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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모하는 자에게 주시는 은혜 (룻 2: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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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모하는 자에게 주시는 은혜 (룻 2:14-16)

몸에 병이 들면 밥맛이 없어집니다. 그러면 밥을 먹고 싶은 마음까지도 없어져서 더욱 치료가 어려워집니다. 그래서 링거로 영양분을 공급하여 입맛이 돌아오게 하여 치료를 합니다. 밥맛이 돌아오면 그 사람은 살게 됩니다.   

우리 심령도 마찬가지입니다. 심령이 병들거나 약하게 되면 말씀이 맛이 없어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도 없어집니다. 

그러기에 병든 원인이 무엇인지를 찾아야 하고 그 원인에 따라 긴급 처방을 해야 합니다. 

현대인들이 주님의 은혜를 갈급해 하지 않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물질적으로 풍요한 삶을 누립니다. 의료보험제도가 잘되어 있어서 병들거나 아프면 가까운 병원에 찾아가면 얼마든지 치료를 받게 됩니다. 그러니 심각하게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그러다보니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거나 갈급해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배고픈 사람이 밥 먹고 싶듯이, 목마른 사람이 냉수를 마시고 싶어 하듯이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시107:9절에 “저가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 주심이로다”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자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그리고 영적으로 갈급해 하는 자에게 만족함의 은혜를 내려 주십니다. 믿습니까?   

창세기에 야곱을 보십시오. 그는 에서에 비하면 윤리적으로나 성격적으로나 결점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그가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고 복을 받은 것은 그 형 에서보다 몇 배나 더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에서도 하나님의 은혜의 소중함은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보다 그 사모함이 적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오늘날도 하나님의 은혜를 찾고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사람에게 놀라운 복을 주시는 분임을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봉독한 본문의 말씀을 보십시오. 룻이라는 여인이 이스라엘 땅 베들레헴에 이주해 왔습니다. 가족이라곤 홀 시어머님 한분입니다. 남편도 없고 자식도 없습니다. 그런데다 재산도 없습니다. 그래서 추수할 때에 이주해 왔기에 남의 밭에 가서 이삭을 주워 생계를 유지해야 할 형편이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그에게는 그 누구보다도 더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이 가득했습니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은 보아스라는 인물을 만나게 하십니다. 

그리고는 그 보아스를 통해 하나님의 큰 은혜를 체험하게 하십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도 하나님의 큰 은혜를 체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 주신 말씀을 가지고 몇 가지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기를 축원합니다.   

1.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본문 앞 절인 13절 첫 부분을 보세요. 
“룻이 이르되 내 주여 내가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룻은 보아스에게 말합니다.
“내가 당신께 은혜입기를 원하나이다” 

이 말은 오늘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말입니다. 오늘 우리도 룻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성도되기를 축원합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를 누가 사모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입니까? 
은혜란 단어를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사랑으로 베풀어 주는 신세나 혜택”을 말합니다. 헬라어 원어로 ‘카리스’라고 합니다. 이 ‘카리스’라는 말은 ‘값없이 주시는 선물’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조건이 없는 것입니다. 무조건적인 선물입니다. 그래서 좋은 것입니다. 받는 사람이 받을 만한 자격과 조건이 있어서 주는 것이라면 그것은 은혜가 아닙니다. 그것은 대가입니다.  

우리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것은 은혜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은혜를 누가 누릴 수 있나요? 
먼저는, 자신의 상황을 올바로 아는 자입니다. 

한마디로 자기 주제를 제대로 파악한 사람은 은혜밖에는 길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러기에 그런 사람은 은혜를 사모하고 갈급해 합니다.   

어떤 사람이 그런 사람일까요? 겸손한 사람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자신을 제대로 보지 못합니다. 자기가 대단한 사람으로 착각합니다. 그러기에 은혜를 사모하지도 않습니다. 그러기에 자기 문제를 자기 스스로 해결해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대표적인 모습이 사울왕의 모습입니다. 

