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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눅 15:2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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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눅 15:25-32)

(눅15:25-32)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1. 예수께서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인 바리새인, 서기관들과 식사를 함께 하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때에 여러 ‘세리들과 죄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자 예수께 가까이 모여들었습니다. ‘세리들과 죄인들’은 간음한 자, 사기꾼, 그리고 불명예스러운 직업을 가진 자 등으로 유대 사회에서 이방인들처럼 취급되는 이른 바 소외된 자들을 말합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이방인과 식사를 같이 할 수 없었던 것처럼, ‘세리들과 죄인들’과는 식사를 함께 해서는 안되었습니다. 그런데 ‘세리들과 죄인들’이 예수께 모여들자 예수께서 그들을 영접하여 식탁을 함께 하셨습니다. 이를 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매우 불쾌하게 생각하고 불만을 터트렸습니다. 그러한 예수 그리스도를 두고 “(눅15:2)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면서, 예수와 예수의 추종자들을 탄핵하겠다는 뜻으로 수군거렸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잃은 양을 찾은 목자의 비유’(눅15:3-7), ‘잃은 드라크마를 찾은 여인의 비유’(눅15:8-10), 

그리고 오늘 본문에 해당되는 ‘잃은 아들을 되찾은 아버지의 비유’(눅15:1-32)입니다. ‘탕자의 비유’로 널리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두 아들을 둔 한 아버지에 대한 것입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아버지 재산 중에서 자신에게 돌아올 분깃을 달라고 요구합니다.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은 자기 분깃을 받아 아버지와 형을 뒤로 하고 멀리 떠납니다. 그는 아버지 집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상속받은 재산을 모두 탕진하고, 험악한 생활 끝에 크게 후회하며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고자 합니다. 

(눅15:17-19)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마침내 집 나간 아들이 돌아왔습니다. 아버지는 거지 중 상거지 꼴로 돌아오는 아들을 멀리서 보고는 측은히 여겨 달려가 껴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아들은 땅에 꿇어앉아 후회막급한 눈물을 흘리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합니다. “아버지, 저는 당신의 아들이 될 자격이 없습니다. 품꾼의 하나로 삼아주소서”(21절). 

아버지는 잘못을 뉘우치며 돌아온 아들을 향해 “무슨 말이냐? 너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온 아들이로다.”며 오히려 매우 기뻐했습니다(24절). 아버지는 아들을 품꾼으로 대하기는커녕, 아들에게 해주고 싶은 모든 것을 다 베풀어주었습니다. 아버지는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종살이 하느라 맨발로 돌아온 아들에게 신을 신기었습니다. 돌아온 아들은 분명 탕자였지만 ‘방탕한 아들’을 문제삼지 아니하시고, 아들이 살아서 돌아왔다는 것만으로, 아버지는 위로와 기쁨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잃었던 아들을 다시 얻었다는 기쁨에 살진 송아지를 잡아 온 동네 잔치를 벌여 아들의 돌아옴을 모두 다 함께 기뻐했습니다.

(눅15:24)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여기까지는 둘째 아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둘째 아들에 대한 이야기는 ‘탕자의 비유’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맏아들을 두고 소위 ‘잃어버린 아들’로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또 하나의 ‘잃어버린 아들’, ‘맏아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맏아들이 밭에서 돌아오는데 집에서 풍악과 춤추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었습니다. 한 종을 불러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묻자, 그 종이 아주 흥분되어 그 기쁜 소식을 이렇게 전합니다.

 “(눅15:27)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이에 맏아들이 화가 치밀어 집에 들어가기를 거절하자, 아버지가 나와 함께 집에 들어가자고 권하지만 불만을 터트립니다. 

