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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마라를 주신 하나님 (출 15:2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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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를 주신 하나님
출애급기 15:22-27

이집트에서 총리가 된 요셉의 초청으로 족장 야곱의 일족 70명이 이집트로 이주하여 살게 됩니다. 족장 야곱의 일족이 처음에 이집트로 내려갔을 때에는, 요셉이 이집트의 국무총리로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달리 말하면 요셉이 이집트의 권세자였기 때문에, 야곱의 일족은 이집트 왕조로부터 많은 혜택을 받고 살 수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요셉이 죽고 나서 요셉을 알고 있던 파라오도 죽자, 이집트 사람들과 이집트의 지배자 파라오는 족장 야곱의 자손들 즉, 이스라엘 자손들을 그들의 잠정적인 적으로 여기게 되었고, 그 결과 이스라엘 자손이 많은 부당한 대우를 받다가, 모세가 출생할 때에 이르면, 이집트의 지배자 파라오는 이스라엘 백성을 아주 자기들의 적으로 여기거나, 가장 어려운 막일을 감당하는 천역을 감당하는 노예로 삼았습니다. 야곱의 일족이 이집트에서 거하는 도안 큰 민족을 이룬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서 역사가들은 이집트 땅을 이스라엘 자손의 인큐베이터라고 하는 분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430년 간의 이집트에서의 생활은, 이집트의 총리로 요셉이 활동하던 때를 제외하고는 많은 기간이 파라오의 핍박과 박해를 받으면서 감당한 노예생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집트 땅에서 파라오의 노예로 살아가는 이스라엘을 야훼 하나님께서 지도자 모세를 보내서 구원했습니다. 이집트의 지배자 파라오는 자기와 국가의 귀중한 재산이라고 할 수 있는, 이집트 땅에서 천역을 감당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쉽게 내보내려고 하지를 않았지만, 야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진 열 가지 재앙을 통해서 파라오가 두 손을 들고,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 땅에서 나가도록 허락을 합니다. 이집트 땅의 모든 생명의 장자가 죽어나가는 재앙을 만난 파라오가 너무나 큰 충격으로 잠시 정신이 나가서 이스라엘의 출애급을 허락을 했지만, 나중에 숨을 돌리자 파라오는 마음을 고쳐먹고, 자신의 특수부대를 동원하여 광야로 나간 이스라엘 백성을 되찾고자 추격합니다. 하지만 모세가 이끌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은 자기를 추격하는 이집트의 특수부대를 보았지만, 그들을 따돌리거나 물리칠 수 있는 나름대로의 방도가 전혀 없는 형편입니다. 게다가 앞에는 홍해라는 바다가 이스라엘의 길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은 자기들을 이집트 땅에서 이끌고 나온 지도자 모세를 향하여, 이집트 땅에는 무덤자리가 없어서 우리를 이곳까지 끌고 왓느냐?라고 비난과 원망을 합니다. 사실 이집트 땅에 그냥 있었으면, 비록 노예생활이기 하지만 이런 고생 안하고 죽었을 것 아니냐? 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급해진 지도자 모세가 야훼 하나님께 간절하게 기도했더니, 놀랍게도 하나님께서 밤새도록 동풍을 보내서, 홍해바다를 가르고, 바다 가운데 길을 내셨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노예이고 재산이라고 여겨서 이스라엘 자손을 포기하지 못하고 끝까지 집착을 했던 이집트 군대는 홍해바다에 수장이 되고 맙니다. 이처럼 오직 야훼의 능력으로 파라오의 노예생활을 하던 이집트 땅에서 나와서, 홍해를 바로 걸어서 건넌 이스라엘은 이제 야훼께서 조상들에게 약속한 땅인,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인 가나안 땅으로 가는, 광야 여정이 시작됩니다.

