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복 있도다, 심령이 가난한 자여! (마 5:3)

첨부 1


복 있도다, 심령이 가난한 자여! (마 5:3)

오늘 본문 말씀인 마태복음 5장 3절을 다시 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합창이든 중창이든 독창이든 노래하는 기법 중에 아카펠라라는 것이 있습니다. 반주 없이 노래하는 것인데 참 어렵습니다. 저도 옛날에 노래 하나를 중창으로 취입한 것이 있었는데 반주가 있는 것은 한두 번 정도 부르면 충분히 취입할 수 있지만 반주가 없는 아카펠라로 하면 오류가 참 많이 나옵니다. 그래서 반주가 있을 때 한두 번 정도라면 반주가 없으면 스무 번 정도는 해야지 제대로 된 노래가 나옵니다. 

아카펠라로 노래를 하는 것 중에서 제일 어려운 것이 첫 음을 잡는 것입니다. 반주를 듣고 첫 음을 잡으면 되는데, 반주가 없기 때문에 첫 음 잡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피아노가 첫 음을 쳐주기도 하고 합창단이나 중창단원 중에 뛰어난 음감을 가진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의 노래를 듣고 첫 음을 잡기도 합니다. 그 첫 음을 잘못 잡으면 곡 전체가 낮아지거나 높아져서 많이 힘들게 됩니다. 

새벽예배를 나오신 분들은 아실 텐데 목사님이 음을 너무 높게 잡아 한곡 부르면 목이 쉬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첫 음을 잘못 잡아 졸릴 때도 있지 않습니까? 음감이 좋은 사람은 첫 음을 잘 잡겠지만 그렇지 못하는 경우에는 소리북쇠를 이용합니다. 소리북쇠란 쇠로 된 것으로 손잡이가 있어서 그것을 잡고 ‘퉁’ 치면 음 하나가 나오는데 그 음을 기준으로 음을 미리 잡아두는 것입니다. 첫 음은 여기서부터 세음, 테너는 다섯 음, 하이테너는 얼마, 또 베이스는 얼마 이렇게 미리 잡은 후, 그것으로 맞추어 나가면 음악이 제대로 됩니다. 

예수님께서 여덟 가지 복, 여덟 가지 인격을 말씀하셨는데, 그 중에서 첫 번째인 심령이 가난한 자가 소리굽쇠 역할을 합니다. 기본음의 역할을 하는데 이것을 제대로 잡아야 나머지 일곱 가지 복을 제대로 받을 수가 있고, 일곱 가지 인격을 제대로 갖출 수가 있습니다. 다르게 말하면 여덟 가지 복, 여덟 가지 인격은 같은 나무에 있는 뿌리입니다. 

