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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고부간의 갈등, 이것만 바뀌면 (룻 2: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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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부간의 갈등, 이것만 바뀌면 (룻 2:17-23)
우리나라는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것 중에 하나가 부모를 공경하고 어른들을 존경하는 나라로 유명합니다. 

대한민국은 65세 이상은 전철을 무료로 탑승하게 하는 나라입니다. 뿐만 아니라 좌석도 경로석을 만들어 젊은이들이 앉지 못하도록 하는 나라가 우리나라입니다. 

그래서 과거 우리나라에 왔던 의료선교사 앨런 선교사는 말하기를 “조선은 늙음과 죽음이 두렵지 않은 노인들의 천국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과연 지금도 노인들의 천국일까요? 

유감스럽게도 그렇지 못한 것이 현실입니다. 유니세프에서 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17개국 청소년 1만 명을 상대로 어른들을 존경하는지에 대해 조사를 했답니다. 그런데 그 조사 결과 우리나라의 청소년들은 13%가 그렇다고 대답하여 최하위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반대로 어른을 전혀 존경하지 않는다는 청소년이 20%로 다른 나라들의 2%에 비해 10배가 높다고 했답니다. 

정말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살펴보면 부모를 공경하는 자에게 엄청난 복을 주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봉독한 룻기도 그것을 보여 줍니다. 

우리는 지난 두달 동안 연속해서 룻기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구역성경 룻기에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교훈은 이방여인도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오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교훈은 부모와 자식이 사랑과 효도로 올바르게 관계를 유지하면 엄청난 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며느리인 룻과 시어머니인 나오미의 고부관계는 부모를 어떻게 섬길 것인가를 교훈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결혼을 하면 두 어머니를 섬기게 됩니다. 여자는 친정어머니도 섬겨야 하지만 시어머님을 섬겨야 합니다. 남자도 장모님이라는 어머님을 섬겨야 합니다. 문제는 두 어머니를 대하는 마음이 다르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친정 어머니는 그냥 ‘엄마’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단어는 생각만 해도 편하고 사랑이 느껴집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엄마’를 생각하면 마음이 편해집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시어머니는 다릅니다. ‘시어머니’는 왠지 긴장되고 왠지 부담스럽고 불편함을 느끼게 합니다. 그래서 ‘시’자가 들어가는 것은 다 싫다고 합니다. 그래서 시금치도 싫어하고 시 월드도 안 간답니다. 심지어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고부갈등은 영원히 해결될 수 없는 숙제’라는 말까지 있습니다. 이건 비단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전 세계 어디에서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인들은 달라야 합니다. 주안에서는 시어머니가 두렵거나 무서운 존재가 아니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도 고부간의 갈등은 영원히 해결하지 못할 숙제라고 생각하십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그렇지 않다고 분명하게 말씀해 줍니다. 오늘 본문을 보세요. 고부간도 주안에서는 아름다운 관계를 갖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떻게요? 몇가지만 바꾸면 됩니다. 그것이 뭘까요?   

1.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시어머니는 누굽니까? 하나님이 붙여주신 ‘내 어머니’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며느리는 누구입니까? 하나님이 붙여주신 ‘내 딸’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낳은 친 딸은 20~30년 죽으라 고생고생하며 길렀는데 떠나버렸습니다. 

그런데 며느리는 내가 기르지도 않고 내가 가르치지도 않았는데 내 자식을 사랑하고 내 가문을 이어가는 복덩어리가 되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서로를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면 모든 문제는 해결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것이 쉽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생각을 바꾸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시어머니는 나를 부려먹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며느리는 내 아들을 빼앗아간 x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서로가 서로에 대해 피해의식이 깔려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룻과 나오미는 달랐습니다. 그들은 일단 함께 살았습니다. 
효도 중에 최고의 효도는 함께 사는 것입니다. 

첫째 자부인 오르바는 시어머니 곁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둘째 며느리 룻은 시어미니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돌아가라 하니까 뭐라고 합니까? 

룻1:16~17절을 보세요. 

16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17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는지라 

한마디로 어머니와 함께 하겠다는 것입니다. 어머니를 결코 떠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것이 효도입니다. 부모와 함께하는 것입니다. 
육체적으로 강건하실 때는 함께하지 않더라도 연로하시면 함께 해야 합니다. 

부모님과 함께하는 생활이 훈련되어야 합니다. 함께 거하고, 함께 먹고, 함께 일하고, 함께 나누고, 함께 즐기는 생활이 효도 중에 효도입니다. 좋은 일과 행복한 일만 함께하는 것이 아니고 궂은 일, 슬프고 어려운 일도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서로를 대하는 생각이 바뀌어야 합니다. 
시부모님이 내게 복의 통로하고 생각해야 합니다. 성경은 분명이 약속하고 있습니다. 부모를 공경하면 땅에서 잘되고 장수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복의 통로입니다. 

며느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붙여주신 ‘복 덩어리’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왜죠? 내 노후를 돌봐주고 내 자손을 낳아주고 길러 줄 복덩어리입니다. 아멘? 

