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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기억합시다! (출 2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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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합시다! (출 20:8-11)

여러분 사람의 정체를 결정 짖는 것은 무엇일까요? 얼굴입니까? 이름이요? 신분증일까요? 그것은 바로 ‘기억’입니다. 한 사람이 살아 온 기억, 그 사람만이 가지는 유일한 기억, 그 기억이 바로 한 사람의 정체를 결정짓는 것입니다. 

우리는 저마다 살아 온 기억, 그 기억의 힘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얼굴이요? 똑같은 사람은 없다고 하지만 사실 어떤 쌍둥이들은 구분하기 여간 어렵지 않습니다. 이름이요?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신분증이요? 멕시코 선교 보고를 들어보아도 신분증 없는 사람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저마다 소중한 이유는 우리의 모습이 달라서가 아닙니다. 그보다는 저마다 가진 우리의 기억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말씀 드린 대로 우리네 삶은 기억의 힘에 의해 움직입니다. 우리네 모든 행동은 기억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의 삶은 기억의 열매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기억’ 얼마나 중요한 것입니까? 예부터 대한민국은 이 기억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영어의 알파벳은 ‘A’부터 시작하지만 한글의 자음은 ‘ㄱ’부터 시작하지 않습니까? 이해하셨죠? 설교 시작부터 참 저렴한 개그였습니다. 그만큼 기억은 우리 삶에 매우 중요한 요소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 십계명 중 제 4계명, 십계명 중 가장 길게 설명하고 있는 계명, 십계명 중 8가지의 ‘하지 말라’는 표현이 아닌 ‘지키라’ 말하고 있는 두 계명 중의 하나, 이 계명의 시작은 이러합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무엇을요? 안식일을 기억하라는 것이죠. 안식일을 기억하는 것이 왜 이렇게 중요합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천지창조 사건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억을 태고로 이끌고 있습니다. 

‘기억이 우리의 정체를 결정 짖는다.’ 말씀 드렸는데 그렇다면 우리의 정체성은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딸, 하나님의 아들 아닙니까? 무엇이 우리로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상기시킵니까? 바로 하나님의 안식을 기억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지은바 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다음으로는 ‘거룩하게 지키라’ 말씀하십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이는 하나님의 안식에 동참하라는 뜻입니다. 10절의 시작을 보십시오.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의 안식일인 즉’ 보세요. 우리의 안식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안식일이라고 소개합니다. 하나님이 스스로 안식일을 지켰습니다. 하나님이 안식하셨기에 사람들이 안식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안식을 기억할 때 그분의 안식에 동참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이 점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육일 동안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들고 칠일 째 되는 날에는 쉬셨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안식일을 지키라는 것은 하나님의 안식으로의 초대입니다. 하나님이 베푸시는 평안으로의 초대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안식은 어떠한 의미가 있기에 우리가 그 안식에 동참하여야 하는 것일까요? 우리는 흔히 하나님이 여섯 째 날까지는 창조하시고 일곱째 날에는 쉬셨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창조사역을 마치신 날은 여섯 째 날이 아니라 일곱 째 날이었습니다. 이것은 안식이 또 하나의 구별된 창조라는 것을 말해 줍니다. 안식 또한 하나님의 창조였다는 것입니다. 창조의 절정이 인간 창조였다면 창조의 완성은 안식이었습니다.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게 하셨습니다. 불은 아래에서 위로 타오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세상을 짓는 모든 일을 마치시고 안식하셨습니다. 하나님마저 안식일을 지키셨습니다. 그러므로 안식은 하나님의 본성인 것입니다. 모든 피조물의 제자리가 여기에 있습니다. 안식은 모든 피조물의 제자리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가끔 일하는 시간은 소중하고 쉬는 시간은 대단하지 않게 여기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창조질서에는 안식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들어내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도 소개하고 있듯이 창세기를 보시면 하나님께서 안식을 창조하신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셨습니다.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지난 주 담임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께서 세상을 모두 지으신 후 복되고 거룩하게 하신 그 첫 번째 대상은 다름 아닌 ‘시간’이었습니다.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시간을 복되게 하셨습니다. 그것도 안식의 시간 이었습니다. 공간보다 시간이 중요하고, 그 시간 가운데에서도 일하는 시간이 아닌 안식의 시간, 즉 쉼의 시간이 가장 복되고 거룩하다는 놀라운 진리를 깨닫게 해 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이 안식일 지키고 있습니까? 아니죠? 사실 여러분이 다 아시는 것처럼 안식일은 토요일입니다. 우리가 지금 지키고 있는 주일, 일요일은 안식일 바로 다음 날이죠. 왜 우리가 이 날 예배하는지는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바로 부활신앙을 간직하며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바로 그 날을 기억하는 것이지요. 또한 예수님 그 분이 바로 안식일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신약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배가 너무 고파서 이삭을 잘라먹는 장면을 소개합니다. 그 때 이 모습을 보고 바리새인들이 따졌습니다. 그런데 ‘왜 남을 것을 훔쳐 먹느냐?’라는 뜻으로 따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문제 삼은 것은 ‘왜 안식일 날 이삭을 잘라먹었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잘 지키자고 그것을 구체적으로 풀어 정리한 규례들을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이 정한 것이 아니라 사람이 정한 것이지요. 때로는 이 규례들이 인간의 가치와 삶을 침범하기도 하였습니다. 몇 가지 예로 안식일에는 불을 키거나 끄지 말 것, 2km 이상 걷지 말 것, 두 글자 이상 쓰지 말 것, 책 들고 있는 아이를 만지지 말 것. 이런 식으로 안식일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날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더 심한 예로는 안식일에 누군가 아파도 치료를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심지어 종과 아이들까지도 안식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모든 일에서 자유로우라고 하신 말씀이 그들의 생각대로 정하여 오히려 자유로이 행동할 수 없는 족쇄를 만들어 놓고 있었습니다. 그런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은 율법에 대한 바른 이해를 꼬집으셨습니다. 

