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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 탄핵하기 (시 2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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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탄핵하기 (시 22:1-8)

최근 서울대 재학생들이 결성한 프리싱커스(Free Thinkers)라는 동아리가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저들은 일차적으로 ‘전도퇴치카드’를 만들어 누군가가 전도하면 그 카드를 내보이면서 전도자의 입을 막습니다. 단순히 전도를 거부하는 정도가 아니라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이란 존재를 몰아내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무신론 동아리입니다. 그 카드에서 4권의 책을 소개하는 데 그 중에 하나가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 또 하나 크리스토프 히친스의 ‘신은 위대하지 않다’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는 케냐출신으로 현재 옥스퍼드대학의 생물학교수입니다. 한낱 무명이었던 그가 하나님과 맞장을 뜸으로써 단번에 세계적 인물로 부상한 자입니다. 크리스토퍼 히친스(Christopher Hitchens)는 영국출신의 탁월한 논쟁가, 우상파괴주의자, 무신론자로 살았던 인물입니다. 그 역시 책을 통해 반(反)하나님 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은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이후 무신론이라는 주제로 큰 파문을 일으킨 양대 산맥으로 보고 있습니다.

펜실베이니아 주의 비블리칼신학교의 데이비드 T. 램(David T. Lamb) 교수는 두 사람을 이렇게 진단합니다. “도킨스와 히친스는 하나님을 믿지 않기로 함으로써 본질에서 하나님을 ‘탄핵’한다고 말할 수 있다. 문제는 그들이 성경을 제대로 읽지 않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저들은 하나님을 호의적으로 말하는 본문을 의도적으로 빼버린다.”

엠마오로 향하던 두 사람에게 주님이 나타나셨습니다.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눅 24:27). 여기서 중요한 것은 ‘모든’입니다. 좋아하는 몇 구절이 아닙니다. 자신의 창자국과 못 자국을 보여주시는 대신 성경 속에서 주님에 관한 내용을 자세히 설명해주셨습니다. 그러자 저들의 눈이 밝아졌고, 마음이 뜨거워졌으며, 믿음으로 돌아왔습니다. 

만일 도킨스가 하박국서를 읽었다면 1장 앞부분에만 집중했을 것이고, “선지자 하박국도 하나님을 원망, 즉 탄핵하고 있구나!”라고 주장했을 것입니다. 만일 도킨스가 욥기를 읽었다면 3장에서 멈추었을 것이고, “하나님이 계시다면 어떻게 욥과 같은 사람에게 이런 일들이 연속적으로 불어 닥칠 수 있단 말인가?”라고 주장했을 것입니다.

도킨스가 만약 시편 22편을 펼쳤다면 분명 그는 2절까지만 집중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역시 반복되는 ‘어찌하여’란 신음소리를 듣고, 이렇게 주장했을 것입니다. “봐라, 다윗도 하나님을 향하여 ‘어찌하여, 어찌하여’를 반복하며 하나님의 부당함을 고발하고 있지 않는가? 그러므로 이 시편 22편은 다윗이 하나님을 탄핵하는 현장이다. 신은 없다. 신이 있다면 이런 불편하고, 부당한 일들이 다윗에게 일어날 수 없다.” 

하지만 하박국서가 1장까지만, 욥기가 3장까지만, 시편 22편이 2절까지만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다윗의 시, 시편 22편은 어떤 배경인지 명확한 설명이 없지만, 그가 무척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서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그 원인이 자신의 죄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듯합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어찌하여’라는 말을 반복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그렇게 뻔뻔한 사람이 아닙니다. 자신이 죄를 범했을 때 그는 솔직하게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잘못을 자복하는 사람입니다(시 51:2-3). 

다윗의 생애를 추적해 볼 때 그가 어려운 상황에 던져졌던 경우가 크게 두 번 있었습니다. 한 번은 그가 소년시절 사울 왕에게 쫓기고, 쫓길 때입니다. 또 한 번은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왕궁에서 나와 맨발로 기드론 계곡을 넘어 울면서 도망칠 때입니다. 이 경우는 심각한 죄를 범한 후의 시련입니다. 그렇다면 시편 22편은 분명 그가 소년시절, 사울의 칼날을 피하여 유대광야를 배회할 때의 경험을 노래하는 시입니다.

그의 ‘어찌하여, 어찌하여’ 절규를 듣노라면, 분명 하나님을 향하여 탄핵하는 음성으로 들립니다. 고통소리에 반응하지 않고, 멀리 계시며, 돌보지도 않는 것, 이것이 탄핵의 주요 사유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다윗을 정말 더 힘들게 했던 것은 무엇입니까? 그의 조상들의 기도에 역사하시고, 응답하셨듯이(시 22:4-5) 다윗에게는 왜 그렇게 하지 않으시냐는 것이 다윗의 흔들림과 고민이었습니다(시 22:1-2).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도 다윗과 동일한 고민이 없습니까? 우리는 이 성경을 통해서 우리 선조들에게 역사하신 하나님을 믿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나에게 역사하지 않으시고, 응답하지 않으시기에 우리 입에서도 ‘어찌하여, 어찌하여’ 탄식이 나오고 있습니다. 탄핵까지는 하지 않아도 하나님에 대하여 섭섭한 감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최근 저는 ‘내겐 여전히 불편한 하나님’(IVP)이란 책을 읽고, 고개를 끄덕끄덕 한 적이 있습니다. 불편한 사람을 만나면 말을 섞고 싶지 않고, 얼굴이 펴지지 않습니다. 빨리 멀어지고 싶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불편하게 다가오기 시작하면, 그분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것도 싫습니다. 그분의 말씀을 듣는 것도 굉장히 힘겹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과 점점 멀어지기 시작합니다. 봉사의 자리, 교제의 자리에서 멀어집니다.

그런데 다윗은 이와 같은 상황에서 어떤 태도를 취합니까? 하나는, 하나님을 ‘내 하나님(엘리, 엘리)’이라고 삼중적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냥 단순히 하나님이 아니라 ‘내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골고다 십자가 위에서 이와 똑같은 탄식을 하셨습니다(마 27:46). 또 하나, 중요한 고백이 이어집니다.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계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시 22:3). 이 고백은 ‘하나님은 잘못이 없으십니다. 거짓이 없으십니다. 완벽하십니다. 언제나 옳으십니다.’라는 뜻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상황에 던져져 있습니까? 하나님에 대해 어떤 감정을 갖고 있습니까? 혹시 도킨스, 히친스처럼 하나님을 향하여 도전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도전하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불편하고, 섭섭한 감정을 갖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래서 ‘어찌하여, 어찌하여’를 반복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박국서는 1장에서 끝나지 않고 3장까지, 욥기는 3장에서 끝나지 않고 42장까지, 그리고 시편 22편은 2절에서 끝나지 않고, 31절까지 이어집니다. 드디어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나타나셔서 그 울부짖음을 들으시고, 역사하셨습니다(시 22:24,31). 우리 삶의 정황이 힘들고 어렵다 할지라도, 다윗처럼 하나님의 가슴을 파고들며,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더 나아가 이 고백에서 그치지 않고, ‘하나님이 하신 것은 선하십니다. 내게 행하신 모든 일을 찬양합니다. 신실하신 하나님, 실수가 없으신 하나님,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나타나셔서 하나님은 나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자리에 이를 수 있도록 은혜 허락하여 주실 줄 믿습니다. (옥성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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