“(눅15:29-30)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이 말은 그가 아버지와 동생으로 인해, 얼마나 깊이 마음에 상처를 입었는가를 보여준 것입니다. 그는 아버지의 기쁨으로 인해 고통스러울 정도로 상처를 입은 것이었습니다. 아버지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동생을 위해, 그처럼 거대한 잔치를 베푸는 것이 몹시도 못마땅하여, 상심한 끝에 분통을 터트린 것입니다. 그의 분노는 집으로 돌아온 형제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2. 이 맏아들처럼 이 시대에도 여전히 집에 있는 ‘잃어버린’ 맏아들이 많이 있습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동생”을 정죄하고,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탕자를 위해서는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며, 시기와 빈정거림 속에 분노하는 모습이, 바로 또 다른 형태의 ‘잃어버린 맏아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돌아온 탕자 동생과 그 동생에 대한 아버지의 처우에 대해 터트린 분노, 시기, 빈정거림, 적개심 등은 맏아들의 마음과 인격을 크게 일그러지게 만들었습니다. 둘째 아들이 죄를 범했다는 사실에는 쉽게 누구든지 공감하게 됩니다. 그 둘째 아들은 금전과 시간을 잘못 사용한 면에서 분명히 ‘잃어버린 아들’입니다. 그가 행한 것은, 그가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라고 고백한 것처럼, 분명 탕자의 죄악 그대로였습니다. 

그의 가족과 친구뿐만 아니라 그 자신도 그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도덕과 윤리에 반하여 행동했고 비행을 저질렀습니다. 그러나 얼마 후 제정신이 돌아와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고, 아버지의 용서를 구했습니다. 아버지는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탕자를 너무나 쉽게 용서하시고 끌어안으며, 게다가 잔치까지 베풀어 크게 환영했습니다. 

이같은 아버지의 사랑과 용서를, 맏아들로서는 도저히 용납하기 어려웠던 것입니다. 맏아들은 옳은 것만을 행했습니다. 그는 부모에게 순종적이었고, 자신의 의무에 충실했고, 근면 성실하게 일했습니다. 그는 소위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그를 존경하며 칭찬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아주 모범적인 아들을 여겼고 그 자신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겉으로 볼 때 그는 무결점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동생이 집으로 돌아와 아버지가 기뻐하시는 그 기쁨에 직면했을 때, 그의 어두운 면이 들어나게 되었습니다. 갑자기 그는 분개하며, 박정하며, 이기적인 사람이 되었습니다. 여지없이 그의 깊이 숨겨진 면모가 드러났습니다. 그의 마음 깊은 곳에 감추어진 욕망과 분노가 드러났습니다. 그의 분노는 마치 그의 바르고 의로운 마음과 생활에서 분출한, 소위 의로운 분개처럼 보였습니다. 

맏아들의 분노는 ‘의로움’ 가운데 드러난 것으로 정당한 행위처럼 보였고, 그러한 그의 행위는 아버지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동생에 대해 당연한 정죄와 비판으로 나타났습니다. 맏아들은 소위 ‘바른 생활의 사나이’이기 때문에, 동생에 대해 분개하는 가운데, 자신이 무엇을 잃어버렸는가를 쉽게 깨달을 수가 없었습니다. 조심스럽게 맏아들의 말에 귀를 기울일 때, 그의 말이 이렇게 들리기도 합니다. ‘나는 정말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오랫동안 누구보다 더 많이 일했습니다. 

그런데도 나는 다른 사람들이 쉽게 얻은 것에 비하면 나는 그만큼 받지 못했습니다. 왜 사람들이 그렇게 쉽게 아무런 생각없이 사는 사람들에게 엄청난 관심을 가지는 반면, 내게 감사하지 않는지, 왜 나를 초대하지 않는지, 왜 나와 함께 놀아주지 않는지, 왜 내게 영광을 돌리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가운데 이러한 ‘맏아들’의 모습이 우리 자신 안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맏아들은 집 안으로 들어가 그의 아버지의 기쁨을 함께 나눌 수가 없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기쁨과 분개는 함께 존재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탕자와 함께 기뻐할 수 없게 하는 것은 자신의 의로움과 그 의로움에서 내뿜는 분개입니다. 그래서 그를 기쁨으로 초대하는 음악과 춤은 더욱 더 그를 괴롭게 할 뿐이었습니다. 기뻐하는 자와 함께 기뻐하고 슬퍼하는 자와 함께 할 수 없는, 그의 일그러진 의로움이 자신을 불만에 빠지게 했고, 자신을 어두움으로 몰아갔습니다. 맏아들의 어두운 마음이 탕자로 돌아온 동생을 비판하고 정죄하며 분개한 것이었습니다. 


