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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실존적 믿음 (약 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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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적 믿음 (약 1:5-8)
 
부부가 정기적으로 대화를 나눠야 가까움을 유지할 수 있는 것처럼, 성도들도 하나님과 정기적으로 대화를 나눠야 하나님과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부부가 나눠야 되는 대화는 사무적인 내용이 아닙니다. ‘관리비를 냈느냐?’ 라든가 ‘애 급식비 보냈냐?’라든가 이런 사무적인 대화 말고 서로에 대한 대화의 양이 많아야 됩니다. ‘내가 오늘 미장원에 가서 머리를 새로 했는데 마음에 드느냐?’ ‘내가 오늘 또 새 옷을 샀는데 마음에 드느냐?’ ‘마음에 든다. 보기 좋다.’ 이런 대화가 필요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과 나눠야 될 대화도 사무적인 차원을 벗어나야 됩니다. 사무적인 기도는 무엇을 달라는 것입니다. 만일 무엇을 달라는 내용이 우리의 기도의 전부라면 우리의 기도는 짧을 수밖에 없고 지극히 지루할 수밖에 없습니다.

‘구주를 생각만 해도 내 맘이 좋거든, 그 얼굴 뵈올 때에야 얼마나 좋으랴’ 이런 기도는 사무적인 기도가 아니지만, 얼마나 진실 되고 아름답습니까? 우리의 기도에 내용이 이런 아름답고 진실된 내용이 포함될 수 있다면 얼마나 우리의 신앙이 즐거울 수 있겠습니까? 주님이 이런 기도를 듣고 싶어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정기적인 예배의 효험을 과소평가하면 안 됩니다. 예배에 참석하는 것만으로 효험이 있습니다. 그냥 예배당에 와서 앉아 있는 동안에 사람이 회심을 할 수 있고, 거듭날 수 있고, 병이 나을 수 있고, 인생의 문제가 해결될 수 있습니다. 

요한 웨슬리는 올더스게이트라는 곳에서 예배를 참석을 하다가 별안간 가슴이 뜨거워지면서 회심을 하는 경험했다고 했습니다. 

제가 아는 어느 성도는 별 기대를 하지 않고 어느 부흥회에 가서 앉아 있다가 병이 낫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저는 인터넷으로 어느 목사님의 설교를 듣다가 저희 교회 이름을 하나님의 응답으로 얻었습니다. 

아마 성도님들 중에는 모르긴 몰라도 부부 간에 갈등이 있고 소원한 문제가 있는데 부부가 예배에 함께 참석 하노라면 뭔가 도움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앉아계시는 분이 분명히 계실 것입니다. 제가 그런 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그런 기대를 저버리면 안 됩니다. 함께 예배를 드리는 것에는 효험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에서 야고보는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고 지혜를 구할 것을 당부했는데 지혜만 가지고 될까? 돈이 필요한 사람은 돈을 구하라는 성경 구절이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우리가 필요한 게 하나 둘이 아닌데 왜 하필이면 야고보는 지혜만을 따로 추출해서 지혜를 구하라고 했을까? 

예수님은 ‘너희가 무엇을 구하든 구한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이런 식으로 믿음의 효험을 모든 것에 적용시키셨는데 왜 야고보는 지혜만을 주목했을까?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방법입니다. 하나님은 한 가지를 열쇠로 해서 그 열쇠를 통하여 다른 것을 얻도록 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하나님의 나라와 의가 열쇠가 되어서 그 열쇠를 얻으면 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더하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하나님이 ‘내가 너에게 무엇을 주랴?’고 물어보실 때 지혜를 구했더니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지혜만을 주신 것이 아니고 그가 구하지 않은 다른 많은 것을 덤으로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서 지혜가 부족한 사람은 지혜를 구하라는 말씀을 과소평가하면 안 됩니다.

그런데 구하긴 구하되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흔히 생각하기를 사도 바울은 믿음을 강조했고 야고보는 행함을 강조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이것은 교리적인 믿음을 말하는 것이고, 실존적인 믿음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야고보나 예수님이나 사도바울이나 히브리서 저자나 신약성경이나 구약성경이나 마찬가지에요. 

모든 성경의 저자는 실존적인 믿음의 필요성을 동일하게 강조했습니다. 오히려 실존적인 믿음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야고보가 사도바울보다 더 중요하게 강조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5장에서도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기도를 하되 믿음으로 할 필요성을 강조한 것입니다. 

