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기준은 하나님이십니다 (딤전 4:1-5)

첨부 1


기준은 하나님이십니다 (딤전 4:1-5)

1525년 6월 13일, 온 유럽을 깜짝 놀라게 하는 결혼식이 있었습니다. 이 결혼식이 놀라움을 준 이유는 결혼 당사자들이 천주교회의 신부와 수녀였기 때문입니다. 이 결혼식의 주인공은 당시 42세였던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 Martin Luther, 1483-1546>와 26세였던 <캐서린 폰 보라, Katharina von Bora, 1499-1552>였습니다. 

루터는 신부로 살다가 결혼한 이유에 대하여 늙으신 아버지께 손주를 안겨드리기 위해서라고 말했지만, 진짜 이유는 신앙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내가 가르쳐 온 것을 실천으로 확증하고 싶었다. 왜냐하면 복음으로부터 오는 엄청난 빛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소심한 채로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하기를 원하신다.> 

그는 천주교회의 신부로서 교회의 타락을 보아왔습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천주교회의 신부들은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삽니다. 독신주의를 최초로 공식화한 것은 1007년 <교황 그레고리 7세> 때였습니다. 그러나 훨씬 이전부터 수도원 등에서 독신주의를 장려해왔습니다. 

그러나 후에 이로 인한 많은 문제가 생겼는데, 육체적 욕망을 참지 못한 성직자들이 성적 추문을 만들어낸 것이었습니다. 심지어 교황과 추기경 같은 고위성직자들이 숨겨둔 여인을 두고 많은 사생아들을 낳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로드리고>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아버지는 발렌시아의 대주교였습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그의 고모가 그의 어머니라는 사실이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여동생과 관계를 가져 로드리고를 낳은 것입니다. 그 후 로드리고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사생아라고 매장되었을까요? 아닙니다. 당시 이런 타락이 일반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도 없었습니다. 

로드리고는 아버지 후광으로 불과 25세에 대주교가 되었고, 교황 <인노센트 8세, 1484~1492>가 죽은 후, 그 뒤를 이어 교황이 되었는데, 그가 바로 <알렉산더 6세, 1492-1503>입니다. 그는 교황의 자리를 얻기 위해 교황 투표에서 반대표를 던진 사람에게 12살 밖에 되지 않은 딸을 내 주고 다음 투표에서 한 표를 얻기도 했습니다. 이게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전의 천주교회의 타락상이었습니다. 

루터는 이런 타락상 앞에서 고심했습니다. 독신주의를 고집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거기에는 주님의 일에 집중하겠다는 본래적 의도보다는 오히려 독신이란 것으로 인해 사람들로부터 더 많은 존경을 받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습니다. 지금도 결혼한 개신교 목사님들보다 독신으로 사는 신부들을 더 존경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독신이 남에게 보이기 위한 억지요, 인간적인 금욕이라면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루터는 이러한 잘못된 문제를 깨뜨리기 위해 결혼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루터가 결혼을 하게 된 정말 중요한 이유는 당시 타락한 교회의 모습도 문제였지만, 독신주의가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파괴하는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본문에도 이와 비슷한 문제가 언급되고 있습니다. 3절 앞부분을 보세요. <혼인을 금하고 어떤 음식물은 먹지 말라고 할 터이나>라고 했지요? 본문 당시에 교회 안팎에는 결혼을 반대하거나 음식을 가려먹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넓은 의미에서 <금욕주의자>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당시 금욕주의자들의 예를 들면 <에세네파>를 들 수 있습니다. 에세네파는 유대교의 한 종파로서 예수님 오시기 일이백년 전에 사해 근처 <쿰란>이란 곳에 거주하였습니다. 흰옷을 입었고, 독신을 강조했습니다. 

