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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바울의 기도 (빌 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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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기도
빌립보 1:3-11

본문 빌립보서 1:3-11절을 보니까,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인에게 강조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본문 9절에 보면, 바울 사도는 빌립보 교인에게 담대하게 말하기를, ‘내가 기도하노라,’라고 합니다. 여기서 ‘기도한다’는 표현은 헬라어로는 “프로슈코마이”라고 합니다. ‘프로슈코마이’란 단어의 의미는 ‘제단 앞으로 나아가다.’, ‘예배를 드리다.’ 라는 뜻입니다. ‘제단 앞에 나아간다.’는 것은 곧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왜 사람이, 하나님 앞으로, 제단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까? (1) 제사를 드리기 위함입니다. 자신이 믿고 의지하는 능하신 하나님께 정성껏 준비한 제물을 바치고,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를 회복하고, 유지하기 위한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제사 곧 예배를 통해서,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을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표현하고, 그런 제사를 받으시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2) 사람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뜻을 온전하게 분별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까 기도를 통하여 자기의 소망을 하나님께 아뢰었지만, 자기의 소망이 하나님의 뜻에 맞는 것인지를 아닌지를 확인하기 위하여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제사 곧 예배는 자기의 뜻을 찾거나 주장하기 위하여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는 인간의 생각과 판단이 하나님의 거룩하고 자비하신 뜻에 합당한지, 그리고 진정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겸손히 찾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올바로 찾기 위한 행동이 바로 기도입니다.

그러니까 복음적인 기도란, 겸손하게 주님 앞으로 나아가서, 자신의 뜻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과 주님의 약속을 구하는 행위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기도할 때, 중요한 요소는, 기도하는 내용이 문제가 되는데, 여러분이 주님께 기도하는 내용은, 여러분의 바램과 소원만을 아뢰는 것이 아니라, 기도를 통해서 주님의 거룩하신 뜻과 소망찬 약속을 발견하고 그것을 이루기 위하여 자기의 할 일과 역할을 깨닫고, 그것을 이루는 도구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기도는 주님의 뜻을 깨닫고 주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생각에 매달리지 말고, 자기의 생각을 버리고, 자기의 망므을 비워야만 하고, 주님의 음성을 들으려면 자기의 목소리를 낮추어야만 합니다. 지금까지 나의 기도는 어떠했는지 한번 자신의 신령상 형편을 정직하게 살펴보기 바랍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본문에 나오는 바울의 기도의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바울 사도의 기도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바울은 (1) 빌립보 교인의 사랑이 풍성해지기를 기도합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빌립보 교인에게, 사랑이 풍성한 모습이 그리스도인의 종말의 모습이자, 하나님께서 원하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빌립보 교인에게 말하기를, ‘그런 사랑은 지식과 인식 안에서 풍성해진다.’라고 하면서 9-10 상반절에서 말하기를, ‘나는 여러분의 사랑이 지식과 모든 통찰력으로 더욱더 풍성하게 되어서,(빌 1:10)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가를 여러분이 분별할 줄 알게 되었으면 합니다.’라고 합니다. 

알아야 면장을 한다는 말처럼 제대로 알게 될 때 모든 것이 제대로 되어집니다. 여기서 ‘지식’ - 에피그노시스’는 내적인 것까지도 볼 수 있는 능력을 말하고, ‘총명’ - ‘아이스데시스’는 외부적인 것까지도 모두 고려해서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지식과 총명 안에서’라는 표현은, 내외부의 모든 것을 종합해서 판단하고 평가하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그 사랑이 어떤 사랑이 되었던지, 그 모든 사랑은 하나님께서 빌립보 교인을 위해서 어떻게 행하셨는지를 구체적으로 알게 될 때에 더욱 풍성해지게 됩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말합니다. 하지만 예수의 사랑을 어떻게 체험을 했던지 상관없이 나사렛 예수께서 나 자신을 위하여 어떻게 행하셨는지만, 분명하게 알고 믿게 되면, 그 사람은 누가되었든지 사랑으로 더욱 풍성한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을 믿으시고, 먼저 나를 사랑하신 나사렛 예수의 사랑, 곧 십자가의 사랑에 깊이 잠기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당시 빌립보 교회 안에는 교인 서로 간에 불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빌립보 2:14절에서 빌립보 교인에게 말하기를, ‘무슨 일을 하든지, 불평이나, 시비를 하지 말고 하십시오.’라고 합니다. 어디서든지 다툼이나 불화가 있을 때에는 다툼의 근본 원인이 무엇인지를, 그리고 불화한 이들 사이에서 일어난 사건이,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를, 분명하게 시시비비를 가릴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다투던 사람들 사이에서 다시 원망과 시비가 없으려면, 정확한 지식을 가지고, 공평하게 판단해서 분별해주는 총명이 있어야만 합니다. ‘좋은 것이 좋다’고 적당히, 마치 구렁이가 담을 넘어가듯이 넘어가버리면, 당장은 아무 일이 없을지 모르지만, 그렇게 처리를 한 것이 나중에는 공동체 안에서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원리와 원칙을 적용할 때에 때로는 유연할 필요가 있기도 하지만, 원리와 원칙을 무시하면 공동체의 질서는 삽시간에 무너지고 맙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빌립보 교인에게 기도와 지식과 총명이 필요하다고 한 것입니다. 