이것의 원뿌리는 오늘 본문의 심령이 가난한 것입니다. 나머지는 이 원뿌리로부터 뻗어져 나오는 가지 즉 결과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여덟 가지 인격, 여덟 가지 복을 말씀하신 가운데 심령이 가난한 것을 먼저 말씀하신 까닭이 바로 그것이 출발이 되고, 열쇠가 되고 관문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께서는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는데 그 복이란 천국이 그의 것이라고 아주 정확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천국에는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만 있다고 말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심령이 가난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어떤 사람이 되어야할 것일까요? 나중에는 우리가 판단하지 않아도 어차피 천국문을 지키는 사람들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인지, 그 문을 못 들어가는 사람인지 판단해줄 것이므로 우리는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미리 보는 것입니다. 즉 다시 말씀드리면 천국에 들어갈 사람은 참된 기독교인이고, 참된 기독교인의 기본적인 인격이 심령이 가난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심령이 가난해야 천국에 갈 수 있고, 기본적으로는 참된 기독교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흔히 말하는 무늬만 기독교인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어떤 것이 심령이 가난한 것인가를 보아야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것을 볼 때 먼저 부정적인 측면으로 접근해야합니다. 그 까닭이 있습니다. 너무나 많은 기독교인들이 아닌 것을 마치 그것이 심령이 가난한 것으로 잘못 알고 있는 오류를 범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흔히 우리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첫 번째, 물질적으로 가난한 사람을 가리켜서 복이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적으로, 물질적으로, 재산적으로 가난한 사람이 마치 복이 있는 것처럼 말하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성경 그 어디에도 그런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 것이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우리 기독교인들이 정말로 관심을 가져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정말로 도와주어야합니다. 그리고 위로해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사실 가난한 것은 은혜를 받기 쉽습니다. 믿음에 들어가기도 쉽습니다. 그래서 심령이 가난한 것을 실제적으로, 물질적으로, 세상적으로 가난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우리가 알아야할 것은 주님께서 심령이 가난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물질적으로, 세상적으로 가난하다는 것이 절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물질적으로 가난한 것이 결코 미덕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두 번째,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심을 통해서 복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재산을 버리고 가난한 사람이 되라고 권면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절대로 그런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 역사에 그런 분들이 많이 계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복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주님과 더 가까워지고 싶었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가 선택한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절대로 재산을 버리고 가난한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경계하신 것은 재물이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내 삶의 무게 중심을 재물 위에 두고 재물이 없어지면 휘청거리는 것을 경계하신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돈에 대해서 우리들에게 말씀하시는 바는 열심히 일해서 돈을 많이 벌어서 모으라는 것입니다. 할 수만 있으면 돈이 많은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다음이 더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바르게 사용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모으기만 하고 벌기만 하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다시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립니다. 여러분들이 재산이 얼마이든 간에 참된 여러분의 재산의 양이 얼마나 되는가를 생각할 때, 계수적으로 많은 사람을 부자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얼마나 땅이 많고, 예금이 많은가를 두고 부자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진정한 여러분의 재산은 돈이 얼마이든 간에 얼마나 아름답게 쓰고 바르게 썼는가? 그 금액만 여러분들의 재산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힘써서 재물을 모아서 없는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재산을 버리고 가난한 사람이 되는 것이 복있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성경은 에베소서에서 도둑질하는 자는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 돌이켜 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수 있도록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엡4:28)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이것이 재산, 재물, 돈에 대해서 우리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내가 복 받기 위해서 내 재산을 여기저기에 버리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부끄럽지만 저도 그랬던 적이 있었습니다. 대학 4학년 때 회사에 입사하였는데 월급도 참 많이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회사에 다니면서 승진도 빨리하여 월급쟁이치고 제법 괜찮게 살았습니다. 물론 사치하고 호화스럽게 살 정도는 아니었지만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재산을 가지고 있었는데, 어느 날 하나님께서 저에게 목사가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로서는 큰일 났습니다. 그래서 맨 처음 한 것이 “하나님 진짜 부르셨습니까? 아니면 내가 목사가 되고 싶은 병이 들어서 잘못 들었습니까?” 자꾸 물어보았습니다. 어른들에게 물어보고 선배들에게 물어본 후, 마지막 결론으로 하나님께서 부르셨다는 것으로 내렸습니다. 

사실 평소에 목사가 되겠다는 생각을 한 적도 없고 기도한 적도 없었으므로 목사가 되면 하나님께서 다 먹여주신다고 나름대로 혼자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내린 결정이 신학을 하려면 3년을 해야 하므로 3년 동안 우리 아이들이 공부하고 먹고 살 것만 챙겨두고 나머지는 다 팔아서 나누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어쩌다 보니 땅도 있고 여기저기 재산이 좀 있었는데 다 팔아서 달라는 사람에게 주고, 빌려달라는 사람에게 빌려주고 바칠 곳에 바쳤습니다. 

그런데 제가 신학을 하면서 하나님 말씀을 보다 보니 그런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때는 어쩐지 그러했습니다. 그 후에 하나님께서 많은 복을 주셔서 지금까지 잘살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적이 없다는 사실은 알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복 있기 위해서 내 재산을 다 팔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저는 교회가 예배당을 건축하는데 있어서 복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내 집을 팔아 전세로 가고, 전세 있는 사람은 월세로 가는 것을 반대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주셨는데 그것을 줄여서 갑니까? 왜 그렇게 합니까? 정말로 여러분이 꼭 그렇게 하고 싶다면 몰라도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권장하시는 바는 아닙니다. 두 번째 하시는 말씀이 복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내 재산을 버리고 가난한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정신적인 것입니다. 정신자세를 이야기하는 것인데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소심한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 없이 살아가는 것, 용기 없고 숨어 지내는 것, 은거하는 것, 개성을 억제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개성을 너무 밝히는 사람들은 문제입니다. 그래서 개성을 너무 드러내는 사람을 가리켜서 세상에서는 우스갯소리로 ‘개같은 성질’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적절하게 개성을 표현할 수 있겠지만 너무 억제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자기 의사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것을 가리켜 심령이 가난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라는 말씀입니다. 