또 <스토아철학>도 대표적인 금욕주의를 표방했습니다. 스토아철학은 키프로스에서 태어난 <제논>에 의해 주전 3세기에 시작되어 주후 200년경까지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이들은 금욕을 통해 평정, 즉 아파테이아의 상태에 이르러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금욕주의자들은 결혼만 반대한 게 아닙니다. 3절에 있는 것처럼 음식물도 금했습니다. 예를 들어 채식만 먹으라고 한다든지, 돼지고기는 먹지 말라고 하는 경우입니다. 

당시 이런 영향으로 교회 안에는 <영지주의>라는 이단이 생겼는데, 이들은 영과 육을 구분하던 당시의 이원론에 따라 육체는 물질이므로 악하다고 하면서, 악한 물질인 몸을 잘 먹이고 잘 입힐 필요가 없다고 했습니다. 또 육체의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도 잘못이었습니다. 그래서 육체를 위하는 일은 하지 않거나, 하더라도 최소한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들은 먹고 결혼하는 것은 다 육체를 위하는 일이라고 여겨 반대했습니다. 영지주의 이단은 그 후의 모든 이단들의 원조와 같은 자리에 있습니다. 

바울이 이 서신을 디모데에게 보낼 당시 많은 교인들이 혼돈을 겪었습니다. 결혼하는 사람보다 하지 않는 사람이 거룩해 보이고, 아무 음식이나 잘 먹는 사람보다는 가려 먹고, 적게 먹는 사람이 훨씬 거룩해 보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대로 하고 싶은 사람들이 많이 생기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1-2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 하셨으니,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이미 성령께서 이상한 사람들이 나타나서 혼인도 금하고, 음식물도 금할 것을 다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들은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로서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자신도 결혼하지 않은 바울 사도가 결혼하지 말라고 가르치는 이들을 비판할 자격이 있었을까요? 충분히 자격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바울이 결혼하지 않은 이유와 금욕주의자들이 결혼하지 말라고 하는 이유 사이에는 결정적 차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결혼하지 않은 이유는 백 퍼센트 주님을 위해서였습니다. 결혼에 대한 바울의 입장이 잘 나타나고 있는 곳은 고린도전서 7장입니다. 우선 바울은 모든 사람이 바울 자신처럼 결혼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7장 7절 앞부분을 보면 <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것이 억지로 될 수 없음을 밝힙니다. <....그러나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으니 이 사람은 이러하고 저 사람은 저러하니라>고 합니다. 

독신의 은사가 있는 사람에게는 가능하지만, 즉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뜨거워서 성령의 도우심으로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가능하지만, 억지로는 독신으로 사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할 수 있으면 독신으로 지내도 좋지만, 그렇지 않으면 결혼하라고 말합니다. 7장 8절 이하를 보면 <내가 결혼하지 아니한 자들과 과부들에게 이르노니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만일 절제할 수 없거든 결혼하라 정욕이 불 같이 타는 것보다 결혼하는 것이 나으니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결혼하지 말라>고 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이들은 정욕을 참지도 못하면서 억지로 결혼하지 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이 억지로 결혼하지 않는 이유는 2절에서 본 것처럼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결혼을 반대하고 음식물에 제약을 두어야 한다고 하는 사람들은 <외식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즉 속은 더러운 정욕으로 가득하면서도, 겉으로는 모든 욕망을 주님을 위해 버린 사람인 것처럼 꾸미고, 거짓으로 행세하고 있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지도 않으면서도 그런 척하여 자신을 꾸미려는 가증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양심이 죽어 자신들이 얼마나 가증한지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도 주위 사람들의 눈 때문에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언젠가 심방을 갔습니다. 예배를 드리고 나니 제가 정말 좋아하는 메뉴가 나왔습니다. 그 메뉴가 뭔지는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혹시 심방가면 그것만 주실 것 같아서요. 저는 그것을 보고 기쁨에 넘쳐 젓가락이 그 쪽으로 가는데, 같이 간 권사님이 말씀했습니다. <목사님, 저게 목사님에게는 안 좋은 음식입니다. 목사님 체질에는 안 잡수셔야 해요...>라고 했습니다. 그 순간, 같이 간 다른 분들도 다 똑같이 말씀했습니다. 그 순간 제 기쁨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젓가락 댄 것만 먹고, 손을 놓아야 했습니다. 제가 안 먹고 남긴 것을 그 분들이 다 잡수셨습니다. 

