶을 살려는 사람들에게 맞추어져 있었다는 사실이지요. 군중으로 앉아서 이 말씀을 들었던 사람들의 놀람과 제자의 삶을 살기로 작정하는 사람들의 놀람이 어떻게 같을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을 보세요. 사람들이 놀란 이유가 나오지요?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첫째는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산상수훈은 계속해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가르쳤던 잘못된 것을 지적하며 말씀합니다. “옛사람이 말한바”라고 시작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예수님의 말씀이 권위가 있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요한복음 1장 1절에 보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모세의 율법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가르침이 하나님을 드러내거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에는 하나님이 드러났기 때문에 ‘영적 권위’가 있었습니다. 절대적 진리는 힘이 들어도 권위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심판 앞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말씀이었습니다. 생명의 길로 가기 위한 좁은 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누가 이 죽음과 심판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습니까?

죽음과 심판의 문제가 ‘정의’에 대한 문제였다면 무서워 견디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얼마 전 전두환 전 대통령의 집을 수색하는 것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하셨나요?

5공 때 가장 많이 한 말이 ‘정의 사회 구현’이었습니다. 아마도 전두환 전 대통령은 자신이 하는 일이 정의 사회를 구현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을 향한 정의의 칼이 자신을 향할 때 얼마나 무섭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는지 모릅니다.
그가 스스로 정의 사회를 구현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자신의 업적이 다음에 인정되리라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사랑”이 없는 정의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지, 그 정의가 복수의 복수를 낳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권위가 있었던 것은 잘못된 질서를 바로잡고 하나님의 정의를 세우고자 하셨지만, 더 깊은 곳에 ‘사랑’이 있었다는 것이죠. 마지막 하나님의 심판 위에 서게 될 우리에게 심판을 면하도록 길을 보여주신 것이죠.
하나님의 사랑을 이루기 위해 정의가 세워져야 하는 것을 분명히 가르쳐주셨습니다.
예수님 말씀의 결론은 ‘사랑’으로 귀결됩니다. 사랑이 아니고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산상수훈의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13장 1절은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라고 말씀합니다.

테레사 수녀는 이 사랑에 대하여 이렇게 표현합니다.
난 결코 대중을 구원하려고 하지 않는다. 난 다만 한 개인을 바라볼 뿐이다.
난 한 번에 단지 한 사람만을 사랑할 수 있다. 한 번에 단지 한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씩만.

따라서 당신도 시작하고 나도 시작하는 것이다.
난 한 사람을 붙잡는다. 만일 내가 그 사람을 붙잡지 않았다면 난 4만 2천 명을 붙잡지 못했을 것이다. 모든 노력은 단지 바다에 붓는 한 방울 물과 같다. 하지만 만일 내가 그 한 방울의 물을 붓지 않는다면 바다는 그 한 방울만큼 줄어들 것이다.
당신에게도 마찬가지다. 당신의 가족에게도 당신이 다니는 교회에서도 마찬가지다. 단지 시작하는 것이다. 한 번에 한 사람씩.

이들이 가장 놀라게 된 이유는 기존의 가치를 뒤집어 놓았다는 것이죠.
사랑보다 더 큰 권위가 어디 있겠습니까?

두 번째로, 예수님의 권위는 그 가르침이 서기관들과 같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는 인쇄술이 발달하지 않아, 하나님의 말씀을 필사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서기관이었죠. 그들은 성경에 대한 지식이 많았고, 일반 대중은 성경을 함부로 대할 수 없었습니다. 당연히 서기관들은 사람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근본적인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는 그들은 지식이 있었을지는 모르지만, 본질적인 말씀을 전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들은 공의와 정의를 구현하면 될 줄 알았으나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인지는 몰랐습니다. 그들은 약자를 보호하기 위해 법이 필요하다는 것은 알았으나 그들을 사랑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가르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면 공의로운 사회가 될 줄 알았으나 인간의 기준과 능력으로 이것이 불가능한 일인 것을 몰랐습니다. 원수를 사랑하지 않으면, 우리가 받은 사랑이 원수도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인 것을 몰랐습니다. 그들은 기도하면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의 뜻을 벗어난 기도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들은 기도를 많이 하면 하나님과 가까워지리라고 생각했지만, 인격적인 만남을 갖지 않으면 우리의 기도와 경건이 하나님과 관계없을 수 있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이제 이 새로운 주님의 가르침 앞에 많은 사람이 놀랐습니다. 기대도 있었을 것이고 호기심도 있었을 것입니다. 바로 산상수훈 말씀이 끝나고 마태복음 8장 1절에는 제자들과 사람들의 반응이 나오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니 수많은 무리가 따르니라”

예수님의 가르침은 뭔가 다른 것이 있었습니다. 그동안 전통과 습관에 젖어 있었던 사람들에게 도전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따른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하게 했습니다.
말씀을 듣기 전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갈 수 있었던 것이 이제는 그럴 수 없게 되었습니다. 내 행동이 문제가 아니라 내 내면을 들여다보시는 하나님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죄에 대한 준엄함이 있을 때에 비로소 체험되는 것이 아닐까요?

마태복음 13장 53절 이하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한 번은 예수님이 고향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은 그곳에 있는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때도 사람들은 똑같은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치심에 놀랐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가 어떠했습니까? 그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사람의 이런 지혜와 능력이 어디서 왔느뇨?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뇨? 그 모친의 이름은 마리아요, 그 형제들과 자매들도 우리가 다 잘 아는 사람이 아니뇨?”