이렇게 시작된 이스라엘의 광야 여정은 언제나 야훼께서는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이스라엘의 갈 길을 마칠 때까지 인도합니다. 장정만 60만, 그러니까 여자와 어린이와 노인들을 포함하면, 200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그 어려운 광야 길을 가면서 사건도 많이 일어났고 어려움도 많았습니다.  오늘 여러분이 읽은 본문 출 15:22-27절의 말씀은 이스라엘이 광야 여정을 r시작하면서 첫 번째 겪은 어려움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이 광야로 들어서서 사흘 길을 갔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이스라엘이 여행을 위하여 준비해 온 물이 다 떨어졌습니다. 형편은 이미 하루나 이틀 전에 물이 떨어졌지만, 조금 가면 물이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길을 간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바람대로 사흘 길을 간 후에 오아시스를 발견을 했는데, 샘물이 써서 먹을 수가 없습니다. 

출 3:8절에서 야훼 하나님께서 약속하기를, ‘이제 내가 내려가서 이집트 사람의 손아귀에서 그들을 구하여, 이 땅으로부터 저 아름답고 넓은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사람과 헷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이 사는 곳으로 데려 가려고 한다.’라고 합니다. 지도자 모세를 통하여 이런 약속을 듣고, 모세를 따라 나선 이스라엘이 이집트 땅을 벗어나서 가나안 땅을 향하여 가면서 광야 길에서 처음으로 만난 것은 시원하고 차디찬 단샘물이 아니라 샘물이긴 한데 맛이 써서 음용할 수가 없는 쓴 물이었습니다. 

그러면 왜 야훼께서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겠다고 약속한 당신의 백성에게, 가장 먼저 쓴 물을 만나게 한 것입니까? 목말라 기다리던 샘물이 써서 마실 수가 없자, 이스라엘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우리를 인도한다더니, 겨우 써서 마시지 못할 물이 있는 곳으로 끌고 왔느냐? 라고 지도자 모세를 원망합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꿀은 단 것입니다. 단 것을 준다고 약속해 놓고, 그들에게 처음 주신 물은 단 물이 아니고 쓴 물입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은 모세를 원망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쓴 물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광야 여정에 나선 이스라엘에게 준 선물입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에게는 이 쓴 물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인생을 살면서, 늘 단물만 마시고 쓴 물은 마시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사람은 쓴 물을 마시지 않고는 살 수가 없습니다.하나님의 자녀인 여러분에게도 쓴 물은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쓴 물은 여러분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기 때문입니다. 인생여정에서 어쩔 수 없이 마시게 되는 쓴물은, 책이나 유명한 학자의 강연에서 배울 수 없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히브리어로 ‘쓰다’는 말은 ‘마라’라고 하는데, 이 말은 ‘모레’라는 히브리말과 어원이 같습니다. 히브리어 ‘모레’라는 말은 ‘가르친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야훼께서 광야 길을 가면서, 처음 도착한 곳에서, 이스라엘에게 쓴 물을 주신 것은, 쓴 물을 통하여 중요한 진리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오늘은 그점에 대해서 몇 가지 말씀을 드리겟습니다.

1. 쓴 물은 모든 것을 치료합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여정에서 처음으로 만난 오아시스가 쓴 물이 나는 샘이었다는 것은, 앞으로 남은 이스라엘의 광야 길이, 마치 이 샘에서 나는 쓴 물처럼 고통스러울 것이라는 점을 보여 준 것입니다. 이제 막 가나안을 향하여 출발한 이스라엘이 수르 광야에서 쓴 물 때문에 고통을 하지만, 사실상 이스라엘의 긴 광야 여정은 쓴 물을 마시는 것과 같은 고생길입니다. 하지만 야훼께서는 이스라엘을 이 쓴 물을 마시는 것과 같은 광야 여정의 괴로움이란과정을 통하여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이스라엘의 심령 속에 깊히 뿌리를 내리고 있는 노예근성을 치료합니다. 