3. 하나님을 아주 잘 믿는다는 시몬이라 하는 바리새인이 예수를 초청했습니다. 예수께서 그 집에 들어가 앉자마자, 그 동네에서 행실이 불량한 한 여인이 따라 들어와, 눈물로 예수의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어드렸습니다. 이를 보고있던 바리새인 시몬은 마음에 “예수가 만일 선지자라면 이 여자가 행실이 불량한, 죄 많은 여자임을 알아보고 자신에게 하는 행위를 못하게 하고 물리쳤을 것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는 시몬의 마음을 꿰뚫어보시고 다음과 같은 비유를 말씀하시며 질문하셨습니다.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저를 더 사랑하겠느냐?” 시몬은 “제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시몬에게 “네 판단이 옳다.” 말씀하시고 그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 여자를 보라. 내가 네 집에 들어오매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씻었으며,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관습에 손님이 자기 집에 들어올 때는, 반드시 손과 발을 씻을 물을 주고, 그 손님을 반가운 마음으로 환영한다는 표시로 입을 맞추는 것이 예의였습니다. 그리고 식사 전에 손님을 존경한다는 표시로 머리에 향유를 발라드리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 시몬은 이 모든 절차와 예의를 하나도 지키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 마음 중심으로 예수를 초청하고 영접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초청해서 오면 그만이고 오지 않아도 그만인 태도였습니다. 시몬은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를 초청하여 영접하고자하는 뜨거운 마음과 열정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죄 많은 여인은 소문을 듣고 예수를 찾아와, 눈물로 예수의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씻고,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부어드렸습니다. 이 여인은 마음 중심에서 예수를 존경했습니다. 이 여인은 진실한 마음으로 예수를 사랑했습니다. 이 여인은 극진한 마음으로 예수께 헌신했습니다. 이 여자가 눈물로서 예수의 발을 닦은 것은 사랑의 진실이었고, 그 발에 입을 맞춘 것은 복종과 헌신의 진실이었고, 향유를 부은 것은 최선을 다하여 최후의 순간까지 예수를 따르는 죽음의 진실이었습니다. 이런 진실을 예수는 자기 곧 하나님께 대한 믿음으로 받아드리시고, 그 여자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또한 이 여자의 행위야말로 참된 신앙의 모범이었기 때문에, 예수는 “이 여자가 한 일은 온 세상 어디든지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알려져야 하고 기억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가14:9). 예수는 이 여인의 진실한 마음의 행동을 “사랑함이 많음”이라고 해석하셨습니다. 그 “사랑함이 많음”이 그 죄 많은 여인을 구원하였습니다. 

예수께서는 여러분 마음의 진실함을 보십니다. 그러나 그 여인의 행동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제자들은, 그 죄 많은 여자에게 “왜 값진 향유를 허비하느냐. 그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해야 할 것이 아니었느냐?”면서,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제자들의 마음속에는 정말 빈민구제의 사랑이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단지 입바른 소리에 불과했습니다. 사랑은 마음에 있는 것이지 입술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의 마음속에는 사랑 대신 질투와 물질에 대한 욕심이 차 있으면서 스스로를 기만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어느 쪽이 진실한 믿음과 사랑인가를 꿰뚫어 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여자가 예수의 발을 머리털로 닦았건 손수건으로 닦았건 그것이 문제가 안됩니다. 그 향유의 가치가 3백만 원이든 3천 원이든 거기에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여자의 눈물, 그 마음의 표현, 그 진실의 표현에, “네 죄가 사하여졌다”는 용서와 구원의 능력이 나타났던 것입니다. 