또 하나 더는 대단히 겸손한 사람에 대한 것입니다. 너무 겸손한 사람, 진짜 겸손을 드러내는 사람이 있는데, 여기에 대해서 생각할 일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어른들도 ‘과공은 비례’라고 이야기하지 않았습니까? 지나친 겸손은 예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적절하게 해야지 그렇게 겸손할 것이 무엇입니까? 지나친 것은 좋지 않습니다. 

또한 어떤 사람은 믿음이 좋다고 생각해서 지나친 희생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린 그런 부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몸이 상할 정도로 지나치게 희생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하나님 일을 할 때 몸을 너무 아끼는 사람이 생각납니다. 사실 물질적으로 또 육체적으로 조금 힘이 드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지나친 희생은 절대로 좋지 않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원하시는 바가 아닙니다. 심령이 가난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영적인 문제, 영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라는 말을 영어로 번역하는 영어 성경은 거의 대부분 한결같이 ‘Blessed are the poor in spirit’ 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영적으로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영적으로’ 라는 말이 무엇입니까? 기독교에서는 영적이라고 하면 신비적이고 무엇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아주 조심해야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영적이라는 말만 하면 꾸뻑 넘어갑니다. 영적이라는 것은 신비스러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관계 하에서 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보고 하나님 앞에서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서 행동한다는 것이 바로 영적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두려워하면서 보는 것이나 거룩하고 신비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심령이 가난한 자라고 할 때는 하나님 앞에서 가난한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모든 순간을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보다보니 나는 정말로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이것을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구체적으로 보려면 성경의 예를 보는 것이 가장 좋으므로 성경의 예를 보겠습니다. 다윗에게 어느 날 하나님께서 “땅에서 위대한 자들의 이름같이 네 이름을 위대하게 만들어주겠다. 네가 죽을 때 내가 네 후손 중에서 너의 뒤를 세워서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해주겠다.” 라고 축복해주셨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이 축복을 받고 어떻게 고백했는지 보십시오. ‘주 여호와여 나는 누구이오며 내 집은 무엇이기에 나를 여기까지 이르게 하셨나이까(삼하7:18)’ 라는 고백을 하였는데, 이것이 심령이 가난한 자입니다. 다윗이 왕이 되었습니다. 그는 왕이 된 후에도 “내가 무엇이기에 왕이 되었으며, 내 자손을 그렇게 지켜주셨습니까?” 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여러분의 경우에는 이렇게 생각하십시오. 여러분에게 좋은 집이 있으면 즐거워하고 누리십시오. 그러면서 늘 생각하십시오. “하나님, 도대체 내가 무엇이기에 이렇게 좋은 집을 주셨습니까?” 바로 이것이 심령이 가난한 자입니다. 필요하다면 좋은 차를 타십시오. 그 차를 타시면서 “하나님, 내가 무엇이기에 이렇게 좋은 차를 주셨습니까? 나에게 이런 좋은 사업을 주셨으며, 이런 재산을 주셨습니까?” 라고 늘 고백하십시오. 

재산은 많아도 좋습니다. 많으면 많을수록 좋습니다. 좋은 일을 얼마든지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끊임없이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에게 왜 이렇게 많이 주셨습니까?’ 라고 고백하는 이런 사람이 영적인 사람이고, 이런 사람이 심령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세상적으로 지위가 높아도 됩니다. 지위가 높으면서도 ‘나는 그런 사람이 되지 못하는데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높은 자리를 주셨습니까?’ 이런 고백을 하는 사람이 영적인 사람이고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이런 사람이 복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선지자 이사야가 어느 날 성전에서 하나님 모습을 뵈었습니다. ‘아차’ 하는 순간에 뵈었기 때문에 깜짝 놀랐습니다. 그때에 이사야가 고백한 이것이 바로 심령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이사야는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사6:5) 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요즘 우리나라 대통령이 많이 바쁜데 우리 주변에서 보면 대통령을 만나고 나면 대단한 영광으로 생각하지 않습니까? 대통령을 한 번 뵙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애를 써야합니까? 옛날에는 대통령이나 대통령 비슷한 사람을 한 번 만나려면 얼마나 큰 돈 보따리를 싸 가지고 갔습니까? 그래도 한 번 만나고 나면 농담 삼아 손에 붕대를 감아 풀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와서 “내가 어떻게 저 존귀하신 하나님, 역사의 주인이시고 세상의 심판자이신 하나님을 뵐 수 있습니까?” 라고 고백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재판할 일이 있을 때, 재판장을 만났다는 것과 같습니다. 내 일, 내 사건을 결정할 재판관을 만나는데 얼마나 감사하겠습니까? 내가 어떻게 그런 하나님을 뵐 수 있는가? 그럴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 자격이 없는 내가 하나님을 뵙는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사람이 심령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세상에서 지위가 높아도 됩니다. 돈이 많아도 됩니다. 잘 나도 됩니다. 그러나 정말로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내가 무엇이기에 이런 사람이 되게 해주셨습니까?’ 라고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어찌하여 내가 이렇게 좋은 학교에서 공부하게 해주시고, 다른 사람으로부터 인정받고 존경받는 사람이 되게 해주셨습니까?’ 라고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베드로를 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난 뒤 바닷가에 나갔습니다. 어느 날, 밤새 물고기를 잡았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그 앞에 어떤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그때 그는 그 분이 예수님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깊은 곳에 그물을 던져보라는 말에 말도 안 되는 소리였지만 어차피 허탕 쳤으니 한 번 던져보자는 마음으로 던져보았더니 한가득 고기를 잡게 되었습니다. 그때 베드로의 눈이 띄어졌습니다. 