이스라엘은 믿음의 조상인 족장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후손입니다. 하지만 430년 동안이나 이집트 땅에서 파라오이 종살이하면서, 자신들이 믿음의 조상 족장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의식도, 그런 삶의 모습도 다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집트의 풍습에 젖어 있었고, 야훼를 믿고 의지하는 신앙적인 삶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야훼께서는 세속적인 사고와 우상에 젖어 있는 이스라엘을 그냥 약속의 땅인 가나안으로 데리고 갈 수가 없었습니다. 불신앙적이고, 노예근성을 버리지 못한 이스라엘로 광야 길을 가게 함으로써, 광야 여정에서 만나는 쓴 물을 통하여, 이스라엘의 병든 영혼을 치료하고자 한 것입니다. 썩어질 육신의 질병을 고칠 때에도 쓴 약이 필요합니다. 몸에 좋은 약은 대게 쓴맛이 납니다. 그래서 달달한 음식보다는 맛이 쓴 음식이 몸에 더 좋다고 합니다. 

현대인의 많은 질병은 단 음식을 많이 먹어서 생긴 것이라고 합니다. 쓴 음식은 씹으면 침샘을 자극하여 많은 침이 만들어지는데, 그 침은 단 것을 먹을 때 생기는 침보다 질이 좋은 침이랍니다. 쓴 것을 씹으면서 침샘을 자극하여 생긴 침은, 위장에 내려가서 소화기능을 강화시켜준답니다. 그래서 쓴 음식을 많이 먹으면, 소화에 필요한 호르몬을 더 많이 만들 수가 있다고 합니다. 쓴 음식은 인간의 장 속에 세균의 양을 조절하여서 설사와 변비를 막아준답니다. 설사는 좋지 않은 세균이 너무 많이 생겨서 생긴 병이고, 변비는 장에 유익한 세균이 너무 작아서 생긴 병이랍니다. 쓴 음식을 먹으면 이것을 적당히 잘 조절해서 건강을 유지시켜준 답니다. 이와 같이 영혼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약이, 훨씬 더 쓴 경우가 있습니다.

야훼께서 지도자 모세를 따라서 약속의 땅에 가려고 이집트 땅에서 나온 이스라엘에게, 제일 먼저 쓴 물이 나오는 샘물을 만나게 한 것은, 앞으로 남은 광야 여행길에도 쓴맛을 보게 될 것을 예고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광야 여정의 쓴맛을 통하여 이스라엘의 자기중심적인 자세와 불신앙과 뿌리 뽑지 못한 노예근성을 온전하게 치료해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세속적이고 물질중심적인 생활자세와 우상숭배라는 나쁜 습관을 온전하게 고치고, 야훼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광야의 쓴 물이 필요했습니다. 
 
영혼의 질병을 고치는 것은 이만큼 어려운 일입니다. 여러분도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각종 육신의 질병과 영혼의 질병을 자녀에게 물려주지 않고, 철저하게 끊어버리는데는 쓴 물이 꼭 필요합니다.
치료의 고통이 필요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병든 것을 고치기 위해서는 반드시 쓴맛을 보아야 합니다. 쓴맛을 보지 않고, 고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육신의 질병도 고치기 위해서는 쓴맛을 보아야 합니다. 주사를 맞아야 하고,, 약을 먹어야 하고, 굶어야 하고, 수술을 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영혼의 질병을 고치는 데도, 쓴맛의 고통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도 인류의 병을 고치는데 쓴맛을 보아야만 합니다. 그래서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도, 자기가 지은 죄로 인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생명을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고, 사람이 된 하나님인,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나사렛 예수께서, 전혀 죄가 없으시지만,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사람에게 정죄를 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쓴맛을 보게 합니다. 

