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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복을 받은 자입니까? (삿 13:24-25, 삿 15: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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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을 받은 자입니까? (삿 13:24-25, 삿 15:14-20)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연구할 때 세 가지 관점에서 볼 수 있습니다. 본문에 나타난 하나님은 누구신가? 본문에 비추어 본 나는 누구인가? 그렇다면 나는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할 것인가? 이 원칙만 잘 지킨다면 큰 무리 없이 말씀을 대할 수 있고 그 말씀이 우리를 인도합니다. 

그 말씀대로 살 때 열매가 있고 주님의 영광이 나타납니다. 지난 두 주 동안 기드온, 입다를 살펴보았습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뛰어난 일을 하기는 했지만 그들의 생애 후기의 모습은 안타까움을 자아내게 합니다. 끝이 별로 아름답지 못한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반복해서 말씀 드리지만 사사기는 성경의 어느 책보다 우리의 상황을 잘 대변한다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사사기를 통하여 하나님을 알고 나를 알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명을 끝까지 아름답게 감당하기 원합니다. 

이스라엘의 현 주소 

입다가 죽은 후에 소사사로 불리는 입산, 엘론, 압돈이 이스라엘을 다스렸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도무지 하나님께 돌이킬 줄을 모릅니다. 그들은 여호와의 목전에서 다시 악을 행했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40년 동안 블레셋의 압제아래 두셨습니다. 지금까지 압제 기간 중에서 가장 깁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악이 가장 심각했음을 보여줍니다. 40년의 기간 중 20년은 삼손이 사사로 있었습니다. 다른 사사들의 경우, 사사가 있던 기간에는 압제가 끝나고 평온했던 반면, 삼손의 경우에는 그가 사사로 있던 때에도 여전히 힘들었습니다. 삼손이 사사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 증거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방의 압제를 당하면서도 다른 때와 달리 하나님께 도무지 부르짖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으로부터의 구원을 아예 기대조차 하지 않을 정도로 처참한 상황에 빠져 있습니다. 

삼손은 복을 받은 자입니다

이스라엘의 어려운 상황을 반영하는 한 가정이 등장합니다. 소라 땅 단 지파 마노아의 가정입니다. 압제 아래서 부르짖지 않았던 이스라엘처럼 아이를 낳지 못하는 안타까운 상황에 있으면서도 그 부부는 하나님께 부르짖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여호와의 사자가 여인에게 나타납니다. 우리가 무엇을 했기에 기특해서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기도했기에 언제나 응답하시고 무엇인가 섬겼기에 그것으로 크레딧을 쌓아 반드시 복을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회개의 대가가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 즉 불쌍히 여기심에서 나옵니다. 여호와의 사자는 마노아의 아내에게 장차 아들을 낳을 것이라 하면서 그에게 대한 두 가지 약속을 줍니다. ‘아들이 태에서부터 나실인이 될 것이다.’ ‘그가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할 것이다.’ 

‘나실인’이 되는 것은 특별한 목적으로 일정 기간 자신을 구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삼손은 태어날 때부터 나실인으로 구별되었습니다. 부모는 아이의 이름을 삼손이라 지었습니다. 이름의 뜻은 ‘작은 태양’(little sun) 혹은 ‘태양처럼 빛나는’

(sunny)입니다. 압제에 빠진 이스라엘에게 자유와 구원을 가져다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그렇게 지었을 것입니다. 삼손은 여호와의 복과 여호와의 영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구약의 삼손만큼 복을 많이 받은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과 부모는 삼손을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만들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다했습니다. 이제 열매를 거두는 것은 삼손에게 달렸습니다. 삼손은 과연 복을 받은 자로서 하나님과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는 삶을 살아갑니까? 삼손은 과연 민족을 구원하는 태양처럼 사사의 직분을 감당할까요? 

이스라엘은 복을 받은 자들입니다

삼손만 복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사실은 이스라엘이 삼손과 같이 복 받은 민족입니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출 19:5-6)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모세와 언약을 맺으시며 하신 말씀입니다. 온 세계가 하나님의 것이지만 이스라엘만큼은 가장 보배로운 소유가 되게 하시겠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을 제사장 나라로 삼기 위함입니다. 언약 백성을 통하여 세상을 하나님께 이끌기 원하십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세상에 믿는 자의 본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약속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주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것은 하나님을 축복하는 것이요 아브라함을 저주하는 것은 하나님을 저주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완전히 아브라함 편이 되어주시겠다고 하십니다. 더구나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을 통하여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힘입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들은 복덩이일 뿐 아니라 복의 전달자가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축복합니다.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네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신 33:29)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은혜로 나실인 민족으로 선택받았고, 하나님의 영이 감동하는 백성이며, 하나님의 복을 받은 민족입니다. 

