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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고전 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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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고전 11:1)


러시아의 모스크바에 높이 5.4m에 무게 219톤이나 되는 세계 최대의 종이 있다고 합니다.
이 거대한 종이 울려 퍼질 때에 그 웅장함은 얼마나 대단하겠습니까? 그런데 애석하게도 그 종은 크지만 세계 최대의 종일 뿐 사람들이 그 가치를 인정해 주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것은 그 종이 한 번도 울려 본 적이 없는 덩치만 큰 벙어리 종이기 때문입니다. 
울리지 않는 종은 바로 용광로에 들어가 다른 것으로 만들어 져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이 세계 최대의 종이 벙어리가 되었을까요? 

종 만드는 공방에서 세계 최대의 종을 만들기 위해 모든 준비 작업을 끝내고 뜨거운 쇳물을 주조틀에 들이 붓고 있을 때였습니다.
갑자기 공장 내부에서 큰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다행히 불은 인부들의 재빠른 진화 작업으로 꺼졌지만 불을 끄는 과정에서 작은 물방울 하나가 주조틀 속으로 튀어 들어갔습니다.
그것이 화근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주조틀 속에 작은 틈이 생겼고, 종이 완성되어 그 종을 주조틀에서 옮기는 과정에서 결국 그 종은 금이 가고 말았습니다.
물 한 방울 때문에 최대의 걸작품이 영원히 울리지 못하는 신세로 전락하여 결국 폐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작은 물방울 하나가 219톤의 덩치를 무용지물로 만들고 말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작은 것이 우리를 망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산을 오를 때 등산하는 사람을 힘들게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높은 산일까요? 
멀리 보이는 산봉우리는 희망을 보이게 하고 투지를 불태우게 합니다. 힘들게 하는 것은 등산화에 박혀 발을 아프게 하는 작은 돌인 경우가 많습니다. 
발바닥을 아프게 하고 나를 힘들게 합니다. 결국은 가는 길을 멈추고 앉아 신발끈을 풀고 돌을 빼내야 합니다.

인생을 살아가는 길은 험난하고 힘든 여정입니다. 고통과 어려움이 당연히 있습니다. 흡사 큰 산의 봉우리와 같습니다. 힘들지만 어떻게든 전진하려고 합니다. 앞으로 가지 못하게 하는 것은 의외로 작은 실수들입니다. 
취업을 하는데 결정적인 결점은 지원자의 출신학교가 아닙니다. 지원자의 영어점수가 아닙니다. 어쩌면 면접관 앞에서 면접 보는 지원자의 주름 잡힌 양복일수 있습니다. 
학교가 나빠도 점수가 낮아도 투지를 보고 뽑아 줄 마음이 생긴 면접관 눈에 보인 양복의 주름이 지원자에 대한 평가를 확 낮출 수도 있습니다. 

실제 이런 일이 많이 일어납니다. 주름 잡힌 양복, 흔들거리는 다리, 면도도 하지 않은 수염 ..... 등 작은 것들이 우리를 망칩니다.
거래처에 중요한 서류를 전달하고 연락처를 주지 않아 사업성과를 전달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며칠을 밤샘해서 만든 멋진 서류를 보고 흡족해 한 거래처 임원이 겉표지에 회사 이름이 없는 것을 보고 낙방시킨 경우도 있습니다.
친구들 중에 대입시험을 시험지에 풀고 답안지에 답을 옮겨 적지 못해 원하는 대학에 가지 못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요? 

사람들은 큰 산을 가기 위해 등산복도 사고 체력도 키우고 지도도 삽니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출발을 합니다. 마음이 급합니다. 모든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높은 산에 올라 전망을 볼 꿈에 당당하게 앞으로 나아갑니다. 그러나 신발에 든 모래 한 알, 작은 돌 하나가 당신을 괴롭힙니다.
일을 할 때에는 작은 것에도 신경을 써야 합니다. 큰 것은 실수하면 사람들이 웃으며 넘어 갈 수도 있습니다. 등산복이 얇으면 조금 추워도 올라갑니다. 

