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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장자권을 차지하라1 : 장자권을 차지한 야곱 (창 25:2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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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권을 차지하라1 : 장자권을 차지한 야곱 (창 25:27-34)
 
 
❚장자권

저는 아시다시피 4형제 중 4남, 막내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부터 막내아들이라고 부모님의 사랑과 귀여움도 받고 자랐지만 솔직히 불만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특히 사탕이나 과자를 나누어 줄 때 나는 3개 주는데  큰형은 장남이라고 두 개 더 주고, 둘째 형은 한 개 더 주고, 셋째 형은 저와 똑같이 3개 주는데(이건 도대체 무슨 기준일까요?) 아주 불만이 많았습니다. “형이면 형이지 왜 사탕을 더 주냐? 장남이면 다냐?” 이런 불만 말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은 어떻습니까? 

물론 지금은 자녀를 한 둘만 낳아서 이런 일이 별로 안 일어나겠지만 과거 자녀들을 많이 낳고 형제들이 아주 많을 때 여러분의 집안도 장남은 더 아끼고 더 많이 주는 일이 없었는지요. 특히 어려운 살림에 자식들을 다 공부시키기 어려우니 장남은 대학 보내고 동생들은 못 보내는 일도 있었지요. 그러면서 늘 부모님들 하시는 말씀이 “장남이 잘 돼야 집안이 잘 된다”였습니다. 아마 여러분이 장남으로 자랐다면 이런 혜택을 조금은 더 봤을 것이고, 동생으로 태어났다면 혹시 저처럼 작은 희생(?), 저야 사탕 몇 개 덜 받는 정도였지만 혹시 좀 더 큰 희생을 치러야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책을 읽다가 이런 내용을 발견하게 됩니다. 조선 왕조 500년에 임금이 27명이었는데 그 중에 장남이 왕이 된 경우는 단 7명뿐이었다는 것입니다. 조선 시대는 철저하게 왕위를 장자가 승계하던 나라인데도 장남이 왕이 된 경우가 단 7명뿐이라니 참 이상하지요? 그러고 보니 우리가 잘 아는 태종이나 세종 등 조선의 거의 모든 왕이 다 장남이 아니네요. 최근에 <왕이 못 된 세자들>이라는 책도 나왔는데 이 책에 보면 다 까닭이 있답니다. 

조선에서 장남을 책봉하는 세자라는 자리는 참 고통스러운 자리였다는 겁니다. 세자가 왕위에 올랐을 경우를 두려워하는 세력들로부터 음해를 당하고, 다른 왕자들과는 필연적으로 정적이 돼야 했으며,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가 아닌 아버지의 여인들과도 불편한 관계에 놓여야 했다는 것입니다. 또 세자가 왕위에 오르기 위해 거쳐야 할 글공부와 무예 등 수행과정도 만만치 않았고요. 이 모든 정치적 술수와 수행 과정을 이기고 살아남아야 왕위에 오를 수 있었기에 세자 자신의 잘못도 있었겠지만 많은 세자들이 우여곡절 끝에 왕위에 오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조선 시대만 그런 것이 아니라 성경에도 장자들이 좀 별 볼 일 없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위대한 사람들 중에 아브라함, 야곱, 요셉도, 다윗, 솔로몬도 다 장자가 아닙니다. 예수님도 아닌가요? 아! 예수님은 장자네요. 예수님만 빼고 성경의 거의 모든 인물들, 위대한 신앙인들은 장자가 아닌 차남이나 저 같은 막내아들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고 제가 얼마나 위로가 되던지요. 장남이 아니라 막내로 태어난 억울함이 눈 녹듯 씻어졌습니다. 

여러분, 제가 지금 무슨 말을 하려는 것 같습니까? 장남은 다 잘 못 되더라 하는 말일까요? 여러분 중에 장남들은 상당히 기분 살짝 나쁘지 않으세요? 하지만 제가 지금 장남 차남 따지면서 형제들 간에 분란을 일으키려는 것이 아니라는 것 여러분도 잘 아실 것입니다. 이런 현상, 즉 장남이 생각보다 잘 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 또 장남 아닌 차남이나 동생들 중에 잘 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은 무엇을 말해 줍니까? 물론 혈통적 장자권이 중요합니다. 저는 형제들 사이에도 질서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동생은 형을, 아우는 윗사람을 존중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런 혈통적 장자권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영적 장자권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어떤 교훈을 얻게 됩니까? 첫째, 혈통이나 세상적인 조건과 환경, 세상적인 능력을 의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둘째, 그렇다면 세상의 조건이나 환경, 능력이 아닌 무엇을 의지해야 하는가?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영적인 능력을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오늘부터 새로운 시리즈 설교인 <장자권을 차지하라!>라는 주제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오늘부터 4주 동안 우리는 성경에 나오는 위대한 인물들 중에 장자가 아닌 사람들을 살펴볼 것입니다. 또 혈통적으로는 장자인데 결국 실패하고 만 사람도 살펴볼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장자권은 세상적 혈통적 장자권이 아니라 영적인 장자권입니다. 우리는 영적인 장자권을 사모해 결국 하나님께 크게 쓰임 받고 존귀하게 쓰임 받은 사람들이 누구인지 알아볼 것입니다. 