우리는 복을 받은 자들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에게 똑같이 해당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갈 3:9) 받는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셨습니다. 죄인인 우리 대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하시며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에베소서를 보면 바울이 로마 옥중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묵상하면서 감격에 차서 영광을 돌립니다. 성부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예정하셨습니다. 성자 하나님은 당신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즉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하나님 나라의 기업을 받도록 상속자로 삼으셨습니다. 

주님 앞에 서는 날까지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증거하기 위하여 성령 하나님은 우리를 인치셨습니다. 한 마디로 우리는 복 받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우리도 삼손처럼 거룩하고 흠이 없는 나실인으로 살아가도록 부름받은 거룩한 백성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과 삶의 목적이 분명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을 통하여 주님의 말씀을 잘 듣고 그 언약을 지키면서 세상의 소금과 빛, 산위의 도성으로 역할을 잘 감당하라 하셨습니다. 


삼손의 스토리에 나오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1) 끝까지 사랑을 베푸시는 분 

“그 때에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을 다스린 까닭에 삼손이 틈을 타서 블레셋 사람을 치려함이었으나 그의 부모는 이 일이 여호와께로부터 나온 것인 줄은 알지 못하였더라” (14:4) 개역성경에 의하면 삼손이 블레셋 여인을 가까이 하는 것은 블레셋 사람들을 치기 위한 의도적인 전략인데 그의 부모가 그것을 알지 못한다는 인상을 줍니다. 그러나 그 번역은 잘못되었습니다. 히브리어 원문에는 ‘그’라는 대명사가 사용됩니다. 그는 여호와를 가리킵니다.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그러나 그의 아비와 어미는 이것이 여호와께서 나온 것인 줄 알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가 즉 여호와가 블레셋 사람들로부터 기회를 찾고 있었고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다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않는다고 하였는데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치유와 회복을 위하여 쉬지 않으셨습니다. 삼손은 틈만 나면 딤나에 내려가 자기 눈에 좋은 여자를 찾고 있는 반면에 여호와께서 틈만 나면 삼손을 통해 블레셋을 칠 기회를 찾고 계셨습니다. 비록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도리어 우상을 섬기며 하나님께 부르짖지도 않지만 하나님은 고통을 당하는 당신의 백성을 잊지 않으시고 안타깝게 여기시면서 그들을 구원하려 하십니다.

삼손이 결혼식 잔치자리에서 블레셋 사람들에게 수수께끼를 냈습니다. 도저히 그것을 풀 수 없었던 블레셋 사람들이 삼손의 아내를 위협하여 마침내 그 답을 알아냈습니다. 삼손은 블레셋 사람들의 자기의 아내를 통해 수수께끼를 푼 것에 대해 분을 참지 못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영이 삼손에게 갑자기 임했고 삼손은 아스글론에 내려가 그곳 사람 30명을 쳐 죽이고 노략해 얻은 옷을 수수께끼 푼 자들에게 주었습니다. 삼손이 아내의 강요에 못 이겨 수수께끼를 알려주는 어리석음을 범했음에도 하나님은 그를 통해 하나님의 역사를 행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어리석음을 뛰어넘어 그분의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이것은 삼손의 승리가 아니라 여호와의 승리입니다. 하나님은 실패하시는 법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일하시지만 우리의 실패가 하나님의 실패가 아닙니다. 우리의 연약함이 하나님의 역사를 제한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뜻 가운데 모든 것을 이끄십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일의 성패가 사람에게 달린 것처럼 생각합니다. 돈, 지식, 능력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결정적인 요소라고 생각하여 그것을 갖춘 사람을 찾으려 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택한 사람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십니다. 지금 팔로마한인교회를 섬기게 하신 것을 감사하기 바랍니다. 충성하기 바랍니다. 주님의 상급이 있습니다.


2) 말씀대로 이루시는 분

블레셋이 군대를 이끌고 유다 지파 변경에 나타나 삼손을 붙잡아 넘겨줄 것을 요구하자 유다 자파 사람 3000명이 삼손을 잡으려고 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블레셋 사람이 우리를 다스리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15:11) 하며 도리어 일을 복잡하게 만든다고 삼손을 책망합니다. 