3년 동안 함께 다녔던 그 예수님이 하나님인지 알게 된 베드로가 이런 고백을 합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5:8) 3년 동안 함께 했던 예수님이 하나님인줄 알지 못했는데,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고 나니 드디어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보니 한없이 추한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심령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바울은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많이 배웠고 재산도 상당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바울 스스로도 ‘나도 육체를 신뢰할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리하리니(빌3:4)’ 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이 하나님의 일을 하다 함께 일하시는 하나님을 뵙고 난 후 이런 고백을 하게 된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나 혼자 잘난 것으로 생각하면서 멋지게 일하고 당당했는데, 하나님의 일을 하나님과 함께 하다 보니 알게 된 것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을 할 때 너무 두려웠고 겁이 났습니다. 그리하여 내가 여러분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어떤 분은 제가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을 보고 편하게 전하는 것처럼 보였든지 참 편하게 한다고 말합니다. 정말 남의 속을 모르는 소리입니까? 얼마나 겁이 나는지 아십니까? 옛날에 모시던 어떤 어른에게 제자가 찾아와서 “목사님, 주일마다 말씀을 전하는데 왜 그렇게 떨리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하면 안 떨 수가 있습니까?” 그때 그 어른이 하신 말씀은 “이보게, 내가 주일날 오줌 누러 몇 번 가는지 아는가?” 입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긴장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그러했습니다. 너무 두렵고 떨렸습니다. 옛날에는 이런 일 정도는 일 같지도 않았는데, 하나님과 함께 그 일을 하다 보니 너무 두렵고 떨렸던 것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보니 그랬던 것입니다. 이것이 심령이 가난한 자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 예수님을 보십시오. 하늘의 하나님이 이 땅에 내려오셨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인간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당신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사셨습니다. 요한복음 5장에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라 나는 나의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 하므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요5:30)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 뜻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한다는 고백을 하셨는데, 이는 당신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에서 그 위대한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요14:10) 라고 고백하셨는데, 이것을 빌립보서 2장에서는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빌2:6) 라고 해설했습니다. 

당신이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자기를 낮추셨던 것입니다. 또한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셨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빌2:7-8). 같은 하나님인데 인간의 몸을 빌렸기 때문에 죽기까지 복종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심령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 심령이 가난한 것은 내 힘만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마음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철저한 무능을 이야기합니다. 나를 의지하지 않습니다. 내가 가진 지식, 내가 가지고 있는 재산에 의지하지 않습니다. 재능이 많은 사람은 재능에 의지하지 않고, 머리가 좋은 사람은 머리에 의존하지 않는 것입니다. 내 경험이 무엇이고 내 권력이 무엇이고 내 재산, 내 학력이 무엇인가? 아무것도 아니고 그것으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아마 세상을 제대로 살고 고민해보신 분들은 이런 고백을 하셨을 것입니다. 어떤 것도 나에게 힘을 줄 수 없고 하나님뿐이라는 고백, 이것이 바로 심령이 가난한 자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과거의 어떤 일들에 대해서 내가 무엇을 했다고 절대로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앞으로의 일에 대해서 내 힘으로 이것을 하겠다는 말을 절대로 하지 않습니다. 내 힘만으로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절대로 그런 말을 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한참 위기에 있었을 때 어느 날 하나님께서 기드온에게 찾아오셔서 너는 가서 너의 힘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라고 말씀하셨을 때 기드온의 대답은 너무도 심령이 가난한 자의 대답입니다. “주여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겠습니까? 나는 너무 작고 약합니다.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나타나셔서 이스라엘을 에집트의 노예살이에서 구원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출3:10)라고 말씀하셨을 때 모세가 한 대답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출3:11)는 바로 심령이 가난한 것입니다. 모세는 사십년 전에 왕자로 있었을 때는 이런 고백을 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40년 동안 광야에서 살면서 하나님을 제대로 알게 되었습니다. 그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보니 옛날에 그렇게 자신만만했지만 지금은 자신이 하나도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못하겠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심령이 가난한 자 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늘 기도하셨습니다. 새벽에도 기도하셨습니다. 우리 새벽기도가 바로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얼마든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예수님께서 왜 그렇게 기도하셨습니까? 그것은 단적으로 내가 인간으로 있는 이상 내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고백이었습니다. 

