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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가 하나님만 의지하니 (막 6:14-29, 시 5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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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하나님만 의지하니 (막 6:14-29, 시 56:1-4)

대부분의 교우들이 아시듯이, 지난 초여름에 제 아내가 갑작스럽게 당뇨병에 걸렸습니다. 처음에는 체중도 급격하게 줄고 그 영향으로 기운도 차리지 못했습니다만, 차츰 나아져서 이제는 좋은 상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기도해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몇 달 지나고 보니, 갑자기 아내에게 찾아온 반갑지 않은 손님이 저희 내외로 하여금 영적으로나 육신적으로 지난 날을 돌아보고 앞날을 준비하도록 도와주는 은총이 되고 있음을 느낍니다. 물론 당사자인 아내에게는 그 병 때문에 불편한 점이 여러 가지 생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희 두 사람은 그 병이 가져다 주는 불편함보다는 유익을 더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감사의 조건으로 삼고 있습니다.

건강한 육신을 위해서도 늘 자기 몸 상태를 살펴보고 진단해야 하지만, 내면의 건강을 위해서도 역시 늘 자기 마음을 살펴보고 진단해야 합니다. 마음을 진단하는 첫 번째 방법은 자기 마음이 평안한지 불안한지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분주하고 힘겨운 가운데서도 평정지심을 유지하고 있다면 마음 상태가 건강한 것이고, 별일도 없는데 괜히 마음이 불안하면 건강하지 않은 것입니다. 둘째는 마음에 기쁨이 있는지 울적한지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특별히 좋은 일이 없어도 마음이 즐거우면 건강한 것이고, 특별히 어려운 일이 없는데도 짜증스럽거나 걱정스러우면 건강하지 못한 상태입니다. 셋째는 마음에 만족이 있는지 아니면 허전한지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딱히 많이 가진 것도 없는데도 마음에 부족함을 느끼지 않는다면 건강한 것이고, 딱히 부족한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꾸 뭔가를 더 원한다면 그 마음은 병든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가 예의 주시해야 할 또 하나의 마음 상태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마음속의 두려움입니다. 여러분, 자기 자신에게 한 번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내 마음속에는 어떤 두려움이 웅크리고 있는가?’ ‘두려움이 있다면, 나는 왜, 무엇 때문에 그것을 두려워하고 있는가?’ 사람은 누구나 크고 작은 두려움을 품고 살아갑니다. 그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두려움의 유무가 아니라 두려움의 정체입니다. 만일 우리가 마땅히 두려워해야 할 것을 두려워한다면 별 문제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전혀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면, 혹은 도에 지나치게 두려워하고 있다면, 그 마음 상태는 건강하지 못한 것입니다.

사고나 질병에 대한 두려움, 일에 실패할 것에 대한 두려움, 사람에게 외면당할 것에 대한 두려움, 직업을 잃거나 친구를 잃을 것에 대한 두려움, 범죄나 전쟁에 대한 두려움, 천재지변에 대한 두려움 등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매일 같이 하늘이 무너질까 땅이 꺼질까 두려워하면서 살아간다면 그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사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모든 사람에 대한 지나친 경계심을 품고 있다면 그것 역시 심각한 문제입니다. 실패할까봐 두려워 어떤 일도 시작조차 하지 못한다면 그것 역시 심각한 문제 즉 마음의 질병을 앓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행복할 수 없습니다.


2.

오늘 우리는 마가복음 6장 본문에서 헤롯이란 인물과 마주치게 됩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의 이름은 헤롯 안티파스(Herod Antipas)입니다. 아기 예수 탄생 이야기에 등장한 헤롯 대왕 사후에 그의 세 아들이 유대 땅을 분할 통치하게 되었는데, 헤롯 안디파스는 갈릴리 지역을 통치하던 분봉왕이었습니다. 그는 한 나라의 절대 권력을 행사하는 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누구보다 더 극심한 두려음에 사로잡혀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에게 치명적인 과오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본부인을 내쫓고 이복 동생인 헤롯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를 빼앗았습니다. 그 죄악으로 인해서 헤롯 안티파스는 세례 요한에게 호된 질책을 받았습니다. 분노를 이기지 못한 헤롯은 요한을 잡아 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러나 의롭고 성스러운 요한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그를 죽이지는 못했습니다. 

