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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무엇이 보이느냐? (막 8:2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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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보이느냐? (막 8:22-26)

이집트 카이로에서 약 6시간 정도 내려가면 Luxor라는 곳이 나옵니다. 이곳은 King’s Valley 있는 왕들의 무덤이 있는 곳으로 아주 유명한 곳입니다. 또 카이로에는 스핑크스와 피라미드가 있는 곳으로 유명합니다. 그 중 가장 큰 것은 높이가 143 미터, 넓이 230, 평면 면적이 15,800평 정도인데 24년간 쌓아 올렸다고 합니다. 무덤을 만드느라 자기 통치 기간의 반을 여기에 신경 쓰고 있었다는 것이지요. 이집트 하면 빠질 수 없는 것이 “미이라”. 시체를 40일간 ‘미이라’로 만들지요. 코를 통해서 꼬챙이를 집어넣어서 뇌를 빼내고, 속에 있는 장기들을 다 빼내어서 썩을 것들을 없앤 후에, 썩지 않는 부식 처리를 한 다음 꽁꽁 하얀 천으로 감쌉니다. 이렇게 미이라를 40일 동안 만들고 장례식은 30일 동안 하면서 총 70일간 온갖 보화들과 함께 피라미드에 넣습니다. 

왜 그렇게 만들었을까요? 그것은 저들이 사후의 삶은 그렇게 준비해야 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24년간 피라미드처럼 정확한 동서남북으로 네 모서리를 향하게 하는 거대한 무덤을 만들고, 방부처리를 철저하게 한 미이라를 만들어도 그 결과는 그저 썩은 시체덩어리밖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미이라를 보면, 해골의 시커먼 검은 눈이 2개 있는 것처럼, 그저 영생에 대해서는 장님일 뿐이었던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을 보니, 예수님께서 한 장님의 눈을 고쳐 주십니다. 장님이 눈을 떴단 말입니다. 예수님이 장님의 눈을 뜨이게 하신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이 소경의 눈을 왜 다시 보여 주셨을까? 발견하시면서 우리 주님은 오늘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발견하시는 귀중한 주일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오늘이 벳새다 마을의 소경이 예수님 앞에 나오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나오는 본문의 소경을 치유하시는 사건은 소경 바디메오를 고치시는 것과는 너무나 다른 것을 발견합니다. 소경 바디메오는 어떻게 합니까? 예수님이 오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분께서 계시는 것 같으니깐,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며 소리를 지르며 찾았어요. 사람들이 막으면, 더 크게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면서 찾았단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소경은 어떻습니까? 치료를 받기 위하여 나왔습니까? 아니에요. 말씀을 잘 보면, 이 소경이 예수님 앞에 나온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이 소경을 끌고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이 소경이 치유 받기를 간구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간구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 벳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잘 섬기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냐? 마치 사람들에 의해서 지붕을 뚫고 침상에 내려와 치료를 받게 한 사건처럼, 흔히 말하는 친구였는지 아니었는지는 모르지만 그 이웃의 믿음으로 치료를 받는 사건인가? 그것도 아닙니다. 

이 벳새다 사람들은 그렇게 신앙적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화가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가 있을진저 벳세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마11:21, 눅10:13).” 라고 말씀하실 정도였어요. 가장 타락했던 두로와 시돈에 이 벳새다 만큼 능력을 행하였으면 변하였을 텐데, 너희들은 변하지도 않았다고 말씀하실 정도였으면 얼마나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었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잘 들으세요.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역사하지 않으시는 것이 아니라, 역사하시고, 능력을 베풀어 주심에도 불구하고, 믿지 않기 때문에 변화가 없습니다. 

어떤 전도사가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학교 들어가게 해달라고, 입학했어요. 그랬더니 하는 말이 아마도 추천서를 잘 받아서 그런 것 같다고 해요. 그리고 그 다음에 또 기도합니다. 이번에는 영주권 받게 해달라고 합니다. 영주권이 2달 만에 나왔어요. 

그러더니 이번에는 미국에서 학교를 나와서 빨리 나온 것 같다고 합니다. 한심한 일이지요. 기도는 왜 했습니까? 하나님께 부탁하고 의뢰한 것 아닙니까? 그래서 되었으면, 이것은 하나님께서 해주셨다고 고백해야지 말입니다. 벳새다가 그런 곳이었습니다. 주님이 행하신 능력이 많이 나타난 곳이지만 믿지 않던 곳이란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이 소경을 치유하시고, 이 마을에 돌아가지 말라고 명령하시는데, 바로 여기에 이유가 있습니다. 실제로 그 믿음 없는 곳으로 가지 말라고 말입니다. 