그는 왕이 되기 전에는 매우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자기는 왕이 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고 숨어버렸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왕이 되고나서는 교만해졌습니다. 모든 사람이 자기를 받들고 자기 명령에 따라 움직이다 보니 자기가 대단한 사람인 것으로 착각을 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종인 사무엘도 무시하고 예배도 자기가 주관하려 하고 결국은 하나님 명령에 불순종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버림받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나온말이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그러기에 우리도 우리의 한계를 아는 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를 올바로 알고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잠18:12절을 보세요.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길잡이니라

또 약4:6절을 보세요.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룻은 자신의 형편과 처지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겸손히 낮아졌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주변 사람을 통해 그에게 놀라운 은혜를 누리게 하신 것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아는 자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은혜 베풀기를 기뻐하시는 분이십니다. 특별히 하나님은 당신의 사람들에게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노아도, 아브라함도, 모세도 하나님이 크게 쓰신 사람을 자세히 살펴보면 하나님의 은혜가 늘 함께 했던 사람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가 존재하고 있는 이유도 은혜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서 예배를 드리는 이유도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을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찬송가 197장을 보세요. 

(1)은혜가 풍성한 하나님은 믿은 자 한 사람 한 사람 
어제도 오늘도 언제든지 변찮고 보호해 주시네 

<후렴>주여 성령의 은사들을 오늘도 내리어 주소서 
성령의 뜨거운 불길로써 오늘도 충만케 하소서 아멘  

그렇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은혜가 풍성한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그 은혜를 한사람, 한사람에게 베풀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뿐만 아니라 어제도 오늘도 영원토록 변찮고 보호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믿으시면 아멘? 그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마지막으로, 마음이 가난한 자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산상 수훈의 8복 가운데 첫째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의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이 뭔가를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바로 영적으로 갈급함을 느끼며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은혜를 누릴 수 있는 것이고 그런 사람이 만족함을 누리게 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룻은 그야말로 가난한 마음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그의 주변에 보아스라는 사람을 붙여주셔서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룻이 베들레헴으로 이주해 올 때 그는 그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전혀 몰랐습니다. 그저 시어머니가 섬기는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 된다는 믿음 하나만 가지고 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사람을 통해 위대한 왕의 가문을 이루는데 사용하셨습니다. 그것이 은혜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의 손자나 증손자 중에 이 나라에 대통령이 나온다면 여러분은 그것을 어떻게 받아 드릴 것입니까? 꿈 깨시라고요?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그러기에 그것이 은혜입니다. 그러기에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고 그 은혜를 힘입으며 사시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축원합니다. 
  

2. 예상치 못한 은혜를 주시는 분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14절을 보세요. 

14 식사할 때에 보아스가 룻에게 이르되 이리로 와서 떡을 먹으며 네 떡 조각을 초에 찍으라 하므로 룻이 곡식 베는 자 곁에 앉으니 그가 볶은 곡식을 주매 룻이 배불리 먹고 남았더라   

룻은 이삭 줍는 자로서 식사자리에 초대를 받습니다. 
예상치 못한 은혜입니다. 그 자리는 밭주인인 보아스와 그 일꾼들이 먹는 자리입니다. 그런 자리에 롯이 초대를 받습니다. 

“이리로 와서 떡을 먹으며 네 떡 조각을 초에 찍으라”

그리하여 룻이 배불리 먹고 남게 되는 은혜를 체험하게 하십니다. 말도 안 되는 은혜입니다. 상상할 수도 없었던 일입니다. 그런데 그런 은혜가 실제로 임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도 초대받았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주님의 잔치 자리에 저와 여러분을 초대하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넘치도록 채워주시는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성경에 우리 주님을 자세히 살펴보세요. 

대부분 혼자 식사하지 않고 늘 함께 하십니다. 제자들과 함께 떡을 뗍니다. 그리고 죄인들과 세리들도 초청합니다. 유대인들이 제일 싫어하는 세리들, 그들의 초청을 받아 그들의 집에 들어가기도 하십니다. 

뿐만 아닙니다.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는 잔치를 베풀기도 합니다. 그 자리에 참여한 사람들을 보세요. 다 배불리 먹고도 남게 하십니다. 

막6장 42절 이하를 보세요. 