안식일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날인데 왜 너희는 하나님의 뜻은 잊고 안식일 자체에 매달리고 있느냐.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비, 사랑 다 잊고 왜 사람이 만든 규례에 얽매어 있느냐. 안식일의 참 뜻, 그 내용 그것을 잘 기억하여 지켜야 할 터인데 안식으로 초대하신 하나님의 뜻은 기억하지 않고 왜 그저 껍데기뿐인 형식을 더 껴안고 있느냐. 

그렇게 예수님은 성서 속 그 어느 선언보다도 강하게 말씀하십니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오늘 본문으로 다시 돌아가 봅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핵심이 무엇입니까? 지키는 것입니까? 아니죠. 기억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그리고 거룩하게 하는 것이 그 다음입니다. 

성경 속의 기억이란 단어는 우리가 생각하는 의미와 조금 다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기억하면 흔히 잠시 잊었다가 다시 생각난 것. 국어사전에서도 그 의미가 ‘이전의 인상이나 경험을 의식 속에 간직하거나 도로 생각해 냄’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의미보다는 ‘마음에 새기다’라는 더욱 강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는 평상시에는 잊고 있다가 갑자기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마음속 깊이 새기고 있는 상태, 단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또한 성경은 이 ‘기억하여’라는 단어를 동시에 ‘기념하여’라고 쓰기도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만찬을 나누시며 제자들에게 떡과 잔을 주시며 ‘나를 기념하라’ 하신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나를 기억하라’, 즉 ‘나를 너희 마음에 새기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참으로 올바른 신앙생활의 출발점은 죄로 인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상태에서 나를 구원해 주신 그리스도의 은혜를 잊지 않고 마음에 새기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기억’, 그 다음으로 ‘거룩’은 무엇입니까? 성경책 겨드랑이에 이렇게 끼고 ‘사랑합니다. 축복합니다.’하고 인사하는 것이 ‘거룩’입니까? ‘거룩’은 바로‘하나님처럼 되는 것’ 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동참하며 하나님을 닮아가는 노력입니다. 일곱째 날 하나님께서 쉬셨으므로 우리도 하나님을 따라 쉬는 것, 그렇게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 바로 그것이 ‘거룩’입니다. 

그런데 여기 중요한 또 한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삶에 지쳐 비틀거리는, 일에 얽매여 허우적거리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당신의 안식으로 초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비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역시 하나님의 모습을 본 받아 하나님의 ‘자비’를 실천하는 것 이것 역시 거룩의 모습입니다. 

여러분 자비의 뜻을 아십니까? 사랑할 자, 슬플 비자를 써서 바로 ‘슬픔에 참여하는 사랑’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슬픔에 참여하는 사랑을 보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역시 다른 이들의 슬픔에 참여하는 사랑을 가지는 것, 이렇게 하나님을 닮아가려는 노력 바로 그것이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10절 후반 절을 보시면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하셨습니다. 창조물인 우리 모두의 평등성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 날에는 주인이라고 일하지 않고 종이라고 일해야 하는 법이 없습니다. 심지어 가축들도 모두가 하나님의 피조물로 평등함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안식일은 우리 모두가 평등한 날입니다. 주님의 안식에 참여하는 우리 모두는 동등한 존재입니다.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 나는 의인이고 너는 죄인이다. 이런 모습은 하나님의 안식에 어울릴 수 없습니다. 

예수님 바로 이 말씀을 바리새인들에게 그리고 제자들에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주일을 지키며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기억합니다. 따라서 주일을 지키는 것은 예수님을 기념하는 것이요 동시에 안식일을 기억하는 행위입니다. 