예수가 문제로 삼은 것은 바리새인 시몬과 제자들의 어두운 마음이었습니다. 사랑은 태양과 같이 밝은 것입니다. 바리새인은 죄인들과 거리를 두고 사는 가장 의로운 사람으로, 더러운 여인의 행위를 용납한 예수를 비난하는 마음, 어두운 마음을 가졌습니다. 시몬과 제자들의 어두운 마음이, 죄 많은 여인의 어두운 과거만을 보고 모든 것을 어둡게만 판단했습니다. 마음이 병들었기 때문입니다. 

시몬은 죄 많은 여인의 행동을 비판하고 정죄했지만, 그 여자는 진실한 마음으로 행동했습니다. 시몬은 자랑스러운 바리새인이었으나 어둡게 살고 어둡게 생각했습니다. 그 죄 많은 여자는 사회에서 떳떳하지 못한 어두운 과거를 가졌으나, 이제 예수를 만나 진실되고 밝은 마음으로 사랑을 표현했고 용서를 빌었습니다. 진실된 마음을 드러내어 밝은 내일을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는 여자의 기름붓는 행동을 식사준비가 아니라, 자신의 장례준비로 해석하셨습니다. 즉 함께 있을 기간이 많지 않은 예수를 위하여 살아 계신 동안에 자기의 최선을 다한 사랑의 표시가, 옥합을 깨는 행동이었던 것입니다. 행동과 실천이 있는 사랑, 내일을 바라보는 밝은 사랑을 예수는 “사랑함이 많음”이라고 불렀고, 그런 사랑이 예수의 용서와 구원의 은총을 받게 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그 여인이 죄 많은 여인임을 알고 계셨지만 그 지은 죄에 대해 한 마디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조용히 그 여인의 진실한 마음과 행위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어두운 과거로부터 밝고 새로운 구원받은 삶을 선포하셨습니다. 

“네 죄사함을 얻었느니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그 여인은 새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여인의 진실한 마음의 사랑과 예수의 용서와 사랑의 은총이 열매를 맺은 것입니다. 진실한 마음에서 비롯되는 용서와 사랑은 반드시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500만 원 빚진 자와 50만 원 빚진 자가 모두 탕감 받았을 경우 누구의 사랑이 더 크겠습니까? 

물론 많이 탕감(용서)받은 사람이 감사도 크고 사랑도 큰 법입니다. 죄인인 여자를 비난하고 있는 바리새인 시몬이나 제자들은, 자기 자신은 바르게 살았으므로 하나님께 빚진 것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 단돈 5만원도 빚진 것이 없고, 그 죄 많은 여인은 500만원, 아니 그보다 더 엄청난, 그래서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빚을 졌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을 어기지 않았으니, 하나님께 용서받을 빚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가장 큰 빚은 사랑의 빚입니다. 사랑하지 않은 것이 그 모든 계명을 어긴 것보다 더 큰 죄인 것을 알아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는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고 선언하시고, 새 계명은 곧 사랑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 “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해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할 수 있는 사랑의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크신 사랑이 이 여인의 많은 죄와 허물을 덮었습니다. 그리고 구원과 새 생명의 열매를 맺었습니다.(눅7:36-47) 


4. 오늘 본문 이야기에서, 우리는 맏아들이 종으로부터 집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전해 듣고 분노하여, 집 안으로 들어가기를 거절했습니다. 이에 아버지가 나와서 들어가자고 권면합니다. 그러나 맏아들은 동생과 아버지의 행위에 대해 빈정거리며 시기하고 정죄하며 분노를 터트립니다. 이에 아버지가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며 다시 권면합니다.