신실한 신자들은 늘 기도합니다. 기도할 제목이 많아서입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위대한 기독교인들은 기도를 많이 합니다. 기도할 거리가 많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그분들은 내 힘으로는 할 수 없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하나님 앞에서 살면서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심령이 가난한 것 즉 내가 하나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과 같은 귀한 가르침은 인기가 없습니다.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는 물론이고 기독교 신자들에게도 환영받지 못하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바로 이 말씀의 귀함이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이 말씀은 워낙 인기가 없고 환영받지 못하는 말씀이지만 우리 예수님께서 여덟 가지 복 중에서 처음으로 말씀하신 것이기 때문에 너무도 중요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말씀은 참된 기독교인과 그렇지 못한 기독교인들을 나누어주는 중대한 잣대가 됩니다. 

세상은 자기 신념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자신감을 아주 크게 평가합니다. 요즘 젊은이들을 면접할 때보면 자기 의지가 강한 사람, 자기를 제대로 주장할 줄 아는 사람, 자기 확신이 강한 사람, 자신감이 넘치는 사람, 자기 이미지를 제대로 부각시킬 수 있는 사람을 뽑으려고 합니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모든 것을 동원하여 자기를 표현하고 심지어 자기를 선전합니다. 이것을 잘못 알고 심지어 교회까지도 자기를 선전합니다. 버스에 교회 광고를 하기도 하고, 기독교 텔레비전에도 그렇게 합니다. 심지어는 자기표현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 성형까지도 서슴지 않는 일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이것이 세상입니다. 자꾸 나를 드러내야하고, 다른 사람에게 제대로 표현해야합니다. 세상은 세상 앞에서 살고 사람들 앞에서 살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참된 기독교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향해서 살아가는 사람이기 때문에 자기를 드러낼 것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에서 그리고 기독교 신자들에게 심령이 가난한 것은 인기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져야 합니다. 우리가 진실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심령이 가난한 것을 추구하고 소원해야합니다.

여러분, 채우려면 비워야합니다. 운동할 때는 숨 쉬는 것을 정말로 잘해야 하는데, 숨을 잘 쉬려면 내쉬는 것을 잘해야 합니다. 건강한 사람은 내쉬기를 잘합니다. 우리가 흔히 숨이 찬다고 하는데 내 속에 숨이 가득차면 힘이 듭니다. 노래할 때에도 비우는 것을 훈련하지 못하면 숨이 차서 노래하지 못합니다. 속을 비우면 노래하기 얼마나 쉬운지 모릅니다. 비우면 힘이 들지 않습니다. 

인생이 그렇습니다. 가득 차 있으면 들어오지 못합니다. 사해를 보십시오. 사해는 빠져나갈 길이 없습니다. 강이 없습니다. 계속 받기만 하는데 그렇다고 사해가 늘어납니까? 요즘 보도에 의하면 사해에 물이 줄어서 큰일 났다고 합니다. 하나도 빠져나가지 않고 들어오기만 하는데 왜 그렇습니까? 그런데 그 위의 갈릴리 호수는 끊임없이 물을 빼줍니다. 그러므로 끊임없이 물이 들어옵니다. 거기엔 물이 항상 풍부합니다. 물이 맑고 많은 생물들이 삽니다. 이 까닭이 무엇입니까? 

이는 시사하는 바가 대단히 많습니다. 비우라는 것입니다. 비워야만 하나님이 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비워놓은 사람들에게 채워주십니다. 그냥 채워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충분하게 채워주시고 넘치게 채워주시고 풍성하게 채워주십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들에게 자신있게 말씀하십니다. ‘복이 있도다 심령이 가난한 자들이여’ 이것이 원문 해석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복이 있도다 심령이 가난한 자들이여’ 우리 주님께서는 여러분들이 이런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이 되기 원하십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