바디메오는 간절하게 부르짖었고, 바디메오가 있던 여리고의 사람들은 그래도 잘 섬겨보려는 마음으로 바디메오를 막았었는데, 물론 잘못된 방법이었지만 말입니다. 오늘의 사건은 정 반대로 이 소경은 간절한 마음도 없습니다. 병 고쳐 달라고 부탁할 마음도 없었어요, 이 벳새다 사람은 예수님을 섬기려고 이 소경을 데려온 것이 아니라, 그저 흥미거리, 혹은 호기심 거리로 그 사람을 예수님 앞에 데려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어쩌면 오늘의 이 소경을 치유하시는 말씀이 이 세대에 중요한 말씀이 되어 버렸습니다. 왜냐하면, 정작 상황은 바디메오나 이 소경처럼 절박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바디메오처럼 부르짖는 간절함이 없는 세대입니다. 주님만 바라보고 기도할 정도로 그렇게 심령이 가난하지가 않아요. 목사님, 오늘 특별히 기도하러 교회가면 안될까요? 문 좀 열어주세요 하는 세대는 지나가고, 목사가 성도들에게 제발 같이 기도합시다 라고 부탁해야 하는 세대가 되어 버린 그런 안타까운 세대가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오늘 그런 세대에 소경처럼 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예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의 첫 번째 행동 방침이 무엇입니까? 바로 그 맹인을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를 발견해야 합니다. 하나는 예수님은 왜 이 마을에서 데리고 나가셨을까? 그리고 이 소경은 어떻게 그 마을에서 나갈 생각을 했는가 말입니다. 예수님이 이 소경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소경에게 간절함이 없었고, 나음을 받고자 하는 소망도 믿음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마을 자체가 그런 불신앙의 마을이었습니다.

그래서 제일 먼저는 “터”를 바꾸셨던 것입니다. 장소를 바꾼 것입니다. 영향을 받지 못하도록 한 것입니다. 바디메오처럼 바로 그 자리에서 치유를 베풀어 주시지 않은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벳새다에서 행하였다면, 그것은 그저 그 소경을 데리고 온 사람들이 원했던 것처럼 구경거리만 하나 더 만들어 주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뱃세다에서 예수님께서 기적을 아니 행했던 것이 아니라, 시돈과 두로도 변화시키고도 남을 만큼의 기적을 이미 베푸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래서 그 불신앙의 장소를 바꾸십니다. 

예수님께서 그리고 장소만 바꾸시지 않습니다. 그를 데리고 나갈 때, 어떻게 나가십니까? 소경보고 알아서 따라와라 하십니까? 아닙니다. 소경의 손을 붙드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나약하고 여리고, 믿음 없는 자에게 자신의 스탠더드를 강요하면서, 최소한 이 정도의 믿음은 되어야지 하면서 강압하신 것이 아니라, 그 믿음 없는 자의 손을 붙잡으시고 인도해 가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손을 잡으심은 바로 이 소경만을 위한 시간, 그 만을 위한 공간, 사랑의 표현을 해 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손을 붙잡고 이끌어 내시는 모습은 바로 구약의 예언을 통해서 알려 주신 예수님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사 42:16 내가 소경을 그들의 알지 못하는 길로 이끌며 그들의 알지 못하는 첩경으로 인도하여 흑암으로 그 앞에 광명이 되게 하며, 굽은 데를 곧게 할 것이라, 내가 이 일을 행하여 그들을 버리지 아니하리니.” 그렇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나약함을 돌보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사랑하는 교회도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소경의 손을 붙드시는 예수님처럼, 오늘 우리도 나약한 자, 연약한 자의 손을 붙잡아 주고, 함께 주님의 하늘 나라를 가자고 격려해야 합니다. 같은 교회에서 섬기는 형제 자매들을 향해서도 같이 손을 붙잡아 주고 이끌어 주는 손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의 손은 오늘 예수님과 같은 모양의 손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한편, 이 소경을 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는 애초에 예수님도 잘 모르고, 남들에 의해서 억지로 그 자리에 온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그를 그 마을에서 이끌어 내시는 예수님의 손길에 어떻게 응했습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순종했습니다. 여러분 이 사람이 가지고 있는 문제는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눈이 보이지 않는 이 사람을 다른 곳으로 가지고 하는 것입니다. 이 소경이 어떠했을까요? 두려웠을 것입니다. “어. 난 보이지도 않는데.” “어디 다른 데로 가자고.” “어, 나는 다시 돌아올 줄 모르는데, 지금 내 손을 잡고 어디로 나를 데려가는 것이지.” 라는 마음이 들었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예수님의 손길을 뿌리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이끄심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 순종의 결과가 그의 치유로 이어졌습니다. 바디매오처럼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처음에 그에게는 없었지만, 그는 예수님의 인도하심에 의심하거나, 반항하거나, 자기의 생각을 덧붙이거나 하지 않고, 순응하면서, 그가 이끄시는 데로 따라 나갔습니다. 보이지 않는 사람에게 타지만큼 무서운 곳이 또 어디 있습니까? 매일 지나가는 길이야 이제 보이지 않아도 좀 익숙할 테지만, 난생 처음 가보는 그곳을 그래도 갔더란 말입니다. 결국 이 순종이 그를 변화시켰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변화가 일어납니다. 우리의 가슴에 주님을 통한 생명을 얻고, 세상을 이기는 기쁨은 우리 모든 크리스천에게 있는 줄로 믿습니다. 주님은 분명 이르시기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그리고 그 승리를 우리에게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위대한 승리는 내가 아무것도 안 해도 거저 오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세상 보다 주님을 따라 살 때에 주어지는 것이란 것입니다. 여러분 철저하게 순종하면서 살아야 함을 잊지 마시기를 부탁을 드립니다. 

