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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벧전 4: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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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벧전 4:7-11)


철학자 스피노자가 했다는 말, "내일 지구가 망한다 해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라는 말은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유명한 말입니다. 
이 말은 또한 자기 인생과 사회뿐 아니라 역사와 우주공간에 그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자기에게 주어진 현재라는 삶에만 충실해서 초연히 살겠다는, 아주 멋있는 선언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만약 실제로 그런 상황이 생긴다고 한다면 어떻겠습니까?
  
정말 내일 지구가 망한다는 것이 피할 수 없는 기정사실이 되고 그것이 모든 사람들에게 다 알려진다면, 과연 그 사람들 중에 '오늘 사과나무를 태연히 심는'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겠습니까?
아마 그 말을 한 스피노자 자신도 실제로 그런 상황이 닥치게 되면 적어도 그 마지막 날에 사과나무를 심고 앉아 있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말은 아주 멋있게 들리고 뭔가 고차원적인 것 같지만, 내일 사라지게 될 사과나무를 오늘 심는다는 것은 현실적으로는 정말 아무 의미도 없는, 좀 까놓고 말하자면, 그저 자기는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과시하려고 폼 좀 잡는 행위에 지나지 않습니다. 
정말 내일 지구가 망한다는 것이 분명해진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마도 "내일 죽으리니 오늘 먹고 마시자" - 이렇게 나올 것이고, 그것이 오히려 훨씬 더 솔직한 말일 것입니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그 '내일 죽으리니 오늘 먹고 마시자'라는 생각을, 그처럼 내일 망할 날을 앞에 두고 하는 것이 아니라, 평생을 살면서 날마다의 좌우명처럼 여기고 산다는 데에 있습니다. 
사실상 지구가 '망하고 아니고'에 관계없이 '날마다 꾸준히 사과나무 한 그루씩을 심는' 자세로 사는 것이 일상의 좌우명이 될 만한 것이고, 어쩌면 스피노자의 말도 그런 뜻으로 한 것인지도 모르겠는데, 사람들은 마치 내일이면 정말로 끝날 인생인 것처럼 '먹고 마시는' 향락에 빠져서 하루하루를 살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불신자들이 이처럼 '내일 지구가 망해도'라고 말할 때에는 그것이 '전혀 일어날 수 없는 가정'이라는 전제가 그 속에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즉 '오늘 사과나무 한 그루를 심겠다.'는 사람이든지 '오늘 먹고 마시겠다.'는 사람이든지 간에, '내일 지구가 망하게 될 날'이라는 것이 실제로 자기 인생 중에 닥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은 바로 그런 말을 가정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기정사실로, 그것도 아주 임박한 기정사실로 우리에게 선포해 주고 있습니다. 
바로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라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시간과 공간의 세계, 이 물질계가 끝나고 말 시각이 촉박하게 다가오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모든 성도들은 바로 그 사실을 항상 염두에 두면서 자기에게 주어진 오늘 하루하루의 삶을 바로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하에 이어지는 말씀들은 그처럼 말세의 날이 내일이 될지도 모르는 긴장 속에서 자기에게 얼마 남아 있을지도 모르는 이 아깝고 귀중한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증거해 주고 있는데, 오늘 이 시간 그 교훈들을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말세가 가까운 줄 아는 성도는 더욱 기도로써 자신의 영혼을 지켜야 합니다. 

7절 말씀에 "7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고 기록했습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다'는 것은 바로 자기 인생의 마지막이 가까웠다는 사실과 직결됩니다. 
만물은 끝나는데 사람만 영생할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 피조세계가 분명히 유한하다는 사실을 보면서도 자기 인생은 마치 무한할 것처럼 착각하고 사는 사람은 실로 얼마나 어리석은 것이겠습니까?
그러므로 그런 만물의 종말을 보면서 자기 인생을 똑같이 비추어 볼 줄 아는 성도라면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며 기도해야 한다."고 한 것입니다. 

여기서 '정신을 차리고 근신한다'는 것은 기도드리기 위한 준비 자세에 해당되는 말입니다. 
'정신을 차리고'라는 말은 '마음을 가다듬고'라는 뜻으로서, 쓸데없는 일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자제심을 가지고 기도에 몰두하라는 뜻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그 생각과 행동이 항상 욕심과 정욕에 이끌릴 수밖에 없게 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그 생각이라는 것이 사실은 육체가 생각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입니다. 
  