이것이 과연 하나님의 백성들의 말이 맞는지 의심할 정도입니다. 블레셋에 대항하여 단 한 명도 일어나지 않던 유다인들이 동족인 삼손을 잡기 위해 3000명이 동원되었다는 것은 누가 적인지 아군인지 분별하지 못하는 당시 이스라엘의 영적인 상태를 잘 보여줍니다. 

유다인들은 삼손과 타협한 끝에 새 줄 두 개로 심속을 결박한 채 에담 바위틈에서 끌어내어 레히로 나옵니다. 삼손과 블레셋이 정면으로 충돌합니다. 여호와의 신이 삼손에게 임하시자 삼손을 묶는 줄이 풀립니다. 삼손은 나귀의 새 턱뼈를 보고 손을 내밀어 취하고 그것으로 일천 명을 죽인 후에 승전가를 부릅니다. 

“귀의 턱뼈로 한 더미, 두 더미를 쌓았음이여 나귀의 턱뼈로 내가 천 명을 죽였도다”(15:16). 

삼손은 승리를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고 자신을 자랑합니다.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지 않았더라면 삼손이 어떻게 혼자서 천명을 죽였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손은 자기 자랑만 하다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을 잊어버립니다. 그런데 갑자기 문제가 생깁니다. 삼손이 심한 갈증을 느끼며 죽음의 공포를 느낍니다. 이에 삼손은 갈증을 견디다 못해 하나님께 도움을 청합니다. 

“주께서 종의 손을 통하여 이 큰 구원을 베푸셨사오나 내가 이제 목말라 죽어서 할례 받지 못한 자들의 손에 떨어지겠나이다”(15:18). 

우리는 삼손의 기도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삼손의 어리석은 행동을 통해 결국 자신의 두 번째 약속을 성취하시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두 번째 약속은 “그가 (하나님의 나실인인 삼손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하리라”(13:5)라는 것입니다. 

삼손의 기도에 등장하는 세 단어 ‘종’, ‘구원, ’ ‘무할례자’는 사사기 13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두 번째 약속과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민 23:19)

우리는 복 받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복 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려면: 

1)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삼손은 나실인으로 어머니의 태에서부터 성별되었고 태어나서도 하나님의 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삼손은 나실인으로서 온전히 구별된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삼손이 딤나 여인과 결혼하려는 단 한 가지 이유는 ‘내 눈에 좋사오니’입니다. 이스라엘의 특징은“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17:6) 

‘자기 소견에 좋은 대로’를 문자적으로 직역하면 ‘자기 눈에 좋은 대로’입니다. 삼손은 자기가 죽인 사자의 주검을 보았습니다. 그 주검에 벌떼와 꿀이 있었습니다. 삼손을 그 꿀을 떠서 먹고 부모에게도 주었습니다. 시체를 가까이 해서는 안 된다는 나실인의 규례를 어겼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삼손을 통해 이스라엘 구원 역사를 시작하십니다. 나귀의 새 턱뼈 하면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것을 뜻합니다. 삼손은 나실인으로 만져서는 안 되는 짐승의 시체를 다시 한 번 만졌습니다. 하나님께서 부적절한 행동을 하는 삼손을 통해 블레셋을 치기는 하셨지만 그래도 삼손의 행동은 잘못된 것입니다. 


사탄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패배했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를 유혹해 넘어뜨리는 가장 강력한 적입니다. 사자보다 강한 삼손을 무너뜨린 무기는 블레셋의 철제무기가 아니었습니다. 삼손은 이방 여인들을 집요하게 좇았습니다. 영적으로 이방 풍습에 대한 사랑, 세상에 대한 열망 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신약적인 용어로 말하면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을 무력하게 만드는 것도 바로 이것입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 2:15-17).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우리가 무엇을 행했거나 우리에게 그럴만한 조건이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삼손과 마찬가지로 태어나면서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나실인입니다. 사탄은 우리의 약한 부분을 공격하며 우리를 넘어뜨리게 합니다. 늘 깨어 있으며 하나님이 이미 주신 약속을 믿을 때 사탄의 공격을 이기고 거룩함으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약점이 무엇인지, 하나님께 대한 헌신의 정도가 어떠한지 살펴야 합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성령의 역사와 인도하심 가운데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로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2) 성령의 능력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제대로 감당할 수 없는 부족한 자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명을 맡기실 때 그것을 능히 감당할 수 있는 힘과 능력도 함께 주십니다. 자신의 아내를 친구에게 준 장인의 행동에 화가 난 삼손은 블레셋 사람들의 밭을 불태웠습니다. 그러자 블레셋 사람들은 다시 삼손의 아내와 장인을 죽였고 삼손은 이에 대한 복수를 행하다가 결국에는 블레셋 사람 1000명을 죽이게 됩니다. 삼손은 ‘내가’ 원수를 갚겠다고 말했지만 성경은 하나님의 영이 임해 나귀의 턱뼈로 1000명을 죽인 것이라고 기록했습니다. 