‘죽었다가 살아난 것과도 같으며 잃었다가 얻은 것과도 같은 동생’을 두고, 함께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빈정거리고 시기하며 정죄하며 분노할 것이 아니라, 함께 즐거워하고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맏아들은 기쁨과 축제로 가득한 집으로 들어가기를 원치 아니하는 모습이었습니다. 동생에 대한 아버지의 용서와 사랑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회개하고 집으로 돌아와 새 사람이 된 동생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스스로를 의롭다고 여기는 여지없는 바리새인들과 같은 맏아들이었습니다. 옥합을 깨트린 여인의 뼈아픈 과거, 죄 많은 과거만을 보고, 모든 것을 어둡게만 판단하는 바리새인 시몬처럼, 맏아들의 마음은 온통 어두움을 꽉 차 있었습니다. 옥합을 깨트려 예수의 발에 부어드린 여인을 두고, “왜 값진 향유를 허비하느냐. 그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해야 할 것이 아니었느냐?”면서 빈정거리며, 스스로를 의롭게 여긴 바리새인의 어두운 마음 그대로였습니다. 

예수께서는 그 여인이 죄 많은 여인임을 알고 계셨지만, 그 지은 죄에 대해 한 마디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조용히 그 여인의 진실한 마음과 행위를 받아들이고, 어두운 과거로부터 밝고 새로운 구원받은 삶을 선포하셨습니다. “네 죄사함을 얻었느니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이렇게 해서 그 여인은 새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탕자에 대한 아버지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동생은 아버지 재산을 탕진한 죄인이었지만, 아버지 집으로 돌아온 그 자체로, 이미 아버지께서 그 죄를 용서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맏아들은 아버지의 권면을 받아들이지 않고, 집 안으로 들어가기를 거부했습니다. 아버지 집 안에는 기쁨과 빛으로 가득한, 바로 하나님의 집입니다. 거기에는 모든 음악과 춤이 있습니다. 

맏아들은 그 집으로 들어가기를 거부하고, 이 용서와 사랑의 잔치가 벌어지는 마당 울타리 밖에 서 있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 맏아들에게 결국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그는 그의 아버지의 설득을 받아들였을까? 그는 형제를 포옹하고 그 아버지와 같이 형제를 환영했을까? 맏아들은 진심으로 아버지처럼 탕자 동생을 용서하고 사랑했을까? 그리고 그는 동생에 대한 형제애를 가지고 아버지와 함께 잔치를 즐기기 위해 함께 식탁에 앉았을까?’ 다는 아니지만, 이 비유는 해피엔딩(Happy Ending)으로 끝나지 않고, 그 마지막을 여러분의 몫으로 남겨놓았습니다. 


5. 둘째 아들은 ‘돌아온 탕자’였고, 맏아들은 자신의 의로움 때문에 ‘잃어버린 아들’이었습니다. ‘돌아온 탕자’는 어두움에서 빛으로 돌아왔습니다. ‘잃어버린 아들’, 맏아들은 빛이 되시는 아버지 집에 있었지만, ‘돌아온 탕자’ 동생에 대한 분개, 그 동생을 집으로 맞아들여 잔치를 벌이시는 아버지에 대한 불만으로, 그의 마음은 온통 어둠으로 휩싸이게 되었습니다. 재산을 탕진했지만 회개하고 집에 돌아온 둘째 아들은, ‘잃었다 찾은 아들’입니다. 

그러나 맏아들은 회개하고 집에 돌아온 동생을 기쁨으로 영접하지 아니하고 아버지의 용서와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신의 의로움을 내세워, 분노하여 집 밖에 서있는 ‘잃어버린 아들’입니다. 맏아들은 처음부터 아버지 집에 있었지만, 스스로의 의로움 때문에 집에 들어가기를 거부한 ‘잃어버린 아들’이 되었습니다.