육체가 놀고 싶다고 생각하면 그 정신도 그대로 따라가는 것이고 육체가 간음하고 싶다고 생각하면 그 생각도 그대로 따라가는 것이며 육체가 더 향락만을 누리고 싶다 하면 그 마음도 욕심으로만 가득 차서 하나님께 헌금을 속이고 교인에게 사기를 치는 일까지 자제하기는커녕 오히려 담대하게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근신하며'라고 번역된 말은 원래 '깨어서'라는 뜻인데, 육신이 술에 취하여 몽롱하거나 심령이 나태하여 멍청히 있지 말고 항상 '맑은' 상태를 유지하면서 기도하라는 뜻입니다. 
사실상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마치 취중 운전을 하는 사람처럼 그 심령이 몽롱한 상태에 있습니다. 
즉 신앙생활을 하기는 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좌우로 왔다 갔다 하면서 달리게 되고, 그 결과 언제 사고가 터질지 모르는, 아니 큰 시험의 사고가 언젠가는 터지게 될 것은 오직 시간문제일 뿐인 사람이 됩니다. 
취중 운전이 늘 교통사고 원인 제1호가 되고 자신이 다치고 차를 망칠 뿐 아니라 상대방의 생명까지 위협하는 것처럼, 기도할 줄 모르는 교인들이 늘 자신의 신앙생활에서 파선할 뿐 아니라 교회를 흔들고 주변의 다른 교인들까지 실족하게 만드는 죄를 저지르게 되는 것입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고 우리에게 남은 시간도 얼마 없는데 그렇게 비틀거리면서 교인 노릇해서야 하겠습니까? 
자신의 영혼을 스스로 책임지고 지킬 수 있는 길은 기도밖에 없습니다. 
말씀은 공적으로 같이 받지만 기도는 정말 여러분 각자가 자신의 기도를 드려야만 하는 것입니다. 

아직도 기도할 시간이 없다고 말씀하시겠습니까?
그런 교인은 자신의 바쁜 일과에서 기도를 위하여 쪼개어 낼 수 있는 시간이 없다고 하겠지만, 진짜로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은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기도할 수 있도록 허용해 주신 시간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전혀 소용이 없는 때, 기도란 것이 이미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의 헛수고가 되고 말 때가 이미 임박해 있는 줄로 깨닫고, 늘 기도함으로써 자신의 심령을 맑은 상태로 유지하고 자신의 생활을 깨끗하게 성별시킬 줄 아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말세가 가까운 줄을 믿는 성도는 열심히 서로 사랑해야 할 뿐이지 원망하거나 미워할 여유가 전혀 없습니다. 

이어지는 8절과 9절에 "8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9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하고"라고 명했습니다. 

그처럼 기도로써 대자관계가 바로 정립된 성도는 자연히 대인관계 역시 건전하게 나타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성도 사랑'입니다. 
본문에 보면 "열심으로 서로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이 '열심으로'라는 말은 원래 '불타듯이' 혹은 '열이 펄펄 나듯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성도 사랑이란 것도 특별한, 의도적인 노력과 정성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불신자들은 그냥 느껴지는 대로만 사랑하면 되고 안 느껴지면 안하면 그만이지만, 신자의 사랑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무조건 사랑해 주신 것처럼, 저와 여러분도 형제를 무조건 사랑해야만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그 사랑의 실천을 위하여 정말 열심히 구체적으로 노력을 해야만 합니다. 

그런 사랑을 나누게 되면 성도 사이에서는 "허다한 죄를 덮을 수 있는" 일이 벌어진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죄를 덮는다'는 말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실 때 아주 자주 쓰이는 표현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말은, 성도가 다른 형제를 진정 뜨겁게 사랑하게 되면 그 형제가 자기에게 짓는 많은 죄들을 지적하거나 따지지도 아니하고 아예 처음부터 덮어 버리고 용서해 준다는 뜻인 것입니다. 