믿음의 반대가 무엇이냐? 믿음의 반대는 의심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할 정도라면 신앙이 있기 때문에 기도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러나 신앙인 중에도 의심하는 사람이 많이 있기 때문에 야고보가 본문에서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고 말한 것입니다. 

신앙인 중에 의심하는 사람이 없다면 이 말씀을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두 마음을 품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차라리 불신자는 두 마음을 품지 않습니다. 오로지 한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불신의 마음. 그러나 신앙인은 믿는 것 같으나 사실은 의심하는 두 마음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 중에는 ‘안 믿어지는데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이런 반문하는 분이 계실 수 있습니다. 믿음을 강요할 수 있습니까? 억지로 믿을 수 있다는 얘기입니까? 그러나 만일 믿어지면 믿고 안 믿어지면 의심하는 것이라면 왜 본문에서 야고보가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고 명하겠습니까? 

예수님도 누누이 믿음을 강조하신 것뿐만이 아니고 믿음을 명하셨습니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나님을 믿으라’ 만약 믿어져야만 믿을 수 있는 것이라면 믿음을 명하는 것은 무의미한 것이 될 것입니다. 때로는 믿어지기 때문에 믿을 때도 있지만 믿어야 되기 때문에 믿을 때가 있습니다. 

제가 아는 어느 사모님은 목사님을 따라 집회를 인도하고 찬양을 인도하는데 때로는 괴로운 일이 있고, 때로는 경제적인 어려움이 있고, 마음에 괴로움이 있어도 집회를 인도할 시간이 되면 웃는 얼굴을 하고 강단에 올라가야 되는데 그러나 비록 마음에 괴로움이 있더라도 하나님이 오늘의 흡족한 은혜를 주실 것이라는 것을 믿고 강단에 올라가 찬양을 인도하고 말씀을 증거하면 하나님이 그 믿음에 응답하셔서 은혜를 주시더라, 이런 말씀을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는데 우리가 믿어지기 때문에 믿어야 될 때도 있지만 믿어야 되기 때문에 믿을 때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믿어지고 그리고 그 믿음을 하나님이 귀히 여기시고 응답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의심하는 사람의 특징이 무엇이냐? 의심하는 사람은 정함이 없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정함이란 정결함을 뜻하는 것이 아니고, 안정됨, 견고함, 마음먹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제가 토요일마다 성도님들에게 단체문자를 보내 드리는데, 매주 내용이 다를 수 있지만 핵심 메시지는 매주 똑같습니다. 내일 교회에 오라는 것입니다. 다른 의도가 있는 게 아니에요. 내일 교회에 오라, 이 말을 하기 위하여 문자 메시지를 보내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님들 중에는 그런 메시지가 필요 없는 분들이 있어요. ‘목사님, 문자 안 보내도 저희는 갑니다.’ 이런 성도들이 있습니다. 당연히 주일인데 교회를 가야지 목사님이 그걸 가지고 교회에 오라고 따로 말씀하실 필요가 있는 것을 모욕으로 여기는 분이 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오히려 성도님이 저에게 ‘목사님, 내일 힘내시고 저희에게 좋은 말씀 들려주시기 바랍니다.’ 이런 문자를 보내야 될 입장에 계신 성도님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성도님들의 명단을 보노라면 어떤 성도님들은 문자를 보내야 될 것처럼 생각되는 분들이 있습니다. 안 보내면 안 올 것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분은 뭔가 내가 격려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정함이 없는 성도들입니다. 기본적인 주일예배 참석마저도 신뢰하기가 힘들다는 얘기에요. 그렇다면 봉사는 어떻게 하고 선교는 어떻게 하고 어떻게 주님께 헌신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기본적인 주일예배조차도 신뢰하기가 힘들다면 무슨 봉사가 가능하고 헌신이 가능하겠습니까?

초신자라면 이해할 수 있어요. 그러나 초신자가 아니고 이미 신앙인이 된 지 오래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인 예배조차도 목사가 신뢰할 수 없는 차원이라면 그것은 근본적인 문제가 있는 것인데 그 근본적인 문제는 바빠서도 아니고 다른 이유 없습니다. 의심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함이 없는 것입니다.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기분이 좋을 때는 당장 주님께 헌신할 것처럼 말하다가 기분이 나쁘면 교회에 안 와요. 

기분, 무드, 감정의 기복이 많아요. 이것은 그 사람이 감정이 풍부해서가 아니고 의심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정함이 없는 자로다’, ‘두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신앙생활에만 정함이 없는 게 아니라는 애기입니다. 