42 다 배불리 먹고 43 남은 떡 조각과 물고기를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44 떡을 먹은 남자는 오천 명이었더라

아마도 한국어 성경 중에 성경구절이 제일 짧은 구절 하나를 꼽으라면 막6:42절일 것입니다. 

/다 /배불리 /먹고/ 

왜 성경의 장절을 구별할 때 이 짧은 구절을 한절로 만들었을까요? 성경기자가 만든것이 아니고 후대 성경학자들이 장절을 나누어 놓은 것인데 왜 이렇게 짧은 절을 만들었을까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 자리에는 누가 참석했을까요? 배고프다고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생각하고 집으로 돌아간 사람은 먹지 못했을 것입니다. 

오직 말씀의 은혜를 사모하는 사람만이 끝까지 남았다가 이 식사자리에 초대되었고 그리고 다 배불리 먹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자세히 보세요. 
하나님은 보아스라는 사람을 통해 우리 예수님을 보여주시고 계십니다. 

15~16절을 보세요. 

15 룻이 이삭을 주우러 일어날 때에 보아스가 자기 소년들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그에게 곡식 단 사이에서 줍게 하고 책망하지 말며 
16 또 그를 위하여 곡식 다발에서 조금씩 뽑아 버려서 그에게 줍게 하고 꾸짖지 말라 하니라 

율법에 보면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은 추수철이 되어도 거둘 곡식이 없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이 최소한의 삶을 살도록 기회를 주라는 계명이 있는 것을 성경에서 보게 됩니다. 

레19:9절 이하를 보세요. 

9 너희가 너희의 땅에서 곡식을 거둘 때에 너는 밭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네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10 네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네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거류민을 위하여 버려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추수할 때 가난한 사람이나 나그네를 위해 다 추수하지 말고 남겨두고 땅에 떨어진 이삭은 줍지 말고 남겨 두라는 것입니다. 왜죠? 가난한 자들을 배려한 것입니다. 보아스는 그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보아스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일꾼들에게 명령하여 룻이 곡식 단 사이에서 줍게 합니다. 그리고 그를 책망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원래는 추수가 다 끝난 후에 이삭을 줍는 것이 원칙입니다. 그런데 곡식 단을 다 거두지도 않았는데 그 사이에서 주울 수 있게 은혜를 베푸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그를 위해서 곡식 단에서 조금씩 뽑아 일부러 버리게 합니다. 왜죠? 그냥 한단 가져가라 하든지 아니면 곡식을 한 자루 담아서 주면 좋을 텐데 왜 이렇게 하는 것일까요? 그것도 그를 배려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룻에게는 일하여 얻는 보람을 누리게 하는 것이고 자존감을 상하게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얻은 이삭이 한 에바쯤 되었다는 것입니다. 한 에바는 22리터, 즉 한말 정도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풍성한 것입니까?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도 그러한 은혜가 임하고 있음을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일한 만큼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일하지 않음에도 넘치도록 베풀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를 대하실 때 일한 양을 보지 않고 우리 생명과 삶을 보십니다. 그래서 은혜를 베풀고 긍휼을 베푸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성도 여러분! 사도바울도 보세요.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에게 육체의 가시를 주셨습니다. 

그 문제로 여러 번 기도했습니다. 너무 고통스럽고 힘들기에 기도를 했는데 하나님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라고 응답하셨습니다. 그 가시도 은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는 그 문제로 기도하지 않고 감사함으로 살았습니다. 

그 가시 때문에 힘들기는 하지만 그 가시로 인해 자신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 가시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나중에 고백하기를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한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그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은 룻에게 보아스를 통해 은혜를 넘치게 베푸셨듯이 예수님을 통해 우리가 상상치도 못한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 은혜>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나를 지으신 이가 하나님 나를 부르신 이가 하나님
나를 보내신 이도 하나님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
나의 달려갈 길 다가도록 나의 마지막 호흡 다하도록 
나로 그 십자가 품게 하시니 나의 나된 것은 다 하나님 은헤라
한량없는 은혜 갚을 길 없는 은혜 내 삶을 에워싸는 하나님의 은혜
나 주저함 없이 그 땅을 밟음도 나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은혜  

그 은혜가 여러분위에 넘치기를 축원합니다. 
(최일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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