뜨거운 사랑이 없는 신자는 그런 용서를 결코 발휘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신자의 눈에는 우선 다른 형제의 죄가 눈에 잘 띄게 되고 일단 그처럼 발견되거나 자기에게 피해를 끼친 형제의 죄는 절대로 그냥 넘겨버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늘 다른 형제의 잘못하는 것을 찾아내는 재미에 빠지고 그것을 지적해 주는 우월감에 사로잡히는 신자도 있습니다. 
그 모두가 다 이 '덮어 주는 사랑'을 전혀 열심히 노력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보면 이 '죄를 덮는다'는 말은 '죄를 용서해 준다'는 말보다 한 차원 더 높은 수준입니다. 
'죄를 용서해 준다'는 것은 일단 상대방의 죄를 인식하는 것이 선행됩니다. 
'분명히 상대방이 내게 잘못했다'라는 사실을 일단 자기 머릿속에 인식시켜 놓은 후에 그것을 용서해 주는 마음이 따라가는 것입니다. 
물론 이렇게까지만 해도 훌륭한 형제 사랑의 실천임은 두말할 것 없습니다. 

하지만 '죄를 덮어 준다'는 말은, 아예 상대방의 죄를 자기 머리로 인식하기도 전에 미리 용서해 준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니 아예 그런 인식 자체를 하지 않는 습관이 배어 버린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 없는 교인이나 사랑이 약한 교인의 눈에는 분명히 잘못한 일로 여겨질 만한 죄도, 이처럼 형제에 대한 사랑이 늘 뜨겁게 타오르고 있는 성도의 눈에는 그것이 자기에게 잘못한 죄인 줄로 깨닫지도 못하고 넘어가 버리는 것입니다. 

그와 정반대의 자세를 바로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없이 하라"는 말씀 속에서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교인이 된 후에도 사람이란 것이 그 얼마나 교활한지 겉으로는 서로 대접하면서도 속으로는 원망까지 동시에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이렇게 사랑해 주는데 이 사람은 왜 이렇게 나에게 쌀쌀하게 대할까?'라든지, '나는 이처럼 먼저 대접해 주는데 왜 이 교인은 한 번도 답례를 하지 않을까?'라는 식으로, 얼굴로는 웃으면서 대접하면서도 마음으로는 불평하고 욕할 줄 아는 것이 이 사람이란 존재의 악하기 그지없는 본성인 것입니다. 
오직 진짜 '불같이 타오르는 열성적인 사랑'만이 이런 감추어진 원망을 없애 버리고 오히려 '허다한 죄까지 덮어버릴' 수가 있습니다. 

이런 사랑 없이 남의 잘못을 찾아내려 하고 따지려는 교인 주변에는 자기에게 잘못하는 허다한 죄들이 끝없이 생길 것입니다. 
반면에 진정한 형제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성도는 아예 누가 자기에게 잘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도 할 줄 모르고 있으니, 그런 성도는 주변 사람들이 자기에게 저지르고 있는 '허다한 죄'를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초장에 다 덮어 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얼마나 차원 높고 아름다운 형제 사랑이겠습니까?

실제로도 사람이 죽기 직전에는 웬만하면 서로 다 용서하고 화해하게 됩니다. 
드라마 같은 데서 흔히 나오는 장면이지만, 비행기가 추락하게 되자 평소에는 앙숙처럼 지내던 곁에 앉은 동료에게 서로 숨겨 두었던 잘못을 고백하고 함께 꼭 끌어안고 마지막 순간을 맞이하려 하지 않습니까?
모든 것이 끝날 시간이 다 된 줄 알면 뭐 따지고 싸우고 한다는 것이 정말 아무 의미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만물의 마지막이 다가온 줄을 알고 우리 인생의 끝이 더 가깝게 온 줄을 안다면, 정말 저와 여러분은 단 한 명이라도 미워하기에는 시간이 없어도 너무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주님 재림하시기 전까지 이 교회에서 우리가 얼마나 더 같이 있을 수 있을지 누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형제에게 원망하지 아니하고 형제가 내게 저지른 죄를 용서해 주는 것도 참으로 훌륭한 사랑이지만, 아예 형제가 내게 저지른 죄를 느낄 줄 모르는 까닭에 용서해 줄 필요조차도 없이 형제의 허다한 죄를 다 덮어버리는, 이런 한 차원 더 높은 사랑까지 더욱 열심히 발휘할 줄 아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말세가 가까운 줄을 의식하는 성도는 주님께 청지기로서 결산보고 드릴 것을 교회 봉사를 통하여 준비해야 합니다. 