사랑하는 마포중앙교회 성도 여러분! 동정과 사랑의 차이가 여기에 있습니다. 동정심이 많은 사람은 우선 고통을 겪는 사람의 고통이 안타까워서, 그들이 당하는 고통을 면제해 주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자녀가 문제를 일으킬 때마다, 문제를 일으킨 자녀는 아무 고통도 안 당하는데, 부모와 형제들만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쓴맛을 봅니다. 문제를 일으킨 본인이 쓴맛을 보지 않으면, 문제를일으킨 사람의 질병이나 잘못된 가치관은 절대로 고쳐지거나 치료되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은 동정심에 얽매이지를 않습니다. 고통당하는 모습을 보면, 정황이 안타깝고, 가슴 아프고, 사랑하는 사람이 당하는 고통이, 자신이 당하는 고통보다 크지만, 절대로 그 고통에서 쉽게 벗어나도록 하지를 않습니다. 잘못된 인간이 고침을 받기 위해서는, 잘못을 저지르면 그만큼 고통을 겪어야만 깨닫고 자기의 잘못을 고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본문 25절에서 출애급기 기자인 모세는 말하기를, ‘모세가 주께 부르짖으니, 주께서 그에게 나무 한 그루를 보여 주셨다. 그가 그 나뭇가지를 꺽어서 물에 던지니 그 물이 단 물로 변하였다. 주께서 그들에게 법도와 율례를 정하여 주시고, 그들을 시험하신 곳이 바로 이 곳이다.’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쓴 물을 고치기 위해서 모세가 나무 가지를 꺾어서 물에 던졌다는 것입니다. 신약성경 베드로전서에서 사도 베드로는 이 나무를 예수님의 십자가에 비유를 합니다. 그것은 장차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모든 병든 자와 병든 것을 고치실 것을 상징합니다. 

그렇습니다, 나사렛 예수께서 세상에 오셔서, 친히 맛보신 쓴맛이 전 인류가 지은 모든 죄악에서부터 구원을 받게 합니다. 예수께서 맛보신 십자가의 쓴 맛 때문에 모든 인생이 스스로 빠진 죄악의 질곡에서 건짐을 받게 합니다. 
 
마취를 하지 않고, 다친 상처를 수술을 하게 되면, 그 치료의 아픔이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런 경우 장점도 있습니다. 마취를 하지 않고 수술을 하면 회복이 훨씬 빠르답니다. 병든 인간이 고침을 받는 데에도 치료의 쓴맛이 강할수록 빨리 고침을 받습니다. 이처럼 야훼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생을 영육의 질병에서부터 치료해주기 위하여 치료의 쓴 물을 주셨으니까, 이제부터는 믿음을 가지고, 자신의 질병을 고치기 위해서, 그리스도 예수께서 주신 쓴물을 마시기를 어렵게 생각하지 않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쓴 물은 단물의 가치를 즉시 깨닫게 합니다.
쓴맛의 깊이를 아는 사람은 단맛보다 쓴맛을 즐긴다고 합니다. 극과 극은 통한다고, 술 마시는 것과 성령 충만한 것은, 극과 극이지만 통하는 점이 있습니다. 신약성경에 보면, 성령 충만한 것을 많은 사람이 마치 낮술에 취한 것으로 오해를 했습니다. 예를 들면 자식을 낳지 못하여 고통을 당하는 제사장 엘가나의 아내 한나가, 자신의 마음의 고통을 오직 기도로만 야훼에게 토로할 때에, 그 모습을 본 실로 성소의 엘리 제사장은, 한나가 술에 취한 줄로 알았습니다. 