주안에서는 서로를 바라보는 생각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서로가 골치 아픈 존재가 아니고 서로를 복되게 하는 존재임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해결됩니다.   

그리고 내가 내 부모님을 모시는 모습을 자식들에게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내 자식들도 부모와 함께해야 한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생각을 바꾸어 주님이 복 주시는 가정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말을 바꾸어야 합니다. 

사람 간의 갈등의 가장 큰 원인은 <말>입니다. 서로가 말로 상처를 주고 말로 힘들게 합니다. 고부간의 갈등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가운데서 입에서 나오는 말을 해석합니다. 
친딸이라면 엄마가 말하는 것이 무슨 뜻인지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욕을 하고 죽일 년이라 해도 이해가 되기에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며느리는 그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어렵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시어머니도 며느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합니다. 
며느리가 어떻게 자랐는지 어떤 문화 속에서 살았는지 어떤 습관이 있는지 이해를 못합니다. 그러다보니 서로가 서로를 오해하고 그래서 말 한마디에 힘들하고 괴로워합니다.   

그럼 어찌해야 할까요? 말을 바꾸어야 합니다. 어떻게 바꾸어야 할까요? 

먼저, 서로에 대한 호칭부터 바꾸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룻은 나오미를 ‘내 어머니’라고 합니다. 
그리고 나오미는 룻을 ‘내 딸아’ 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서로를 존중하고 서로를 배려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룻을 보세요. 룻은 먹을 것을 혼자 먹지 않고 시어머니에게 가져다 드립니다. 18절을 보세요. “그것을 가지고 성읍에 들어가서 시어머니에게 그 주운 것을 보이고 그가 배불리 먹고 남긴 것을 내어 시어머니에게 드리매” 

룻은 시어머니와 함께 살면서 친어머니 이상으로 지극 정성으로 공경했습니다.   

여러분! 효도가 뭐라고 생각합니까? 부모의 필요를 채워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내 자식이 뭘 먹고 싶다하면 돈을 아끼지 않고 쓰면서 시부모는 뭘 먹고 사는지, 뭐가 필요한지 돌보지 않습니다.   

그러나 룻은 홀시어머니를 지극한 정성으로 공경했습니다. 남편도 없고 자식도 없는데 지극한 정성으로 시어머니를 섬긴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그것도 자기 나라가 아닌 외국 시어머니를 따라와서 섬겼으니 이보다 더 큰 효도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렇게까지 할 수 있었던 배경은 뭘까요? 
무엇이 그렇게 효성을 다하도록 만들었을까요? 룻이라는 여인이 훌륭하고 참으로 착한 여자이었기 때문일까요?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말>에 있었습니다. 말로 서로가 서로를 배려하면서 존중했습니다.   

룻은 룻대로 어머니를 존경하고 배려했습니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고 어머니가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겠습니다.”

이 말이 얼마나 멋지고 훌륭한 말입니까?   

나오미도 마찬가지입니다. 룻기를 읽다보면 눈에 띄게 들어나는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이 뭡니까? “내 딸아”입니다. 나오미는 며느리를 며느리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 며느리를 딸로 여겼습니다. 

보통 시어머니 같았으면 결혼하자마자 아들이 죽었으니 “서방 잡아먹은 x”이라고 미워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나오미는 내 딸이라 부릅니다. 오늘 본문 22절을 보세요. 

“나오미가 며느리 룻에게 이르되 내 딸아 너는 그의 소녀들과 함께 나가고 다른 밭에서 사람을 만나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라 하는지라”   

여기뿐 아닙니다. 룻기 전체를 살펴보니 11번이나 “내 딸아” 라고 부릅니다. 이 얼마나 사랑스러운 표현입니까? 제가 지난번 숙제를 드렸지요? 며느리에게 “내 딸아!”한번 불러 보셨나요? 어렵지요?   

보통 여러분들은 뭐라 부르시나요? 처음 시집온 며느리는 ‘아가야’ 라고 부르지요? 좀 시간이 지나면 ‘얘야’ 부르다가 아이를 낳으면 아이 이름을 부르며 “기정 애미야?” 이렇게 부르지요? 

그런데 오늘 본문의 나오미는 그러지 않습니다. 자기 친딸처럼 부릅니다. 그렇게 ‘내 딸아’ 하고 부를 수 있었기 때문에 서로 사랑하고 아껴주는 관계를 맺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룻도 시어머님에게 밖에 있었던 일을 감추지 않고 다 이야기합니다.   

중요한 것은 말만 “내 딸아” 그렇게 불렀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딸처럼 여겨주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알 수 있냐고요? 룻기 3장을 보면 나오미가 ‘보아스’라는 사람과 며느리 룻을 맺어주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어느 날 며느리에게 예쁘게 목욕도 시키고 치장하게 합니다. 그리고는 보아스가 타작마당에서 잠을 잘 때에 그의 이불 속으로 살그머니 들어가라고 코치를 합니다. 이건 무슨 짓입니까?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시집보내려고 별 짓을 다합니다.  