거꾸로 혈통으로는 장자로 태어났지만 결국 이 장자권, 하나님이 주신 장자권, 영적인 장자권을 소홀하게 여겨 실패한 사람도 알아볼 것입니다. 우리가 이 사람들에 대해 살펴보고 나면 여러분이 장남이든, 차남이든, 막내든, 또는 아들이든 딸이든 이 모든 것이 다 상관없게 됩니다. 가난한 집안에 태어났든 부잣집, 왕후장상의 집안에 태어났든 다 상관없습니다. 이 모든 조건과 환경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진정한 장자권을 누리게 되어 존귀한 하나님의 자녀로 쓰임 받는 방법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장자권을 차지한 야곱

오늘은 그 첫 번째 시간으로 <장자권을 차지한 야곱>에 대해 말씀을 나누려 합니다. 야곱이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여러분도 잘 아실 테니 길게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야곱은 이삭과 리브가 사이에서 아들로 태어나지요. 형인 에서와는 쌍둥이 형제로 태어났는데 우리 교회에도 쌍둥이가 있습니다만 대개 쌍둥이는 불과 몇 분 차이, 길어야 한 시간 차이로 태어나지 않습니까? 형 에서와 동생 야곱은 몇 분 차이로 태어났는지는 모르지만 이런 이야기만 나옵니다. 본문 바로 앞 24~26절 말씀입니다.

24 그 해산 기한이 찬즉 태에 쌍둥이가 있었는데 25 먼저 나온 자는 붉고 전신이 털옷 같아서 이름을 에서라 하였고 26 후에 나온 아우는 손으로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으므로 그 이름을 야곱이라 하였으며 리브가가 그들을 낳을 때에 이삭이 육십 세였더라

쌍둥이 형제 중에 먼저 나온 자, 즉 형은 붉고 전신이 털옷 같아서 이름을 ‘에서’라고 붙입니다. ‘에서’의 뜻은 ‘붉다’ 혹은 ‘털이 많다’는 뜻입니다. 이 에서는 여러분도 잘 알다시피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팔아넘긴 사람입니다. 왜 팔아넘겼는지, 팔아넘긴 결과가 얼마나 무서운 지는 다음 주에 나누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한편, 나중에 태어난 동생은 어머니의 뱃속에서 나올 때 손으로 형 에서의 발꿈치를 잡고 나왔기 때문에 ‘야곱’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지요. 야곱이라는 이름은 ‘움켜쥐다’ 혹은 ‘속이다’라는 뜻입니다. 이 이름 자체가 야곱이 어떤 사람인지를 말해주지요. 야곱의 타고난 집념과 욕심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욕심이 많고 집념이 강했으면 태어날 때부터 형의 발꿈치를 잡고 나왔겠습니까? “어딜 먼저 나가? 내가 먼저 나갈 거야” 이런 뜻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하나 물읍시다. 욕심이나 집념이 나쁜 것입니까? 나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문제는 그 집념과 욕심이 육신의 욕망이나 자신만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것이 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욕심이 너무 지나치거나 잘못된 방향으로 집념을 가지면 안 되지만 욕심이나 집념이 반드시 나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아이들을 보세요. 공부도 욕심 있는 애들이 알아서 하지요? 백날 부모가 “공부해라, 제발 공부 좀 해라” 잔소리해도 아이들 자신이 공부에 욕심 없으면 절대  합니다. 반대로 부모가 제발 공부 좀 그만 하고 자라고 해도 공부 욕심이 큰 아이들은 안 자고 공부합니다. 