결혼도 그래요. 결혼해서 행복한 가정을 이루어야 하겠는데, 사람들이 독신자라야 거룩한 주님의 종으로 인정하니, 사람들에게 의롭고 거룩하게 보이기 위해서 억지로 결혼하지 않는 겁니다. 그리고 못 참으니, 뒤로 못된 짓을 해서 사생아들을 낳았던 것입니다. 이런 삶에는 자유가 없습니다. 다른 이들의 시선에 노예가 되고, 마음에도 없는 일을 억지로 하게 됩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교인들이 행동하는 데 있어서 자유가 없습니다. 남들 눈을 의식합니다. 마음은 원하지 않으면서도 원하는 척 행동합니다. 혹은 하고 싶은 데도 그렇지 않은 척 하면서 참습니다. 거기서 위선이 나옵니다. 영혼의 자유가 없습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의 참 자유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오늘 본문은 그 비밀을 보여줍니다. 그 비밀의 핵심이 5절입니다. 다같이 읽어보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 아멘. 결혼을 하지 않아야 거룩해지고, 특정 음식을 먹거나 먹지 않아야 거룩해지는 게 아닙니다. 모든 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해집니다.  

우선 <말씀으로> 거룩해집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허락하신 것은 모두 거룩하다는 것입니다. 
결혼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사람들을 만드신 후,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이 결혼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1장 28절을 보면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자녀를 많이 낳는 것입니다. 자녀를 낳으려면 결혼을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결혼이란 사람들이 욕망에 따라 어쩌다보니 하게 된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만드시고 배우자인 하와를 만들어 그 곁에 두셨습니다. 둘이 한 몸이 되어 행복하게 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제도요, 축복입니다. 그러므로 결혼은 그 자체로서 거룩합니다. 그러기에 결혼하지 않아야 거룩할 것처럼 가르친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정면으로 위배하는 잘못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음식도 그렇습니다. 결혼에 대해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바로 다음에 하신 말씀이 음식에 관한 말씀입니다. 창세기 1장 29절을 보면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자녀가 태어나려면 결혼을 해야 하고, 결혼해서 살려면 우선 먹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음식을 먹고 결혼하는 것은 그 자체로 하나님께서 주신 복이었습니다. 먹는 사람보다 금식하는 사람이 거룩한 것처럼 가르치는 것은 매우 잘못된 일입니다. 

둘째로, <기도로> 거룩해집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감사의 기도로 받을 때 거룩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임을 보여주는 특징적 행위 중 하나는 식사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많은 식당에서도 우리는 음식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립니다. 그 순간 그 음식은 축복이 되고, 우리를 건강하고 복되게 합니다. 

3절을 보세요. <혼인을 금하고 어떤 음식물은 먹지 말라고 할 터이나 음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 아멘. 음식물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감사함으로 먹으면, 그것이 복입니다. 음식을 먹지 않아야, 금식을 해야 거룩해지는 게 아닙니다. 

또 4절을 보세요.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할렐루야!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주신 모든 것이 귀한 줄로 알고, 감사의 기도로 받을 때 거룩해지고 복이 됩니다.  