또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천하면서 약속하신 말씀을 믿고, 성령 받기를 사모하며,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 모여서, 전혀 기도에 힘을 쓴 120여명의 성도에게 오순절 날 성령이 임하여, 주님의 제자들이 성령 충만했을 때에, 예루살렘 사람들은 제자들이 낮술에 취했다고 말했습니다. 술은 그 맛이 쓰지만 자주 마시는 사람에게는, 맛이 달게 느껴진다고 합니다. 그래서 술을 즐기는 사람은 그 쓴맛을 즐기고, 그 쓴맛이 달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은 주일마다 교회에 가고, 교회에 가서는 봉사를 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말씀을 배우고, 또 단지 예수를 구세주로 믿는다는 것 때문에, 불신자에게 욕을 먹고, 오해를 받고, 핍박을 당합니다. 그러 측면에서 보면 예수를 구세주로 믿는다는 것은 분명히 쓴맛입니다. 하지만 이 쓴맛을 자주 맛보다 보면, 쓴맛의 맛을 음미할 수 있게 됩니다. 커피를 마실 줄 아는 사람은 블랙을 마십니다. 이처럼 쓴맛을 알고, 음미하고 즐길 줄 아는 사람이, 진짜 맛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쓴 맛 자체를 즐기고, 음미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쓴맛은 단맛의 맛을 알게 합니다. 예를 들면, 사탕을 먹은 후에, 아무리 맛있는 과일을 먹어도, 과일이 맛이 없습니다. 아무리 달콤하고 맛있는 과일도, 싱겁게 느껴집니다. 
이제나 저제나 물이 있는 곳을 발견하기 위해서, 두리번거리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처음부터 단 물을 주셨으면, 그들은 그 단물의 가치를 바르게 깨닫지 못했을 것입니다. 광야에서 물을 마시게 된 것이, 얼마나 큰 하나님의 은총인지를, 깨닫지 못했을 것입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로 쓴맛을 알 때, 단맛의 참 가치를 압니다.  쓰디쓴 한 약을 먹고 나서는, 약간만 단 것을 먹어도, 달게 느껴집니다. 쓴맛이 단맛의 강도를 높여준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인생의 쓴맛 나는 고통의 순간이 없으면, 단맛 나는 행복의 순간도 모릅니다. 쓴맛을 모르는 사람은 결코 단맛을 알지 못합니다. 불행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결코 행복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가난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부가 얼마나 좋은 것인지 알지 못합니다. 인생의 쓴맛을 맛보지 못하고, 계속해서 인생의 단맛만 보고 산 사람은, 자신의 삶이 행복하다는 것을 모릅니다. 쓴맛을 맛보지 못한 인생은, 단맛에서 행복을 느끼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권태’를 느낍니다.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모든 조건이 갖추어졌는데도, 자신이 행복한 줄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쓴맛을 맛보지 못했기 때문에, 단맛 역시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지금 많은 사람이 행복한 삶을 살면서, 자신이 행복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불행을 맛보지 않은 사람은 행복도 맛볼 수 없습니다. 사람이 일생을 살면서, 처음에 쓴맛을 보고, 나중에 단맛을 보고 살아야, 행복이 더 커집니다. 젊었을 때에 인생의 전반기에 잘 나가다가, 늙어서 되는 일이 없는 사람은 불행합니다. 이미 인생의 단맛만 보고 살았기 때문에, 쓴맛에 익숙하지 않은데, 쓴맛 나는 인생을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인생의 전반기에, 젊어서 쓴맛을 보고 산 사람은, 늙어서 인생의 후반기에 조금만 여건이 갖추어져도 행복합니다. 
 
그러니까 어떤 측면에서 지금까지 인생의 쓴맛만 보고 살아오신 분은, 하나님의 큰 복을 받은 것입니다. 단맛을 보고 살아온 사람보다, 남은 인생을 훨씬 더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조건을 갖추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자녀에게도 인생의 단맛만 가르쳐 주어서는 안 됩니다.  인생의 쓴맛을 맛보아야, 청년이 되고, 어른이 되어서, 인생을 제대로 살아갑니다. 