세상에 욕심이 없으면 무엇을 하겠습니까? 집념이 없고 의욕도 없으면 무엇을 잘 해낼 수 있겠습니까? 제 얘기를 잠깐 하지요. 제가 어렸을 때 가장 많이 듣던 소리가 “고집 세다, 욕심이 많다”였습니다. 지금 생각해 봐도 어렸을 때의 저는 고집도 꽤 세고, 욕심이 아주 많았던 것 같습니다. 남에게 지고 사는 게 제일 싫었습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꼭 차지하고야 마는 성격이었습니다. 그런데 돌아보면 이 집념이나 욕심이 괜찮은 방향으로 발전된 것 같습니다. 만약 나쁜 방향으로 발전했다면 지금 이 자리에 서 있지도 못하겠지요. 틀림없이 잘못된 길로 갔을 것입니다. 그것도 아주 멀리 멀리 말입니다. 

그런데 자라면서 긍정적인 방향으로 발전했습니다. 저를 발전시키고 더 나은 길로 가게 해주었습니다. 지금도 저는 욕심이 많은 사람입니다. 운동을 해도 꼭 이기고 싶고, 뭘 해도 끈질기고 집념도 강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면서 이 욕심과 집념을 좋은 방향으로 발전시키는 지혜를 얻었습니다. 아무리 제가 하고 싶어도 참을 줄 아는 훈련도 받았고, 남을 배려하고 함께 가는 방법도 배워 지금은 좋은 방향, 긍정적인 방향에서 집념을 가지고 끈질기게 추진합니다.

야곱도 타고난 집념과 욕심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집념과 욕심이 죄 짓는 일이나 나쁜 방향이 아니라 장자권이라는 데 집중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야곱은 세상에서 장자권이 가장 소중하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차지하기 위해 어떤 방법과 수단도 안 가린 사람입니다. 물론 형을 속이고 아버지를 속인 그의 행동이 절대 정당화 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성경이 왜 야곱을 위대한 신앙의 인물로 평가하는 것일까요? 비록 그가 쓴 방법이 옳지 않을지 몰라도 그의 모든 집념과 모든 욕심이 오직 이 장자권이라는 데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 어떤 사건이 벌어집니까? 오늘 본문을 다시 한 번 봅시다. 27절과 28절을 보면 에서는 사냥꾼이었고 아버지 이삭이 에서가 사냥한 고기를 좋아해서 그날도 하루 종일 들에 나가 사냥을 하다 돌아오게 됩니다. 너무 지치고 피곤하고 배가 고픈데 마침 동생 야곱이 팥죽을 쑤고 있었지요. 이 팥죽은 팔레스틴 지방에서 나오는 적갈색의 렌즈 콩을 가지고 끓인 진한 수프입니다. 그러니 팥죽이라기보다는 콩죽에 가깝습니다. 야곱이 이 팥죽(콩죽)을 끓인 이유가 무엇일까요? 자기가 먹으려고 끓였을 수도 있지만 어쩌면 형 에서의 성격을 잘 알고 있기에 처음부터 의도를 가지고 형 에서가 사냥을 마치고 돌아올 딱 그 타이밍에 맞춰 더 맛있게 끓였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야곱은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사람입니다. 과연 에서는 “그 붉은 색 나는 팥죽 너무 맛있게 보이는데 나한테 좀 주라”고 하지요. 그러자 야곱은 기다렸다는 듯이 “좋다, 형한테 이 맛있는 팥죽을 줄 테니 그러면 형의 장자의 명분을 나에게 팔라”고 말합니다(31절). 형의 장자의 명분, 그 중요한 장자권을 고작 팥죽 한 그릇과 바꾸자는 참으로 어이없는 거래를 시도한 것이지요. 그런데도 형 에서는 그 거래를 얼른 받아들여 장자의 명분을 팝니다. 32절을 볼까요?

에서가 이르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지금 배고파서 죽을 지경인데 그까짓 장자권이 나한테 뭐 그리 중요하냐는 겁니다. 이에 야곱은 아주 주도면밀하고 약은 사람이라서 형에게 “나에게 맹세하라”고 재확인 합니다. 그리고는 형 에서는 정말 동생에게 “내 장자의 명분을 이 팥죽 한 그릇에 너한테 판다. 진짜 너 가져라!” 하고 맹세한 후 팥죽 한 그릇을 먹어치우지요. 그런데 성경은 뭐라고 평가합니까? 마지막 34절을 봅시다.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

이 거래에서 야곱이 수지맞고 에서가 손해 봤다고 했습니까? 에서가 바보 같다고 합니까? 아닙니다. 아주 결정적인 평가 한 마디가 나옵니다.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 이 말이 너무나 결정적입니다. 에서의 가장 큰 잘못은 자신이 가진 장자의 명분을 소홀히 여기고 우습게 여겨 팥죽 한 그릇과 맞바꾼 것입니다.