그가 사자를 맨손을 잡아 죽인 일이나 아스글론 사람 30명을 죽인 일에도 여호와의 영이 강하게 임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삼손을 사사로 부르시고 강한 힘으로 그에게 역사하신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부르시고 하나님의 모든 능력을 부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 역사하시기에 우리는 이제 연약한 자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주님의 일을 감당할 수 있도록 힘과 능력을 충만히 부어 주셨습니다. 그것을 믿고 담대하게 주님의 일을 감당해야 합니다.

맡겨진 일들을 성령의 능력으로 감당한 사람은 일의 성패에 상관없이 그 모든 일로 인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베푸신 은혜에 감사하며 찬양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힘으로 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 일의 성패에 따라 자신을 드러내고 자랑하며 보상을 바라든지 아니면 자책하거나 열등감에 빠져 절망하게 됩니다. 우리의 능력으로는 선한 열매를 제대로 맺을 수 없습니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성령은 믿음으로 구원받은 자들의 분명한 증거입니다. 오직 성령을 구하며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할 때 성령의 인도하심과 능력 가운데 값진 열매를 맛보게 될 것입니다. 


3)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나귀턱뼈로 블레셋 사람 천명을 쳐 죽였습니다. 가장 큰 승리를 이룬 순간에 삼손은 하나님을 생각하며 그분께 영광을 돌리지 않고 도리어 자기가 블레셋 사람들을 죽였다고 자랑했습니다. 그러다가 목말라 죽을 지경이 되니 살려달라고 하나님께 구원을 요청합니다. 그제야 삼손은 자신이 거둔 승리를 하나님이 베푸신 구원으로 고백합니다. 

이런 고백을 하였다는 것은 하나님이 도와주셔서 자기가 블레셋을 물리쳤다는 것을 이미 알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아쉬울 때만 하나님을 찾아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받으셔야 할 영광을 우리가 도적질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연약할지라도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이루어가십니다. 우리가 실패할 수 있으나, 하나님은 실패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무지하며 능력이 없고 연약해 자주 넘어지나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 역사하셔서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이루십니다. 하나님이 그분의 구원 역사에 우리를 동참시키시며 우리에게 승리의 기쁨을 충만히 누리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더 큰 은혜와 복을 알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엎드려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구할 때 얻으며 찾을 때 찾게 되고 두드릴 때 열릴 것이라고 약속을 주셨습니다. 오늘날의 나실인인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고 자기 일에만 몰두할 때 하나님이 어떻게 여기시겠습니까? 어쩌다 보니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 자들이 아니라 이왕 하나님께 부름 받았으면 자원해서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동역자로 주의 일에 참여하며 그분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히브리서를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이 세대를 본받지 않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써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며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여 우리의 삶 전체를 드리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고 놀라운 이적을 베푸십니다. 우리는 선택받은 자들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백성이요, 하나님의 소유입니다(벧전 2:9). 그리스도인이 구원을 받은 것은 단순히 자신의 구원을 즐기기 위함이 아니라 죄의 어두움과 그 악한 세력으로부터 영생으로 불러내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분을 찬양하기 위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들은 우리가 얼마나 복을 받은 자들인지 압니다. 우리가 누구인지 압니다. 우리가 왜 택함을 받았는지 압니다. 우리가 갈 곳이 어디인지 압니다. 이 사실을 깨달은 성도들은 세상에 대하여 당당하여 미래에 대하여 확신하며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습니다. 

나실인으로 구별된 삶을 살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역사를 삶 속에 보여주어야 합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살며 그분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세월을 아끼며 때를 잘 활용하는 지혜로운 성도들,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아는 성도들,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성도들이 되어 하나님께 기쁨의 찬송이 될 뿐 아니라 이 땅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주시는 기름진 복을 누리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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