둘째 아들이 방탕한 생활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 맏아들이 ‘잃어버림’으로부터 집으로 돌아오는 것보다 훨씬 쉬운 것입니다. 분노 가운데 자신을 잃어버리고, 시기 가운데 사로잡히고, 복종과 의무를 다한 생활 가운데 자신의 의로움에 갇혀있을 때, 어떻게 잔치가 벌어지고 있는 아버지 집으로 돌아올 수 있겠습니까? 아버지는 집 안으로 들어오기를 거부하며 분노하고 있는 아들에게, 집 안으로 들어가자고 애원했습니다.(28절) 

그 아버지는 둘째 아들이 돌아오는 것뿐만 아니라, 맏아들 역시 마찬가지로 집 안으로 돌아오기를 원합니다. 맏아들 역시 찾아야 할 필요성이 있었고, 그래서 잔치하는 집으로 돌아와야 했습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한 가지는, 그 아버지는 두 아들 모두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이 두 아들을 만나기 위해 밖으로 나왔습니다. 아버지는 두 아들 모두가 한 식탁에 앉아 잔치의 기쁨에 참여하는 것을 원했습니다. 

둘째 아들에게는 용서와 사랑의 포옹으로 받아들이고, 맏아들은 아버지의 용서와 사랑의 모습을 보고 자신의 분노를 극복하고 치유되기를 원했습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한 가지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은 사랑하는 자에게 강요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내면의 어두움이 치유되기를 원하실지라도, 어두움에 계속 머물러 있든지, 아니면 하나님 사랑의 빛으로 들어오든지 우리의 선택에 맡기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거기, 집 밖에 있는 두 아들과 함께 계십니다. 하나님의 빛은 거기, 두 아들에게 함께 비추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은 거기, 집 밖에 있는 두 아들들과 함께 있습니다.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은 거기에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항상 거기, ‘돌아온 탕자’와 ‘잃어버린 아들’이 있는 곳에 계시다는 것입니다. 항상 용서하시고 사랑을 베풀어주실 준비가 되어 거기에 계십니다. 그러나 절대적으로 두 아들의 응답에 맡기십니다. ‘돌아온 탕자’는 아버지의 용서와 사랑을 받아들였고, ‘잃어버린 아들’은, 아버지의 ‘내 아들아,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고, 내가 가진 모든 것은 네 것이다.’ 는 사랑과 축복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여러분이 둘째 아들이든 맏아들이든 상관없이, 하나님의 유일한 소망은, 두 아들 모두가 다 집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아버지는 둘째 아들에게 행한 것과 마찬가지로 맏아들을 맞아들이기 위해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내 아들아,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고, 내가 가진 모든 것은 네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의 끝없는 사랑이 그의 두 아들에게 아주 똑같이 공평하게 제공되었습니다. 우리는 과거에 아버지 집을 떠났다 아버지 집으로 ‘돌아온 탕자’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면에서 스스로를 의롭다 여기며, ‘돌아온 탕자’, 형제에 대해 비판하고 정죄하는, 어두운 마음이 없는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우리를 찾아 집으로 데려오기 위해 밖으로 뛰쳐나가신다 할지라도, 우리는 ‘잃어버린 자’라는 것뿐만 아니라, 찾아서 집으로 데려와야 할 존재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부흥사인 이성봉 목사의 설교집에서 읽은 내용 하나를 소개합니다.
《어떤 부자가 상처(喪妻)를 했는데 새 장가를 들어 젊은 색시를 데려 왔습니다. 여자가 시집 온 날부터 남편의 속을 많이 썩이는데, 밥을 하라면 죽을 쑤고, 죽을 쑤라면 밥을 하고, 가라면 오고, 오라 하면 가고, 앉으라면 서고, 서라면 앉는 것입니다. 아마 나이가 어려서 그렇겠지 하고 모든 것을 참았더니, 나이가 들고나니, 꼴에 외간 남자에 눈을 뜨기 시작했습니다. 간부(姦夫)를 두고는 볼사납게 굴기 시작합니다. 여러 번 권면을 하나 조금도 회개하는 빛이 없고, 오히려 이혼을 강요하기까지 합니다. 허락하지 않으니까, 하루는 간부와 공모를 하고, 남편의 밥에다 독약을 넣어 처치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남편이 하루는 밥을 먹다가 토하고 구사일생하였습니다. 여자를 불러 책망을 하니, 조금도 회개하지 않고 반항을 합니다. 할 수 없어 간부를 책망하고, 어서 내 눈앞에서 보이지 않는 곳으로 멀리 가서 잘 살라고 놓아주었습니다. 간부는 손에 손을 잡고 현해탄을 건너 일본에 가서 재미있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죄악으로 맺어진 사랑은 오래갈 수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나이는 그 여자를 술집 유곽에다 팔아먹었습니다. 그 여자는 불의의 씨를 배고 만삭이 되어서, 술 단지를 부둥켜안고, 오고 가는 뭇 사람에게 술을 팔고 육체를 팔아, 비참한 고통의 생활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 본남편이 일본을 갔다가,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오랜만에 그 여자를 보고, 너무 반갑고 감격하여 달려가서, “너 이거 웬일이냐?” 하고 손목을 확 잡으니, 그 여자는 깜짝 놀라 가만히 있다가, 눈을 흘기며 “무얼 하러 왔소?”하며, 퉁명스럽게 내뱉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너를 보러 왔다.” “이것을 보면 뭘 해요?” “너 내 품 떠나더니 잘 되었구나.” “잘됐건 못됐건 당신이 무슨 상관이오.” “대관절 얼마에나 팔려 왔노?” “물어 보구려,” “여보, 주인! 이 여자 얼마에 사 왔소?” “돈 많이 주었지요” “여보시오 이 여자 도로 물러 주시오. 이 여자는 내 아내요” 하고 많은 배상금을 치르고 찾아내었습니다. 