그럼 도대체 이 장자의 명분, 장자권이 뭐기에 그렇게 중요하다는 것일까요? 당시 장자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가장이 되어 가문을 대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나라와 비슷하지요. 그래서 신명기 21장은 장자에게 다른 형제들보다 두 배의 몫의 유산을 물려줘야 한다고 규정합니다(15~17절). 그런데 여러분, 이 권위나 재산보다 더 중요한 장자의 권리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그 가문에 주시는 영적인 축복의 후계자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에서는 육신적인 장자의 특권을 무시한 것도 문제지만 영적인 장자의 특권을 무시한 것이 더 큰 문제인 것입니다. 결국 이 팥죽 사건은 에서와 야곱 자신만 아니라 그 후손 모두의 미래를 크게 바꾸어 놓는 엄청난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장자권의 교훈

오늘 우리는 야곱이 이렇게 장자권을 간절히 사모하고 귀히 여겨 결국 차지하고 마는 모습을 보면서 세 가지의 중요한 신앙적인 교훈을 얻게 됩니다.

첫째, 신앙도 욕심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거룩한 욕심 말입니다. 장자권을 소중히 여기고 어떤 방법으로든 그 장자권을 차지하려 든 야곱은 정말 엄청난 욕심쟁이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야곱을 보면서 “사람이 왜 이렇게 욕심이 많아?” 하고 비웃고 마는 실수를 범하지는 않는지요? 우리는 오늘도 여전히 아주 소박한 욕심도 못 내면서 늘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이왕 예수 믿었으면 야곱처럼 “하나님, 제가 하나님 제일 잘 믿는 사람 되고 싶습니다.” 하는 욕심은 가져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축복도 욕심입니다. “기왕 예수 믿는 거 예수 제일 잘 믿는 사람 되어서 축복도 제일 많이 받고 싶습니다.” 이 정도의 욕심은 좀 가져봐야 하는 것 아닙니까?

둘째, 적극적인 자세와 집념입니다. 야곱은 이 점에 있어 정말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사람이었습니다. 마태복음 11:12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침노(侵擄)란 남의 나라를 쳐들어가서 빼앗는 것을 뜻합니다. 주님이 왜 천국을 침노해서 빼앗아야 한다고 말씀한 것일까요? 천국은 그만큼 적극적인 자세로 차지하려는 자에게만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신앙 가지고는 절대 천국을 얻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신앙생활 어느 정도 유지하고 살다 보면 언젠가 천국 가겠지...” 천만에요. 절대 못 갑니다. 천국은 절대 그런 식으로 주어지지 않습니다. 

천국은 야곱이 장자권을 사모한 것처럼 천국을 간절히 사모하고 천국을 얻기 위해 모든 것을 바치고 투자할 각오가 된 자, 즉 침노하는 자에게만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축복도 마찬가지입니다. 은혜도 마찬가지입니다. 간절히 사모하고 집념하는 사람, 야곱처럼 그것을 빼앗아서라도 차지하려는 사람, 침노하는 자가 아니면 결코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 오늘 우리가 사모해야 할 우리의 장자권은 무엇인가? 오늘날의 장자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이 권세는 이 특권은 세상 그 어떤 권세나 특권과도 바꿀 수 없는 가장 소중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냥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마시고, 둘째나 막내 되지 말고, 반드시 장자가 되셔야 합니다. 누구보다 우대받고, 누구보다 존귀하며, 다른 어떤 성도들보다 권세와 특권을 많이 받아 누리는 장자가 되기 바랍니다. 기왕 예수 믿고, 기왕 구원 받고, 기왕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데 둘째나 막내가 되어 하나님의 권세와 특권을 덜 누리게 된다면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하나도 안 억울하다고요? 난 욕심도 없고 지금 이대로가 좋다고요? 천만에요. 억울해야 합니다. 

야곱처럼 “억울해서 못살겠다! 바꿔보자! 바꿔보자!” 해야 합니다. 어떻게든 이 장자의 권리를, 그 권세와 특권을 차지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장남 차남, 아들 딸, 가난과 질병과 고통 등 세상의 모든 조건과 환경과 능력을 뛰어넘는 놀라운 은혜를 받게 됩니다. 이게 바로 장자권입니다. 따라합시다. “기왕 예수 믿은 거 제대로 믿어보자! 기왕 하나님의 자녀 된 거 장자가 되자!” 저와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의 장자가 되어 놀라운 축복과 더 큰 권세를 풍족히 누리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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