모든 일에, 신앙생활에 정함이 없는 사람은 다른 일도 마찬가지가 될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인간관계든 친구와의 관계든 직장생활이든 국가에 대한 마음이든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사람은 결국은 근본적인 차원에서 믿음이 없고 의심하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의심을 함으로써 가장 큰 피해를 입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당사자에요. 교회가 피해를 입는 게 아니고, 남이 피해를 입는 게 아니고, 본인이 피해를 입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의심하는 자는 주님이 기뻐하지 않는 것뿐만이 아니고 ‘무엇이든 주님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의 기도는 하나님이 듣지 않는다는 말이에요. 

그러다보니 악순환이 계속됩니다. 얻지 못하기 때문에 더 의심을 하고, 의심하기 때문에 더 못 얻습니다. 악순환이 계속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악순환을 끊고 어떻게 해서든지 믿음을 얻어야 됩니다. 믿음을 얻어야 하나님께 무엇을 얻을 수가 있고, 무엇을 얻으면 더 믿음이 성장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이 악순환을 끊고 믿음을 얻어야 됩니다. 믿음. 시작이 반이라고 했어요. 어떻게든지 믿음을 얻어야 뭔가 선한 역사를 시작할 수가 있습니다. 

몇 년 전 성경공부 시간에 어느 성도님이 저에게 ‘모세오경의 저자가 누구냐?’라는 질문을 했습니다. 그분이 그 질문을 한 이유는 모세가 아닐 수 있다는 것을 본인이 알고 있기 때문에 질문을 한 것이지요. 저는 솔직히 대답했습니다.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후에 그 분을 교회에서 거의 보지 못했습니다. 저는 참 아쉽게 생각했는데 아마 본인은 모세오경의 저자를 알 수 없다는 사실이 구약성경을 믿을 수 없는 이유라고 생각을 했는지도 몰라요.

그런데 저라고 그런 생각을 안 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은 생각하기 나름입니다. 마태복음을 마태가 썼다는 것을 알아야 마태복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신뢰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에요. 요한복음을 요한이 썼다는 사실을 알아야 요한복음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됐다는 것을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는 이처럼 저자를 알 수 없는 책들이 있습니다. 히브리서는 저자가 누군지 알 수 없지만, 거기에는 엄청난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많은 말씀들이 기록돼 있습니다. 셰익스피어가 햄릿이나 리어왕을 썼다는 것을 알아야 그 작품들이 위대한 문학작품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누군가를 감동하셔서 당신의 말씀을 기록하게 하셨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성경을 신뢰할만한 이유가 됩니다.

우리는 때로는 이해를 하기 때문에 믿는 경우도 있지만 다수의 경우에는 믿어야 이해를 할 수 있고 납득할 수가 있고 깨달음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내가 깨달아야, 이해를 해야 믿겠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지적인 허영을 영적인 것보다 높이 올리는 것입니다. 먼저 믿으면 깨달음을 얻고 지혜를 얻습니다. 

믿음으로 구해야 지혜를 얻습니다. ‘의심하는 자는 아무것도 주께 얻을 줄 생각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믿음이 먼저에요. 믿음이 먼저이고 그 다음에 감정이든, 은사든, 성령이든, 깨달음이든, 지혜든, 이런 것이 따라올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에요. 

우리는 정기적인 예배와 신앙의 실천의 효과를 과소평가하면 안 됩니다. 콩나물시루 비유를 들으셨을 것입니다. 콩나물을 키울 때 시루에 키우는데 시루는 아래에 구멍이 뚫려 있습니다. 그래서 위에서 물을 주면 그 물이 구멍을 통해서 다 흘러나가는 것처럼 보여요. 그러나 그럼에도 콩나물이 자랍니다. 신기한 것입니다. 그 밑에 구멍이 뚫려서 물이 다 새나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콩나물은 여전히 무럭무럭 자라는 것처럼 우리가 평소에 예배에 참석하고 기도하고 말씀을 공부하는 것이 귀로 듣고 다 빠져나가는 것처럼 보여도 그러나 우리의 영혼을 하나님이 키우시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우리가 평소에 교회에 참석하는 것이 습관적인 행사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매일 식사하는 것이 습관적인 행사입니까? 한번 멈춰 보세요. 어떻게 되나. 그게 결코 습관적인 행사가 아니고 필요한 것이고 유익한 것이고 의미 있는 것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요, 교회도 마찬가지요, 예배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신실함을 의지해야 됩니다.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의로우신 분이에요. 당신의 미쁘심을 의지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의심하지 말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할렐루야! (김영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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