결혼 제도를 제정하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결혼하는 사람들은 감사의 기도로 결혼해야 합니다. 음식을 먹으라고 말씀하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감사의 기도로 음식을 먹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허락하신 것을 믿고 감사함으로 먹으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그 자체가 복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결혼하지 않은 분들은 결혼해야 합니다. 그리고 혼인을 귀하게 여겨 배우자를 아끼고 존중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가정이 주는 행복을 마음껏 누리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음식도 맛있게 잡수십시오. 과식은 금물이지만, 주신 음식을 맛있게 먹고, 가려먹지 말고 건강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기서 부가적으로 말씀드릴 일이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금욕주의자는 아니지만, 절제는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혼했지만, 부부가 거룩한 목적을 위해 며칠 정도는 딴 방을 쓸 수도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7장 5절을 보면 <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가 절제 못함으로 말미암아 사탄이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기도를 위해 딴 방을 쓸 수 있습니다. 이건 절제입니다. 그러나 계속 그렇게 하면 사탄이 틈을 탈 수 있기 때문에 다시 한방에서 살아야 합니다. 음식도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오면 금식하라고 했습니다. 영적 비상상태가 오면 특별한 기도를 위해 금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금욕이 아니라, 절제입니다. 

금욕과 절제는 겉으로 보면 비슷해 보이지만, 완전히 다릅니다. 금욕은 인간적 힘으로 억지로 하는 것인 반면에, 절제는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기쁨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금욕은 어렵지만, 절제는 쉽습니다. 금욕은 남에게 자신의 거룩함을 과시하기 위해서 하는 것인 반면에, 절제는 자신이 부족하고 추하기 때문에 겸손하게 엎드리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금식도 하고, 분방도 하는 것입니다. 금욕은 하면 할수록 교만해지고, 절제는 하면 할수록 겸손해집니다. 성도는 금욕은 하지 않지만, 절제는 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정리해 봅시다. 결국 성도의 자유는 <하나님의 말씀과 감사의 기도>로부터 옵니다. 여러분, 무엇을 하실 때, 하나님의 말씀에 부합되는가를 먼저 살피십시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부합된다면 감사의 기도로 하십시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주일예배에 오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모이기에 힘쓰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선배들도 주님 부활하신 날에 모여 예배했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우리는 감사한 마음으로 모인 것입니다. 이 때 하등 불편함이 없어야 참 그리스도인입니다. 마음으로 예배에 오게 된 것에 감사하면서 참석하면 그가 자유인입니다. 만약 오기 싫은 데 사람들 눈 때문에, 옳게 보이기 위해서 온 것이라면 이미 그에게는 자유는 없습니다. 그런 신앙엔 기쁨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일에 성도들이 모여 예배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고, 내가 그렇게 할 수 있는 여건과 건강과 함께 예배할 땅끝교회 성도들이 곁에 있음을 감사한다면, 그것이 복이 됩니다. 

돈을 쓰는 것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생각되면 쓰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라면 사용해야 합니다. 그리고 사용할 수 있는 물질이 있음에 감사해야 합니다. 
직무상 부정한 돈이 주어질 때, 뇌물을 받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한다면 받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받지 않을 수 있는 믿음을 주신 데 대하여 감사의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우리 삶의 모든 기준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면 거룩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생과 성공의 기준이십니다. 하나님께 맞출 때, 비로소 자유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라면 감사의 기도로 받으면 됩니다. 성도는 매사를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합니다. 제도나 전통이 그러하기 때문에, 남들이 그것을 원하기 때문에 하지 않습니다. 성도의 자유는 말씀과 기도로부터 옵니다. 말씀과 기도에서 정당하다면, 그의 인생은 정당합니다. 

늘 하나님을 바라보고 질문하십시오. <하나님, 지금 제가 하고자 하는 일이 하나님의 말씀에 부합됩니까?> 이를 위해 늘 하나님의 말씀을 상고하십시오. 그리고 늘 감사의 기도를 드리시길 바랍니다. 오늘 이 자리에 오신 것은 백 퍼센트 하나님의 뜻이요, 감사한 일입니다.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평생을 자유하게 하시는 하나님 안에서 복되게 사시길 기원합니다. 이렇게 할 때 잠시 후에 부를 찬양의 가사처럼 우리 영혼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참 평화>가 충만할 줄 믿습니다. (김운성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