우리나라의 부모는 너나 할 것 없이, 모두가 자녀에게 단 것만 주려고 노력을 합니다. 음식도 단 것 위주로 주고, 삶도 너무 편하게만 해 주려고 합니다. 하지만 진정으로 자녀의 행복을 바라고, 미래를 위한다면, 조금은 독하게 자녀에게 쓴맛을 알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쓴 물 때문에 하나님의 기적을 맛봅니다. 쓴 물을 통하여 육신의 고통이 있었지만, 그 고통을 통하여 영적인 진리를 깨닫게 되었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조금 힘이 들더라도 쓴 맛을 맛보게 하시는 하나님의 자비를 깨닫고, 어려울 때에 오히려 그리스도 예수만을 의지하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승리하겠다는 확신을 가지고 쓴 물 때문에 요동하기보다는 더 그리스도 에수와 하나가 되고자 마음과 정성을 다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쓴 물 뒤에는 반드시 단물의 복이 있다는 점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람 가운데 인생의 단물만 마시고 사는 사람은, 반드시 인생의 쓴 물을 마시게 된다는 점을 유념하기 바랍니다. 반대로 인생의 쓴 물을 마신 사람은, 반드시 단물을 선물로 받습니다. 밤잠을 자지 않고 공부하느라, 쓴잔을 마신 사람은 합격의 단물을 마시게 됩니다. 그래서 옛 선현들은 고진감래(苦盡甘來)란 말을 만들었습니다. 쓴 것이 다하면, 반드시 단 것을 맛보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이 쓴 물을 맛본 ‘마라’에서 얼마간 여행을 하자, 이스라엘은 단물이 철철 넘치게 샘솟는 샘, 열두 개와 시원한 그늘을 제공해주는 커다란 종려나무가 70주나 있는 오아시스 ‘엘림’이란곳에 도착을 합니다. 처음과 나중이 되시고, 참으로 섬세하신 야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길을 인도하실 때, 미리 이스라엘이 가야할 코스를 아름답게 정한 것입니다. 그리고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정해진 코스를 따라서 이스라엘을 안전하고 평안하게 인도합니다. 

그러니까 ‘마라’ 다음에 ‘엘림’에 이르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고 철저하게 계산된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쓴 물이 나는 ‘마라’를 잘 통과하자, 이제 상급으로 단물이 나는 ‘엘림’으로 이스라엘을 인도합니다. 성경은 이처럼 항상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주님만을 의지하고자 하는 이에게 하늘의 보상이 있을 것을 약속합니다. 자비하신 주님께서는 고통의 시간을 보낸 사람에게 기쁨으로 보상을 합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시 126:5절에서 노래하기를,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진리입니다. 진리에 서서 흐트러짐이 없이, 고난을 잘 감당하면, 반드시 기쁨의 날이 올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사람이 어려움을 당했을 때에, 왜 포기합니까? 그것은 지금 내가 당하는 고통이 언제 끝날지 모르기 때문에, 지쳐서 포기를 합니다. 하지만 고통이 언제 끝이 난다고 정해진 시간을 확실하게 알 수 있다면, 어떤 고통도 이겨낼 수가 있습니다.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여러분에게 승리의 날이, 주님의 날이 언제라고, 때와 시기는 알려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한 가지만은 분명하게 약속을 하셨는데, 그것은 끝까지 침고 견디는 사람은 구원을 얻는다는 점과 세상의 모든 고통은 반드시 끝이 날 때가 있다는 약속입니다.

여러분의 삶이 아직도 ‘마라’에 머물러 있는지, 한번 겸손히 여러분의 신령상 형편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비록 마라에 있을 지라도 쓴 맛을 보았을지라도, 소망 중에 참고 견딘다면 분명히 다음에는 ‘엘림’에 도착할 것입니다. 그러니 마라를 만났다고 시비와 원망을 하기보다는, 힘을 내어서, 오직 예수만 의지하고, 힘차게 걸어가기 바랍니다. 마라를 지나면, 분명히 단물이 펑펑 솟아나는, 샘물이 열두개나 있고 종려나무가 칠십주나 서서 시원한 그늘을 만들고 있는 낙원인 엘림에 도달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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