다음으로 당시에 빌립보 교회 안에는 소위 ‘할례당’이라고 불리는 거짓교사 곧 이단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빌립보 교인에게는 이 거짓교사들과 바울이 보낸 사람들 가운데서 과연 누가 그리스도 예수에게 속한 사람인지를 분별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빌립보 교인에게 정확한 지식과 총명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교회 안에 가만히 들어온 이단을 구별하는 것은, 지금도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니 당시에는 신약성경의 목록조차도 아직 완성되지 못한 시기였기 때문에 거짓교사와 이단을 분별하는 기준이 분명하지 못했던 시기였기 때문에 이단에 대하여 언급한다는 것이 참으로 어려운 때였습니다. 성경을 영어로 Bible 이라고 합니다. 또 다르게는 Canon 이라고 하는데, Canon 이란 말에는 ‘기준, 경전’이란 의미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은 감리교 교리적 선언에서 고백하듯이, ‘신앙생활의 충분한 표준이 되는 책’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성경말씀에 어긋난 주장을 하는 집단을, 성경에 근거하여 어리석은 신자들이 그런 잘못된 교리에 미혹되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분명하게 이단이라고 정죄를 하는 것입니다.     

당시 빌립보 교회 안에도, 가만히 들어온 이단들이 활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칫 잘못하면, 바울의 수고가 한 순간에 무너지는 결과를 낳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 교인에게 권면하기를, ‘정확한 지식과 올바른 인식 안에서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분명히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에수 안에서 서로를 섬기고 사랑해야 하지만, 거짓된 가르침까지 받아 들이면서 사랑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빌립보 3:2-3절에서 빌립보 교인에게 분명하게 권면하기를, ‘개들을 조심하십시오, 악한 일꾼들을 조심하십시오. 할례를 주장하는 사람들을 조심하십시오. 하나님의 영으로 예배하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자랑하며,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우리야말로, 참으로 할례를 받은 사람입니다.’라고 하면서 본문 10절에서도 빌립보 교인에게 말하기를.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가를 여러분이 분별할 줄 알게 되었으면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날을 맞이하기에 순결하고 흠이 없이 되라.’고 합니다. 여기서 ‘분별하다’라는 표현은 헬라어로 ‘도키마조’라고 하는데, 의미는 ‘조사하다’ ‘입증하다’라는 뜻입니다. 즉, 철저히 조사를 해서, 옳고 그름을 입증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철저한 시험을 통해서 거짓교사들의 정확한 정체성을 알아낸다는 것입니다. 아닌 것은 아닌 것으로, 좋은 것은 좋은 것으로 분별을 해서 바른 믿음의 도리와 구원의 원리를, 확실하게 지키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분별의 역사는 그리스도인에 대한 뜨거운 관심과 형제사랑이 있을 때에만 가능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없으면, 무엇이 유익한지, 해로운지 상관하지를 않습니다. 그냥 회사 노동자가 자기 책임량을 감당하듯이 의무적으로 해치워버리고 맙니다. 형제 곧 교인에 대한 따뜻한 관심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형제를 사랑하게 되고, 그 형제 사랑 때문에 고민을 합니다. 어떤 것이 그 형제자매에게, 그 학생에게 가장 좋은 것일까? 생각하면서 고민을 하고, 기도를 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더 좋은 것을 찾으려면, 제대로 알아야 하고, 진정으로 좋은 것이 어떤 것인지를 분별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무조건 누가 좋다고 해서, 덥석덥석 받아 먹이지는 않습니다. 하나하나 차근차근 따져보고, 진짜 좋은 것인지 알아봅니다. 그런 과정을 거쳐야만 사실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별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에베소서 4:13-15절에서 에베소 교인에게 말하기를,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일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고, 온전한 사람이 되어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경지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우리는 이 이상 더 어린 아이로 있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인간의 속임수나 간교한 술수에 빠져서 온갖 교훈의 풍조에 흔들리거나 이리저리 밀려다니거나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면서 모든 면에서 자라나서, 머리이신 그리스도에게까지 이르러야 합니다.’라고 합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은 왜 빌립보 교인에게 사랑이 더 풍성해지기를 기도하는 것입니까? 그냥 생각해보면 바른 지식만 있어도 될 것 같은데 말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이 모자라는 지식과 총명함은, 사람을 냉정하게 만들고 교만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사랑이 없이 지식과 총명함만 있는 사람은, 마치 자신이 아는 것만이 최고이고, 그것만이 유일한 진리인양 생각을 하고, 이것저것 하나씩 하나씩 따지기 시작하면, 그 사람 주위에는 아무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이 없이 지식과 교만만 있는 사람에게는 이웃이 없습니다. 항상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없는 지식은 날카로운 칼이 되어서, 사람 마음을 찔러서 아프게 하고, 자신도 찔림을 당하여 아프게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사랑은 나누어진 공동체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비록 형제가 나와 의견이 다르다고 해서, 형제를 미워하고, 형제를 잘못된 것으로 판단을 하고 비판을 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언제나 유념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의견이 다른 형제를 비판하고 대적하면 그리스도 예수께서 머리가 된 공동체인 주님의 교회가 분열하고, 나누일 뿐입니다. 