10절과 11절 말씀에 "10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 11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이라고 기록했습니다. 

만물이 마지막을 향하여 달리는 긴박한 시간의 흐름을 느끼는 성도들이 당연하게 하게 되는 일은 바로 '선한 청지기같이' 봉사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청지기'라는 단어는 본인에게는 재산이 없지만 오직 주인의 재산을 맡아서 그 주인의 지시에 따라서 관리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런 경우 그 주인이 오랫동안 집을 비웠다가 다시 돌아오게 되면 그 누구보다도 이 청지기가 그 주인 앞에서 그 동안의 경과보고를 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바로 그런 자세, 부활승천하셔서 이 세상을 잠시 떠나셨다가 이제 반드시 다시 돌아오실 그 주님 앞에서 그 동안 자기에게 맡겨졌던 주인의 재산을 어떻게 관리하고 얼마나 늘렸는지를 계산해야 할 청지기처럼 교회를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청지기는 우선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봉사한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설교, 교회행정, 사무, 재정, 구제, 주일학교교사, 구역장, 찬양대원 등 각각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달란트를 따라서 섬긴다는 뜻입니다. 
"각양 은혜를 맡은"이라는 말은 아까 말했듯이 아무 것도 자기의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맡기신 지식이요 능력이요 시간이요 재물이라고 생각하면서, 그처럼 주인께로부터 맡은 것을 주인의 명령을 따라 나누어주는 사람처럼 교회를 섬기고 성도들을 봉사한다는 뜻입니다. 

여러분들께서 그 맡은 직분을 위하여 내어 놓은 시간과 흘리는 땀과 바치는 헌금은 사실상 여러분 자신의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니 그런 귀중하고 아까운 것을 내어 놓아야 한다면 최소한 자랑이라도 좀 하고 칭찬이라도 좀 들으면서 해야 할 것 같지만, 우리 주인께서는 결코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것들은 오직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요, 하나님께서 맡기신 은혜일뿐이며, 그런 까닭에 그것들을 바치는 것은 결코 대단한 희생이 아니라 선한 청지기라면 그저 '저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라고 하면서 섬겨야 할 의무인 줄로만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11절은 바로 그런 청지기의 자세를 더 자세히 설명해 줍니다. 
그런 청지기는 교회 안에서 무슨 말을 할 때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즉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세로만 해야 합니다. 
봉사할 때에도 전적으로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즉 자기 것을 내어놓는다는 공명심을 조금이라도 가져서는 안 되고, 자신에게 속한 모든 것이 원래부터 아예 다 주님의 것이라고, 내 생명부터 시작해서 내 두뇌와 내 손과 발, 내 시간과 힘, 내 물질에 이르기까지 오직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시는 이 모든 것들을 가지고서 자신은 그저 사용하고 섬기고만 있을 뿐이라고 끝까지 겸손을 지켜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의 말 한마디에서부터 시작하여 모든 일거수일투족까지도 전부다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것으로만 알고 그 주인의 명령대로만 섬기는 자세 - 바로 이것이 진짜 충성스럽고 선한 청지기의 모습일 따름인 것입니다. 

바로 그런 청지기 자세를 지켜야만 비로소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는 봉사자가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만약에 내 속에 넘치는 사랑으로만 성도를 섬기려 하면 어렵기도 하거니와 하나님께 영광 돌릴 것이 없게 됩니다. 
내가 가진 것을 너그럽게 나누어 주는 자세로만 봉사하려면 참 아깝기도 하려니와 하나님께 영광 돌아갈 여지가 조금도 남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주신 사랑의 분량으로,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시는 육체의 힘과 물질의 힘과 심령의 힘으로 나누고 섬기고 봉사할 때라야만, 비로소 모든 영광이 제대로 가야 할 곳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정성스럽게 충성스럽게 섬긴 후에도 모든 영광을 오직 하나님께로 돌릴 줄 아는 것 - 이것이 바로 청지기의 너무나도 멋진 유종지미가 아니겠습니까?