요한이 옥에 갇혀 살아가던 어느날 헤롯의 생일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그날 헤로디아의 딸이 어찌나 춤을 잘 추었든지, 헤롯은 공개석상에서 그 소녀(의붓딸)에게 무슨 소원이든지 다 들어주겠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소녀는 어머니의 사주를 받아 세례 요한의 머리를 달라고 했습니다. 순간 헤롯은 무척 당혹스러웠습니다. 요한을 처형하자니 그로 인해 백성들의 거센 반발을 살까 두렵습니다. 그렇다고 요한을 살려주자니 자기가 공개적으로 약속한 것을 지키지 안게 되어서 체면이 짓밟히고 권위가 땅에 떨어질 것이 두렵습니다. 이래도 두렵고 저래도 두렵습니다만, 당장의 두려움이 헤롯을 더 강하게 지배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세례 요한을 처형한 것입니다. 

당장의 두려움을 피해보려고 일을 저질렀지만, 헤롯의 마음속에는 여전한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낮에는 요한을 따르던 수많은 백성들의 원성과 분노를 생각하며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밤에는 혹시라도 요한이 살아나서 그의 앞에 나타날까 두려워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렇게 염려하고 두려워하던 일이 일어난 것만 같았습니다. 사람들은 놀라운 기적을 행하고 다니시는 예수에 대해 “세례 요한이 살아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헤롯 자신도 예수에 대한 소문을 듣고는 자기가 죽인 그 하나님의 예언자가 살아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더 큰 두려움에 휩싸이게 되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아무리 잔치를 벌인든 그에게 기쁨이 있었겠습니까? 아무리 부귀영화를 누린들 그에게 만족이 있었을까요? 아무리 강한 군사력을 보유한들 그에게 평화와 안정이 있었을까요? 비록 로마 황제의 재가를 받아 이스라엘의 한 부분만 다스리는 분봉왕이었지만, 어쨌든 헤롯은 자기가 통치하는 땅에서는 아무것도 두려워할 것 없는 최고 권력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세상에서 가장 큰 두려움에 싸여 살아가는 사람이었습니다. 오히려 힘 없고 가난한 백성들에게 두려움이 더 많아야지, 어째서 최고 권력자인 그가 누구보다 더 큰 두려움에 짓눌려 살아가게 되었습니까?


3.

죄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그를 위협했기 때문에 두려웠던 것이 아닙니다. 무언가를 크게 잃었기 때문에 두려웠던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최고 권력자인 헤롯을 두려워했습니다. 그에게는 여전히 강력한 군사력과 든든한 정치적 기반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그토록 두려움에 휩싸여 살아간 까닭은 외부의 위협이 있었거나 어떤 위험에 직면했기 때문이 아니라 동생의 아내를 가로챈 죄와 그 죄를 감추려고 하나님의 예언자를 가두고 죽인 죄가 그의 영혼을 병들게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여러분, 죄는 반드시 값을 치릅니다. 훗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도 당연히 죄값을 치르겠지만, 사실은 죄를 짓는 순간부터 그 값을 치르기 시작합니다. 두려움이 바로 죄값입니다. 사람은 죄를 지으면 자기가 지은 죄로 인해 두려워하기 시작합니다. 선악과를 따먹는 불순종의 죄를 지은 아담을 하나님께서 찾으셨을 때에 그가 대답했습니다. “저는 벗은 몸인 것이 두려워서 숨었습니다.”(창 3:10) 에덴 동산에서 벗은 몸은 두려워할 일이 아니었습니다. 죄 짓기 이전에 하나님을 향한 아담의 마음은 두려움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어서 두려워하게 된 원인이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죄’였습니다.