그렇다면 주일은 어떻게 지켜야 합니까? 잭 캔필드의 책 중<영혼을 위한 닭고기 수프>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를 하나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죽음을 앞둔 한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이 땅에서 맞는 마지막 순간이 오기 전에 재산을 상속할 자식을 정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두 아들과 막내딸을 불러 놓고 이렇게 제안했습니다. "누구든지 이 방을 가득 채울 수 있는 것을 가져오면 그를 내 상속자로 삼겠다." 큰 아들은 이 말을 듣자마자 예금해 놓은 돈을 모두 털어 값비싼 보석을 잔뜩 사왔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값나가는 보석이라도 그 방을 채우기에는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둘째 아들은 밖으로 나가 모래를 잔뜩 퍼왔습니다. 그리고 방바닥에 모래를 뿌렸습니다. 하지만 방을 모두 채울 수는 없었습니다. 그 때 막내가 들어왔습니다. 막내딸은 방안의 불을 끈 다음 조용히 촛불에 불을 밝혔습니다. 밝게 타오르는 촛불은 마침내 환한 불빛으로 방안을 가득 채웠습니다. "잘했다." 아버지가 지혜로운 딸에게 말했습니다. "너야말로 왕국을 다스릴만한 재목이로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금 우리의 방을 무엇으로 채우고 있습니까? 우리 마음을 무엇으로 채우고 있습니까? 과연 우리네 삶을 무엇으로 채워야 가득 찰 수 있겠습니까? 바닷물은 갈증을 해소해 주지 못하고, 손바닥으로는 하늘을 가릴 수 없습니다. 다른 것으로는 우리 마음을 충만하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불꽃은 아무리 작아도 방안을 가득 채웁니다. 불꽃은 아무리 작아도 어둠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다른 것으로는 우리 마음을 채울 수 없지만,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마음을 가득 채울 수 있습니다. 

현대인의 성경은 요한복음 12장 46절 예수님의 말씀을 이렇게 적었습니다.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기 때문에 나를 믿는 사람은 어둠 속에서 살지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로 가득 채우면 다른 것이 전혀 없이도 우리의 마음은 충만하게 된다는 놀라운 말씀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채우기 위해서는 버려야 함을 아시지요? 조금 있으면 제 아이가 생깁니다. 참 경이로운 경험입니다. 그러면서 집을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버릴 것이 너무 많았습니다. 어쩌면 어수선한 제 마음을 정리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부모가 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제 마음도 치울 것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버려야 할 마음이 한 가득이었습니다. 집안 구석구석 가구들을 재배치하고 아이를 맡을 준비를 하면서 깨달은 것이 있었습니다. 채우기 위해서는 비워야 하는 것이구나. 이 공간에 사랑하는 내 아이가 들어오기 위해 버려야 하는 것들이 참 많이 있구나, 내 마음의 부모의 마음을 품기 위해서 비워내야 하는 것들이 참 많이도 있구나.

현대 많은 전통적인 교회들이 예배하는 사람들로 붐비기보다는 구경하는 사람들로 붐비고 있습니다. 이탈리아의 성당들도 심지어 이 곳 보스턴의 전통적인 교회들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성전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있어야 합니다. 성전이 성전일 수 있는 이유는 그 곳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그릇은 속을 비워 만들어야 합니다. 그 그릇 속에는 아무것도 없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그릇이 비로소 그릇이 됩니다. 비워야 채울 수 있습니다. 버려야 가질 수 있습니다. 교회가 교회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 차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인간적인 생각과 틀이 가득한 공간은 더 이상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주일은 우리의 생각을, 틀을 비우는 날입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새롭게 가득 채우기 위해서입니다. 일요일이 주일일 수 있는 이유는 주님을 만나는 감격이 있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 감격이 없다면 일요일은 주일이지 않고 교회는 성전이 될 수 없습니다. 가지는 것보다 쓰이는 것이 중요하고, 채우는 것 보다 비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라’ 참 평안이 그리스도에게 있습니다. 

참 휴식이 그리스도로부터 나옵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비우는 곳입니다. 주일은 비우는 날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휴식에 참여하여 복되고 거룩하게 채움 받는 날입니다. 주일을 지키는 것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시라는 고백이며, 동시에 예수그리스도를 따라 살겠다는 다짐입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우리는 기억의 힘으로 매 순간을 살아갑니다. 때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들 가운데 허우적거릴 때도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기억하고 싶지 않은 상처가 있습니다. 잊고 싶은 아픔들이 있습니다. 떠올리고 싶지 않은 고난이 있습니다. 가정환경, 상처, 열등감, 불안, 외로움 등은 모두 잊어 벗어버리고 싶은 기억의 그림자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런 저런 그림자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자기 그림자를 벗어 던지고 싶은 사람은 더 큰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나무 그늘로 들어가면 된다는 것을.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입니다. 십자가는 커다란 나무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드리우는 커다란 그늘입니다. 우리가 버리고 싶은 어두움의 그림자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그늘 안에 들어갈 때에 비로소 사라지게 됩니다. 그 그늘아래 쉬고 있는 우리는 모두가 동등합니다. 우리가 주일을 지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기억할 것은 우리가 가진 어둠의 그림자가 아닌 온 세상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분의 안식을 기억할 때 우리는 참 쉼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안식일이 우리를 지킵니다. 우리가 주일을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주일이 우리를 지켜줍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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