하지만 작은 실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오래 기억하고 실수를 한 사람에 대한 평가를 낮게 줍니다. 작은 실수가 실수를 한 사람에 대한 모든 평가가 될 수 있습니다. 
일을 할 때에는 큰 흐름을 잘 잡아야 합니다. 또한 작은 부분, 세세한 부분에도 신경을 기울어야 합니다. 작은 것이 우리 인생을 망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신앙생활에도 적용됩니다. 우리는 작은 것 하나가 우리의 신앙생활을 망치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성웅 다윗은 아주 완벽한 위인이었습니다. 그는 부모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이었고, 국가와 왕 사울을 위해서 죽음을 불사하고 블레셋의 골리앗과 일전을 치루었습니다.
그는 수많은 전쟁에서 불패의 신화를 일궈냈습니다. 아직 촌티를 못 벗은 그와 왕자 요나단과의 우정은 신분과 생사를 초월한 드라마와 같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일에도 열정적이어서 성전 건축을 위해서 통치기간 40년중 30년을 전력투구하여 우리 돈으로 900조에 해당하는 금 10만 달란트를 준비해서 아들 솔로몬에게 넘겼습니다.

그는 그의 하나님 중심의 신앙을 시를 통하여 표현하여 오늘에 이르도록 큰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신앙의 영웅도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의 간통사건으로 그의 위대한 인생에 지울 수 없는 흠집을 만들고 말았습니다.
이런 경우를 두고 파스칼은 “인간을 죽이기 위해서는 온 우주를 동원할 필요가 없다. 선 줄로 아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했습니다.
일평생을 흠 없이 산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다윗 같은 위대한 신앙인도 그만 큰 죄를 범했으니까요!