주님의 방법은 독특하기 이를 데 없었는데도, 그 방법에도 순종합니다. 23절 보니, 눈에 침을 뱉으시고, 안수하셨습니다. 막7:33 귀먹고 어눌한 자를 고치실 때도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셨습니다. 요 9:6 에서는 날 때부터 소경 된 자를 고치실 때에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거 그의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셨습니다. 독특하기 이를 때 없습니다. 물론 어느 전승에 따르면 당시 이렇게 침을 바르는 것은 사랑의 표현이라고도 합니다. 마치 동물들이 침 뭍은 혀로 새끼를 핥아 주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어떻게 하셨느냐에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도 저렇게도 하실 수 있습니다. 뭐 우리도 알지만, 손을 머리에 얹어 안수를 하기도 하고, 아픈 곳을 직접 대기도 하지만, 백부장의 종을 살리실 때처럼 말씀만으로 전혀 대지 않기도 하고, 눈에 얹기도 하고 등등 많은 방법들이 있지만, 그 방법들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도 여러 모습으로 치유하셨지만, 그 방법들에 형식이 없습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바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그 받는 자의 자세란 말입니다. 오늘 이 소경은 나와 예수님의 방법에도 전적으로 순종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그릴 때도 자기 하나님을 그립니다. 하나님은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 이런 도식에 있는 것이 아니냐.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도식 안에서 그립니다. 하나님은 물론 비 이성적인 분, 전혀 말도 안 되는 비논리적인 분이 아닙니다.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행동양식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는 논리적인 분이고, 또 감수성도 풍부하셔서 백성들의 고통도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렇지만, 인간의 논리대로만 움직이는 분이 아니라 이성 너머에 계시는 분이고, 논리 너머에 계시고, 인간의 생각으로는 잴 수 없는 분이십니다. 만일 사람이 자기 생각 안에 하나님을 넣고 생각하려니, 하나님이 그 작은 좁아터진 인간의 생각을 들어오실 수가 없다는 것을 발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자기 생각에 맞지 않는다고 그 하나님을 거부하면, 자기 한계를 모르고, 사람의 이성이란 것을 너무나 지나치게 과대평가하는 것일 것이고, 반대로 자기 생각에만 맞는 하나님을 주장한다면, 그것도 자기가 만들어낸 하나님일 뿐 진짜 하나님은 아닐 것입니다. 

오늘 소경은 자기 방식에 주님보고 맞추라 하지 않았습니다. 소경은 그 자신이 주님의 방식에 따라 갔습니다. 때로, 이해 되지 않는 것도, 따라 갑니다. 내가 이해되는 것만 하는 것은 선택적인 수용입니다. 여전히 주권은 자기에게 있군요. 오늘 소경을 보면서 철저하게 주님의 방식에 들어가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이제 그에게 치료해 주시고, 그에게 물으셨습니다. “무엇이 보이느냐?” 소경이었던 그에게 뭐가 보이느냐? 라고 물으셨단 말입니다. 대답합니다. “사람들이 보이나이다.”그런데 뚜렷하지 않습니다. “나무 같은 것들의 걸어 가는 것을 보나이다.” 하였습니다. 뭔가 지나가지만 나무들이 지나간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그의 시력이 덜 회복이 된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다시 안수하셨습니다. 그제서야 저가 예수님께 기쁨으로 대답하였습니다. “만물이 밝히 보입니다.” 