그것은 바로 사탄이 끼어들 자리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주변에 있는 다툼이 있는 교회에서 여러분은 이런 모습을 쉽게 발견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런 교회에 필요한 것은 지식과 총명이 아니라 바로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이런 교회들의 경우 공통점이 있는데, 문제 해결을 위하여 지식 있는 목사, 똑똑한 장로를 찾는데, 제가 보기에는 아닙니다. 그런 교회일수록 먼저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서 있는 목사와 장로를 찾아야, 문제를 해결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사탄에게 역사할 자리를 만들어 준 교회에게 필요한 것은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이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교인들이 서로 주고 받는 사랑입니다. 예수의 사랑이 풍성해질 때, 그런 모든 상처들이 치유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 예수께서도 말씀하기를, ‘비판하지 말라, 네가 비판하는 대로 너도 비판을 받을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자세히 살펴보고, 시험을 거쳐서, 아닌 것은 아닌 것으로 밝혀내는 세밀한 분별력이 없이, 그저 모든 것을 좋다고만 하면, 결국은 선한 것과 악한 것이 섞여서 혼잡하게 되고 맙니다. 아닌 것도 긴 것이 되고, 긴 것도 긴 것이고, 도대체가 ‘예와 아니요’가 분별이 되질 않습니다. 이렇게 되면 공동체성을 잃게 되고, 결국에는 공동체가 지향한 본래의 목적과 성질을 잃고, 변질되고 맙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처럼 분별력이 없는 사랑이나, 사랑이 없는 지식은, 모두 사람을 망하게 합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사랑을 하되, 정확한 말씀의 지식 안에서, 분별력 있는 사랑을 할려고 마음과 정성을 다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바울은 빌립보 교인이 진실하고 허물이 없기를 기도합니다. 본문 10절에서 바울은 말하기를,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가를 여러분이 분별할 줄 알게 되었으면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날을 맞이하기에 순결하고 흠이 없이 되라,’고 합니다. 여기서 ‘순결하고, 진실하다’라는 표현은 헬라어로 ‘에일리크리네스’라고 합니다. 이것은 ‘태양빛에 의해 판단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햇빛에 비추어 보았을 때에도 깨끗한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진실하다, 순결하다’는 것은, 처음 말씀을 받았을 때의 마음과 말씀을, 그리스도의 날까지 지속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금도 순수한 믿음을 해하려는 많은 시도가  있습니다. 그런 악한 공격으로부터 순수한 믿음을 잘 지키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허물없이, 흠이 없이’라는 표현은 사람을 죄짓게 하지 말고, 본인도 죄를 짓지 말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이 하나님과 이웃에게 거리낌없고, 자신에게도 거리낌없는 삶을 살기를 원했습니다. 곧 하나님의 말씀에 합당한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바라는 삶이요,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인을 위하여 기도한 내용입니다. 지금 바울의 기도가, 여러분의 기도 제목이 되어야만 합니다. 이제부터 진실한 신자가 되기를 위하여, 햇빛에 비추어 보았을 때에도 흠이 없는 믿음을 소유한 신자가 되고자 갈망하고 기도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그리고 허물이 없는 신자답게 하나님과 이웃에게 거리낌이 없도록 살고자 성령 안에서 최선을 다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빌립보 교인에게 의의 열매가 가득하기를 기도합니다. 본문 11절에서 바울은 기도하기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여러분이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돌리게 되기를 기도합니다.’라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의의 열매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맺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의’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의’는 헬라어로 ‘디카이오 쉬네’라고 하는데, 이는 예수 그리스도 아래 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칭의’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의의 열매’란, 칭의를 입은 그리스도인이 살면서 맺는 믿음생활의 열매를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믿음의 삶의 덕과 행위입니다. 이것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구원 받은 결과로 나타나는 성령 안에서 맺어진 신앙인격의 열매입니다. 그러면 이처럼 성령의 도우심으로 맺는 ‘의의 열매’는 무엇입니까? 바로 영생과 구원입니다. 구체적으로 설명을 한다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는 여러분의 새로워진 신앙인격의 열매를 통해서, 여러분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구원을 얻는 과정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풍성하게 맺히는 의의 열매, 곧 영혼의 구원은,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이 됩니다.

이처럼 세상 사람은 여러분의 삶을 통해서 그리스도 예수를 봅니다. 여러분은 세상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창문입니다. 그러니 이 창문을 맑고 깨끗하게 닦아서, 의의 열매가 많이 맺어서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돌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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