'만물의 마지막 때'는 바로 그런 청지기들에게 작업 종료 시간이 될 것입니다. 
그 작업종료 신호, 바로 예수님의 재림을 알리는 나팔소리가 울리면 이제 그때까지 일해 놓았던 것을 계산하는 순서가 따라오게 됩니다. 
받았던 그대로 한 달란트만 달랑 주인에게 보이는 게으른 종, 집안 식구들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 주지 않았던 악한 청지기들이 등에 땀을 흘릴, 아니 바깥 어두운 데로 쫓겨나서 슬피 울며 이를 가는 시간이 되는 것이며, 오직 '일할 때 일하고 놀지 않았던' 성도들만이 주인의 즐거운 추수잔치에 함께 들어가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쉴 시간이 아닙니다. 
아직은 놀고 여유 부리면서 낭비하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시간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주신 사명을 따라 이 '경향 포도원'에서 열매를 거두고 이 '경향 방주' 안에 물고기를 가득 잡아 올릴 수 있도록 허용해 주신 시간이 이제 곧 끝나는, 더 이상은 일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작업 종료의 순간이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워지고 있는 시각의 흐름을 깨닫고, 이처럼 소중하게 남아 있는 시간을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주님께 칭찬 받게 될 충성과 봉사로써 부지런히 활용하는 선한 청지기 같은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미국에는 소위 '둠스데이 프레퍼스'(Doomsday Preppers)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태양 폭발, 혜성 충돌, 자기장 역전, 대륙 이동 등의 자연 재앙이나 핵전쟁, 신종 바이러스, 석유 대란, 경제 붕괴 등의 인위적 재앙으로 말미암아 지구가 멸망하게 될 날이 가까웠다고 믿고서 그날을 대비하고 있는 자들인데, 정말 온갖 것들을 다 준비하고 있습니다. 
몇 주일 정도를 버틸 수 있는 식수와 식량을 늘 보관해 놓는 정도는 그저 기본에 불과하며, 자연 상태에서 물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미리 연습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약 3개월 동안 자기 가족이 먹을 수 있는 식량을 통조림만으로 준비해 놓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폭동이 일어날 것을 대비해서 총기와 탄약을 마련해 놓고 집 자체를 요새처럼 건축하는가 하면, 그런 사람들을 위해 특수 지하벙커까지 제조 판매되고 있는 실정인 것입니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 보아도 그들은 얼마나 불쌍한 사람들입니까?
왜냐하면 그들에게 있어서 '마지막 날'이란 문자 그대로 '둠스데이' 즉 '망하게 되어 있는 운명의 날'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이 지구와 인류가 정말 그런 대재앙으로 끝나게 된다면 아무리 '대비'란 것을 해 보았자 그저 남들보다 조금 더 오래 버틸 수 있을 뿐이지 결국은 다 똑같이 멸망하고 말 것이 아니겠습니까?

성경이 예언해 주고 있는 '마지막 날'은 결코 그런 식으로 오지 않습니다. 
그 날은 '우주적 재앙'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시작되며 '인류의 자멸'이 아니라 '백보자의 심판'으로 종결될 날입니다. 
그러므로 그 날은 '둠스데이 프레퍼스'들만 살아남을 수 있는 날이 결코 아니라, 오로지 예수님을 영생의 구주로 영접하고 그 분 만날 날을 준비하며 살았던 신자들만 구원을 받을 수 있는 날인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만물의 마지막'을 향하여 성경이 카운트다운을 해 주는 그런 소리를 듣는 성도는 정말 일분일초라도 그것을 자기 정욕을 위해 쓸 수가 없습니다. 
오직 정신을 바짝 차리고 깨어서 기도하며, 열심히 뜨겁게 서로 사랑하고 용서해 주며,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되는 일에만 전심전력을 투자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내일 죽으리니 오늘 먹고 마시자." - 만물의 마지막을 준비하는 신자가 어찌 이런 불신자처럼 살아서야 되겠습니까?
혹 오늘 밤에 주님께서 나를 불러 가시거나 내일 주님께서 재림하실지 아무도 알 수 없음을 늘 명심하면서 바로 '오늘이라는 이 날' 하루하루를 주님 앞에 서게 될 준비를 할 수 있는 '내 인생의 마지막 날'처럼 소중히 선용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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