여러분 단번에 쾌유되지 않고, 재차 안수함이 나타내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치유에서 성장이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신앙에도 성장하는 단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단번에 날 수도 있었겠지마는 예수님께서 이 사건이 단계적으로 된 대에는 깊은 의미와 뜻이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오늘 설교 처음에 드렸던 질문의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드렸던 질문을 기억하십니까? 왜 예수님께서 이 소경을 치유해 주셨을까 말입니다. 

소경의 눈은 점차적으로 밝히 보이게 되었습니다.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 그렇게 점차적으로 보게 됩니다. 왜 예수님은 이렇게 치유하셨는지 우리는 마가복음의 흐름을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질병으로서 장님은 바로 치유를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앞에 있던 장님은 이 사람뿐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예수님과 함께 모든 기적을 바라보았던 사람들이며, 또한 예수님과 가까이 있었던 제자들도 다 장님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저들은 예수님이 누구인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소경을 치유하신 사건의 시점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이 소경을 언제 만나셨는가? 우리는 마가복음 8장 처음부터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말씀을 보니, 예수님께서 4천 명을 먹이시고, 7광주리가 남겨진 사건입니다. 4천 명을 먹이신 사건은 5천명을 먹이신 사건 다음 사건입니다. 5병 2어로 5천 명을 먹이고 12광주리가 남았을 때, 그 다음날 사람들이 또 찾아왔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찾아온 저들에게 말씀하여 주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은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그러므로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이 있도록 하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말씀하시고” 광야의 만나는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하나님의 떡이라 하시고,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하셨습니다.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바로 5병 2어의 놀라운 사건을 말입니다. 저들은 보았지만 장님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역사 가운데, 먹기만 했지, 참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마치 10명의 문둥병자가 예수님께 와서 치료받기를 간구했지만, 치료받은 자들 중에 오직 1명 사마리아인 만이 돌아와 예수님께 감사하였습니다. 다른 아홉 명은 육신의 치료를 받았는지 모르지만, 영의 치료인 구원을 얻은 자는 오직 이 한 명 사마리아인 밖에 없었던 것과 같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치유를 보았지만 모두 장님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가까이에 섬겼던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본문의 사건 바로 전에 있는 이야기 입니다. 빵이 딱 한 개밖에 없는데, 저들이 빵이 없음으로 싸우고 있었습니다. 떡이 부족함으로 싸우니 예수님께서 답답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지 못하느냐?” 내가 떡 다섯 개를 오천 명을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바구니를 거두었더냐? 가로되 “열둘 이니이다.” 또 일곱 개를 4천명에게 떼에 줄 때에 조각 몇 광주리를 거두었더냐?” 가로되 “일곱 이니이다.” 가라사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그렇게 눈을 뜨고 보았으면서도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기억하지 못하는 장님들이 바로 제자였고, 저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땅의 빵 뿐 아니라, 영원한 양식이 되시는 그분을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이 역사하지 않는다고 오늘날 누가 그럽니까? 오늘은 옛날과 다르다고 누가 그럽니까? 이 세상을 살고 있는 우리들이 눈 뜬 장님이 아닙니까? 

그래서 오늘 주님은 장님들의 눈을 뜨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 소경뿐 아니라 모두의 눈을 말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은 단번에 되는 것이 아니라, 처음에는 사람들이 나무들처럼 보이는 것을 알다가 나중에는 분명하게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의 상태가 예수님과 함께 하지만, 장님이었던 저들이 지금은 그저 나무들이 지나가는 것처럼 예수님을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직 먹을 거를 놓고 싸우는 그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오른쪽 자리를 놓고 투쟁하는 그 제자들에게, 십자가를 지시러 간다는데 안 된다고 말하는 그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다시 한 번 이 소경처럼 안수해 주시기를 원하셔서 그 눈이 밝히 뜨여 지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날은 예수님의 부활을 몸소 바라보고, 승천을 목격하고, 성령님의 강한 임재가 함께 할 때에 그 제자들에게 비로소 일어났습니다. 분명하게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지, 어디로 가야 할 지 알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세상의 빵을 위해서 고민하거나 싸우지 않는 제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예수님께서 이 소경에 벳새다로 돌아가지 말라고 명령하셨던 것처럼, 그 제자들은 자시 불신앙의 자리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영화 타이타닉을 보면 참으로 우리 삶을 다시 한 번 뒤돌아 볼 수 있는 명작입니다. 그 영화 하면, 디카프리오라는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이 배 앞머리에서 서로 팔을 벌리고 먼 바다를 바라보는 그림으로 아주 유명합니다. 