그런데 본문에서 바울 사도는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1절)고 했습니다. 바울이 얼마나 자신이 있는 삶을 살았으면 이렇게 담대하게 말했을까요? 
바울은 그리스도를 만난 후 그리스도의 복음으로만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서 일평생을 살았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복음을 위해 전력하는 자신의 열심을 본받으라는 마음에서 그런 권면을 했습니다.
물론 바울도 부족한 것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바나바를 안디옥에서 만나 함께 복음을 증거하는 동역자로서 그와 깊은 우정을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젊은 전도자 ‘마가 요한’의 문제로 일시적으로 헤어지는 아픔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바나바와 함께 선교 활동을 하면서 젊은 마가 요한을 동행시켰습니다. 마가 요한은 지중해 구브로 섬 출신이었으나 예루살렘에서 성장한 레위 족속으로 바나바의 생질이었고 그의 모친은 주님의 뒤를 돌봐준 유력한 여인이었습니다.
마가 요한은 물질적으로는 풍요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의 다락방을 주님과 제자들의 공동체를 위해서 내주었을 정도로 윤택한 집안 출신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마가 요한은 바울과 바나바의 선교여행에 동행하다가 너무 힘들어 그만 중간에 돌아가서 그 선교 여행에 큰 타격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뒤 마가 요한이 마음을 다잡아 바울과 바나바의 선교팀에 다시 합류하려고 했습니다. 
그 때 바울은 선교에 방해가 되었던 마가 요한을 동행할 수 없다고 주장했고, 바나바는 젊은이에게 한 번 기회를 주자고 해서 서로 다투고, 결국 그렇게 가까운 동역자들끼리 헤어지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상황을 감안한다면 바울이 그렇게 잘못한 일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주의 종으로서 넓은 아량을 보이기 보다는 자기 주장을 꺾지 않고 가장 가까운 선교 동역자인 바나바와 헤어지기까지 한 것은 대사도로서 그렇게 잘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결단력이 있고, 확신해 찬 면이 있는 영웅적인 성격이었지만, 바바나 같이 한 젊은이의 미래를 위해서 기회를 주려는 너그러운 성품은 아니었습니다.
물론 후에 마가 요한을 용서하고, 마가가 바울의 선교활동에 유익한 사람으로 동행한 것을 보면 바나바의 주장이 옳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후에 그 마가 요한은 마가복음을 쓸 정도로 대단한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바울이 본문에서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 한 것은 자신의 성격까지 전체를 본받는 자가 되라는 말은 아니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대설교자로 존경받았던 설교자를 본받아 그의 설교의 음성과 톤을 그대로 따라하려는 설교자들이 많습니다.
물론 그렇게 훌륭한 주의 종의 성품과 설교의 능력을 배우는 것도 좋으나 하나님이 주신 자신의 개성을 잃어버리고 기계적으로 남을 모방하는 것은 분명 잘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개성을 주셨습니다. 그 개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거룩하게 될 때 천지만물 중에 단 하나의 보배로서, 구원의 역사에 귀하게 쓰임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각 개인이 자신의 개성을 상실하면서까지 남을 모방하는 것은 분명 잘못된 것입니다. 남을 그대로 따라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개성을 사장시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바울이 자신을 본받는 자가 되라고 말한 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하늘의 권세를 포기하고 이 세상에 내려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셔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을 자신이 본받은 것처럼 고린도 교인들도 자신의 그 복음에 대한 열심을 본받는 자가 되라고 한 것입니다.
바울은 본래 유대인 가운데 베냐민 지파요, 가말리엘 문하에서 공부하였고,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관원이었으니 세상적으로는 자랑할 만한 신분이었습니다.
그는 유대인으로서 기독교 신자들이 유대교의 가르침에 어긋난다고 믿고 스데반을 죽이는데 앞장섰고, 대제사장으로부터 신자들을 체포할 권한을 위임받아 다메섹으로 가다가 부활한 예수를 만난 다음 그가 가진 모든 기득권을 버리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는데 일생을 보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만난 다음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주님을 만난 후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고 믿고 일생을 복음을 증거하는데 바쳤습니다.
그는 복음을 증거하다가 일평생 동안 엄청난 고난을 받았습니다. 그 고난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평생 동안 연속해서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고난을 즐거움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왜냐하면 그 고난을 장차 받을 영광과 비교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4:17-18).
바울은 일평생 동안 복음을 증거하면서 환난과 핍박을 받았는데, 그 환난과 핍박은 잠시 동안 받는 것이고 너무 가벼운 것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환난과 핍박은 하나님의 무한하신 영광을 이루게 하는 도구가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에 갑자기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힘든 사건이 벌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에는 언제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목적이 담겨 있습니다. 
바로를 강퍅케 하셔서 하나님의 선한 역사를 이루셨듯이, 때로는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우리가 사는 환경이 어려워질 때도 있는 것입니다. 

어떤 성도님은 주일에 부인과 교회에 나간다고 단단히 약속해 놓고는 차를 몰고 골프장으로 가다가 그만 전봇대를 들이받는 사고를 당했습니다. 
그는 정신이 아득한 중에 하나님께서 목숨을 살려주신 것을 감사하고 그 자리에서 주일 범한 것을 회개하고 이후 주일을 잘 지키게 되었다는 간증을 했습니다. 
또 어떤 성도님은 담배를 끊지 못하여 목사님에게 안수기도까지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날 또 담배를 피우려고 불을 켜다가 그만 눈에 불똥이 튀어 들어가는 변을 당했습니다. 

다른 데도 아니고 눈에 불똥이 튀었으니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눈이 떠지지 않을 지경이었습니다. 
너무나 아프고 놀라서 안과에 뛰어 갔더니 의사가 진찰을 하고 나서 하는 말이 만일 0.1mm만 안쪽으로 불똥이 튀었으면 실명할 뻔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제서야 이 분은 정신이 번쩍 들어 담배를 끊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어려운 환경에 처했을 때 그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고난과 환난을 당하여 하나님을 원망할 것이 아니라 그것들로 인해 얻을 수 있는 영적인 유익을 고려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사도 바울처럼 예수 그리스도과 그의 복음을 위해서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번 총동원 주일은 그 삶을 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전도 때문에 오는 고난은 잠깐이고, 그 영광은 영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인 바울처럼 전력을 다하여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의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전병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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