이건 큰 모험입니다. 보통 며느리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시어머니가 하라고 하니 그대로 순종합니다. 만약 이것이 잘못되면 오히려 음탕한 여자로 소문이 날 수도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나오미는 룻이 행복하기 위해서라면 할 수 있다고 모험을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이런 시어머님이 어디 있습니까? 

오히려 며느리가 바람날까봐 감시하고 바깥출입을 못하게 하는 것이 보통 시어머니인데 이 나오미는 룻을 오히려 시집을 보내려고 앞장섭니다. 
왜죠? 그를 딸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호칭부터 바꾸셔야 합니다. 어머님이 아니고 ‘엄마’입니다. 며느리가 아니고 ‘내 딸’입니다. 그러면 관계가 달라집니다. 그러면 상대방을 행복하게 해주게 되어 있습니다. 말로 표현하기 쑥스러우면 선물을 사고 거기다가 카드를 한 장 써서 “내 딸아 내가 너를 사랑한다. 고맙다.” 이렇게 해 보세요. 

며느리 여러분! 여러분도 시어머님에게도 엄마라고 말하기 어려우면 선물을 사서 카드를 써넣으세요. “엄마 사랑합니다. 건강하세요.”   

하나님은 성경에서 다른 어떤 종교보다도 “효”를 강조합니다. 

잠언20:20절을 보세요. “자기의 아비나 어미를 저주하는 자는 그의 등불이 흑암 중에 꺼짐을 당하리라”했습니다. 앞길이 캄캄하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잠언30:17에 “아비를 조롱하며 어미 순종하기를 싫어하는 자의 눈은 골짜기의 까마귀에게 쪼이고 독수리 새끼에게 먹히리라” 했습니다. 객사하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불효하면 망한단 말입니다. 아니 하나님이 망하게 만드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복을 누리고 살려면 부모를 공경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그들을 바라보는 시각도 바뀌어야 하고 그들을 부르는 말부터 바뀌어야 합니다.   

그래서 미국 루지애나주에서는 유치원부터 초등학교 5학년학생까지 선생님에게 반드시 Sir, Ma'am, 등 호칭 붙이도록 하였답니다. 그 결과 학생들의 질이 좋아지고, 事故(사고)가 적어지고, 학습 능률이 올라간다고 합니다. 그래서 다른 주에서도 이와 유사한 법 제정이 늘어가고 있다고 합니다. 

여러분! 여러분 아이는 선생님을 뭐라 부르나요? ‘꼰대’라든지 ‘별명’을 부르지 않나요? 그러니 존경할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제대로 자라지 못하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부모를 공경하는 자에게 반드시 복을 주십니다. 주시되 엄청난 복을 주십니다. 어떤 복인가요? 오늘 나오미와 룻은 어떤 복을 누리나요?   

1) 행복한 가정을 이루어 주십니다. 

룻과 보아스가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그들 부부는 나오미를 모시는 가정이 되었습니다. 그들 사이에 자녀가 태어나고 그래서 3대가 함께 사는 가정이 되었습니다.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2) 복된 가문을 만들어 줍니다. 

룻과 결혼한 그 보아스 가정은 단순한 가정이 아닙니다. 그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혈통을 이어받은 가정이고 결국 그들 사이에 태어난 손주가 이스라엘의 위대한 왕이 됩니다. 그러니 왕가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문에 복을 주신 것입니다.   

3) 영원히 기억할 이름이 되게 합니다. 

하나님은 보아스와 룻의 이름을 마태복음 족보에 기록하여 주십니다. 그리고 누가복음에는 보아스 이름이 기록됩니다. 심지어는 룻기라는 성경을 만드셔서 오늘 3000년 후대 백성인 우리가 그 이름을 기억하게 하며 그들을 본받게 합니다. 

단순한 이방 여인의 하나였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믿음으로 결단하고 시어머님을 지극정성으로 섬기었더니 길이길이 기억되는 이름이 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효도하는 사람에게는 무조건 복을 주십니다. 

부모를 공경하고 사로 사랑하고 존경하는 것은 한 개인의 행복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렇게 해야 후손이 복을 받고 나라가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룻이 섬김을 통한 효를 할 때에 하나님이 복을 내리셨습니다. 

이 사람뿐만 아닙니다. 야곱의 아들 요셉의 삶을 보십시오. 사실 그의 아버지 야곱은 훌륭한 아버지가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은 아버지 야곱을 공경했습니다. 아버지 야곱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그를 높이 세우신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고부간의 갈등, 이것은 정말 주님 오실 때까지 해결하기 어려운 숙제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가 부모님에게 순종하고 부모님을 공경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것이 복 받는 길임을 가르치고 계십니다. 

바라기는 효도하는 자식 효도하는 며느리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이 여러분 부모님에게 행한 그대로 여러분 자식에게 되받게 됩니다.   

그러기에 부모님과 자부를 대하는 생각을 바꾸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그들을 대하는 말을 바꾸어야 합니다. 생각이 바뀌면 말이 바뀌게 됩니다. 

우리 하나님은 효를 다하는 가정은 책임져 주십니다. 절대로 버리지 않고 세상이 줄 수 없는 복을 주시는 줄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최일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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