하지만 영화는 단순한 애정 영화가 아닙니다. 이 영화에는 삶이 담겨 있습니다. 이 거대한 유람선이 출발할 때에, 이 배의 선장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이 배는 결코 무너지지 않아. 바로 사람의 교만을 담은 모습이지요. 그렇지만 그 배의 결말은 바로 처참하게 대자연 앞에 바다 한 가운데서 침몰하게 됩니다. 마치 근대 판 바벨 탑과 같지요. 성경에 인간은 하나님께 도달할 수 잇다는 교만으로 높은 탑을 쌓습니다. 그러나 여지없이 그 탑은 무너지고 서로 대화를 할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또 이 영화 속에는 멋있는 악단이 나옵니다. 바이올린과 첼로 등 멋있는 음악을 연주하던 그 악단, 마지막에 구명보트에 탈 수 있었지만, 그 악단 전원이 마지막까지 남아서 죽음이 두려워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사람들이 있는데, 서로를 바라보며 미소를 머금고 찬송가를 연주하는 모습은 정말 감동적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영화에는 또 다른 감동적인 이야기가 있습니다. 공포에 떨고 있는 한 여인이 이제 곧 차가운 바다위로 내려질 구명보트 위에 탑니다. 많은 사람들이 죽음의 공포에 떨고 있고, 이미 배 하단에 돈을 아끼려 왔던 서민층은 문이 잠겨 밑에서부터 차오르는 물에 피신도 못하고 죽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배를 타려다가 배를 인도하는 사람에게 양해를 구합니다. 잠깐의 말미를 구하는 것입니다. 잠시 망설이던 직원은 어이가 합니다. “3분, 3분입니다. 3분이 지나면 오던 안 오던 이 구명보트는 내려갑니다.” “ok” 그리고선 이 여인이 발길을 들립니다. 자신이 배가 사고 나기 전에 놀던 카지노를 지나갑니다. 수 많은 칩들, 그렇게 자기가 가지고 싶었던 칩들이 발에 차입니다. 그리고 어마어마한 현찰들이 자신의 발에 밟힙니다. 

하지만 이 여인은 그것들을 돌아볼 여가가 없습니다. 그리고 도착한 곳은 자기 숙소. 그 방은 이미 물이 차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무엇을 찾으려고 다시 돌아왔나 했는데, 자기가 가장 아끼고 사랑했던 다이아몬드, 팔찌, 아닙니다. 반지세트가 테이블 위에 놓여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도 거들떠 보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기 침대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던 오렌지 3개, 그 오랜지를 주머니에 넣고 다시 뛰기 시작합니다. 

실로 엄청난 이야기 입니다. 불과 30분 전만 하더라도 거들떠 보지 않던 이 오렌지 3개를 찾으려고, 불과 30분에 그렇게 남에게 자랑하고 싶어했던 다이아몬드와, 얻지 못해 안타까워하던 칩들과 돈들을 다 버려두고 왔다는 것입니다. 정말 그 한 순간입니다. 그 순간에 가장 중요한 것이라는 기준이 바뀌어 버린 것입니다. 정말 자기 생존을 위해서 중요한 것들은 자기가 평소에 하찮다고 여겼던 것이었더란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을 믿으면 내가 살아가기 위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바뀌어야만 합니다. 내가 예수를 믿는데, 여전히 그 가치관들이 바뀌지 않고, 돈 벌고, 잘되는 것 그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한다면, 이는 침몰하는 배에서 여전히 다이아몬드를 찾고 있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시고, 그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에 순종하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바로 여러분들을 구원해 낼 오렌지 3개임을 기억하시고, 그 은혜에 함께 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 눈에 침을 뱉으시고, 안수하시며, 그 소경에게 물으셨습니다. 무엇이 보이느냐? 그리고 다시 또 안수하시고, 물으셨습니다. 무엇이 보이느냐?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무엇이 보이느냐?” 여러분들 어느 신앙에 와 계십니까? 눈을 떴으되, 나무가 지나가는 것처럼이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는 우리가 아마 대다수일 것입니다. 계속해서 더욱더 주님과 정진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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