그러면서 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고, 예수님을 배척해 버렸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듣고 놀란다고 해서 그 자체로서 아름답고 바람직한 결과가 나타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전하시던 산에도 수없이 많은 사람이 모였습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이 말씀에 대하여 어떻게 반응할 것이냐입니다.

요한복음 6장 66절에도 보면 주님의 말씀을 들었던 사람들의 반응이 나옵니다.
“그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무리가 예수님의 곁을 떠나는 모습을 보시면서 예수님은 열 두 제자를 향하여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너희도 나를 떠나려느냐?”

그때 시몬 베드로가 나서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

독일의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는 그의 책[나를 따르라]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다른 이들의 죄를 눈감아 주는 무른 마음만큼 잔인한 행위는 없다. 또한, 죄의 길에서 돌이키라고 형제를 부르는 준엄한 꾸지람만큼 긍휼한 행동도 없다.”
그는 당시의 평안했던, 현실에 안주했던 교회를 향해 준엄하게 제자로 사는 삶이 무엇인지를 지적한 사람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때로는 목숨을 내놓고 말씀에 순종해야 함을 말입니다.
죄에 대한 준엄한 꾸짖음이 없이 어떻게 말씀 앞에 처절하게 반응할 수 있겠습니까?

데이비드 플랫의 [Follow Me]에 나오는 글을 소개합니다.
어떤 이들은 묻는다.
“징계라뇨? 그럼 은혜는 어디로 간 거죠?”
확실하게 답할 수 있다. 하나님의 은혜는 교회가 행하는 징계의 핵심이다. 크리스천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순간, 자신과 사랑하는 이들의 삶에 자리 잡은 죄에 무관심한 태도를 버려야 한다. 알다시피, 그리스도는 단번에 영원히 인류의 죗값을 치르셨다. 따라서 주님의 죽음을 지극히 소중한 보물로 인식해야 한다.

삶에 또는 교회에 꽈리를 튼 죄를 묵과하는 행위는 예수님의 희생을 짓밟는 짓이나 다름없다. 크리스천이 좇는 그리스도는 그저 죄를 눈감아 주시는 분이 아니라 죄를 말끔히 씻어 주시는 구세주시다. 예수님의 죽음을 귀하게 여긴다면 교회 안에 숨어든 죄를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지난여름 우리는 참 황당한 사건을 경험했습니다.
태안에서 한 사설 해병대 체험 업체가 학생에게 체험학습을 시키며 안전수칙을 지키지 않아 5명의 목숨을 앗아간 사건입니다. 왜 우리가 관대하지 못하게 그런 업체에 대하여 엄격하게 규정을 적용해야 하나요? 보험은 들었는지, 구조 자격증은 있는지, 경험은 얼마나 되는지?
구제가 목적이 아니라 생명이 존귀하기 때문입니다.
산상수훈을 통해 정말 무섭게 주님이 말씀을 적용하는 이유, 정말 지키기 어려운 말씀을 우리에게 주시는 이유는 너무나 명백합니다.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이죠.

이루다 목사님을 통해 들은 이야기입니다.
뉴질랜드의 신문에 크게 보도되었던 내용입니다.
어떤 아버지와 아들이 정말로 오랜만에 한가한 시간을 가지고 만나게 되었답니다. 둘 다 의사가 되어 부자간의 정을 나누며 바다에 나가 낚시를 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 순간 해변에서 사람들이 소리를 치고 있었습니다.
어린아이가 빠져 바다로 휩쓸려갔는데 바로 두 부자가 낚시하는 곳으로 떠내려간 것입니다. 두 사람이 방향만 돌려서 아이를 건지면 되는 상황에서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그 아이를 살리지 못했고. 사람들의 고소로 재판을 받게 됩니다.
왜 거기에서 아이를 살리지 않았느냐는 것이죠. 재판 끝에 두 사람은 무죄를 선고받았습니다. 

마지막에 판사가 물었습니다.
“아이를 살리지 못한 것이 정말 듣지 못하고 보지 못했기 때문인가요?”

“예, 우리 부자는 참으로 오랜만에 한가한 시간을 가졌고 낚시를 시작했는데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사건이 일어나던 때 고기가 잡히기 시작했는데, 얼마나 많이 잡히는지 고기를 잡는 것에 집중하다 보니,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참 슬픈 이야기입니다. 이루다 목사님이 이런 도전을 하더군요.
오늘날 교회가 사역의 재미에 푹 빠져서 사람들의 울부짖음을 듣지 못하고, 옆에서 죽어가는 사람도 건지지 못하고 있다고 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놀라운 것은, 자신의 의와 전통에 푹 빠져 그것을 즐기던 사람들에게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자기중심적인 삶에서 하나님 중심적인, 이타적인 삶으로 시각을 바꾸어 놓는 일어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주는 도전입니다. ‘놀라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무엇에 놀랐는가? 그리고 놀랐다면, 그 놀람에 어떻게 반응하느냐는 것입니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보아야 할 것을 보고, 행해야 할 것을 행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보고 들은 것에 대하여 물으실 것이 아니라 우리가 행한 것으로 심판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산상수훈 말씀이 결코 우리에게 쉬운 말씀이 아닙니다. 아니, 말씀대로 사는 것이 너무나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람으로 산다는 것, 영생의 길을 간다는 것을 알기에 그 길을 가라고 말씀하시죠.
그리고 우리에게 결단을 요구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놀랍구나!
주님을 말씀을 듣고 놀랐던 제자들이 이제는 삶을 통해 세상을 놀라게 해야 할 차례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경이로운 일인지를 말입니다.
(김병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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