죄 짓는 데에 이력이 난 사람은 두려움도 없는 것 같습니까? 전과 몇 범 되는 사람은 평범한 사람보다 더 강하고 배짱이 두둑한 것 같죠?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거칠게 폭력을 휘두르는 것은 용감하기 때문이 아니라 미련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의 내면에는 누구보다도 더 큰 두려움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두렵지 않아서 죄를 짓는 것이 아닙니다. 두려우니까 또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가 추가될수록 두려움도 더 커집니다. 결국 그 두려움이 그의 내면을 얼어붙게 만들고, 마음 속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는 모든 요소를 파괴합니다. 그래서 아무리 즐겨도 기쁨이 없고, 아무리 움켜줘도 만족이 없습니다. 남들처럼 행복하고 싶은데, 자신이 지은 죄가 자기의 영혼을 병들게 한 탓에 기쁨과 만족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더 큰 범죄를 저지르는 것입니다. 악순환이 지속되는 것이죠.

뫼비우스의 띠 같이 끝없이 반복되는 이 죄와 두려움의 악순환을 끊는 길은 오직 회개의 길 밖에는 없습니다. 더 늦기 전에 자신의 죄를 십자가 앞에 가지고 나아와야 합니다. 우리의 죄값을 대신 치러주기 위해서 고난과 죽음의 길을 가신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십자가의 은총은 용서의 은총입니다. 십자가의 능력은 죄로 인한 모든 두려움을 물리치는 능력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를 죄에서 자유케 합니다. 자유케 되니, 즉 어느 것에도 얽매이지 않으니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않습니다. 성공에 집착하지 않으니 실패할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인기에 집착하지 않으니 잊혀질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돈에 집착하지 않으니 가난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생명에 집착하지 않으니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진정한 용기는 자유함에서 오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통해 주어지는 용서의 은총은 우리를 자유케 하고 마침내 우리 안에 있는 모든 두려움을 내어쫓습니다. 두려움이 물러간 자리에 기쁨과 만족이 채워지고 비로소 행복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4.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를 죄에서 자유케하시는 하나님은 또한 생활 속에서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시편 23편을 쓴 다윗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이었습니까?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십니다. 함께 하심으로 담대하게 하시고 지켜주심으로 용기 있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우리가 두 번째 본문으로 택한 시편 56편은 다윗이 사울의 칼을 피해 블레셋 지역에 가서 포로가 되었을 때에 지은 시입니다. 그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같은 곳에서 다윗은 다음과 같이 기도합니다.

하나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사람들이 나를 짓밟습니다. 온종일 나를 공격하며 억누릅니다. 나를 비난하는 원수들이 온종일 나를 짓밟고 거칠게 나를 공격하는 자들이 참으로 많아지고 있습니다. 오, 전능하신 하나님! 두려움이 온통 나를 휩싸는 날에도, 나는 오히려 주님을 의지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만 찬양합니다. 내가 하나님만 의지하니, 나에게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육체를 가진 사람이 나에게 감히 어찌하겠습니까?(시 56:1-4)

여러분, 다윗의 고백이 참으로 귀하지 않습니까? “내가 하나님만 의지하니, 나에게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육체를 가진 사람이 나에게 감히 어찌하겠습니까?” 이 고백의 끝에 붙은 물음표의 의미는 느낌표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 하나님께서 지켜주시는 사람은 어느 누구도 그를 두려워 떨게 하지 못한다는 확신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다윗의 하나님은 또한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오늘도 우리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찌라도 결코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살아가도록 지켜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만 의지하며 살아갑시다. 세상의 권력을 좇아가고 돈의 힘을 의지하고 쾌락에서 기쁨과 만족을 찾다 보면 헤롯 같이 죄를 반복하게 되고 결국 그처럼 두려움에 휩싸여 살아가게 됩니다. 그런 어리석음을 범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모든 그릇된 집착과 욕심에서 우리를 자유케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만 구하시기 바랍니다. 두려움을 내어쫓는 완전한 사랑,(요일 5:18) 그 완전한 사랑의 주인이신 주님만 의지하며 살아가고 그 주님의 뜻대로 거룩하게 살아가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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