그 여자 말하기를 “저는 데려다 무엇해요?” 했지만, “어서 가자. 너는 나의 사랑하는 아내가 아닌가?” 하고, 데리고 한국에 건너 와서 그 간부(姦夫)의 자식을 낳게 했습니다. 그 남편은 그 아이를, 제 아이보다 더 사랑하고 귀여워하며, 그 더러운 여자를 전보다 더욱 사랑하여 주었습니다. 그 여자는 누구이겠습니까? 이 여자는 바로 나를 비롯하여 모든 인생의 모습을 나타냅니다.》세상과 눈이 맞아 집을 나간 여자의 삶은 불행 그 자체였으나, 남편의 지극한 사랑으로 집에 돌아와, 참된 행복을 찾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잃은 양 한 마리”, “잃은 드라크마 하나”의 비유를 들어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양 백마리 가운데 한 마리를 잃어버렸을 때, 그 한 마리를 위해 온 들판을 찾아다니지 않겠느냐? 그러다가 찾으면 너희는 그 양을 어깨에 메고 즐거워하며 집에 돌아와서는, 친구와 이웃들을 불러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나와 함께 기뻐합시다. 잃은 내 양을 찾았습니다!’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로운 사람 아흔 아홉보다, 죄인 하나가 회개하는 것을 더 기뻐하느니라.” 

“또 어떤 여자에게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 가지고 집 안을 쓸며 그것을 열심히 찾지 않겠느냐? 그러다가 찾으면 친구들과 이웃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나와 함께 기뻐합시다. 잃은 드라크마를 찾았습니다.’ 하고 말할 것이다.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천사들이 기뻐하느니라.” 

아버지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탕자’를 두고 분개하며, 그 ‘탕자’를 위해 잔치를 베푼 아버지 처사에 불만을 품고 집으로 들어가기를 거부한 맏아들에게, 아버지는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습니다.’(32절) 

스스로 의롭다 여기며 ‘돌아온 탕자’와 함께 기뻐하지 못한다면, 그는 ‘잃어버린 아들’입니다. 아버지가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라.’ 고 하셨지만, ‘돌아온 탕자’와 함께 기뻐하지 못한다면, 그리고 그를 사랑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는 ‘잃어버린 아들’로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항상 여러분과 함께 하십니다. ‘돌아와 탕자’가 그 누구이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함께 기뻐하는 참된 하나님의 ‘장자’(長子)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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